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글
게시물 상세보기
쓰나미의 두 얼굴
쓰나미의 두 얼굴
눈도 코도 너에게는 가슴도 없구나
큰 바다 한가운데 깊은 어둠 속에
찬 밥 더운 밥 가리지 않는 외뿔 짐승이 산다
태평양을 송두리째 훔쳐 마셔도
가슴 속의 불기둥을 잠재우지 못하는
네 놈에게는 촉수(觸手)만 무수하구나
“쓰나미가 와요!” 외치던 스물다섯 살 처녀
엔도 미키를 삼켜 버린 시각
시계 바늘이 멈춰 버린 같은 찰나에
1919년 아우내 장터 흰 저고리 검은 치마
“독립만세!”를 외치던 관순이도 삼켜 버렸다
백 년 전 누렇게 빛바랜 사진 속에
쓰나미가 세운 나무 십자가에 손 묶인 채
피 묻은 무명 적삼으로 매달려
눈 가린 조선 의병 아저씨 동자에 비친
마지막 하늘 조각마저 휩쓸어 가겠구나
-그래, 모두 잊어버리자 지금은
진노하는 지구 덩어리 위에 모여서
낮은 목숨들이 함께 통곡할 시간-
2011년 3월 11일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천만 대군으로 쓰나미가 달려오던 그 날
눈도 코도 가슴도 없는 검은 깃발에 쫓겨
만주벌에서 피 엉킨 흙 한 줌 움켜쥐고 죽은
할아버지 할머니 위패마저 쓸어 가겠구나
가미가제(神風)의 갈기를 붙잡고 다께시마(竹島)는
외뿔 짐승 등 뒤에서 다시 살아나는데
흙탕물 회오리의 오만한 작둣날 아래 짓밟히던
어머니 아버지의 오욕(汚辱)과 한숨
차가운 형옥에서 무너지던 *동주의 신음소리
독도의 상처는 아직 한 치도 아물지 않았다
-그래, 아득한 왜구 떼도 잊었다 치자
그래, 세월 지난 왜란도 잊었다 치자-
그러나 지금은 오직 착한 목숨만이 불쌍한 때
가뭇없는 하늘 밖에 살아남은 목숨들이 모여
다시 꿈틀거리는 쓰나미를 *호시(虎視)할 때
*동주: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진 시인 윤동주
*호시(虎視): 범처럼 눈 부릅뜨고 주시하다.
댓글 12개
쓰나미는 하늘이 내리는 천재지변 엄청나서 휩쓸어가는 재앙 젊은 아이와 늙은이 할것없이 쓸어가버린 자리엔 처참함만이 있다해도 흰저고리 검은 치마의 우리의 할매의 신음소리 동주의 신음 소리, 독도의 신음 소리는 상쇄할 수있는것이 어디에도 없는 일 지금 양심을 구걸해야 하는 그들이 엉뚱한 잠꼬대를 하고 있는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이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윤고방님의 시는 '한'이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왜 인지, 항상 개량한복을 입고 계실 것 같고 뒷 짐을 지고 먼산 보고 걷다 흙을 만져 보실 것 같습니다. 이것을 한국적인 정서라고 해야할까요? ^^ 저는 일본의 독도문제, 쓰나미 이것은 별개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상황때문에 사관 혹은 세계관이 변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것이 애국심과 동일시 되는 것의 위험성과 더불어 요즘 생각이 많습니다. 그것은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요. 윤고방님의 시는 항상 반갑습니다. 환절기 건강 유의하세요.
박성실을 다시 이 자리에서 뵙게 되었군요. 반갑습니다. 제 시에서 '한'을 느끼신다니 옳게 보신 듯합니다. 단 '한'이라는 것을 가급적 빨리 떨쳐 버려야만 할 그 무엇, 즉 아물지 않은 거추장스런 상처쯤으로 생각하신다면 그 점에는 가벼이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문학이라는 가볍지 않은 짐을 지고 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웃음보다는 오히려 눈물에서, 기쁨보다는 오히려 슬픔에서 그 에너지를 얻고 있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어느 희극배우의 헤픈 웃음보다 눈물의 의미를 깊이 꿰뚫고 난 후에야 관객에게 던질 줄 알았던 '찰리 채프린'의 웃음이 더욱 값지고 진정한 웃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궤를 같이할 것입니다. 성실님 예상대로 저는 생활 한복(개량 한복보다는 더 좋아하는 용어입니다)을 즐겨 입기를 원합니다. 어머님께서 저의 한복을 즐겨 지어 주셨기 때문이고, 우리 옷이기 때문이고, 편하기 때문이고, 30여 년 전부터 연을 만들고 띄우는 일에 때로 전념하면서 한복을 즐겨 입어 왔습니다. 단 정치 이념 냄새가 더러 심하게 풍겨 거북할 때가 있고, 꼭 딴 나라 사람 대하듯 하는 뭇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어서 평상복으로 입지 못하는 것이 서운할 때가 많습니다. 독도, 다께시마, 쓰나미, 민족주의, 애국심에 관한 문제는 단순하지는 않지만 저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쓰나미에게 휩쓸려 비명횡사한 일본인은 그가 정치가든 평민이든 남녀노소든 모두다 너무나 불쌍하다. (위의 제 시는 부족하긴 해도, 쓰나미 와중에 나온 '독도 강점'이란 그들의 본심을 똑바로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2차대전 중에 죽은 일본인, 한국인, 미국인과 침략 전쟁을 시작한 일본 위정자까지도 모든 인간은 불쌍하다. 그렇지만 침략전쟁의 책임을 져야 할 일왕과 전범자가 묻힌 그들의 신사에 나는 결코 참배하지도 않을 것이며, 당연히 그 원수들을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다.(죽어서, 너는 너그럽지 못하구나 하고 예수님께 꾸중 듣는 한이 있어도......) 또한 그 침략자가 무고한 나와 내 가족과 내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어 쏘기 전에 내가 먼저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나 애국심이라는 거룩한 용어를 쓰기 전에 간악하고 잔혹한 침략자로부터 나와 가족과 우리들을 누가 지켜 줄까요. 참혹한 임진왜란 7년 전쟁과 36년의 강점기에 우리 목숨을 지켜 준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순신장군의 무저항주의였나요? 평화협정과 양보주의였습니까? 그럴 듯한 명분의 친일과 타협주의였습니까? 과연 변하지 않는 세계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편타당하게 온 세상에 영구히 들어 맞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성실님 글에 답글을 읽고 쓸 말이 없어져 버렸어요. ㅡ.ㅡ 안타까운 처지의 사람을 보면 우선 안타까움이 드는게 먼저니..안타까움부터 해결하고 원한은 나중에 해결해야.......^^
일본열도의 처참한 쓰나미를 보면서 천재지변의 위험한 힘을 두려워 했습니다. 조국이 해방되기전 까지 일제치하에서의 恨도 함께 쓰나미로 쓸려가기를 바라는 현재의 우리 모두는 애국자입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한과 눈물을 통해서 웃음을 이해한다 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역설이네요. 철저하게 삶을 살아내는 시인님의 삶의 자세가 엿 보이는 것 같아요.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저에게는 그런 현실감이 좀 부족해요.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 같은 것 말예요. 속편한 이상주의를 늘어놓는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사람이네요. 제가 아는 예수님은요, 대가 지불' 이라는 말을 쓰는데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정의의 경계 어디쯤에 대가 지불 곧 책임지는 것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닌 결국 용서와 화해로 연결된다는 맥락이죠. 저는 쉽게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치관, 세계관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죠. 사실 그것이 변화할 수 있는 것을 기독교에서 흔히 말하는 은혜라고 생각하거든요(물론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저는 여전히 무저항(정확히 말하면 비폭력 저항)을 통해서 더 큰 피의 부름을 막은 간디나 예수를 존경합니다. 사람을 크게 가학적인 사람과 피학적인 사람으로 나눌 때 피학적인 사람이 결국 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이것도 역설인가요? 저희도 둥근 지구의 어디쯤에서 대화를 하고 있네요. 윤고방님은 언젠가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분입니다. 아, 그리고 생활 한복 멋져요! 어머님이 만들어 주셨다니 더 정겹습니다. 앞으로도 한이 있는 시, 기대하겠습니다. 환절기 건강 유의하세요.
* 본문 일부를 수정하려고 했더니 코멘트가 1개 이상 달리면 수정이 안 된다는군요. 할 수 없이 여기에 수정합니다. 4연 1행 [2011년 3월 11일 해가 중천에 뜰 무렵]을 [2011년 3월 11일 해가 설핏 기울 무렵]이라고 고치고 싶군요. 별 것 아니긴 하지만, 실제 시각이 오후이고, '중천'과 '기울 무렵'은 상징하는 바가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상근님, 박종영님께서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논란거리가 되리라 싶어 올리지 않으려고 여러 번 망설였습니다만, 예상한 대로 여러 분들의 편안한 마음자리에 돌 하나를 던져 넣는 것 같아서, 제 마음이 편하진 않습니다. 3월 말 쯤이던가요? \"한국이 다께시마를 강제 점령하고 있다\"는 저들 정권 대표자의 전에 없던 강경한 성명 발표를 접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며칠 동안 괴로워만 하다가 솔직한 심정을 한 편 글로라도 표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신문에는 몇몇 유명 시인들의 외교적 수사학의 위로시, 애도시가 오르는 걸 봤는데, 이웃 나라의 재난에 대한 당연하고도 그럴 듯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쨋든 두 분의 관심에 감사 드립니다.
알 수 없는 하늘. 그럼에도 살아야하는 번영해야 하는 착한 목숨. 그들을 위해 누군가의 무엇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좋은 시 감사드립니다.
윤고방 선생님, 오랜만에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분망하시지요. 그런 가운데 좋은 글 올려주셨네요.
살아갈수록 세상 분간하기가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얼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더욱 어렵기도 하구요.
최시인님께나 다른 분들께 울상짓고 화내는 표정만 보여 드리는 것 같군요. 그렇다고 속에도 없는 남의 표정을 꾸어다 놓을 수도 없으니 어쩐답니까? 그저 제 마음 속만 들여다 보며 사는 게 속 편하다는 걸 알기는 압니다만...... 수양 부족이라 뜻대로 되질 않아서 그게 탈입니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