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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

한민 2007. 04. 30. 오후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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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생각에 잠긴 정춘팔은 와이퍼의 단조로운 움직임 속에 리듬을 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고 시동을 끄자 갑자기 조용해진 차안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정춘팔은 다시 키를 반만 돌리고 한참동안 와이퍼의 왕복운동을 주시하다가 차에서 내렸다.


  중앙아파트 705동 302호.

  정춘팔이 초인종을 누르자 한 노인이 문을 열어서 그를 맞이했다.

  어느새 정춘팔의 얼굴에는 아까와는 다른 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우리 아들 왔니?”

  “네, 어머니.”

  “어멈아, 애비 상 좀 보렴.”

  그의 아내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어머니, 제가 차려 먹을게요. 여보. 들어가 있어. 내가 할께.”

  “나중에 어머님께 무슨 소릴 들으려고요. 당신 출근하고 나면 노래를 부르시지. 노래를 부르셔.”


  좁은 거실에는 21인치 TV에서 저녁 드라마를 하고 있었다.

  “소주 한잔 줘.”

  그의 아내는 말없이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냈다.


  소주를 서너 잔 연거푸 들이키던 정춘팔이 입을 열었다.

  “얘들에게선 연락 없소?”

  “걔네들이 요즘 부쩍 힘들어하네요.”

  “타지 생활이 다 그렇지 뭐. 친척들 눈칫밥은 또 어떻고? 오늘 출상은 잘 했데?”

  “당신이 없어서 모두 섭섭해들 합디다.”

  “회사 일이란 게 그렇잖소. 내가 없으면 다들 안 된다고 난린데. 어찌 모른 척하고 있을 수 있겠소. 그래도 내가 20년간 몸담았던 곳인데.”

  “힘들진 않아요? 이젠 나이도 있는데.”

  “힘들긴. 뭐가 힘들어.”


  전화벨이 울렸다.

  그의 노모가 전화를 받았다.

  “그래 손자냐? 아버지? 야, 이놈아 우리 아들이지 니 네 아버지냐? 기다려. 아범아. 손자에게서 전화 왔다. 받아 봐라. 우리 아들 말고 지네 애비 바꾸란다.”

  그의 아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참, 어머님도, 개그콘서트에 나가셔도 되겠어요.”

  정춘팔이 전화기를 받아들고 근엄하게 말했다.

  “할만하냐? 그래? 그래 우리는 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무슨 일이래요?” 그의 아내가 궁금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정춘팔은 담배를 꺼내 물고 베란다로 나가자 그의 노모는 드라마에 도취되어 있었고 심드렁한 그의 아내는 이내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를 했다.


  정춘팔은 아내에게 소주를 한잔해야겠다고 말했다.

  술상을 보는 그의 아내는 그의 표정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소주한잔을 비운 정춘팔은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아까 철호가 박사학위논문 통과되고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취직 제의가 들어왔대. 차를 바꾸고 싶다는구먼.”

  “당신이나 차를 바꾸지 않고.”

  “우리 회사 과장 차의 평균이야.”


  정춘팔의 전화벨이 울렸다.

  '이 밤 중에 웬 전화를' 하고 구시렁 거리면서 번호를 확인하니 그의 딸인 영희 번호였다.

  어느새 그의 목소리는 근엄하게 변해 있었다.

  \"영희야, 이 밤 중에 어쩐 일이냐? 작은 아버님댁은 평안하시고?\"

  \"그럼요. 요즘 미도아파트 값이 엄청 올라서 기분이 좋으세요.\"

  \"그 얘긴 나도 들었다. 너 맡기면서 좁은데 살 순 없잖니.\"

  \"그래서 제가 복덩이래요. 저 덕분에 구두쇠 형님이 돈 주셨다고.\"

  \"어허, 이놈이.\"

  \"그런데, 아빠 지은이에게 무슨 일 있어요? 회사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아빠께 부탁드리라니까 입사할 때 신세져서 더 부탁드리기 힘들다는데 그게 무슨 말이예요. 혹시 아시는 것 있으세요. 같은 과에 계시잖아요. 아까 전화와서 훌쩍거렸거든요.\"

  \"지은이는 잘 지내고 있다. 걱정마라. \"

  \"그럼 다행이구요. 엄마랑 할머니도 잘 계시죠? 작은 아버님께 말씀 들으셨죠? 한달 뒤에 사위감 데리고 갈께요. 기대하세요.\"

  \"아직 허락안했다.\"

  \"허락하실 거예요. 아빠만큼 멋있으니까요. 또 전화드릴께요.\"


  정춘팔은 김양의 얼굴이 밝지 않은 이유를 알아버리게 되어서 가슴이 아팠다.

  그의 아내가 입을 열었다.

  \"영희예요?\"

  \"그렇소. 다음 달 쯤 사위감 데리고 온다는구려.\"

  그의 아내는 내친 김에 한 가지 쯤은 목표를 달성할 작정을 하고 다시 물었다.

  “집이라도 조금 넓힙시다.”

  “작은 애는 동생말로 서울대 법대 졸업생인데 사법연수원 수료하는데로 내려온다잖소. 철호는 미국에서 계속 생활할 건데, 어머님과 셋이서 23평이면 대궐이지.”

  “작은 아버님 유산만으로도 충분히 넉넉한데 꼬질꼬질하게 살아야 돼요?”

  “자식이 없어서 어릴 때 양자 입적한 걸 가지고 물려받은 재산이야. 무슨 유세 하듯 그렇게 함부로 돈 쓰면 사람들이 욕해요. 그리고 나중에 애들 결혼 시키려면 이것저것 들어갈 돈도 필요하고. 서울에 집이 좀 비싸?”

  “그게 얼마나 한다고 그래요. 밴댕이 속 알 딱지 하고는.”

  “어허, 서방한테 말대꾸는, 그렇게 헤프게 써대다가 당신이 그렇게 된 거 아니요.”

  “어머머, 오늘은 어찌 그 말씀 안하신다 했어. 골프 치다 발 삐끗한 거 가지고 날마다 시비시네.”


  부엌으로 물을 마시러 들어오던 그의 노모가 말했다.

  “그래, 아범아. 애미 너무 다그치지 마라. 다 내 잘못이다. 너 네 저번 달 결혼기념일에 중앙컨튜리클럽 회원권을 사주는 게 아닌데 말이야.”

  안방으로 자러가는 그의 노모를 향하여 그건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그의 아내가 말했다.

  “여보, 그건 그렇고 조부장님 사모님이 이번에 된 통 당했다는 데 어떻게 된 건지 아세요?”

  “말은 안 하시는데 집을 날려야 한다나봐. 다시 회사 관사로 들어가시는 걸 보면.”

  “신과장도 주식 반 토막 났다면서요?”

  “똑똑한 척 하다가 그리 됐지 뭐. 그래도 그 친구는 아직 젊으니까.”

  이어서 정춘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천벌을 받은 게지.'

  “계속 회사는 다닐 거예요?”

  “어허, 그 회사는 내가 없으면 움직이질 않는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이 나이에 내가 뭐 해서 그만큼 벌겠어. 일하는 시간만큼 쓰는 시간이 줄어드는 거야. 이번 여름휴가 때 철호에게 다녀오려면 경비가 꽤 들 텐데.”

  “시누이 덕을  많이 보긴 하지만 당신이 그만큼 사업자금을 대주니까 서로 좋은 거지요.”

  “걔가 없으면 그런 생각 자체를 못하잖소. 괜히 생색낼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시오.\"

  “누가 생색낸데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참, 아까 어머님께서 댄스모임에서 멋진 남자 친구를 만나셨대요.”

  “그래서 아까 그렇게 기분이 좋으셨구먼. 다행이네.”

  “내일 댄스 모임에서 일박이일로 경주관광 가신데요.”

  “잘 챙겨드려. 장모님 건강하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

  “요즘엔 숫제 당신편만 들어요. 진짜 아들처럼 여기신다니까요.”

  “진짜 아들이지, 그럼 가짜 아들이야? 우리 모친이야 평생 돈 쓸 줄 모르고 돈만 모우다 돌아가셨지만 살아계신 분이라도 여생을 잘 보내셔야지. 당신 돈만 쓰신다고 박박 우기실 때는 정이 좀 안가기도 하지만 말이오.”

  그의 아내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중앙아파트 705동 302호 불이 꺼지고 어느덧 밤하늘에는 별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댓글 3개

포아풀 2007. 05. 01. 오전 12:42

우와, 소설가이신가요? 단편 소설 한 편 단숨에 읽었습니다. 깊이 새겨 읽지는 못했습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시 읽어보렵니다. 인생이 참 치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문이 닳도록 비비고 소신마저 버려야 하는.. 주인공의 입장에 잠시 서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점숙 2007. 05. 01. 오후 09:43

인생이.....그런 건가요?!

한민 2007. 05. 01. 오후 11:32

요지경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잘난 체 하는 사람은 속빈 강정이고. 사회적으로는 비굴하지만 가정적으로는 알찬 인생을 사는 사람을 대조해봤죠. 뭐가 선인지는 몰라도 수많은 군상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어떤 인생' 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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