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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안 가지고 온 날 저녁

박성실 2011. 02. 17. 오후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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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맑아 유난히도 까만 저녁이다. 나는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다다닥’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왔다. 다이소가 보이고 공중전화 박스가 보이고,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빼고 살펴도 그는 보이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손은 벌써 전화기 버튼을 누른다.

“어디야?”

내가 ‘여보세요’를 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어디냐고 묻기부터 하는 그가 오늘 따라 아이 같다.

“지금 막 내렸어.”
“그래? 내가 그리로 갈게.”

5분도 채 되지 않아 나타난 그는 가방이며 카메라를 여전히 어깨에 둘러메고 있다.

“아직 안 들어갔어?’
“그게…….”

머쓱하게 웃으며 열쇠를 안 가져 왔노라고 말하는 그, 역 근처 만홧가게에서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는 그의 웃음에 내 입가에도 슬며시 웃음이 돈다. 미리 연락했었다 한들, 뒤 늦게 시작한 공부에 휴대폰까지 꺼 놓았던 내게 연결됐으리 없다. 그의 팔에 팔짱을 깊게 끼어 넣으며 그의 손을 잡는다. 그러자 그가 말한다.

“난 왜 이렇게 열쇠를 자주 잊어버리나 몰라.”

투명한 저녁 공기가 우리들의 코를 오간다. 마음을 오간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 그것은 열쇠 안 가져온 날 저녁에 대한 것이었다.
 그날따라 몸이 안 좋은 거야. 그래서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지. 정말 눕고 싶은 마음만 간절한 거야. 그런데 하뿔사, 열쇠가 없더군. 식구들한테 전화를 하려니까 또 욕먹겠다 싶었어. 게다가 부모님은 지방에 갔다가 늦게 오시는 날이었거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싶으니 막 화가 나는 거야. 날도 추운데 갈 곳도 없고 어쩔까 하다가 근처 커피숍에 들어갔어. 딱히 할 것 없어 찾은 커피숍에는 연인들로 가득했지. 서로 마주 보고 웃는 커플, 일렬로 앉아 기대있는 커플, 보다보니 더 처량해지고 화가 났어.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차 한자나 시켜 놓고 앉아서 책을 읽는 것 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 무슨 고전이었는데, 얼마나 지루한지 졸다가 깼다가 자다가 일어났다가 했지 뭐야. 결국 엎드려서 자던 나는 점원이 가게를 정리하는 소리를 듣고 깼어. 얼마나 창피하던지 얼굴에 자국 난 채로 도망치듯 나왔어. 집에 가보니 동생이 들어 와 있었어. 아무 일 없었던 듯 지금 막 들어 온 척 했지. 그냥 서럽더라.

 그래 맞아 그 기분 나도 알아. 어느 추운 가을 저녁이었어.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엇인가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일찍 갔지. 난 제법 들 떠 있었어. 난 그런 습성이 있거든, 뭔가 만들면서 집중하면 다른 모든 스트레스를 잊게 되는 말이지. 물론 목 뒤에서부터 줄기를 따라 통증이 시작되지만, 만들어 놓은 결과물을 보면서 그런 것쯤 다 잊게 되거든. 아무튼 떠 오른 그 아이디어를 현실화 하겠다는 생각으로 두근거리며 집에 도착했는데 열쇠가 없는 거야. 일단 엄마한테 전화를 했어. 엄마는 경기도 쪽 어디에 가셨다고 하셨어. 아빠는 회사에서 늦으신다고 하고, 동생은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어. 그러다가 배터리마저 나가버렸어. 그때 나는 할머니하고 같이 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귀가 많이 어두워지셨던 터라 초인종 소리도 잘 듣지 못하셨지. 그래서 열쇠를 안 가져온 날이면 식구들에게 전화를 했고, 연결이 안 되면 문을 부수다 싶을 만큼 두드려야 했어. 그날도 그랬어.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할머니는 대답이 없으셨지. 가방을 내려놓고, 손으로 두드리다 보니 점점 화가 나는 거야. 그래서 발로 차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그냥 소리가 잘 들리게 하려고 그랬어. 그런데 두드리다 보니, 내가 왜 두드리는지 왜 이렇게도 화를 내고 있는지 모르겠더라. 그냥 점점 약이 오르고 화가 나더라고. 나중에는, 그 안쪽에서 내다보는 구멍 있잖아. 그걸 들여다보면서 할머니가 이쪽으로 혹 걸어 나오시는 것이 보일까 했다니까. 보이면 할머니가 걸어 나오실 때 더 두드려 보려고 한 거지. 순간, 너무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 같더라. 문이 크게 보이는 날이 있지. 유난히 굳게 닫혀 있는 그 문을 보면서 이상한 기분에 사로 잡혔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나는 지쳤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너무 화가 나서 눈물까지 흐르고 있었어. 집에 일찍 도착해서 무엇을 하겠다던 그런 마음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어. 그냥 화가 났지. 심지어 아주 큰 소리로 ‘할머니, 할머니’ 소리쳤다니까, 그러다보니 낙담이 되더라고. 뭐랄까 그냥 신세 한탄이 되는 것이 내 안에 웅크리고 있던 외로움이 고개를 들고 몸 밖으로 빠져나오려 몸부림치는 것 같았어, 문득 내가 혼자인 것 같은 거야, 그런 느낌 정말 끔찍했어. 일단 진정을 하기로 하고 그 때 우리 집이 13층이었거든, 13층과 14층을 오가는 계단 쪽으로 가서 그쪽에 쭈그리고 앉았는데, 복도가 갑자기 어두워지는 거야. 그 센서 달린 등 있잖아. 그거였거든. 그래서 몇 번을 일어섰다가 앉았다가 했는지 모르겠어.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서러워지더라. 모르겠어. 그냥 내가 이 세상에 버려진 것 같고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거야. 아 눈물 날라 그런다. 주책이지, 미안해. 그래서 나 그날 울어버렸어. 너무 춥더라. 그러다 문득 발치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발견한 거야. 어느 누구의 주머니 속에 있다가 입으로 옮겨져 몸의 반토막을 잃어버리고도 잔뜩 구겨져 있는 그녀석이 어찌나 외롭고 처량해 보이던지, 나도 모르게 집어 들었지. 그러다 문득 누가 이런 것을 남의 집 앞에 버렸나 화가 나는 거야. 그래서 집어 던졌지. 그 때 그 센서 등이 켜지는 거야.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지. 그냥 던질 수 있는 것은 그 센서 등에 다 집어 던지고 말았어. 왜 그렇게 화가 나고 서러웠을까,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 여러 번 집어 던지느라 배가 터진 필통만 속을 내 보이고 있었지. 문은 꼭 닫친 채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더라.

 잠시 호흡을 고르는 내게 그가 물었다.

“끝이야?”

 아니, 그 때, 복도 쪽으로 나 있던 내 방 창문이 열려 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 거야. 벌떡 일어난 나는 창문의 고리를 확인했지. 젖혀있었어. 그러니까 열려 있었다는 말이지.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창문에 도난방지하려고 되어 진 창살 있잖아. 아래쪽 두 번째 왼쪽 부분이 살짝 녹슬어 있는 것을 발견한 거야. 그래 그 부분을 손으로 잡고 흔들어대기 시작했지. 응, 창살을 떼어 내기 시작했다는 거야. 처음에는 그냥 손을 댔는데 흔들어 댈수록 다른 생각들은 잊고 창살에만 집중하게 되더라. 조금 전에 내가 왜 눈물을 흘렸는지 흥분했는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 결국 창살은 떨어지고 내 어깨가 간신히 빠져나갈 너비가 됐지. 그 때 난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점프해서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일이었지. 결국 던진 것들 다시 다 주워서,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하면서 말이야. 가방이랑 물건이랑 다 챙겨서 가방 먼저 밀어 넣고 팔딱 팔딱 뛰어서 머리를 들이밀면서 무게를 창문 안쪽으로 쏠리게 하는데 성공했지. 몸이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의 그 쾌감이란……. 그날 저녁 우리 엄마는 어떤 도둑놈이 와서 창살을 부순 거 같다고 놀라셨고, 뭐 솔직히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다행이지?”
“뭐가?”
“흐흣, 상계역 근처에 만홧가게가 있어서, 문을 열어줄 가족이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거”
“하하 그러게, 아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데, 아까 얼굴에 자국이 나 있었다고 했잖아, 그거 안 들켰어?”

열쇠를 잊어버리고 간 날 저녁의 퇴근 길, 삶은 때때로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낯선 나를 불러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함정에 빠지기라도 한 듯 당황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을 설명할 수 없을지라도 이것은 나이다. 가끔씩 엿 볼 수 있는 내 무의식의 일상이랄까…….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댓글 12개

안개꽃* 2011. 02. 17. 오후 06:38

성실님~~^^ 성실님의 글 향연에 어느사이 주인공이 되어버립니다 섬세한 그래서 자꾸만 빠져들게되는...나를 자꾸만 뒤돌아보게하는 성실님~~항상 건필하세요~~^^

정상근 2011. 02. 17. 오후 10:19

한마디로하면.. 바아보 같아요..ㅋ 그런데, 옆에서 박성실님 이야기 다 들어준 분이 서방님이세요?.. 참~ 인내심 있으신 분이다..ㅋ(나 같으면 '돼따..고마해라\" 그러고 신경질 냈을 텐데..ㅋ)

포아풀 2011. 02. 18. 오전 02:05

저는요, 성실님의 글 속에 등장하는 부군님과 성실님의 대화내용에 폭 빠졌다 가요. 그래도 흔적은 남기면서...

박성실 2011. 02. 18. 오전 09:57

안개꽃님, 제 이야기에 함께 하셨다니 기쁩니다. 그냥 저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라 쓴 거예요.. 헤헤 이상하잖아요. 이런 순간 불쑥 나오는 무의식의 일상이라는 것이... 안개꽃님도 항상 건필하십시오!

박성실 2011. 02. 18. 오전 10:09

ㅎㅎ 저희 남편 멋지죠? 그게요 저한테 재밌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한테는 재미없고 그런가봐요. 근데 저도 남편의 이야기를 잘 들어줘요. ㅎㅎ 바보 커플인가봐요.

박성실 2011. 02. 18. 오전 10:28

네, 포아풀님, 감사합니다. 흔적, 자취라는 말은 참 매혹적이예요. 마음이 머물렀던 자리라서 일까요, 그나저나 미오새님과 인구님은 뜸 하시네요. 두 분의 이야기가 참 즐거웠는데... 보고싶다...

박종영 2011. 02. 20. 오후 02:16

잊고 나온 열쇠 하나로 더욱 든든한 사랑의 고리를 만들어 가는 신비한 대화, 부러운 듯 봄이 달려올 것 같습니다. 슬기롬고 세련된 언어구사에서 공명의 기쁨을 얻어갑니다. 아름다운 글 잘읽었습니다. 박성실님. 건강하세요. 움트는 이 봄날에 더욱.

박성실 2011. 02. 22. 오전 11:36

시인님,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글이라 칭찬해 주시니 부끄럽습니다. 다시 읽어 보니 고칠 부분이 많은데요. 퇴고라는 것은 얼마나 해야 맘에 들까요? 헤헤 봄날이 움트는, 이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생명력이 느껴져서 일까요? 이 봄 날 더욱 행복하시고, 좋은 시 부탁드립니다.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인구 2011. 02. 22. 오후 02:24

hi~ 성실 님~! 열쇠의 얽힌 에피소드 잘 읽었습니다. 글 속에 스며있는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도 함께요.^^ 자주는 아니지만 열쇠를 분실했을 때 인상 안 쓰고 예비키를 건네주시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성실 님~!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 하나 알려드릴까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한 시간 정도 자 보세요. 그러면 누구를 확 물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뻗혀 있던 화가 신기하게 수그러들어요. 제가 쓰는 방법이기도 하구요.. 저도 요즘 뜸했지만, 미오새 님이 잘 보이지 않네요.. 아무튼 자주 봬요.. bye~

박성실 2011. 02. 23. 오후 01:54

오홋 인구님!! 반가워요^^ 오늘 대학로에 롤집에 점심 먹으러 가면서 초콜릿 카페를 지났는데, 그래서 인구님 생각이 났더랍니다. 1시간 정도 자면 화가 누그러진다는 말은 참 맞아요. 잠은 참 많은 것을 치유하는 것 같거든요. 잠 속에서 무의식이 내 병든 무의식을 만나 치료를 하는 걸까요? 암튼, 잠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라도 반갑습니다. 2011년 잘 보내고 계시죠? 봄이 노크하는 소리를 들었다 싶었는데, 무언가 성큼 저를 따듯한 봄날 속으로 밀어 넣은 것 같습니다. 행복한 봄날 되세요. 그리고 이 봄이 가기 전에 미오새님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헤헤

미오새 2011. 02. 25. 오전 09:16

*성실님.. 이웃집 아저씨가 이웃집 새댁에게 보고 싶었다고 고백을 하여도 용인되는 곳은 세상천지 이곳 뿐이여서,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라도 빨리 오고 싶었습니다. 긴 겨울 잠에서 이제 겨우 눈 비비며 깨어난 한마리 새도 성실님 무척 보고 싶었습니다. 그 특유의 웃음소리도 듣고 싶었지요. 가끔 생각이 날때면 \"헤헤\" 웃어보지만 성실님처럼 자연스럽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움만 더 합디다. 보고싶다는 성실님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인구님도 모습을 보인걸 보면, 사람의 마음을 여는 열쇠는 결코, 잃어버릴 염려없는 \"정\"임을 알 것 같습니다. 봄날을 기다리며 이렇듯 보고 싶은 마음을 서로 전하고 있는 우리들은 아무래도 정 깊은 이웃들이 분명한 것 같아요.

박성실 2011. 02. 25. 오전 10:02

하하하 이렇게 반가울 수가!! 세상천지 이곳 뿐이라니, 저도 말해야겠네요. 보고싶었어요! 정, 이 열쇠다, 멋진 말입니다. 댓글을 통해서 항상 무엇인가 자극이 되고 배웁니다. 사실 내심, 미오새님이 겨울잠에서 깨며 시 한편 영글게 하셨을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헤헤 부담주는 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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