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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하는 신발
동행하는 신발
-박종영-
나는 알맞게 질긴 천과 윤기나는 가죽으로 박음질한 등산화다
나는 길을 개척하는 의무로 태어난 노동의 신발이다
하루의 시작은 아직 잠에서 덜 깬 어둔 골목을 휘돌아
언제나 풋풋하게 아침을 여는 돌쇠네 야채 가게앞을 지나면
나의 몸은 풍선처럼 붕붕뜬다
쾌청한 주말에는 마음먹고 산행을 할 때가 있다
그 힘은 내 주인이 내린 핏줄의 기운임을 알아 힘차게 걷는다
산길 초입을 지나 숲에 들어서면 상쾌한 것들의 움직임이 눈에 잡힌다
사륵사륵 물매화 능청을 받아주기도 하고, 산다화 푸른 아양을 만지며
처음은 낮은 언덕으로 부터 서서히 탄력을 얻어 가파른 8부능선에 다다른다
진땀을 식히고 정상에 오른다,
이때 나의 의무는 승리의 깃발을 표지석에 다는 일이다
겨운 한나절 허기진 뱃속을 채우려 출발하는 내리막길의 모험,
주인의 무게를 이겨내는 탄력의 고통을 뒤로하고 산아래 섰을 때,
녹색의 숲은 그제야 가슴을 열어 나를 배웅한다
석양을 뒤로하고 집에 도착한다
아픔으로 조여진 매듭을 풀면 끈은 매우 피로하다
하루를 지치고 돌아와 질서있게 눕혀지는 신발장,
비록 어둡고 딱딱한 층층의 방이지만
느슨해진 혈관을 조이고, 멍울진 상처를 어루만지며
옆자리 동료와 미욱한 하루의 경험을 푸념하는 곳,
아늑한 그리움의 궁전이다
내일은 비가 왔으면 좋겠다
높은 산허리 고단하게 내려오던 내 뒤틀린 얼굴과,
무례하게 달라붙은 요염한 들꽃의 향기 투성이들,
산굽이 돌아 풍장에 누운 어느 안타까운 혼백과,
함께 갇힌 외로운 산새의 울음소리까지,
우리, 슬픈 인내의 흔적을 떠나 보내기 위해서도 가랑비는 꼭 그렇게
산비알 눈물처럼 스적스적 내렸으면 좋겠다.
2011. 3. 23
댓글 9개
누군가의 지시와 명령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훈련소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고단한 하루를 쉬기 위해, 비라도 오기를 바랬죠. 비는 그렇게 약자를 어루만지는 그런 먼 옛날의 소리 같습니다. 좋은 시 감사드립니다.
낡은 등산화를 보고 나름대로 적어본 글입니다. 머물러 주셔서 감사드리며 늘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김현배님.
참 그렇습니다 마음을 적셔 주고 쉬게 하는 가랑비 그에게만 필요한 건 아니지요 모든 산행을 하는 이들 모든 삶의 주인공들에게 모두 필요한 것 박종영님의 삶의 여유도 보고 갑니다
저도 제 등산화 보면서 그동안의 동행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를 편하게 해준 등산화가 고맘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박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선생님의 글 앞에서 다시 뵙게되니 안온한 느낌이 새롭습니다. 아직도 산 길에 발자국 남아 있을 그 등산화, 수명이 다하였을 때는 산길에 고이 묻어 주십시요. 왜냐면, 소중한 것들과 이별하는 방법을 유씨부인의 조침문을 읽으면서 느꼈거든요. 지금 시간이 11시 30분쯤 되었나요? 이제 30 여분 지나면 하지가 시작되겠지요. 삼복더위에도 선생님의 시심은 한결같으시기를 미오새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신발의 자유, 그건 주인이 밟는 산의 정복으로 완성됩니다. 머무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발과 신발의 역학적 관계 그리고 신겨지고 신는 상호주의, 모두가 오래전부터 지켜온 약속입니다. 감사합니다. 문희님.
미오새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우리의 발과 신발의 동행, 밟고 지나가는 땅과의 교감이 있어 건강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 종류의 신발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참으로 갖가지 웃음으로 기다리고 있어 좋습니다 아름다운 댓글 감사드립니다. 미오새님.
타잔도 아닌데 맨발로 정글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거친 세상길 편하게 내딛을 수 있도록 동행이 되어주는 신발 고마운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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