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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정상근 2011. 08. 20. 오전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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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맴~맴~맴~ 끄르르르르.. 맴~맴~맴~ 끄르르르르..

우지마라 우지마라
네 울음소리 진동하여 내 애간장 마저 다 녹아내린다
네 서런 울음으로 돌아 올 님 이거든
다시 못올 머나먼 길 떠나지도 않았을 것을
우지마라 우지마라
님 보내고 남겨진 설움 어이해 모를까마는
낮밤 없이 우는 네 울음에 세상도 울고 나도 울고
온 우주가 울음의 바다가 되어버렸구나.

맴~맴~맴~끄르르르르르.. 맴~맴~맴~끄르르르르르..
**
세상의 어수선함에 가슴 속의 감성도 암흑 속으로 몸을 숨겨버린 것 같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시지요?
가는 여름이 아쉬운지 창가의 매미는 낮밤 없이 울어댑니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에 나가 앉았는데 매미의 울음이 너무 구성지어 몇 자 적어 봅니다.

댓글 7개

박동수 2011. 08. 20. 오후 05:57

그래 모두가 울고 싶을 때 그래도 실컨 울어주는 매미라도 있으니... 어쩌면 사람들이 나의 일이 아니니 울던 말던 이지만 사실 모두 울고싶은 마음은 너도 나도 같겠지 알것 같기도 하지만 또 모를것 같기도 하고

주몽의 활 2011. 08. 21. 오후 10:46

착하고 순진하고 순수하고 그런 사람들이 잘 살고 복 받아야 마땅 합니다만, 세상은 그렇치가 안죠? 반도체 소녀 연극 대사 중에 시위를 하던 여자분이 교수님께 “그날이 올까요?” 하고 묻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그 질문은 저 역시 전에 교수님께 묻던 말이었습니다. 교수님 대답입니다. “물론 회의가 드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낫다.” 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하지만 전 사람의 이기심이 있는 한 절대 전 그날이 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연대 안에서 연대를 할 수 없는 이기적인 사람들, 그 것이 우리의 진실한 모습일 겁니다. 고인이 되신 아프리카 성자 이태석 신부님. 이태석 신부님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의대를 나온 분이지요. 행상을 하시는 이태석 신부님의 어머니께서 아프리카로 가겠다는 이태석 신부님께 꼭 이렇게 가야 하겠냐고 물으셨을 때, “어머니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의 마음이 저의 양심이 저에게 그렇게 시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상병 시인, 김남주 시인, 그 외에 민주화와 소외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게 기꺼이 부와 명예와 목숨을 던진 많은 분들…… 서울대를 두 번이나 들어간 천상병 시인은 고문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돼 평생을 ‘소주 한 병’으로 시를 쓰며 사셨습니다. 김남주 시인 역시 고문으로 자신의 명을 다 살지 못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 역시 황금 같은 20년을 감옥에서 보내셨습니다.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는 가장 가난한 아프리카 수단에서 병든 이들을 고치며 그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다 짧은 생을 마친 이태석 신부님. 그 외 자신의 명예와 부를 던진 양심 있는 지식인들…… 글에 댓글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미안 합니다. 예전에 댓글에서 님의 마음을 보고 갈등하는 맘에서 이런 글을 올리지 않으셨나 하고 댓글 올려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을 만드세요.^^8

박동수 2011. 08. 22. 오후 01:05

누가 누구를 위하여(?) 어느 날 나는 천사가 되었다가 어느 날 나는 사탄이 되기도 했다 하루는 꽃처럼 고왔다가 하루는 굼뱅이처럼 징그럽기도 했다 날이 세는 아침이면 싱그러운 꽃잎으로 나풀거리고 해 지는 노을 저녁엔 할미꽃 씨앗처럼 세상을 또 한 번 살아질까 정처 없이 떠나는 바람에 의지한 무기력한 종말의 신호가 되어 버린다 누가 누구를 위하였을까 누가 누구의 민주화를 위하여 희생 했을까 돌아서서 펼치면 모두가 나 하나를 위하여 천사이기도 하고 나 하나를 위하여 사탄이고 할 뿐이지 매미일까 굼뱅이일까 스스로의 나를 알 수 없어서 종일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처럼 그래서 세상은 아픔이지 훤한 대낮에도 매미처럼 울지 못하는 가슴 아픈 시인들 그 아픔은 희생일까 투쟁일까 음 또 하루를 몇 줄의 시어를 고르며 속울음을 ........

주몽의 활 2011. 08. 22. 오후 03:10

시경』에는 이와 같은 비판과 저항의 의지가 얼마든지 발견됩니다. 「큰 쥐」(碩鼠)라는 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로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로.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매우 직설적이고 저항적입니다. 그러나 「박달나무 베며」(伐檀)는 고도의 문학성과 저항성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절만 소개하지요. 영차 영차 박달나무 찍어내어 물가로 옮기세. 아! 황하는 맑고 물결은 잔잔한데 심지도 거두지도 않으면서 어찌 곡식은 많은 몫을 차지하는가. 애써 사냥도 않건만 어찌하여 뜨락엔 담비가 걸렸는가. 여보시오 군자님들 공밥일랑 먹지 마소. 공자는《논어(論語)》〈위정편(爲政篇)〉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 것을 익히어 새 것을 알면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느니라[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남의 스승이 된 사람은 고전(古典)에 대한 박식(博識)만으로는 안 된다. 즉 고전을 연구하여 거기서 현대나 미래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분열된 정서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삶과 정서를 분절시켜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별안개 2011. 08. 22. 오후 08:25

왠지 \"온 우주가 울음의 바다\"속으로 들어가 ,함께 흠씬 울어도 될 듯한 매미의 풍경이예요. 그 진액의 곡성속에 튕겨져 나온 기쁨이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해보는 오늘. 그 울음 그 몸짓은 처절한 멋이 배인, 삶의 맛소리인걸요. ^*^

김현배 2011. 08. 22. 오후 09:10

우주의 울음이 내 존재의 깊은 구석을 어루만집니다. 좋은 시 감사합니다.

김정흠 2011. 08. 26. 오후 11:36

정상근님은 어디 가셨나보다..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여기 이렇게 글을 남기셨군요. *^^* 늦게나마 댓글 씁니다.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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