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글

게시물 상세보기

기적은 없다 (#1)

박상덕 2011. 03. 02. 오후 10:58
3118


김길상, 1998, 「童心-피리를 불며」 판화 10/120 

기적은 없다


- 1 -

  안개는 아침 일을 대충 마무리할 때까지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게 끼였었다. 오늘은 준비해야할 것이 상당하여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동녘하늘이 새벽녘의 진한 어둠을 조금씩 걷어내며 보랏빛으로 바뀔 즈음이니 평소에 비해 1시간쯤 이른 편이다. 희끄무레해진 창밖을 내다보니 안개도 그때부터 서서히 스미기 시작하였다. 새벽빛이 그 앞에서 달아나려고 하는 동틀 무렵의 어둠을 이기고 떠오르기 바로 전이었다. 앞산의 들쑥날쑥한 산등성이위로 해가 어슴푸레하게 들어날 때쯤에는 사방을 온통 희뿌옇게 흐려놓고는, 어둠이 걷히는 만큼에 반비례해서 농담을 맞추듯이, 원근법에 따라 먼 곳에서 가까운 쪽을 그려오듯이 갈수록 진하게 쌓였다. 대기를 굵게 썰어 지표면에서 대류권상층까지 두 개의 결로 크게 나누고는 아래쪽으로 상당한 높이까지의 기단(氣團)은 도시의 오염물질과 합세하여 아침녘에 이르러서는 절정에 올랐는지 곳곳마다 뿌옇게 물들이더니 이제는 발치에서부터 앞마당 한갓진 곳에 힘겹게 서있는 늙은 나무의 잔가지 위에까지 진한 잿빛으로 끝 모를 장막을 쳐놓고 '태초에⑴' 이전으로 돌아간 듯 하늘땅 구분마저 완전히 지워버렸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서 이러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내보이기가 부끄러워서 감추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하기야 인간인 내가 봐도 엉망진창인 세상 꼴인데 하늘이 보면 오죽하랴. 그저 옛날로 전부 되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안개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호리병에 집어넣듯 그 속으로 빨아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붕너머 야트막한 언덕배기 여기저기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산동네 낡아 헤진 단칸집들을 집어넣더니, 건너편 둔덕에 조형물을 세우듯이 듬성듬성 교목을 심어놓고 잘 가꾼 관목으로 나지막이 숲을 이룬 어느 부잣집 정원도 단숨에 집어삼켰다. 공허와 암흑의 불투명한 장막으로 무장한 안개는 삭막한 회색도시의 명맥을 끊어놓고, 사회(死灰)로만 남아 있는 생명의 잔재마저도 걷어내어 모든 것을 원점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듯 인간의 이욕이 만든 한심스러운 작태를 몽땅 없애는 것으로 수렴할 수도 있음을(창 6:7) 그 옛날 노아의 때처럼 보여주려고 했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희미하게 밝아오던 새벽하늘을 붉게 물들였던 아침 해가 진리의 빛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일러주려는 듯이(요 8:12) 눈부신 빛으로 대지를 환하게 밝혀주며 영롱하게 누리에 비칠 때쯤에는 완연히 밝아졌다. 지선(至善)의 기쁨은 그 선 자체에 있느니, 신은 인간을 선량한 선을 행하는 자로 만들어 영원한 평안의 보증으로 이 땅을 아담에게 주었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되뇌도록 한다.⑵

* ⑴ 「창세기 1:1」,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신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때는 태초이다. '태초에'의 히브리어 표현은 베레쉬트(Bereshith)로 이는 '기원'을 뜻한다. 시간이 생기기 이전의 절대적 '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태초에'는 천지에 시공을 알리는 신호이자 종소리요, 만물이 없음에서 있음이라는 존재가치를 가지는 순간이다. 신이 창조활동을 개시함으로 시작된 '비가역적 시간의 출발점'을 의미한다. 이는 시간의 상징이며, 시간의 출발점이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마주하는 시간의 끝점도 있다는 것으로, 이는 모든 피조물은 생멸의 섭리에 갇히게 되는 것이 창조의 본연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 ⑵ 단테(Dante, Alighieri, AD 1265∼1321) 著/김의경 譯, 1992, 《신곡(神曲,La Divina Commedia)》/「연옥편 제28곡, 지상낙원」

  제(祭)는 자욱하던 안개가 왼 만큼 걷힐 무렵인 10시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넋(魂魄)을 부르는 향내음이 올라가진 않고 자꾸만 가라앉는다. 안개를 끼게 했던 날씨 때문에 분향강신(焚香降神)의 예가 어그러진 것일까? 아니면 고적(孤寂)에 눌리어 겨워진 분위기에 휩싸여서 또는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보다는 분명히 그 탓이라 그랬을 것이다. 하늘에 사연을 내보이기가 너무나 민망해서 그랬을 것이다. 안개가 끼어 감추려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려니…. 식장은 한동안 고요만이 감돌뿐 짓누르는 침묵은 적막감을 더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밤의 파수꾼이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워 등불을 밝혀 주어야할 시간이 도래한 것처럼 지체할 수가 없다. 누군가 고색이 짙게 벤 누런빛 향로에다 다시금 한 움큼 향을 불살랐다.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음을 알아챘는지, 향불은 힘차게 불꽃을 내며 한 가닥 굵은 연기를 시원스레 피어냈다. 물 빠진 강마른 논에서 회오리바람이 한바탕 크게 요동을 치며 하늘로 솟구치듯 죽은 이를 향한 산자의 비원을 알아들었는지 머리위에서 잠시 머문듯하더니 한줄기 빛을 타고 곧바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앞쪽 뜰 한 켠에서는 불꽃을 위하여 한줌의 재가 되었다는 명예가 수많은 이의 뭇입을 빌어 덧씌워진, - 시민들은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철저한 사고규명을 바라면서 그렇게 불렀다. - 죽은 이들을 추모하며 부르는 진혼의 합창소리가 잘게 부는 바람결에 실려 끊어질듯 이어진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구슬픈 가락은 침통한 장중의 분위기를 말해주듯 스산한 기운처럼 낮게 깔려 잔잔히 흘러오다 그 속에 우뚝 선 어느 유명한 성악가가 솔로가 울려주는 깊이 팬 소리가 한(恨)서린 칼끝처럼 후회와 그리움이 뼛속깊이 사무쳐 몰골이 가년스러운 이가 고까운 한탄을 마구 풀어내듯, 가뜩이나 애타는 가슴인데 사정을 두지 않고 날카롭게 파고든다. 세상일에 무심한 하늘이었지만 그래도 오늘만은 사무친 회한을 안타깝게 여겼는지, 울울한 심사를 달래주려고 배려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지혼(智昏)에서 허덕이는 꼴불견을 재우치려는 것인지, 오월의 메마른 땅위로 어슷비슷 돋아내 옹기종기 작은 군락을 이루어놓은 보드기⑶의 섬섬한 이파리에 파르르 소리를 전한다. 물론 성서에서 말씀하듯 들을 귀 있는 자(마 11:15)에게만 들리는 소리일 것이다.

* ⑶ 보드기 : 크게 자라지 못한 나무.

  위령제는 위령탑 제막을 겸하여 치른 첫 번째 제(祭)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지만 그리 오래시간이 걸리지 않고 끝났다. 산자에게는 온당치 못한 원성(怨聲)의 곳이고 죽은 이에게는 반갑지 않은 실종(失踪)의 곳이지만, 누구도 원치 않는 것이 하나 더 이승의 땅에 생겼다. '기쁨이나 슬픔 때문에 한 기능이 강한 감명을 받으면 혼(魂)은 그쪽으로 쏠려 어느새 다른 능력에는 아랑곳하지 않게 된다.⑷'고 했지만, 이는 산자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곳은 싫든 좋든 우리 모두를 옥죄는 멍에일 수밖에 없으며, 시간이 기억을 무르게 한다고 해도, 서각(書刻)된 글씨처럼 뇌리에서 베껴낼 수 없는 것이다. 산자들은 아벨의 첫 송장부터 해왔던 그대로 진혼가를 목청껏 불러댔다. 멀찍이 떨어진 잔디밭에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동그랗게 둘러앉아 저들끼리 한참을 떠벌리다 무언가를 털어내려는 듯 벌떡 일어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갈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가인의 돌칼이 세상을 가르고 피로 얼룩지게 한 이후부터(창 4:8) 우리가 단 한사람이라도 살생을 하거나 죽음으로 몰아세운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늘에 저당 잡혀야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그때서야 깨친 것처럼 모두가 호들갑을 떤다.
  위패벽(位牌壁)에 새긴 이름을 어루만지며 사람을 대하듯이 쓰다듬던 유가족은 살아서 돌아 온 이 보듯 하다가도, 억장이 무너지는 현실에 또다시 절망으로 흐느끼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슬픔을 삭여야 하는 애태움이 역력한 그들에게 의식을 주재했던 이들이 찾아와 머물 집을 짓지 못하는 이승에서의 고달픈 삶을 끝내고 영원히 사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좋게 받아들이라는 의례적인 말을 건네고 돌아갔다. 풍기는 어의(語義)가 너무나 상투적이라 실망이 컸지만 제의를 실수(實修)해야 하는 담당자였고 매양 같은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겠거니 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아픔을 함께하는 것은 가족밖에 더 있겠는가. 누구에게 나의 상심을 알아달라고 하겠는가. 제(祭)는 그렇게, 빨리 떠나라고 떠밀 듯 재촉하는 너무나 형식에 치우친 의식에 맞추어 모든 절차를 일사천리로 마쳤다. 그래도 좋게 되라고 한 것이니 받아들이자고 속으로 다짐을 했건만, 어찌하여 발걸음은 이대로 돌아서질 못하는가. 후련해져야 하는데, 홀가분해져야 하는데, 어찌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는가. 오히려 부족한 감만이 눈덩이 커지듯이 아쉬움으로만 점점 더 크게 부풀어 오른다.
  이는 죽은 이의 산 가족들만 그렇겠는가. 죽은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승의 연(緣)과 정(情)에 얽혀 있는 미련이야 동아줄보다 질기겠지만 그들로서는 이승을 떠났으니 어찌할 수가 없을 뿐이다. 산자와 갈라놓은 금단의 선은 넘을 수 없는 경계이니 별도리가 없지 않은가. 누구라서 백분의 한 점이라도 그 심정을 알 수 있으랴. 그 차디찬 슬픔의 계곡에 빠진 사무친 뼈저림을. '내 아들은 이 땅위에 살려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이 짤막한 생을 살려고, 한 길로 왔다가 또 다른 길로 간 것이냐?⑸' 어느 스님이 다독이려고 그렇게 말했다지만, 꼭 그렇게 생때같은 자식을 잃어 버렸다. 아니 우리 모두가 죽였다고 단정해서 말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내를, 남편을, 부모를, 형제를…. 작디작은 가슴에 들어갈 수도 없는 큰 아픔의 덩어리를 묻어놓고 통곡해야 하는 가족이 아닌 자는 모른다. 억척스레 집요한 애도로 버티는 것은 명백하게 비천한 감각으로 여기는 남들에겐 기억에서조차 지워질 뿐 알 수 없는 것이다. 죽은 이들에게도 느낌이란 것이 있다면 그들도 똑같을 것이다.

* ⑷ 단테 著/김의경 譯, 1992, 전게서/「연옥편 제4곡, 제1대지」
* ⑸ 함석헌 註釋, 2007, 《바가바드 기타(The Bhagavad Gita)》/「제2 (삼캬 요가):27」



  진혼(鎭魂)의 의식은 어쨌거나 아무 탈 없이 끝났다. 그러나 많은 돈을 들이고 온갖 정성을 다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죽은 이를 위령하고 산자가 의도한대로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오히려 산자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위로라고 해야 숨겨진 진실을 보는 것이고, 그 의식이 가지는 실체에 더 가까울 것이고 그래야 논리적으로도 맞을 것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은 이의 영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에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⑹'는 공자(孔子)의 대답처럼 누구에게나 고뇌이듯이 이 말씀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우리 산자가 과연 무엇을 알고 행할 수 있을 것인가? 안타깝지만 나를 대신하는 존재는 전세에서도 이승에서도 도래할 미래의 내세에서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승은 끝없는 생명의 순환질서 가운데에 어느 한 각(角)에 내 몫으로 주어진 귀한 삶이기에 이를 소진한 후에 받는 어떠한 위로로도 감당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위령제를 성심껏 지냈지만 꺼림칙한 무언가가 남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에 어느 고승의 입적 1주기를 맞이하여 모 사찰에서 추모법회가 성대히 열렸었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야 당연 했을 것이고 관심 있는 이들이 많이 모여 그 날을 특별히 기렸다고 들었다. 그런데 차려진 음식은 고작 밥 한 그릇이었다고 했다. - 살아생전의 그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여 받든 것이다. - 그렇다고 돌아가신 분이 일반인이 보면 여지없이 홀대하듯 한(?) 밥 한 그릇에 섭섭해 했다거나 그래서 산자가 오히려 가는 길에 훼방만 놨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천도제나 위령미사를 올리거나 무당굿을 할 때에 제물(祭物)의 좋고 나쁨이나 많고 적음에는 무엇이 달라지겠는가하고 묻는다면, 이상한 자라고 쳐다보며 산자가 죽은 이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하고 반문할 것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도덕교과서가 아니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내놓으라고 종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죽음의 부정(不淨)을 풀고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여 좋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특별한 제(祭)까지 올리며 이를 확인해주는 것은 죽은 이에 대해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오히려 죽은 이에 대해 크나큰 박대가 될 수도 있음을 산자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나 같다고 할 수도 있다.
  '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죽은 자는 반드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는 근심하지 마라.⑺'고 한다면, 어느 쪽은 그렇다고 말할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무슨 소리냐고 할 것이다. 그러니 죽은 이를 놓고도 인간의 주장은 이토록 천양지차다. 왜 다를까?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당이야 말할 것도 없고, 줄기가 같은 곳에서는 반드시 그곳에서 치러야 하듯이 거대 신비주의 집단에서도 나서서 똑같이 죽은 이를 위령하라고 강권하다시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의(祭儀)란 죽은 이들 보다는 산자와 먼저 결부되지 않고서는 결코 지낼 수가 없는 것이다.⑻ 그런데도 인간세상에서는 고혼(孤魂)을 달래라고 부추기며 야단법석이다. 죽은 다음에는 꼭 몹쓸 곳으로 가는 것을 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고혼은 무슨 고혼이냐. 이승에서는 천애고아도 있고 사고무친일 수는 있으나, 이승에서 살 때 저 혼자 뚝 떨어져 나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죽어서는, 그들 말대로 혼이나 영이 있다고 했으니, 먼저 간 부모형제나 일가친척이 반겨줄건 당연한데 그마저도 없는 고아귀신(孤魂)이 있을 수가 있는가? 그렇게 멍청하다면 귀신도 아니지.⑼

* ⑹ 《論語》「先進篇」, '季路問事鬼神①.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取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자로가 죽은 이의 영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살아있는 사람도 능히 섬길 수 없는데 어찌 죽은 이의 영을 섬길 수 있겠느냐? 감히 여쭙겠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말하기를,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
- ① 귀신(鬼神) : 여기에서 말하는 귀(鬼)는 '조상신'을 의미한다. 신(神)은 범신론(汎神論,pantheism)적 의미로써 산천이나 그 밖의 모든 신을 일괄하여 지칭한다. 이 구절에서는 귀에 중점을 두고 물었다. 계로(季路)는 자로(子路, 仲由)이다.
* ⑺ 함석헌 註釋, 2007, 전게서/「제2 (삼캬 요가):27」
* ⑻ 조병로 著, 2003, 《인류와 문화》/제11장 종교와 문화/1. 개념과 의례
  [제의의 유형]
  1. 신령을 감동시키고 신령의 호의(好意)를 얻고자 하는 목적에서 행하는 의례(propitiation ritual)로서, 부락제(部落祭)라든지 사냥∙질병 때문에 벌이는 의례
  2. 범죄를 저지른 후 부정(不淨)을 씻고 속죄하려는 목적의 의례(piacular ritual)
  3. 참가자의 정신적 내지는 심리적 상태를 고양시키고 평화나 평온을 추구하기 위한 의례(sacramental ritual)로서, 기독교의 빵 나눔이라든지 제사 후의 음복(飮福)등이 이에 해당한다.
  4.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존재와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행하는 의례행사인 통과의례(passage rite)가 있다. 대표적 사례로는 임신∙출산∙성인식∙결혼∙장례 등이다.
  사제(司祭,preist) : 사제는 종교에 대한 특별한 능력이나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교회의 목사, 불교의 승려, 가톨릭의 신부 등과 같이 특정한 제복∙두발∙장식으로 치장하고 일정한 교육과정을 거친 뒤 특정한 종교의례를 정확하게 집행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단지 중개자일 뿐이어서 효과의 궁극적 책임은 일반인의 몫이다.
  무당(巫堂,sharman) : 무당은 특수한 능력, 초자연적인 힘을 동원하거나 그것을 자신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초자연적인 존재와 통신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당은 보통 직업이 아니 경우가 많다. 별도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자신이 보유한 특수한 능력을 발휘할 뿐이다. 따라서 공시적인 교육이나 훈련도 없다. 대신 의례의 효과는 샤먼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무당을 뜻하는 샤먼은 원래 시베리아지역의 종교적 중개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 ⑼ 주검(death)에 대하여 인간의 정서로는 '죽었다는 것은 소멸과 같은 뜻'이지만, 우주의 공리(公理)로서는 이승의 옷인 육체를 벗어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 죽음이라 해도 개개의 미시적 변화의 과정이지 끝은 아니기 때문이다. 흙으로 빚어 만든 생명이니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간단한 이치이다. 명(命)이 다했으니 이승의 숨이 끊어지는 것이고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이를 〈우주의 기원〉이란 존재론적 관점에서 다시 보면, 애초에 '있는 것인 존재자'에 의해 먼지 알갱이로부터 창조가 시작된 '나타난 것인 존재자'인 우리가 다시 먼지로 되돌아감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자기 초월(self-transcendence)의 동력을 얻지 못하고 한정된 지평너머의 전체 모습만을 동경하며, 영혼이라는 수천 년의 세뇌를 통해서 새로운 나일뿐 이승과 똑같은 나일 것이라는 기대감에 인이 박혀 있거나 최면상태에 빠져 타파할 수가 없게끔 되었다. 분명한 것은 죽은 다음이라도 형태만 바뀔 뿐이다. 본질인 원소로서의 요소에 변함이 없는 것은 맞지만 이승의 나와는 전혀 다른 아무런 관련이 없는 모습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의 근원적인 이유에 대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복잡계의 산일구조에서 발생하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라는 불안정속에 변화하는 '자기 조직하는 우주(self-organizing universe)'의 진행과정으로 우주의 거시적 변화에 속한 것일 뿐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먼 훗날, 또 다른 대폭발(Big-bang)로 새로운 우주가 시작되든, 그 전에 또 다른 우주의 변화에 의하던, 또 다른 탄생과 죽음이 연속될 것이고, 지금까지의 우주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성간물질(星間物質,interstellar matter)로 남아 때를 기다리게 될 수도 있고, 새 별이 탄생할 때마다 또 다른 내가 또 다른 남의 것과 합쳐서 새로운 나이며 남이기도 한 탄생을 할 수도 있다. 그때는 태양의 한부분일 수도 있으며, 지구에 사는 생명체의 일원인 사람처럼 또 다른 행성의 사람이 되어 오늘처럼 글을 쓸 수도 있다. 모두 다 우주의 공리에 의해서 주어진 한 사이클(角)의 특별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 이전인 소위 말하는 전생이 무엇이었고 그 이후인 내세의 내가 무엇이 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으며, 의미조차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나라는 실체와 영혼이라 이름붙인 나는 바로 그런 존재이며, 나 혼자가 아닌 여럿이 모여 된 우리가 바로 나이다.

  그래도 죽은 이의 남은 가족이 고인을 그리워하며 스스로 하고자 한다면 이는 인간적인 정리(情理)이니 누군들 막을 수 없는 노릇으로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런데 다른 제 삼자가 말대로 하지 않으면 죽은 이가 당장이라도 큰일이 나는 것처럼 어째서 죽은 이를 들먹이며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려 하느냐이다. 이승에 살면서 원통한 일을 당했다고 해도, - 만족하게 살다 죽은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승과는 넘지 못할 선이 가로막혀 있다. 나쁜 귀신이 있다든지, 원한이 있는 귀신이 해칠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은 죄진 자가 갖는 두려움일 뿐이며, - 물론 대다수가 죄를 지은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 오직 하나 죄질 일이 많은 인간을 단속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어떤 이는 부모보다 일찍 죽었으니 고아귀신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한심하기는, 그 집은 죽어 먼저 간 일가친척이나 조상도 없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 그리고 인간의 시계로 10년이나 100년이 긴 시간이지, 하루가 4억3천2백만년(一劫)⑽인 신의 세계에서는 부모와 떨어져 있는 그 시간이 50년이라 해도 기껏 1/100초에 불과할 뿐, 기껏 수유(須臾)로 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어떤 추론의 결과가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최소한 도움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아예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다못해 '인간의 죽음에 대한 준비는 반드시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만약 사후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도 지금의 삶에서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것과 만나게 될 것이다.⑾'는 투로 사후에 대하여 말한다면 얼마나 귀가 솔깃하겠는가. 내세와 이승은 연장선상에 있으며 영항(永恒)만을 바라는 유애(有愛=생존의 영속을 바라는 욕망)도 충족시켜준다니, 어딘지 모르게 꾸민 냄새가 물씬 나지 않는가? 솔직히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세의 일임에도 그럴듯하게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그러니 죽은 이를 위하여 영예를 높여준다던지 레퀴엠(requiem)을 지어 바친다던지 추선(追善)⑿을 하는 등으로 애쓰는 것이 좋은 뜻이고 모두가 죽은 이를 위령한다는 행위로 그럴듯하게 여겨지겠지만, 죽은 이가 어떻게 보고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산자와는 또 어떻게 교감할 수가 있다는 것인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그러니 귀신타령 하는 자들을 보면 한심하기 쩍이 없다.

* ⑽ 겁(劫) : 산스크리트 'kalpa'의 음역인 겁파(劫波)의 약칭으로, 장시(長時)나 대시(大時)로 의역된다. 본래 인도에서는 범천(梵天)의 하루로 보았으며, 인간계의 4억 3,200만 년을 1겁이라 한다. 그러나 겁(劫)이란 인간계의 눈이다. 무시무종(無始無終)인 신에게는 그 또한 무의미하다.
* ⑾ 오쇼 라즈니쉬(Rajneesh Chandra Mohan Jain),《지혜로운 삶/1. 배꼽, #삶의 진실》
* ⑿ 추서(追敍), 추존(追尊), 추승(雛僧) 그리고 위령미사, 추선공양(追善供養)은 모두 죽은 이의 영혼을 위령하려는 행위이다.

  죽은 이를 위령한다고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산자가 죽은 이와의 의미를 되짚어 자신을 정리하려는 것이며 이는 산자가 수선 떠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확인하기도 할 수도 없는 불가능 한 것을 믿는 것이나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누구나 안다는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애석하게도 그때도 그 엄청난 사건을 겪은 이후로도 여태껏 수긍하지 못하고 납득되지도 않는다. 그동안 가깝던 많은 이와 그토록 안타깝게 이별했지만, 한 가지 정이 멀어지는 것이 아쉬운 것 외에, 그렇다고 구태여 매달릴 필요성을 이제껏 느끼질 못했다. 이는 몰라서도 아니고 이해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존재계에 속한 인간이니 오로지 인간의 소리로 노래하려는 것일 뿐으로 결코 어둠에 갇히려는 우둔함이 아님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祭)는 천제(天祭)를 지내듯 감사나 기원을 담은 의식으로 받친다는 큰 뜻으로 치러야 옳은 것이지 위로를 위주로 하여 제를 지낸 후에는 반드시 상응하는 보상을 받으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구복(求福)이라는 의미의 연장일 뿐이다.
  죽으면 누구에게나 벽이 세워진다. 이를 인정하기 싫은 이도 있겠지만 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받들려지던 인물이나 하찮게 여겨지던 보잘 것 없던 사람도 마찬가지이며, 힘깨나 썼던 자나 지배를 받았던 자들도, 신성한 가치를 다뤘던 전적이 있던 천한 짓을 마다하지 않았던 있는 그대로인체로, - 물론 잘 나간다는 의미도 인간의 잣대일 뿐이지만 - 그들이 가는 길에 선을 그어놓는다든지 구별 같은 것을 두지도 않는다. 죽은 이로서는 애석하기 이를 데 없고 산자가 볼 때는 참으로 기막힌 안 된 일이지만 즐겨 부르던 이름이 없어진다. 그들을 떠올리던 고유한 이름이 이승에서 지워지고 벽에 새겨진 글자가 다음의 형상(morphe, eidos)을 위한 '질료(hyle, materia)로의 전이(轉移)'가 된 실체가 없는 그들을 대신하는 것이다. 만물의 분간은 이름으로 구분하는데⒀ 형체가 사라졌으니 이름도 그렇게 돌아오지 못하는 선을 지나 끝이 없는 그곳으로 따라 간 것이다. 그러니 죽음을 또다시 확인해주는 이런 절차는 죽은 이에게는 달갑지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죽어야만 아는 것이니 누구라서 확인할 수 있겠는가하고 묻게 된다. 따라서 '죽은 이에게도 기도가 통할 수 있음을 믿으려는 것은 산자의 바람이다.'고 밖에 달리 답할 수도 없을 것이다.⒁ 이는 이승에 사는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닥치는 운명이다. 그러니 세상에 이보다 더 슬픈 이별이 어디에 있겠는가? 끊어진 이승의 생명줄을 바라보며 잃어버린 한쪽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던 아름다운 시절인줄 알면서도 하나씩 지워가는 이별의 사실행위를 어김없이 행하면서 헤어지는 슬픈 감정을 애써 달래는 것은 그래서 가족만이 떠안는 짐이 될 수밖에 없다. 기쁨이 자기 것이었듯이 아픔도 오직 자신의 몫이어야 맞지 않겠는가. 사람은 자연의 일부라도 자연이 하는 것처럼, 나올 때에 맞춰 나오고 들어갈 때에 미련 없이 들어가듯 능수능란하다면 뭐가 필요하고 원할 것이 뭐에 있겠는가.⒂ 다만 사람은 상정(常情)이라는 것이 있고, 사물에 대한 애착이 동기부여가 되기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니 누굴 탓할 수도 없지 않는가?

* ⒀ 《老子》「道德經 1章」,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이름 없음이 하늘땅의 비롯이요, 이름 있음이 모든 것의 어미다.)'
  만유는 무명(無名)의 시기에서 이름이 지어졌음으로 존재가 되었다. 도가(道家)의 사상에 의하면, 천지의 모든 만물은 물체가 형성되고 나서 인간에 의해 규정지어 진 것임으로 그 이전의 상태를 무명이라고 이른다. 여기서 이름(名)은 하나의 규정이나 정의를 말한다. 이름이 없을 때는 세상의 시작이고, 이름이 생김으로서 만유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앞은 「창세기 1:1-2」에서 말하는 혼돈이고, 뒤는 이후의 여섯째 날까지의 역사라 할 수 있다.
* ⒁ 지옥의 강 아케론(Acheron,三途川)을 건널 때①, 그곳에서 '나는 죽기 전에 만인의 위에서 빛나던 사람이다. 나를 위해 많은 산자들이 기도와 공덕을 잔뜩 쌓아주지 않았는가.' 뱃사공 카론(Charon)에게 그렇게 말해보라. 험상궂은 용모만큼이나 강한 힘으로 내려치는 노에 맞아 나동그라질 것이다.
- ① 단테(Dante, Alighieri) 著/김의경 譯, 1992, 전게서/「지옥편 제3곡, 지옥문과 그 입구」
* ⒂ 박영호(朴永浩) 著, 2006, 《다석 유영모 어록》/제14장 올(理)을 타야(과학)

* 계속

댓글 2개

포아풀 2011. 03. 03. 오후 12:38

와...... 참 대단한 필력이십니다. 이쪽 문학의 향기 게시판으로 글을 옮기신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전의 글과 조금 다른 느낌... 그러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박성실 2011. 03. 03. 오후 01:26

와 진짜 필력이!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이 분 한 번 만나보고 싶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체 이런 글은 어떻게 해야 쓸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 말이죠. 뭐랄까, 논문 쓰는 것을 취미로 가지고 있다던가, 종교나 철학에 조예가 깊어야 한다거나, 뭐 그런 비결 듣고 싶네요.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