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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이방인

present 2004. 09. 13. 오전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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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와 부처를 자유인이라고 하지요.

내가 보기에,

그 자유를 갈망하는 누군가는 선천적인 불구자란 생각이 듭니다.

다가갈수도, 손에 잡을 수도 없는 그 자유는 그러므로 그의 삶의 숙명인 것이지요.


자유를 향한 열정이 숙명이라면 그는 그 열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가 비록 현실의 안위에 칩거하고 싶어한다고 할지라도

그 자유를 향한 숙명적인 열정이 이미 그 자신을 삼켜버렸기 때문이지요.


며칠, 몇달, 몇년 동안 현실에 안주한 당신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자위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원초적인 생명의 물결이 닫힌 우리들 자아의 울타리를 끊임없이 공략하고

우리는 <진리>와 <가식> 사이에서 또다시 존재의 병(病)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밭과 쟁기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외아들 이삭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모리아 산까지 여행하는 아브라함의 3박4일의 기나긴 고뇌를 천착하여 실존주의를 태동했습니다.


존재와 소유,

살아 남아 있음과 죽음을 무릅쓴 비상(飛翔),

분리와 합일(合一),

언어와 실제......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내가 그래왔듯이 자유를 향한 숙명적인 날개를 지니고 있는 당신은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언제나 패배할 것입니다.

나는 이제야 나의 패배를 유모어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패배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혀 있지 않나 의심스럽다면,

부디 현실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언제나 패배로부터 진리의 지평을 여는 이방인이 아닙니까?


댓글 2개

운영자 2004. 09. 13. 오전 12:00

패배로부터 자유로와지는 진리를 얻으라는 말씀인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느린풀섶 2004. 09. 17. 오전 12:00

현실에서도 진리는 존재하며 패배는 없습니다. 패배는 현실 부정이 있으면서 현실과 타협하려고 하는 고난도의 정치적 계산이 있을 때 나타나는 단어이지요. 진리를 맛 보면, 술병을 끼고 시장에 내려와 온갖 사람들과 어울려도 진리속에 살지요..... 이방인이 아닌 그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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