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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식시인의 시 모음

맑고고운 2007. 05. 19. 오후 05:43
8182
김경식 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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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거리며 날아가는 꽃술에
우리 민족의 역사 아른거린다
밭두렁가 외진 돌담사이
수채화로 장식하여 토담밑 장독대에
피고지는 채송화와 더불어
허기졌던 우리민족 슬픔이었다
희망이었다
눈보라 헤쳐
절망의 언덕에서 만나던 보릿고개
보릿고개 석삼년에도
활짝 웃으며 반기던 너
꽃상여 떨구는 눈물 먹으며
자라나
우리민족 희망꽃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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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바라다보며

찔레꽃 핀 강길 따라
자운영 지천으로 피어 흐드러지는데
어스름 서녘의 황혼은 고요히도
임진강 남쪽과 북쪽을 동시에 아름답게 한다
허리잘린 이 땅의 그 어디고
아카시아 나무의 진한 꽃향기에
다시 취하여
눈시울 붉히며 임진강을 바라다본다
임진강 언덕의 임진각 앞에는
더는 갈 수 없는 경의선 열차가
임진강 철교를 바라다보며
무시로 오가는 사람들 응시하는데
임진강은 침묵으로 동에서 서로
조용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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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탄리에서


먼데 산들이
구름과 더불어 춤을 추고
인간세상의 억울하고
원통함들을 즐기는 듯
판토마임 하고 있다
초가을 잎새들이
나풀 나풀 말을 하고
아무도 억울했던
우리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
더는 가지 못하며
마지막 되어 버린 종착역
흘러가는 구름 북으로 가는데
이념의 길
지뢰밭의 두려움에
구름의 자유로움 상실하였다
길 넓어진다고
좋아라 말라
좁더라도 민족의 길이라면
고갯길이어도
자유의 길이라면
우리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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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에서

붉은 넋 되어 떠도는
오월 사람들의
광주 빛고을 혼령들
망월동 공동묘지엔
서러움의 빗방울 떨어집니다
이 땅의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던
1980년 오월의 살인
칼바람 휘몰아치고
언덕 위엔 단두대
\"여보 당신은 천사였오. 천국에서 만납시다\"
묘비명 읽으며
눈물 글썽이고 있습니다
무등산 넘나드는 구름은
아직도 먹구름인데
지산동 언덕길엔
대나무 무성히 자라는데
한 번 가신 님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황톳땅에 빗방울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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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 떠나며

아직은 어둠이 걷히기 전이지만
조용히 일어나 아파트를 나옵니다
부지런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어느새 일어나
우유를 배달하고 신문을 대문 속으로 넣으며
달음박질치고 있습니다
무한이라는 인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싸움이 부자들 사이에 벌어져
그들의 용병이 되어서라도 살아가기엔
현실이 너무 부끄럽군요
진눈개비 사정없이 내리고
바람 세차게 불던 어느 날
가난이라는 것이 춥고 배고픈 것임을
확인했지만 더는 어쩔 수 없는
가난한 현실 앞에
바람에 흩날리는 루핑의 펄럭임만
원망스러웠지요
밤조차 가난한 사람들의 안식처 되기엔
너무도 화려합니다
차라리 보릿고개시절의 지난날들이 그리워진다고 말하던
중량천변 취로사업장 일 마치고
힘겹게 버스에 오르던 중년아낙의 말을
잊으려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어인 일인지요
지난날 멍석깔고 별을 헤아리다가
타원형 그리며 떨어지던 운석의 기억들을
그리워함은 향수 일까요
오늘도 주어진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내 비록 초라하나 비굴하지 않고
나약하나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삶이라면
언제까지도 새벽길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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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점리 소나무

억압과 수난
칼바람 채찍질에
은근과 끈기로 살아온지
몇 년이던가
훤칠한 키 꼿꼿한 맵시도
사육신 절개가 깃든 듯 붉으래한
몸뚱아리를 자랑하려는 것 아니다
여름날 모진 비바람에도 끄덕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 나이테 많아지면서
삽상한 바람에 가슴 설레며
상사병 앓는다
그러나 너는 홀로 고독하여
어느 깊은 겨울 밤
네 잎새들은 사뿐 사뿐
쌓이던 눈송이에 몸 꺾어지는 소리
절규로 듣는다
어쩌랴
사나운 바람 모진 고문에도
쓰러지고 꺾어지지 않던 네가
부드러움과 겸손함에
복종하고야 마는 역설을
부러지는 아픔의 소리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너 가래올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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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머 님

살아가야 할 고난의 나날들
굶주림으로 허기지고 서글프던
석양노을 불타던 박달산 아랫마을
괴산 추점리 미선나무 같은 이여
객지 생활 부질없고
먹빛 어두운 산들
절망의 절벽 만들 때
아버님 고된 얼굴과 함께
나를 슬프게 하는 이여
가난한 집 뜨락에
함초롬히 피어난 봉선화 마냥
앳된 맵시 검버섯 얼굴
사무치도록 고마운 그리움으로
반기던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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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락눈 내리는 밤

황량한 들판
강물처럼
저무는 날 저녁
언 땅 가만가만 걷자니
녹두꽃 떨어지듯
싸락눈 내린다
솔티재 굽이 굽이
해설픈 들길
햇빛 돌아오는 저 산굽이
달 떠 오던 저 개울길
싸락눈 맞으며
아버지 소 팔러
밤 길 떠나셨다
느릅재 넘어 넘어
괴산장. 음성장
대한. 소한. 강추위
살을 에듯 우는 밤
싸락눈 내리는 밤
녹두꽃 떨어지 듯
싸락눈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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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모 님

유년의 객지 생활
서릿바람에 입술 시린 날이면
언 가슴 데워 주시며
사람처럼 사는 법
온 몸으로 가르쳐 주신 분
꽃상여 따르며
\"아이고 아이고 엄마\" 부르짖을 때
살아있는 사람은 산다며
땅거미 짙은 들녘의
아릿한 들깨 향기와
새벽녘까지 남아 있는
질화로 가득한 잿불처럼
세상 사는 법
배우게 하신 분
안개 산허리 감아 가던
어느 봄 날 고모부
못 넘어오실 성황당 고갯길
넘어가시고 난 후
목쉬어 가래올 뒷동산에 핀
할미꽃 마냥 오슬오슬
외로움 느끼시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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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께

사무치도록 그리운 어머님이시여
살아생전 한맺힌 삶의 슬픔들 일랑
박달산 바라다 보시며 잊으시구려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산벚꽃
진달래 벗 하시고 하늬바람 휘몰아치는 겨울엔
눈꽃 친구삼아 머나 먼 하늘나라 길
부디 편안히 가시옵소서
살아남은 자식들 어머님 그리워
가래올 삶의 희노애락 되새기며 눈물 흘리고
훗날 어머님과 하늘나라에서 만날 것
기약하오니
어머님 부디 편안히 가시옵소서
사무치도록 그리운 어머님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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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지팡이

창호지 문 밖에는
싸락눈 바람에 흩날리는데
오늘은 아버지 머나먼 길
떠나가신 날
아버지 등에 업고
돌아가던 방앗간 모롱이엔
하늬바람 휘몰아치고
다시 만날 기약없는 길
떠나시던 날 아침
꽃상여 쉽사리 떠나지 못하고
마당은 울음 바다
홀로 돌아와야 하던
산자락엔 발자욱
살아서 어른거리고
대나무 지팡이에서는
아버지 울음소리
겨울 저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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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에서

부엌문 열면
아궁이 앞 댓돌 위에
어머님 아른거리시네
우물가엔
할머님의 손자 자랑에
침이 마르시던
검은버섯 얼굴
은행나뭇잎 되어
떨어지고 있네
고욤나무는 늙어가고
모과나무는 키만 커질 뿐
올해도 빈 손으로
왔다 가네
나 살아 생전
몇 번 오고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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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가래올

어린 시절
송사리떼 몰던 실개천
아이들 사라진 지 오래되고
거북등인양 갈라진 논바닥
박달산 넘는 해 꼬리 잡고 늘어져
온통 주홍빛인데
밤을 낮 삼아 일해도
빚덩이 늘어만 가
노인들 한숨소리 애처로워
주막거리 재학이네
집비운 채 떠나고
늙은 살구나무 잎새들만
마파람에 흔들거린다
빈 집 더해만 가고
동네인심 바람꽃으로 날리니
문전옥답은 묵정밭으로 버려지는가
그래도 아침 햇살은
가래올 들녘을 향해
해설피 느릅재를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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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에서

역말다리 건너 인산리 고가엔
산수골에 묻힌 사람의 유언이
두눈 뜨고 살아 있다
그 분의 마지막 언어를 기억하는
경찰서앞 늙은 느티나무는
가을이 되면 유서같은 잎새
옛 장터에 재처럼 흩뿌려주었다
노인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멀리에서 온 젊은이들은
무너지는 흙담 앞에 모여
부활의 노래를 불렀다
세월은 강을 따라 흘러
고가 앞 에돌아
수십년 느리게 걸어 왔지만
괴산 지키는
느티나무 아래 서면
기미년 만세소리 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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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낭 당

서낭당 돌 무더기
돌 하나 던지며 유년의 소원을 빌던
고개를 넘는다
엄마와 함께 첫사진을 찍으러
방곡에 갈 때도 이 고개를 넘었다
무당색 천 조각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던 늙은 나무가
춤을 추면
가슴 조이며 넘기도 했었다
청년 시절 어느 봄
서낭당 나뭇가지에 걸려
휘날리던 알록달록 천 조각들
외적을 막기 위해 의병들 행군할 때
깃발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심히 돌 더미에
던졌던 짱돌 하나가
쌓이고 쌓여서
왜놈의 이마를 때리는
무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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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 리

뒷동산 낙엽송 숲
유년을 기억하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왜가리와 백로들
하얗게 덮인 산
동네 아이들은 배 고파
알을 훔쳐다 먹고
포수들은 어미새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놀란 왜가리들은
부모형제들의 죽음에
두려워 떨다가
솔티재를 넘어
떠나 가서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왜가리들 모두 떠난 어느 날
포수가 죽고 그의 아들이 죽었다
젊은이들은 대처로 떠나 갔고
노인이 되어 버린 사람들
삼십년 동안 뒷동산 바라보며
왜가리 그리워하고 있다
뒷동산에 올라 박달산 보며
추점리 왜가리의 슬픈 역사를
속삭이며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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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며

가끔씩 그대 그리워질 때는
희미한 흑백사진 속에서 그대의 음성
고뿔 기침소리로 듣는다
젊음이 만발하던 꽃의 정원에서
그대는 가장 어여쁜 꽃으로 피어 났었지
조그만 칼라 사진 속에서
멀어지는 강물 소리로
그대의 비명소리를 듣는다
더러는 꽃피는 봄날의 사진 속에서도
그대를 만나지만
발그레한 볼에 떨어지는 눈발에 녹아
눈물이 된다
어느 더운 여름 날
마음과 몸이 만나 사진이 되었지만
마음이 떠나고
몸만 남아 있는
허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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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귀향자의 노래

왔다
내가 왔다
나 태어나 자라난
앞산머리 진달래 피던 마을에
나 이제야 왔다
늙은 친구들아 아는가
내가 떠났던 길
눈물로 떠나던 황톳길
보리가 누렇게 익어 가던
어느 유월의 새벽을
왔다
친구들아
내가 왔다
일제의 징용으로
끌려 갔던 내가
늙고 병 들어
이제야 왔다
왔다
아주 왔다
죽어 고향땅에 묻히고 싶어
내가 왔다
아슴한 세월의 밭고랑 밟고
나는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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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월의 밤

그대와 나는
삼월하늘 저무는 석양에 만났네
백양나무 그늘을 그리워하며
가난했던 유년의 추억이
서삼릉 버드나무 가지로 살아났네
그리움 만들어지기 전에
그대와 나는
서로를 기억할 수 없었네
사랑이 되고
인연이 되었던 오월의 밤이여
솔티재 험한 길을
숨차게 달려 재회하던
해방의 날 밤이여
숨이 막히게 달려 갔네
그대를 만나러
어둠 속의 그대는 나였고
나는 그대가 되어
우린 하나가 되었네
우리들의 만남은
순간의 점들이 자라나
가슴의 별이 되는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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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엽서

들국화 피어 만발하니
네 생각 난다
지금 들꽃세상 어딘가에
너의 발자국 살아나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다
흙바람 불던 신새벽
뒤 한번 돌아보지 못하고
말없이 떠나 가더니
외로운 떠돌이 별 되었는가
네 아내의 울음소리에
세상 용서하는 법 배웠다
떨어지는 잎새에
너의 이름 쓰며
끝내 못 부른 우리들의 노래가
가슴을 흔들고 있다
아 친구여
너는 떠나고
산에는 들꽃들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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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카 소

어둠과 상상이 만났다
삼각형 같은 사람과
네모난 사람이 만나 사랑하니
원이 되었다
향기를 그렸다
아무도 그릴 수 없는 향기를 그렸다
그릴 수 없는 세상의 향기를
온 몸으로 그렸다
사랑을 그렸다
이해할 수 없는 뜨거운 사랑으로
사람을 그렸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추상화 그렸다
여자를 그렸다
마음까지 그렸다
곡선과 각을 그렸다
아무도 모르도록
감미롭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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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 날

우리의 만남은
사랑의 영혼에 흔적을
남기게 되겠지요
집착은
민망하고 끈적거리는 것
다래나무 그늘의 어둠과
가문비나무의 겨울을 되돌아보는 것이겠지요
가슴이 저려와
눈을 감아도
어둠 속 서삼릉 능수버들
가슴으로 흔들리고
귀를 막아도
피카소의 율동소리 들릴 거예요
먼 훗날
가을이 깊어 가면
인연은 익어 별이 되고
우린 낙엽 되어
떨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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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서원에서

자운산 자락
율곡선생 봉분 위에
산벚꽃 휘날리던 날
숲길 우듬지 사이로
당신의 얼굴을 보았지요
총알 박힌 돌비석 더듬거리며 읽다가
당신의 얼굴을 보았지요
손발이 저리던
역사의 뒤안길에서도
사백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
사이좋게 살아 온 이유를
당신께 말하였지요
그리움은 아름답고 순결하여요
건듯 부는 바람
느티나무 흔들고
당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밝은 햇살
푸르도록 눈 부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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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둑길 걸으며

고래실논 가로질러 논둑길 걸어 보라
늙은 농부들 한평생에 빚만 낟가리로 쌓여
어거리 풍년에도 한숨만 나온다
그러나 맑은 가난이 그리우면
논둑길을 걸어 보라
논이 언제 거짓말 하던가
천둥지기 아들들 출세하여
천석하던 지주 아들의 밥줄을 움켜 잡은
자본주의를 희년의 나팔이라 하던가
사랑에 절망하고 세상에 되는 일 없을 때
아버지가 소작으로 살았던 마을의
논둑길을 걸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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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 데 타

인생길 캄캄하여 절망적일 때
늘 함께 할
이름 하나 가져 보자
사람향기 그리운 날에는
가다가다 외로워질 때에는
종교같은 사랑 하자며
손 내밀던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자
사랑은 나 아닌 그가 되는
혁명이나니
구름 흔들어 비를 만드는
쿠데타라도 일으켜 보자
사랑의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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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월 은

서러운 댓잎 휘날리던
남도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가
오월 노래 들으면
꽃잎처럼 사라진
사람들의 울음 소리
연둣빛 햇살로
눈 부시다
오월은
아름다운 꽃잎들
다시 피어나
살아난 들꽃들과
어깨동무 하는 달
그러나
우리들의 오월은
끝나지 않았다
죽은 자들의
무덤들이 살아나
하늘길 가지 못하고
이 땅 서성이고 있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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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골에서

구름들 하늘에 낮달이 떠 있다
머슴 봉은이와 나무하던 베리산 뒤
진달래가 꽃눈 틔우고 있다
개울 건너 천수답 논둑에서
멀리 주정산 바라보며 눈을 감는다
병자호란 때 병방골에 주둔하였던
조선의 어느 군인들에게
이 곳은 연기 피우던 땅이었다
꽃피고 지기 수 백번
추점리 노인부부가 리어카 끌고 밀며
개울가 샛길을 따라 가고 있다
산골길 여섯마장 봉골에는
흔들리던 젊은 날에
박달산 바라보며 시를 쓰던
어머니 산소가 있다
숫돌에 낫갈아 지게지고 오르던
큰음달엔 송신탑들이
옛날옛적 한양으로 보내던 연기 대신에
전기를 보내고 있나니
동박골 다복솔 위로
흩날리는 꽃 바람에
전깃줄이 울고 있다
봄산은 저리도 푸르러 가고
모두 어떻게들 살아가는 걸까
변하지 않을 하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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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에서

푸른 산 바람
날 저문 산 길
곰나루 언덕 우금치
조팝나무꽃 휘날리 듯
황토 고갯길에서
푸른하늘 그리워 하던
이 땅 민중들의 절규여
역사는 강물로 흘러
흰옷 입은 백성들
우뢰같은 함성 소리
백년 세월 지난
오늘 이 땅에 살아 난다
먼 마을 백제고을
차령산맥 너머로
기러기떼 서녘으로 날아가고
인간 해방의 봄
부활 기다리는
우금치의 저녁놀이여
이 땅의 통일은
언제 오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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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랑의 사랑이야기

세월이 가도
바람멀미로 흔들리며
그리워지는
아득한 사랑이야기
어느 꽃 잔치에
취한다고 한 들
고죽과 홍랑의
버들가지 서러운
이별만 하겠는가
살구나무 꽃그늘
낙화 한 마당
파주 다율리엔
고결한 사랑
복사꽃으로
사백년 살아 온
홍랑이 있었네
마음 통하지 않으면
백년을 살아도 타인
사랑하면
잠시 한순간의 스침도
정인이런가
월롱리 산이란 산엔
옛날처럼 꽃이 피고
홍랑 두고 떠나는
고죽선생의 이별
그리운 님 두고
떠나는 길
풀빛도 아득하네
해 저문 들길
푸른 산바람에
산달이 움직이고
사백년 전 사랑을
봄날 애절한
추억과 견주며
바람에 스쳐 가버린 별을
밤나무 아래서
기억하며
그리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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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 울 산

겨울산에는
잊을 수 없는
눈동자들이 살고 있다
눈 쌓인 산
하얀 달빛이 푸른 밤
고향의 산이란 산엔
무덤들이
눈동자 되어
서성거리고 있다
할아버지 숯 굽던 자리엔
파란 밤 하늘의 별들이
내려와 살고
참나무들이 서걱이며
살아있는 사람을 부른다
이 땅 그 어디고
산으로 가는 길목 지나면
먼저 간 이들이
나중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발자국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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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재를 넘으며

갈참나무 숲을 쓸어온 바람은
감물과 불정으로 달려가고 있네요
낙엽송 줄지어 늘어선 길섶에는
도라지꽃이 떨고 있어요
고향 떠난 사람들을 가슴으로 포옹하는
박달산이 오늘은 화가 났네요
아랫마을 방곡리에 고속도로가 뚫리고
추점리 뒷산을 남포질로 상처를 내었다지요
눈 내리면 마을까지 내려오던 노루들은
어찌 할래요
먼 개짖는 소리에 놀란 기러기떼가
서둘러 도망을 가네요
나 어릴 때에
아버지는 고모님이 주시고 간 장롱을 지고
삼십리 이 고개를 구비구비 넘으셨지요
군불로 화롯불 만들어 할머님께 드리던
숭늉같은 추억을 담아 꾸불텅 넘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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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밤바람 구르는 소리 들린다
오가리 장연초등학교 가던 길에는
팔백살 된 느티나무 세월을 삭이고 있다
계단식 논과 밭뙈기에 삶을 지탱하던
우령리 사람들은 대처로 노가다 일 떠나고
남아있는 몇 아이들은 먼산바라기 되어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밤마다 도깨비 불이
가난한 보리밭 사이로 걸어 나와
느티나무 허리에 희망을 걸었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은 변하고
소망 잃어버린 사람들은
고향마을 떠나면서도
조상같은 나무 바라다보며
산 마을의 추억을 담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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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밤에

눈 내리는 밤에는
고향집 문설주에 기대 서서
서울에 다녀오실 할머니를 기다리던
유년으로 돌아가고 싶다
진종일 눈은 내리고
막차도 끝내 오지 않던 밤
어머니와 나는 밤이 하얗게
맷돌을 돌렸다
창호지문 언 유리창에
사랑이란 말을 써 보기도 전 나이에
어머니는 내 곁을 떠나셨다
벽장문 열고 과자를 나눠주시던 할머니도
수몰 되어버린 친정마을 한버들 그리워하며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오늘 밤 생가엔
나이먹어 덩치 커진 은행나무만이
어느 눈 내리던 밤 할머니 기다리며
어머니와 내가 맷돌 돌리며 나누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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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연사 가는 길에

산골길 삼십리
솔티재 넘어
송덕리 지나
감꽃 피는 마을
여울 소리 요란하리
꽃바람에
그리운 이름을
날려 보내려고
하늘 보니
거기에
그대가 있었네
산은 날더러
잊으라
너의 향기를
날려 보내라 하네
산이 산맥 되어 가듯
나 그대와
동행할 수 있을까
산길 걷다
들꽃처럼
나 스러지고 싶네
그대와
함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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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길에

얽매이면 자유 없어요
세상에 내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소유에 집착하며
나 주인처럼 살았어요
죄를 짓고도
아무도 모르는 듯
의인으로 살아 가네요
마음의 칼 갈면서도
미소 짓고
샬롬 하지요
소유 때문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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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고 있어
사랑은
벽을 허물고
증오는
벽을 쌓으리니
지난 겨울은
매서웠어
우리 갈 길
가시밭길 일지도 몰라
눈발치는 산 길
흙바람 속 이라도
우리 함께 가야 해
누군가
기도하고 있어
널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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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3elf 2007. 05. 19. 오후 06:06

시인님께 선물로 받은 시집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시만 모아 봤답니다. 좀 더 예쁘게 장식하고 싶었는데~ 솜씨부족인 것 같아요.(*^-^*)

포아풀 2007. 05. 19. 오후 09:59

맑고고운님의 고운 배려가 보이시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논둑길 걸으며'가 인연이 깊습니다. 그 시를 낭송했었지요. 지금도 싯귀가 기억나네요. 고래실논...

김경식 2007. 05. 19. 오후 10:48

맑고고은 님께서 저의 졸시를 이렇게 게재 하신 것 놀랍고 부끄럽습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반갑고 고맙습니다. 만 6년전에 포아폴 님의 시낭송으로 그 시가 살아 났던 것도 기억납니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맑고고운 2007. 05. 20. 오전 07:50

안녕하세요. 시헌님의 문학기행 싸이트를 재미있게 잘 읽고 사진도 감상하고 있답니다. 근데요 시헌님~ 안경도수가 조금 약하신 듯 하옵니다. 포아폴-포아풀. 맑고고은-맑고고운...이거든요. *^^* 항상 건강하시길 빕니다.

이옥경 2007. 05. 21. 오전 10:05

시집을 선물받고 기뻐한지가 얼마전인데.. 다시 한번 이곳에서 시인님의 시를 읽고 나니 감회가 새롭네요.. '새벽길을 떠나며'.. 늘 부지런한 시인님의 일상을 바라보며 삶의 근원이 이 시에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문학기행을 기획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수고로움이 먼훗날 귀한 결과로 멋지게 다가오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맑고고운님 귀한시 감사드립니다^^

麟香 2007. 05. 21. 오전 11:25

김시인님의 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학기행 때마다 올려주신 시 한 구절 떠올리며 감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될 거 같네요. 기도하며 묵상하며 산책하며 읊게되는 귀한 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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