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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선 큰 바위
百祿 유태복 2007. 05. 12. 오전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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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祿 유태복 2007. 05. 12. 오전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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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선 큰 바위 수필/ 百綠유태복 세상 사람들은 자기중심에서 스스로 고독을 달래며 살아 가나봅니다. 형님께서 고희를 맞이하신 날, 일생을 글로 남기겠다고 하였습니다. 저에게도 글을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하여 형님과 50여 년간 삶을 더듬어 봅니다. 제가 형님을 처음으로 기억하는 것은 내가 3살 말년쯤인데 눈보라치는 초겨울, 저는 상명리 외가댁 외할머니와 놀고 있는데 형님이 오시고는 가지고온 사탕을 주며 “형과 같이 가자, 맛 나는 것 많이 사줄게.” 하며 구호물자로 얻은 두터운 롱코트로 나를 싸서 업고 한림읍까지 걸으셨습니다. 한림성당에서 예배드리고 밥을 얻어먹고 제주시내로 돌아온 기억이 우선 떠올랐습니다. 형님은 알고 지내던 이웃들의 집들을 일 년 가까이 전전하며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키우던 생각이 아직도 나의 뇌리에 흑백사진처럼 스쳐 갑니다. 형님은 저보다 16살 위인데, 당시 제주일고 학생신분으로 중앙 성당 부근의 최 여사님 집, 그리고 지금의 형수님친정댁 등으로 데리고 다녔던 기억과 어린 저를 교우에게 맡기고는 외국신부님 옆에서 복사를 서서 미사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마치 하느님 옆에 천사를 보는 듯 어린 나는 신기했으며, 그때 유아영세를 받게 된 것이 제 삶인 55년이란 고난의 삶에 큰 나큰 대들보가 되어 비틀어짐 없이 곱게 자랄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제가 외가 집 외할머니와 철없이 놀고 있는 어린 저를 형님께서 왜 데려오셨는지요? 그 외할머니 모습도 그날로 영영 마지막이 된 것도 오늘이야 세삼 느낍니다. 그때 왜 저를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까지 하면서 저를 키우고 가르치느라고 왜 형님이 고생을 하셔야 했는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제가 5살 때 새 어머니에게 놓고 간 일, 누님은 부산에 수양딸로 가버린 상태이고, 형님은 늘 바쁘신 듯 집에서 산 일이 거의 없이 간간이 집에 들으셨는데 형님은 그 당시 병원근무를 하셨다는데 가끔 골련곽(주사약 마분지 상자)과 주사 바늘을 가지고 와서 왕대말축(큰 메뚜기), 잠자리 등을 채집하고는 주사약을 놓으며 실험을 많이 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그래서 형님께서 집에 안 들어오는 날엔 형님 방에 가서 형님 행장들을 신기한 듯 이것저것 손자파리(만지는 일)했다가 그만 혼나게 맞았고, 또 아버지에게까지 곱으로 맞았던 기억들, 집에는 늘 어린 나 혼자뿐 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성당에 구호물자 배급 타러 가면서 부엌에 불 때지 말라고 하신 것을 불 때라는 말로 잘 못 알아듣고는 불 소시개로 쌓아둔 말먹이 고사리 등 마른 잡초로 밥하다 그만 삼간 초가집 중에 한 칸을 태워버린 실수를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잡귀가 쓰였다고 무당 빌어다 굿 하던 중 형님께서 마침 들어 오셔서 “미신 나가라!”며 무당의 제상을 걷어 차버린 일, 초등학교 입학 날 교복을 사주시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주시던 일, 저를 아껴주셨기에 빛바랜 사진으로 추억이 남아 요즘도 인터넷에 올릴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초등3학년 무렵, 형님은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간간이나마 집에 오시어 저를 보살펴 주셨는데 의지하던 형님이 안 계시니 성당교리를 중단하게 되어 첫 영성체도 못 한 채로 냉담의 길로 들어갔었습니다. 몰촐(말 먹이잡초), 지들커(땔감), 등 허드레 집일을 ‘죽 삼시 메 삼시’라고 매도 맞아 가며 일을 하였고,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고시를 합격해도 입학금 3,850원 없어 입학을 못 했습니다. 나에게 시간만 나면 귀에 익으라고 ‘나도 그랬으니 죽을 때 까지 독학으로 배우라’고 강조 하시던 아버지 말씀. 그 덕인지 나중에 저는 경영학석사까지 마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당시 일 년 넘도록 ‘몰태우리’를 하고 있는데 형님께서 야간중학교라도 입학고시를 보라하여 합격은 되었습니다만, 신산몰 B선생님 댁 사글세방에 사시던 형님께서 어려운 입학금과 교복을 사준 덕택으로 그토록 그리던 야간중학생이 되었습니다. 2기분 수업료 낼 때 찾아 갔는데 형님도 어려웠는지라 내일 오라, 다음날 오라해서 그 다음은 갈 수가 없었습니다. 낮에는 영평동 앞동산, 뒷동산, 배남터 등을 번갈아 가며 밭농사를 일을 하다가 오후에는 몰촐 또는 지들커를 등에 지고 내려와야만 보리밥 한 그릇 먹었던 시절입니다. 16살 되는 5월, 아침밥을 등에 짊어지고 4키로 길을 걸어 배남터 밭에 갔는데, 어머니께서 아침밥 늦게 해서 왔다고 호통 하시면서 “너 빌엉 일 안 허키어 나가라”하며 돌팔매질 하는 바람에 책가방과 교복만을 챙긴 채 가출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한다고 이를 악물고 동급생의 소개로 경향신문 배달원을 시작으로 껌팔이, 구두닦이로 식비, 학비를 조달했으며, 책가방과 교복은 제주시 동문시장 국수집에 매일 우동을 팔아 주는 조건으로 맡겨 놓고서 노상 상판과 동문교 다리 밑에서 가출 동료들과 살기 시작했습니다. 몇 불우 청소년 동료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정신지체장애인이며 무법자인 울보아저씨, 서영섭 아저씨들과 같이 노숙생활을 하며 어디엔가 살고 계실 친어머니를 그리며 살았습니다. 비 내리는 어느 날, 껌을 들고 산호다방에 들어갔는데 형님 계신 줄 모르고 껌 한 개를 팔아 달라고 내민 손을 “그래 팔아 줄게” 하며 덥석 잡고는 다방 앞쪽(당시 후생병원 옆),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가서는 우산대가 부러지도록 맞았습니다. 온 종일 벌어들인 껌 한 상자는 어두운 해병탑 아래로 내동댕이 쳐놓고는 노타리에서 신산몰 형님 방까지 잡혀가서는 “집안 쪽팔리게 망신 주냐!” 면서 다시 매를 들었습니다. 하루 밤 지내고 나와야만 했던 일이 지울 수 없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형님께서는 우리 집에서 살라고 하셨지만, 형님도 남의 집 셋방을 살아가는 실정이고 조카와 형수님 눈치를 볼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안 했으며, 내 인생을 남에게 의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그때 제 심정이었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고생 되지만 집에서 밭일하며 잘했느니 못 했느니 매 맞으며 시달리는 것보다 동료들과 별이 보이고 빗물을 보는 노숙생활이 나에게는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이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입으로 삼켜가며 이런 글도 써지나 봅니다. 그런 밑바닥생활을 하면서도 형님께서 성당으로 인도해줘서 초등하교 3년까지 천주교리 공부한 덕택에 그 많은 불량청소년 중에 나만 죄악의 위험에서 벗어 날 수가 있었고, 제주도교육감표창, 제주도지사표창 등 해마다 모법청소년으로 이어졌습니다. 1971년 5월 청소년 달에는 전국모범청소년 제주대표로 뽑혀 내무부장관표창을 받으러 서울 중앙청까지 공짜로 비행기를 타고 간 일, 그때 신앙이 모태가 되어 나의 생활은 성실로 이어져 끊임없이 학문을 갈고 닦다 보니 경영학석사와 시, 수필을 쓰는 문인이 된 것도 모두 형님의 은덕이라 여기며 이 지면을 빌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6살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서 목욕탕 등 에서 막일을 하셨다는 아버님은 해방이 되어 고향에 돌아오니 4.3사건 터지고 그로 인하여 할아버지를 졸지에 잃으시고, 화북 갯가로 피난 왔지만 그곳에도 난리가 터져 한 달 사이에 큰 어머니와 3남매를 모두 잃은 아버지 마음은 세상의 원한으로 꽉 차있었기 때문에 조급한 성격으로 변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무엇이든지 확실해야 하고 불같이 급한 성격이라 엄하셨지만 순간 확 태워버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인자하시기도 한 분이었습니다. 형님도 아버님의 그 불같은 성질 때문에 집에 같이 산 날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하고 지금은 제 나름대로 생각해 봅니다. 77년 언젠가 제가 형님에게 아버지와 관련된 몇 장의 편지를 쓴 기억이 납니다. 뭐라고 썼는지 지금은 기억이 지워졌습니다만, 형님은 제가 장가를 가면 돌려준다고 하셨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소식이 없습니다. 그 편지가 있는지, 그 내용도 궁금해지네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 왔을 땐 이미 아버지는 젊어 막 노동과 4.3사건 시절을 한탄하며 매일 한 서린 소주와 싼 독한 담배로 한 많은 세상을 탓하며 살아서인지 몸과 마음은 허약할 때로 허약 해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친구 따라 수사가 되겠다고 하였더니 “수도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야. 하느님이 선택해야 가는 거야, 자내는 아버님이나 잘 모시게나.”하는 친구 말에 마리스타 수도회를 포기하였고, 평생 동안 아버님을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성질 급하고 엄한 아버지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때론 모든 것을 버리고 육지로 지원하여 떠나 살고 싶은 날도 없지 않아 고민했던 날도 많았습니다. 아버님초상을 치르는 날, 형님을 찾아 온 조문객이 상복 입은 저를 보더니 “자네 이집에 어떻게 되나?” “예 아들마씸.” “그래? 옛날 거리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니 난 자네가 고아줄 알았어.” 하는 말 속엔 서러움과 괴로움도 있었습니다만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주어진 숙명이고 하느님의 제게 주신 삶의 과제라 받아 드리고 성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형님 의술은 아버님의 생명을 76세까지 많이 연장 시켜 주었다는 것은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형님에게 생명을 연장한 사람들이 어디 아버지뿐이겠습니까? 그 당시는 지금처럼 병원이 많지 않은 때라 제주시내에선 유원장님으로 통하였습니다. 몰구르마(우마차)를 끌고 제주시내를 누비던 우리아버지도 만나는 사람마다 “유원장 아버지, 당신 아들덕택에 내 목숨 살아났어요.” 등의 말을 들으면 아버지도 큰아들 때문에 흐믓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오시던 날도 더러 있었습니다. 의사선생님을 모시고 신산의원을 경영하던 형님은 어느 날 검찰이 들이닥쳐 의료법으로 연행해 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형님 댁에 가보니 정말 가택수색을 하여 집안은 마치 큰 도둑이 허가받고 할퀴고 간 것처럼 모든 것들이 여기저기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어린 조카들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저 마음도 정말 찹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후 형님과 형수님은 그 한을 풀기 위해 장남을 고려대 의대에 입학시켰고, 지금은 전문의가 되어 부천 세종병원 순환기내과과장까지 되었기에 한을 풀었다고 생각이 듭니다만. 병원업무가 워낙 바쁜 관계로 가정사에도 돌아보지 못 함은 물론, 칠순이 넘도록 부자간 상봉도 어려우니 이것마저 대를 이어 지켜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품안에 자식’이라고 떠나면 아버지 인생은 아버지 것이고, 자식들 인생은 자식들 것인가 봅니다. 형님께선 5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켜 아들 셋은 서울에서 학교 한 영향인지 모두 객지 생활하고 있고, 중간 셋은 출가하였지만 아직도 둘을 못 보낸 조급한 마음도 없지 않겠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고독한 눈물을 흘리며 우뚝 선 바위처럼 요새 제주말로 ‘형님 복녘’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다행이도 늙도록 형님 직업이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 삼으십시오. 이제 손자들 재롱 받으며 편히 살아야 할 칠순이 넘은 나이인데도 향학열에 불타서 못 배운 한을 넘기 위해 손자 같은 학우들과 아들 같은 후배교수들에게 한글자라도 더 배워보겠다고 대학 캠퍼스에서 주경야독하시는 모습 또한 감동으로 울렁거립니다. 결국 형님께서는 우리형제들을 대할 때면 “가난에서 해방” “무지에서 해방”이라고 선두 지휘했던 역사적인 사실이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 중에 막내가 가장 먼저, 그리고 큰 형님께서 마지막순으로 대학졸업을 하게 되는 셈입니다. 형님은 초, 중학교 총동창회장, 동문성당노인대학장, YMCA활동 등 사회활동도 많이 하시고, 그동안 형님의 살아온 발자취를 글로 남기겠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요즘 컴퓨터까지 열심히 배우시는 형님께 거듭 찬사를 보냅니다. 생의 끝나는 날까지 몸과 마음이 건강하시고, 살아온 경험철학을 바탕으로 좋은 글 남기시고 보람찬 날들이 지속되시길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
댓글 1개
포아풀
2007. 05. 13. 오전 09:36
홀로 선 큰 바위... 애틋한 형제애가 느껴지네요. 초년의 고생이 바탕이 되어 지금 넉넉하고 추억어린 얘기로 담담히 풀어갈 수 있는 것이겠지요. 홀선 큰 바위는 형님 뿐 아니라 유태복님도 해당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장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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