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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구 이야기
문태성 2010. 01. 22. 오전 09:58
3449
문태성 2010. 01. 22. 오전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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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추억> 낭구 이야기-------------------------문태성
고향에서 처음 마을 뒷산으로 낭구(나무)하러 다니던 시절이 엊그제였는데 벌써 30년도 더 지난 그때 그 시절의 얘깃거리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시골 어느 집이나 낭구를 해야 굼불(군불)도 때고 소여물도 끓이고 밥도 짓던 터라, 유독 나만의 기억은 아니다.
산은 우리의 부모님들과 나와 동년배, 선배, 형들, 동생들의 이야기이자 산골 촌뜨기들 모두에게 향수의 무대가 된다.
봄에 새 잎이 날 때부터 여름이 지나 가을 낙엽이 질 때까지는 나무를 하러 산에 가지는 않는다.
대신 산나물을 뜯으러, 도라지 더덕 잔데를 캐러, 딸기 머루 깨금 찔레 개살구를 따먹으러 간다. 이 때는 뱀과 옻나무, 땅벌 등을 조심해야 한다.
늦가을부터는 집집마다 나무를 해 둬야 한다.
아침나절과 오후 나절에 한번 씩 하루 두 번 산을 오르내리며 두 짐을 해야 기본이다.
나무 한 짐은 하루치 분이어서 그렇게 미리 해 둬야 비오는 날과 눈오는 날에도 나무가 떨어지지 않는다.
대문 밖 집 앞에 쌓여진 나뭇단을 보고 그 집 남자 일꾼들의 부지런함을 평하기도 했다.
나무를 하러 산에 다니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때부터이다.
동네 우리집 뒤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언제나 산에 갈 때 꼭 나를 부르러 왔다. 같이 동무하고 가자며 부르러 오면 나의 아버님은 어여 가라 하셨다. 친구에게 끌려 다니며 나무를 배운 셈이다.
어머니가 가까운 뒷산으로 머릿짐으로 나무를 하시러 다니실 때, 같이 따라 다니며 개나리 봇짐 하듯 걸빵(멜빵)으로 나무 한 단을 등에 메던 때가 시작이었다.
그러다 6학년쯤 되어서부터는 친구와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네는 소위 화전민으로 마을에서도 산 쪽 높은 곳에 집이 있는, 가정 형편이 어렵고 형제들도 많아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했지만, 친구는 시골에서 하는 일들에 관한 한 나보다 선생이었다. 높은 산에 올라도 무서움도 없고, 심성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반죽도 좋았다. 나무도 잘하고 내 짐도 잘 꾸려 주었다. 체구는 작아도 어른 못지 않은 「어른 아이」였다.
겨울 방학 때는 겨우 내내 으레 나무를 하고 난 후 노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가까운 곳도 가고 먼 곳을 갈 때도 있었는데 우마차가 있는 집들은 도시락을 싸서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다니는 모습은 마을에 자주 보이는 풍경이었다.
나무의 종류는 비나무, 싸리나무, 갈비, 검부재기, 솔버댕이 등 여럿으로 그때마다 가는 곳에 따라 종목을 돌아가며 한다.
물론 장작도 있지만 이건 돈을 주고 사는 경우가 많거나, 통나무를 썰고 도끼로 패야 한다.
비나무는 주로 소나무, 참나무, 떡갈나무 등이 아닌 작은 키의 가지 많은 나무들을 말한다. 이들 나무가 다 베어지고 나면 나중에는 가시나무들도 벨 경우가 있는데, 이 때에는 특수 제작한 가죽장갑을 읍내에서 사서 손에 끼고 낫질을 해야 위험하지 않다. 그러므로 가죽장갑과 나이론 끈으로 된 지게꼬리(지게끈)가 부러운 때가 있었다.
비나무를 다하면 단을 3개로 만들어서 짐을 꾸린다. 한 아름씩 벤 나무 묶음을 대여섯 개 정도씩 모으면 한 단이고, 3단이 한 짐이다.
처음에는 한 단씩 등짐으로 지고 다니다, 차차 두 단, 세 단으로 늘려 나갔다.
높은 산 위나 절벽, 경사지가 있는 곳에서는 산 아래로 굴려 보낸다. 이 때 잘 묶어야 흩어지지 않으므로 칠구랭이(칡넝쿨)로 단단하게 묶어야 한다.
싸리나무는 싸리만 모여 있는 곳을 만나기가 어렵고 어른들이 놔두질 않는다.
무겁기도 하지만 싸리가 탈 때 따닥대는 소리가 듣기 좋고, 화력도 좋아 마디다(오래 탄다)고 해 좋아하는 나무였다. 타고남은 검댕이와 재들은 화롯불에 오르기도 한다.
갈비는 소나무들이 모여선 곳에서 깍지로 떨어진 솔잎들을 긁어모으는 나무다.
깍지로 모은 것을 다시 간추려서 장을 친 다음 옆단에 나무를 대고 잘 얹어야 나뭇짐이 균형이 잡히고 볼품도 생긴다.
갈비는 어머니들에게 불때기도 좋고 화력도 좋아 인기지만, 불이 오래가질 못하고 잔불이 없다. 부지깽이로 하나 둘씩 아궁이에 밀어 넣던 소년에게 희망은 어디쯤에 있었을까?
검부재기는 비나무, 싸리나무가 다 베어지고 난 후 또는 마땅한 나무거리가 없을 때 풀들이 말라 모여 있는 비탈진 곳에서 그 밑 둥을 잘라 모은 풀나무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기가 일쑤다.
이 때는 낫질을 한 번만 하지 않고 빠르고 능숙하게 옆으로 누이여 노려야 한다.
낫을 빠르게 움직이므로 특별히 발을 조심해야 다치지 않는다. 검부재기는 지게에 올릴 때 조심해서 잘 꾸려야 한다. 지겟짐을 일으키기 전 옆단들을 쳐서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하고, 지게를 세우고 나서도 균형을 잘 잡혔나 확인해야한다.
솔버댕이는 소나무를 가지쳐 놓았다 마른 후 가지고 오거나 작은 솔을 아예 밑 둥을 잡는 일로 상깜(산감)이나 산 주인에게 들키면 경을 치므로 조심한다.
눈이 며칠씩 내려 양지가 보이기를 기다려 산에 오를 때는 나무를 찾아 눈밭을 다니기도 하고, 산에 다니는 길에는 토끼 옹노(올무)를 놓아 산토끼 맛을 보기도 한다.
산 중턱이나 비탈진 곳에서 나무를 할 때는 각자 산골짜기를 택해 나무를 하지만 나뭇짐을 꾸릴 때는 서로 도와주기도 한다.
집으로 오는 도중 힘들면 여러 번 쉬기도 하고, 어떤 날은 허기가 지면 짐을 둔 채 집에 와 밥을 먹고 다시 지게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뭇일은 중학교 기간은 물론 읍내에서 자취를 하던 고교 때까지 이어졌고, 고 3때에야 전기가 마을로 들어오고 연탄도 때는 집들이 한 둘씩 시작되었다. 그 후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던 스물 네 살 때에도 하였다.
이 일은 군 전역 후 직장을 서울에서 가지게 되고, 부모님들도 제재소에서 송판 쭉정이를 사서 나무를 때였으므로 마감되었다.
나무하러 다니던 친구들이 꽤 많았고, 모두들 그 때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성장기 때의 그 흔적으로 거울에 비친 내 등은 지금도 약간 굽어 있다.
요즈음의 아이들, 청소년들에게는 얼핏 들어보거나 동화 속에 나오는 얘기일 테지만 산을 오르내리며 배우고 체득한 자연과의 만남과 끈기가, 지금까지 시골 출신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버리지 못하고 사는 인내심의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촌에서 자란 사람들 누구든 뚝심과 정직이 모이고 쌓아져, 무슨 일이건 헤쳐나가려는 힘의 원천이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노라면 어느 해거름 무렵 저녁밥 짓는 연기가 집집마다 피어오르던 때, 지게에 나뭇짐을 가득 지고 지게 작대기를 내짚으며 오솔길을 내려 집으로 환향하던, 고달팠지만 정겨운 모습이 잊혀지지 않고 생생히 떠오르는 건,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가 다가와 여전히 나뭇꾼 소년으로 내 주변에 맴돌기 때문인가 보다.
이 소중한 체험을 어디에서 다시 할 수 있을까?
문태성 카페: http://cafe.daum.net/ts21
고향에서 처음 마을 뒷산으로 낭구(나무)하러 다니던 시절이 엊그제였는데 벌써 30년도 더 지난 그때 그 시절의 얘깃거리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시골 어느 집이나 낭구를 해야 굼불(군불)도 때고 소여물도 끓이고 밥도 짓던 터라, 유독 나만의 기억은 아니다.
산은 우리의 부모님들과 나와 동년배, 선배, 형들, 동생들의 이야기이자 산골 촌뜨기들 모두에게 향수의 무대가 된다.
봄에 새 잎이 날 때부터 여름이 지나 가을 낙엽이 질 때까지는 나무를 하러 산에 가지는 않는다.
대신 산나물을 뜯으러, 도라지 더덕 잔데를 캐러, 딸기 머루 깨금 찔레 개살구를 따먹으러 간다. 이 때는 뱀과 옻나무, 땅벌 등을 조심해야 한다.
늦가을부터는 집집마다 나무를 해 둬야 한다.
아침나절과 오후 나절에 한번 씩 하루 두 번 산을 오르내리며 두 짐을 해야 기본이다.
나무 한 짐은 하루치 분이어서 그렇게 미리 해 둬야 비오는 날과 눈오는 날에도 나무가 떨어지지 않는다.
대문 밖 집 앞에 쌓여진 나뭇단을 보고 그 집 남자 일꾼들의 부지런함을 평하기도 했다.
나무를 하러 산에 다니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때부터이다.
동네 우리집 뒤에 사는 친구가 있었다. 친구는 언제나 산에 갈 때 꼭 나를 부르러 왔다. 같이 동무하고 가자며 부르러 오면 나의 아버님은 어여 가라 하셨다. 친구에게 끌려 다니며 나무를 배운 셈이다.
어머니가 가까운 뒷산으로 머릿짐으로 나무를 하시러 다니실 때, 같이 따라 다니며 개나리 봇짐 하듯 걸빵(멜빵)으로 나무 한 단을 등에 메던 때가 시작이었다.
그러다 6학년쯤 되어서부터는 친구와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네는 소위 화전민으로 마을에서도 산 쪽 높은 곳에 집이 있는, 가정 형편이 어렵고 형제들도 많아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했지만, 친구는 시골에서 하는 일들에 관한 한 나보다 선생이었다. 높은 산에 올라도 무서움도 없고, 심성도 좋고, 노래도 잘하고, 반죽도 좋았다. 나무도 잘하고 내 짐도 잘 꾸려 주었다. 체구는 작아도 어른 못지 않은 「어른 아이」였다.
겨울 방학 때는 겨우 내내 으레 나무를 하고 난 후 노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가까운 곳도 가고 먼 곳을 갈 때도 있었는데 우마차가 있는 집들은 도시락을 싸서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다니는 모습은 마을에 자주 보이는 풍경이었다.
나무의 종류는 비나무, 싸리나무, 갈비, 검부재기, 솔버댕이 등 여럿으로 그때마다 가는 곳에 따라 종목을 돌아가며 한다.
물론 장작도 있지만 이건 돈을 주고 사는 경우가 많거나, 통나무를 썰고 도끼로 패야 한다.
비나무는 주로 소나무, 참나무, 떡갈나무 등이 아닌 작은 키의 가지 많은 나무들을 말한다. 이들 나무가 다 베어지고 나면 나중에는 가시나무들도 벨 경우가 있는데, 이 때에는 특수 제작한 가죽장갑을 읍내에서 사서 손에 끼고 낫질을 해야 위험하지 않다. 그러므로 가죽장갑과 나이론 끈으로 된 지게꼬리(지게끈)가 부러운 때가 있었다.
비나무를 다하면 단을 3개로 만들어서 짐을 꾸린다. 한 아름씩 벤 나무 묶음을 대여섯 개 정도씩 모으면 한 단이고, 3단이 한 짐이다.
처음에는 한 단씩 등짐으로 지고 다니다, 차차 두 단, 세 단으로 늘려 나갔다.
높은 산 위나 절벽, 경사지가 있는 곳에서는 산 아래로 굴려 보낸다. 이 때 잘 묶어야 흩어지지 않으므로 칠구랭이(칡넝쿨)로 단단하게 묶어야 한다.
싸리나무는 싸리만 모여 있는 곳을 만나기가 어렵고 어른들이 놔두질 않는다.
무겁기도 하지만 싸리가 탈 때 따닥대는 소리가 듣기 좋고, 화력도 좋아 마디다(오래 탄다)고 해 좋아하는 나무였다. 타고남은 검댕이와 재들은 화롯불에 오르기도 한다.
갈비는 소나무들이 모여선 곳에서 깍지로 떨어진 솔잎들을 긁어모으는 나무다.
깍지로 모은 것을 다시 간추려서 장을 친 다음 옆단에 나무를 대고 잘 얹어야 나뭇짐이 균형이 잡히고 볼품도 생긴다.
갈비는 어머니들에게 불때기도 좋고 화력도 좋아 인기지만, 불이 오래가질 못하고 잔불이 없다. 부지깽이로 하나 둘씩 아궁이에 밀어 넣던 소년에게 희망은 어디쯤에 있었을까?
검부재기는 비나무, 싸리나무가 다 베어지고 난 후 또는 마땅한 나무거리가 없을 때 풀들이 말라 모여 있는 비탈진 곳에서 그 밑 둥을 잘라 모은 풀나무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기가 일쑤다.
이 때는 낫질을 한 번만 하지 않고 빠르고 능숙하게 옆으로 누이여 노려야 한다.
낫을 빠르게 움직이므로 특별히 발을 조심해야 다치지 않는다. 검부재기는 지게에 올릴 때 조심해서 잘 꾸려야 한다. 지겟짐을 일으키기 전 옆단들을 쳐서 흩어지지 않도록 해야하고, 지게를 세우고 나서도 균형을 잘 잡혔나 확인해야한다.
솔버댕이는 소나무를 가지쳐 놓았다 마른 후 가지고 오거나 작은 솔을 아예 밑 둥을 잡는 일로 상깜(산감)이나 산 주인에게 들키면 경을 치므로 조심한다.
눈이 며칠씩 내려 양지가 보이기를 기다려 산에 오를 때는 나무를 찾아 눈밭을 다니기도 하고, 산에 다니는 길에는 토끼 옹노(올무)를 놓아 산토끼 맛을 보기도 한다.
산 중턱이나 비탈진 곳에서 나무를 할 때는 각자 산골짜기를 택해 나무를 하지만 나뭇짐을 꾸릴 때는 서로 도와주기도 한다.
집으로 오는 도중 힘들면 여러 번 쉬기도 하고, 어떤 날은 허기가 지면 짐을 둔 채 집에 와 밥을 먹고 다시 지게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뭇일은 중학교 기간은 물론 읍내에서 자취를 하던 고교 때까지 이어졌고, 고 3때에야 전기가 마을로 들어오고 연탄도 때는 집들이 한 둘씩 시작되었다. 그 후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던 스물 네 살 때에도 하였다.
이 일은 군 전역 후 직장을 서울에서 가지게 되고, 부모님들도 제재소에서 송판 쭉정이를 사서 나무를 때였으므로 마감되었다.
나무하러 다니던 친구들이 꽤 많았고, 모두들 그 때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성장기 때의 그 흔적으로 거울에 비친 내 등은 지금도 약간 굽어 있다.
요즈음의 아이들, 청소년들에게는 얼핏 들어보거나 동화 속에 나오는 얘기일 테지만 산을 오르내리며 배우고 체득한 자연과의 만남과 끈기가, 지금까지 시골 출신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버리지 못하고 사는 인내심의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촌에서 자란 사람들 누구든 뚝심과 정직이 모이고 쌓아져, 무슨 일이건 헤쳐나가려는 힘의 원천이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노라면 어느 해거름 무렵 저녁밥 짓는 연기가 집집마다 피어오르던 때, 지게에 나뭇짐을 가득 지고 지게 작대기를 내짚으며 오솔길을 내려 집으로 환향하던, 고달팠지만 정겨운 모습이 잊혀지지 않고 생생히 떠오르는 건,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가 다가와 여전히 나뭇꾼 소년으로 내 주변에 맴돌기 때문인가 보다.
이 소중한 체험을 어디에서 다시 할 수 있을까?
문태성 카페: http://cafe.daum.net/ts21
댓글 4개
포아풀
2010. 01. 24. 오후 09:08
글 읽다가 마음이 덩달아 저 먼 유년의 그곳으로 가곤했네요. 정겹고 다사롭고 추억이 가득 묻어나는, 고향의 그리움도 전해지는 그런 글입니다. 문태성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끔 올려주시는 글도 읽었습니다만 댓글조차 인색했었네요. 반갑습니다.
박민
2010. 01. 26. 오전 09:56
직접 해보구 싶네여..ㅋ 감사해요.. 산토끼 맛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귀여운 눈을 보면 절대 못먹을거 같아여..ㅎ
문태성
2010. 02. 01. 오전 10:04
포아풀님, 박 민 님 감사드려요~! 오늘도 힘찬 멋진 하루~! 세상의 단 한 분~! 님~~!
Michell Yoo
2011. 07. 20. 오후 11:30
40년쯤의 제 고향이 그립습니다. 낭구... 운전하다 혼자 씹어보니 눈물이 주르륵... 이민살이에도 추억은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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