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우주기원론과 창조신화)
- 4. 참 뜻 - 하늘은 더 없이 높고 푸른데도 세상은 왜 이리 흐리고 어지러울까? 어찌하여 천지가 서로 어울려 형통하질 못할까? 땅을 두루 살펴야할 하늘의 기운은 어찌 막혀있을까? 이는 참 뜻을 마음의 귀로 듣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자 하는 욕(欲)을 지나치게 크도록 만든 이후로 탐하는 욕(慾)이 넘쳐난 인간이 이를 따르지 않기에 더해졌다.⑴ 참 뜻인 진리는 우주∙천지∙자연∙만물과 함께 인간을 창조하고 생육하는 절대선(絶對善)인 하늘이다.⑵
(모두의 하늘이고 오직 하나인 가를 수 없는 하늘이다. 그러니 자기 하늘만 믿으라고 강요한다면 그건 가짜가 틀림없다. 하늘이 어찌 갈라지나? 인간의 이욕이 갈라놓은 거지. 이 하늘에서 죄를 짓고, 저 하늘로 가서 면죄부를 받는다면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따라서 신성한 경외심이 가득한 옳은 마음이어야만 느낄 수가 있다. 하늘은 언제나 바름의 표징으로 태고부터 모든 이의 잣대이지만 참 뜻을 쫓지 않고 거역하는 것은 선단(善端=선한 씨앗)을 심는 옳은 마음의 창고를 꼭 닫아놓아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는 자가 그 문을 활짝 열고 참 뜻에 두려움을 갖게 되면 이욕으로 들끓고 오만과 방자로 이탈하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은 어떤가? 가짜 불에 희희낙락하고, 가짜흥분으로 끼리끼리 손을 잡는다. 제 몸만 고달픈데도 어설프게 따라하는 그 속이 뭔지 아리송하다. 참 뜻을 잘 안다는 거짓의 가면을 쓰고 엉터리로 지르는 소리를 믿으며 한심한 짓을 일상처럼 일삼고 있으니 세상이 모두 똑같은 물이 들었다. 이처럼 성정(性情)을 가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인간사이다.⑶ 그러니 어지럽지 않다면 도리어 그게 이상한 거다. 좋은 행위로 복 받을 일만 생기는 곳은 어디냐? 신의 나라다. 나쁜 짓으로 고통과 눈물로 지새야 하는 곳은? 당연히 지옥세계다. 이런 생각으로 굳세게 믿으면 끄떡없는 데 헷갈리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오락가락이다. 그것도 그냥 헤매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최면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다. 개중에는 신선으로 착각하여 구름 위를 헤매니 좋은지 나쁜지도 모른다. 시뻘건 구호가 새겨진 팻말을 들고 제 세상인 듯 설레발을 치기도 한다.
(신을 대함에도 선민(選民)인 민족과 외부의 기원을 갖는 민족이 갖는 믿음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는 외래종교가 타민족에게는 잘못하면 맹신이라는 엉뚱한 샛길로 빠져 더한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유대인이 그들 나라에서 세끼 밥도 굶으면서 오직 하늘만을 외치고, 불신 지옥이라고 떠들고 지하철 내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도 누구하나 맹신에 빠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가? 좋게 말해서 광신자라고 한다.)
하늘은 시련을 줄망정 망가트리지는 않는다.⑷ 그런데 왜 그렇게 됐겠나? 참 뜻이 다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불합리가 활개를 칠 때는 이런 때가 둘도 없는 적당한 기회이다. 세상 모든 게 한결 같을 수는 없으니 한두 곳이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온 나라 곳곳에서 오뉴월 죽순처럼 돋아났다. 공덕을 쌓는 데는 마음이 진정이면 충분하다. 하늘과 통하는 덴 뭐가 필요한가? 진실한 기도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것은 모두 뒷전으로 밀렸다. 아무리 포교도 세일즈처럼 점수를 매기는 세상이라지만, 성전 크기와 성령 충만은 비례하지 않는 역사임에도 어찌된 일인지 바알의 눈으로만 보고 채점하듯 재촉한다. 바라는 자들이야 뭔 말을 못하겠는가. 열심히 설은 장단을 맞춘다. 하나가 있으면 더도 말고 두 개만 있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두 개를 갖게 되면 다섯 개도 적다고 열 개를 바라는 것이 사람이다. 지금까진 이를 속세의 속악(俗惡)한 짓거리로만 알았다. 동네방네 떠도는 각설이의 타령에 나오는 대사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온 세상이 욕심으로 가득 찼음을 실증이라도 해주듯 가당찮은 일들이 흔한 일처럼 눈앞에서 생 쇼를 벌린다. 아마도 이쯤이면 노아의 때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실례를 들어 말하려니 얼굴이 다 붉어진다. 감투가 뭐기에 이전투구로 밤까지 새는가. 자신의 영혼보다 값진가? 성화(聖化)라고 외치는 그 손을 쳐다보는 많은 눈망울을 보기는 했을까? 신을 받든다며, 뒤에서는 이욕에 얽혀 형제끼리 싸움질이나 하고 가족끼리 서로 험담하는 짓거리를 말하기란 어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늘을 쳐다보기가 민망하니 세세한 건 관두자. 하여간에 고적에 어울리는 절간이 도찰사건으로 복작이는 시장통이고 셰익스피어의가 「햄릿(Hamlet)」의 오필리아를 통해 우려했듯이⑸ 우리를 실망케 하는 슬픈 일들이 멈출 줄 모르니 이를 어쩌나. 언제까지나 이런 추문에 마음을 졸이며 떨어야만 하는가. '명예와 생명 중 어느 것이 절실한가?' '생명과 재산 중 어느 것이 소중한가?' 이렇게 물으면 눈이 번쩍 뜨이지만, 아래처럼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것이 괴로운가?'하고 물으면 어리석음에 빠지는 허방다리인줄도 모르고 헤매기만 할뿐이다. '만족할 줄 알면 부끄러운 변을 당하는 일이 없고, 적당히 그칠 줄 알면 위험한 꼴을 당하지 않아 오래도록 편안히 있을 수 있다.⑹'고 경고한다. 진정으로 무엇을 더 절실히 원하고 어느 것이 더 귀한가 묻고 싶다. 세속에 눈먼 자들을 탓하면, 나는 아니라고 하나같이 발뺌하지만 그들이 속한 세계는 촘촘히 짜여 진 한 그물이고, 같이 산다. 한 마디로 한 코로 움직이는 한 그물이고 한통속인 것이다. 같은 배를 타고 놀며 내남이 어디 있나! 같잖은 변명이다. 참을 멀리하고 무섭게 여기지 않으니 정신부터 썩어 냄새가 진동한다. 과연 무소유는 무엇이고, 십자가를 지란 말씀은 어디로 갔는가? 세상엔 별의별 인간이 다 있고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자들도 부지기수다. 어느 부류의 족속은 짐승보다 못한 짓까지 서슴없이 한다. 지옥에 떨어질 망나니 같은 행동에도 눈썹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몇 마디 말씀으로 죄가 용서될 수 있다는 장치를 만들었다.⑺ 물론 심판은 하늘이 해야 하는 것이니, 그때까지 잠시 미뤄둔 것에 불과한 조치지만 어떻든 기회를 줬다. 그것이 한 종교의 주지(主旨)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악정사(善惡正邪)를 바로 하는 하늘이 그렇다니 모를 일이다. 인간이 하늘에 대해 얼마나 알까? 동양적인 사고에서의 하늘은 어떤가? '하늘을 안다(知天)'고 해봐야 어디까지일까? 기껏해야 하늘의 무한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天何言哉)/《논어》「양화편」'는 반문은 인간의 얍삽함에 일침을 가한다. 어쩌고저쩌고 함부로 운운하지 마라. 참의 뜻을 깨달았다면 그렇게 막말하듯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하늘을 빙자하는 짓거리는 그게 다 교만이기 때문이다. 장자나 순자가 '하늘! 하늘!' 외치며 오히려 겸손해 했던 것도, 그럴수록 점점 더 오묘한 생성변화를 알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무궁한 변화와 현란한 착종(錯綜=복잡하게 뒤얽힌 것)의 현상 속에서도 세상의 질서가 혼돈의 극단을 넘지 않고 균형과 평형을 맞추어 유지되고 운행되는 것은 억만년의 세월에도 일정불변한 섭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를 인간의 얄팍한 지혜로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늘의 일을 어찌 아느냐.⑻' 이 한 구절이 하늘에 대해 그들이 터득한 깨달음이다. 혹여 공자는 하늘을 알 수 있었을까? 부처도, 예수도, 마호메트도, 인간으론 최선의 위치에 있었지만, 보통의 인간들이 보지 못한 참 뜻을 보고 깨쳐 앞장을 선 것뿐이다. 하늘을 아는 인간은 없다. 그래서 보이는 것뿐이라고 한 것이다.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다만 일정한 경계는 필요하다. 《공자》와 《맹자》를 볶아 된다고 성인군자가 될 수 있는가? 경(經)을 첫 자부터 마지막 자까지 모조리 외웠다고 거듭나게 되는가? 아침부터 저녁도 모자라 밤을 지새우며 정진한다고 도통의 경지에 오를까? 깨달음이 없으면 깨진 항아리에 물붓기일 뿐이다.⑼ 진실로 믿는 것과 종교적인 의식행위는 분명히 다르다. 구복(求福)기도를 하면 한순간의 욕구가 채워진 듯 하고,⑽ 미립이 날 만큼 경(經)만 읽으면 지식은 늘어날지 모르지만, 뭐하냐. 진정이란 없는데, 이를 모르면 믿는 게 다 신기루다. 말씀에(잠언 23:7) 마음의 생각이 곧 됨됨이라고 했다. 이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사람처럼 생각대로 되어 짐을 말한다. 어떻게 되느냐는 마음속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다. 바른 세상은 가짜의 유혹을 떨치고 참을 제대로 받을 때에 가능하다. 다 얻으려 욕심 부리지마라. 그게 참 뜻을 보는 눈을 뜨는 길이다. 인간행위의 선악까지 결정하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은 어떤 것보다 옳기도 하지만, 그야말로 남는 장사다. 그래서 바른 수고에는 참 이익이 따른다고 했다. 생각이 이처럼 바르다면 일부러 한 곳에다 굳이 정신을 얽매여 놓지 않아도 되고 곳곳을 찾아다니며 빌지 않아도 될 것이다.⑾ 생각을 바꾸면 최소한 자기 세계 정도는 다르게 만들 수가 있다.⑿ 옛 성인도 대인과 소인배는 타고난 게 아니고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했다.⒀ 따지고 보면, 큰 수고 없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 방법인가. 그런데도 모르는 이가 너무나 많다.⒁
* ⑴ 에덴동산 밖의 그 밖의 세상으로 내몰린 이후부터 인간은 무한의 수고를 하여야 먹을 수 있으며, 종의 보존도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정(性情)의 극단을 넘나들며 치열한 경쟁을 하여야한다. 그곳에는 성질이 어떠하던 인성(人性)만이 모든 것을 좌우할 것이다. 인간의 속성은 불빛을 쫓는 불나방처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설령 뇌옥(牢獄)에 갇힌 겸재(箝制)의 통고(痛苦)를 당한다 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우리에게 무한의 수고를 하여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으니(창 3:17) 어쩔 수가 없다. 욕(欲)은 욕(慾)자의 같이 '하고 싶다, 탐내다.'의 뜻으로 쓰고 있다. 다만, 오랜 예전에는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욕(欲)자만 쓰였다. 따라서 욕(欲)은 욕(慾)의 본자(本字)가 된다. 요즘에는 두 자가 같은 의미로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구분하려는 것은, 하고자 하는 뜻이 더 많은 욕(欲)자는 '욕구불만(欲求不滿)'에서처럼 물질은 배제하고 '무언가를 의지적으로 하고 싶다.'는 뜻으로, 욕(慾)자는 탐욕(貪慾)처럼 물질을 '바라다, 탐내다.'란 뜻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면 이 두자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해서다. * ⑵ 하늘은 우주∙천지∙자연∙만물과 함께 인간을 창조하고 생육하는 절대선(絶對善)이다. 이를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God), 불교에서는 니르바나(Nirvana), 이슬람교에서는 알라(Allah), 도교사상은 천신(天神)이나 옥황상제(玉皇上帝), 유교사상으로는 그대로 천(天)이며 절대선의 도리인 천도천리(天道天理)로 본다. 하늘은 사람에게 '천리를 깨닫고 알고 행하는 훌륭한 본성(本性)'을 주었다. 그러므로 '본성대로 사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率性之謂道)'고 했다. * ⑶ 인간들을 고뇌케 하고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나쁜 쪽으로 말한다면, 갖고 못 갖는 체제의 제약과 - 이는 경쟁이 심한 사회일수록 기회가 찾아오는 것 이상으로 심하다. - 높고 낮음이 주는 주위환경에 스스로가 두려움을 만들고 모순되는 사회정의에 끊임없이 자기를 가둠으로써, 성정(性情)의 극단을 넘나드는 곡예 짓을 마다 않고 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삭정이처럼 메말라 비틀어지고 점점 더 강퍅해지는 쪽으로 마음이 변화되고 생각도 좁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질서라는 환경은 개인의 심성에 큰 영향을 끼칠 만큼이나 좋고 나쁨에 깊이 관여한다. 《맹자(孟子)》에 \"공도자(公都子)가 말하기를 고자(告子)는 '성(性)은 선한 것도 없고 선하지 않은 것도 없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성은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선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선을 좋아하였고,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포악한 것을 좋아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①\" 따라서 인정으로 넘치고 정의가 바로 서면 사람들은 감화되어 스스로 선하게 되지만, 반대로 사회가 모순에 싸이고 불공정하고 무관심하면 그 영향으로 성정까지도 포악하게 된다. 인간의 성(性)이란 선이나 악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선하게도 될 수 있고 악하게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① 《孟子》「告子章句上 第6 乃若其情章」, \"公都子曰, 告子曰, '性無善無不善也.' 或曰, '性可以爲善, 可以爲不善, 是故文武興則民好善, 幽厲興則民好暴,'\" 논자 주 : 서주(西周)의 여왕(厲王, 11代)과 유왕(幽王, 13代)이 관련된 이 시기는 중국역사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여왕은 간신인 영이공(榮夷公)을 앞세워 학정을 펼치다가 BC 841년에 성난 백성들에 쫓겨 체(彘:西周國人起義時,厲王避難處,今 山西霍縣東北.)라는 땅으로 도망가 숨어살아야 했다. 주나라는 현자(賢者)로 추앙받던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서로 협력하여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14년간을 숨어살던 여왕이 죽자, 그의 아들 정(靜)을 왕위에 앉히고 나라의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그가 선왕(宣王, 12代)이다. 선왕이 BC 781년에 죽고 그의 아들인 궁열(宮涅=宮生)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유왕(幽王)으로 서주의 마지막 왕이다.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 이 시기를 특별히 '공화(共和)'라고 했으며, 여왕(厲王)이 체 땅으로 도망간 해인 BC 841년을 공화원년이라 한다. 이 사건은 후일 공화정(共和政)이나 공화국(共和國)의 어원이 되었다. 또 하나는 중국의 역사기록은 그 때까지는 대략적으로 전해 내려왔으나 이 해를 기점으로 기록이 분명해졌으며, 《사기(史記)》의 「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도 이 해를 기점으로 삼았다. 사만천(司馬遷)도 '유왕과 여왕이 아둔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결과, 풍호를 잃었다.(幽厲昏亂 旣喪豐鎬)'고 기록하였다. 비록 하(夏)의 걸왕(桀王)이나 은(殷)의 주왕(紂王)에는 미치지 않았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군주로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풍호(豐鎬)는 서주(西周)의 도읍이었던 호경(鎬京)을 말한다.(豐鎬:周文王建都於豐,今 陜西西安西南灃河以西,武王又建鎬(鎬京),今 長安縣韋曲公社西北,與豐同為國都.) 《시경》에도 이때의 학정을 비판하여 올린 시가 있다. 「大雅蕩之什, 桑柔(뽕나무는 부드러워)」에는 '維此良人 不求不迪 維彼忍心 是顧是復 民之貪亂 寧爲荼毒.'라 하여 당시를 신랄히 비판하였는데, '차라리 독한 괴로움을 겪는다.(寧爲荼毒)'는 의미에 뜻이 있다. - 차(荼)를 고채(苦菜=씀바귀)로 보고, 맛이 쓰고 향이 매워서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도독(荼毒)이라 했다. - 전체적인 뜻은 바른 인재를 등용하여 국정을 살펴야 하거늘 잔인한 마음을 가진 자를 총애하여 삶이 피폐해진 백성들이 아예 독초를 먹고 괴로워하는 편이 오히려 났다는 의미이다. 여왕(厲王)의 학정에 대한 풍자시이다. 당시 대부(大夫)였던 예량부(芮良夫:芮伯)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春秋傳》에서도 '芮良夫의 詩이다.'고 말하고 있다. * ⑷ 《孟子》「告子章句下 第15 天將降大任於是人章」, '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지치게 하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은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긋나게 하느니라. 이는 그 사람의 마음을 두들겨 참을성을 길러 주어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 이다.)' * ⑸ 「햄릿(Hamlet)」1막 3장, '사악한 목사들이 그렇듯, 제게는 천국으로 가는 험한 가시밭길을 권하면서 오만하고 방자한 난봉꾼처럼 자신은 장밋빛 애정행각 길을 밟으며 자기가 한 말에 개의치 않는 것은 아니겠지요.' 오필리어가 오빠 레어트스의 충고를 받아들이며 한 말. * ⑹ 《老子》「道德經 第44章」, '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지나치게 바깥 것에 집착을 하면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너무 많이 재물을 쌓아 두면 결국은 그 만큼 잃게 된다. 만족할 줄 알면 부끄러운 변을 당하는 일이 없고, 적당히 그칠 줄 알면 위험한 꼴을 당하지 않아 오래도록 편안히 있을 수 있다.)' * ⑺ 영화나 소설에 불과한 단순한 얘기꺼리지만 이것도 세태를 반영한 것임엔 틀림이 없다. 대부(代父,The Godfather) - 1972년도 작품/마리오 푸조(Mario Puzo) 원작, 프란시스코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 감독 - 에서 돈 코를레오네(Don Corleone)의 고해성사 장면은 시사점이 많다. 근거로 삼은 「요한복음서 20:23」절의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한 말씀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해야 한다. 아무리 12사도이지만, 그렇다고 사도들의 능력으로 누구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그런 능력이 없다. 물론 지금의 사제들도 마찬가지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만이 할 수 있다. 이는 '사도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죄 사함의 길로 인도하는 것인데, 이를 못하여 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지 못하게 됨은 큰 잘못이다. 그러니 복음에 힘쓰라' 그런 의미이다. 따라서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에 대해 사도들이 용서하거나 말 수 있는 권세가 있음과 같다. 바로 복음증거의 사명과 권위가 그들에게 주어졌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부에서 거론했던 도척(盜蹠)과 오십보백보인 돈 코를레오네는 악인의 표본과 같은 인간인데 드라마처럼 반전도 아니고, 이승세계를 유지시키는 신의‧정직과 윤리‧도덕을 내팽겨 칠 의도가 아니라면, 과연 신이 용서했을까? 오히려 인간들 중에는, 정과 연이나 이해관계로 이어져, 용서하는 자가 있을 줄 모르겠으나 신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가 천품(天稟)이 선했다든지,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려했지만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런 변명이 참작이 될 수 있느냐이다. 물론 '죽을 때'를 넘어선 것이니, 천공(天功)을 누가 알랴! 인간이니 그 뒤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사필귀정에 흠집은 나지 않을 것임은 믿고 싶다 * ⑻ 《荀子》「天論」, '皆知其所以成 莫知其無形(사람이 아는 것은 다만 이루어져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하며 그 보이지 않는 무궁한 세계는 알 수 없다)' * ⑼ 인간이 평생을 살다가 눈을 감을 때가 되면, 버리기가 아쉽도록 많은 미련이 남을 것이다. 세상에 나올 때는 하얗던 순결의 색이 카바(Kaaba)의 검은 돌①처럼 시커멓게 변할 만큼이나 모으고 쌓았으니 오죽이나 답답하고 안타깝겠는가. 그러나 그 많던 재산이나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권력도 소용이 없다. 우뚝 세워주었던 지혜조차도 아무 짝에 쓸모가 없다. 하물며 욕심을 버리고 치열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삶의 조건을 이겨내려 했던 것은 모두가 가지는 한결 같은 것이며, 굴곡진 삶이라도 진정성이란 반드시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삶을 성화(聖化)시키는 피와 살이다.' 그런 삶을 살았어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믿음이 태산보다 높다고 자부하는 이들 중에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으뜸이요, 알지 못하고도 아는 체하는 것이 병이다.(知不知上 不知知病)/《老子》「第71章」'는 말씀이 딱 들어맞는 이가 의외로 많음에 놀란다. 그나마 바라던 길로 갈 수가 있으려면 '성서를 통해서 신의 말씀이 주는 진리를 찾을 수 있는 혜안(慧眼)'을 떠야 그게 진정으로 믿음에 따르는 것이지, 차가운 교리주의에 빠져 '경(經)이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만 곧이곧대로 인식하는 육안(肉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은 인간세상에다 의를 쌓는 일에 보태줄 뿐, - 크고 많게 짓는 곳에 기와나 벽돌 값을 내는 것을 불 밝히는 것으로 착각하듯이 - 안타깝지만 결코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신성을 대함에 있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qualis sit Deus?)'로 다가가야 이해가 바르지, '하느님은 누구이신가?(quid sit Deus?)'하고 찾아봐야 복덕(福德)을 주지 않으면 금방 돌아설 것이 아니겠는가. '비합리적으로 신봉되는 진실들은 분별에 의거한 오류들 보다 더 큰 해악이 될 수 있다.'는 토머스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AD 1825∼1895)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 ① 카바(Kaaba)성전(聖殿)의 검은 돌 : 이슬람의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아들인 이스마엘과 함께 카바를 세웠을 때, 천사장 가브리엘이 하늘로부터 흰 돌을 가져왔으며, 인간의 죄와 접촉하면서 검은 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카바의 동쪽 벽에 박혀 있으며, 순례자가 손으로 만지거나 이것에 입을 맞춘다. 이슬람 이전부터 신성한 물체(페티시)였으며, 《꾸란》에는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이 접촉 행위가 의식의 일부로 되어 있다. * ⑽ 소위 신에게 기도한다며, 욕애(慾愛=감각적 욕망)에 빠져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이가 있다. 이는 신을 잘못 접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는 신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이는 귀하게 해 달라고 말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 어떤 이는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게 해달라고 갈구하기도 한다. 이는 유애(有愛=생존의 영속을 바라는 욕망)에서 헤매는 것이며, 뇌동부화하거나 주위에서 이를 조장하거나 부응하는 것도 똑같은 부류다.① 붕괴기의 헬레닉 사회에서 몇몇의 실패한 사도(邪道)인 자들이 창조적 구세주로 자처하였음을 역사의 기록으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정도(正道)인 구세주는 인간으로 화신(化身)한 신으로, 그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 것이 아닌 왕국'을 세우려 하였기 때문으로 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② 그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무산 계급)로 세상의 맨 아래로 왔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새겨볼 때에, - 이는 예수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구세주로 불렸거나 아니면 자처했던 이들 중에는 무산계급으로 대중을 이끌던 시몬 마구스나 아폴로디우스도 마찬가지였음을 보았을 때에 특별하다기보다는 그렇게 했다고 봐야 한다. - 그와 같은 기도는 - 기도라 할 수도 없다. - 모두가 욕심의 범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온의 대로(시 84:5)가 열리게 해 주소서!'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인간의 탐욕이 정상의 사고를 일탈(逸脫)시킨 어리석음이다. 신은 도깨비가 아니다. 신은 어리석지 않으며, 원한다고 주지도 않으며, 당연히 응답하지도 않는다. 신에게 도깨비 방망이를 두드려 달라고 기원하는 것은 불경스럽게도 신을 도깨비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주술적(呪術的)인 바람이니 점쟁이에게나 부탁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짓거리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믿음과 충실함에서 멀어져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당연히 우리가 추구하려고 하는 숭엄한 인생과도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오직 한 가지에만 얽매어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하늘의 뜻으로(有天道焉)'만 살려고 하는 것도 - 실제로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없다. -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도리(有人道焉)'만 지키며 살 것이냐는 것은 - 듣기에는 바른 것 같지만, 천도(天道)를 무시하는 인도(人道)는 경우에 따라서는 천륜(天倫)까지 저버리게 하는 죄악을 만든다. -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더한 극단의 선택이 될 수도 있으니, 인간의 삶을 그렇게 한쪽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막가파식(有地道焉)'으로 살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인생을 그런 식으로 한쪽으로 몰아사는 것은 바른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 ① 「마태복음서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는 하늘 왕국에의 초대이다. 예수가 모든 불상한 인류를 향하여 '내게로 오라 너희가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면서 '나를 믿으라.(요 14:1)'고 하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먹고 마시고 입는 일은 이방인들도 다하는 것이니, 그들이 못하는 것.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3)'고 하였다. 하늘나라에 의(義)를 이루라는 것이 '구하라'는 뜻이다. 어느 곳에 이승에서 만사형통한다고 쓰여 있는가? 오히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고 하였다.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막 13:12)'고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참고 이겨내 끝까지 남아야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승의 삶에서 주제를 벗어난, 부자가 되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귀하신 몸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의호식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다른 곳을 찾아야 한다. - ② 아놀드 J. 토인비, 1976, 《역사의 연구》 卷7 「문명의 붕괴와 세계국가」,五部. 문명의 붕괴(續)/C-Ⅱ(a)補論Ⅱ. 수난(受難)의 그리스도. * ⑾ '흔히 사람들은 정신을 어디에 매어 놓으면 일이 잘될 것같이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정신을 붙들어 매어놓고 싶어 하지만 정신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은 자유로운데 그 본질이 있다. 그 대상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라 해도 거기에 매여 사는 것은 그 대상은 우상이 되고 내 정신은 내려가게 된다. 내 정신은 하느님 한 분을 우러를 수 있도록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매여서는 안 된다. 매어놓지 말아야 할 것을 매놓고 모으는 것이 아닌데도 모으려고 하는 것이 우상이다. 어디에다 묶어 놓을 수 있는 게 정신이 아니다.(1956, 「안 매인 마음(Untied Mind)」)①' - ① 박영호(朴永浩), 2006, 《다석 유영모 어록》「5. 예수 그리스도」 * ⑿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리를 따르려는 도심(道心)이 있는 줄 모른다. 오직 동물적 욕구처럼 이기적 탐욕을 채우려는 악덕한 마음인 인심(人心)을 바탕으로 하여 나만의 하늘을 만들고 편벽으로 벽을 세우고 나만의 이득을 챙기려고 한다. 그러니 모두가 혼란에 싸여 서로를 질시하고 불신하여 온 세상을 위기에 빠트린다.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보편타당한 공리(公理)인 절대선의 천리인 참 뜻을 바로 알고 깨달아야한다. 그것이 나뿐만이 아니고 내 주위를 모두 편하게 하는 올바른 삶의 자세일 것이다. 옛말에 '사람은 누구나 다 형체(形體), 즉 육체를 가지고 있다. 고로 뛰어나게 지혜로운 사람, 즉 상지(上智)라도 인심(人心)①이 없을 수 없으며, 사람은 또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고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 즉 하우(下愚)라도 도심(道心)①이 없을 수 없다.(然人莫不有是形 故雖上智不能無人心 亦莫不有是性 故雖下愚不能無道心/《大全疏註》)'고 하였다. 도심과 인심은 한 치 크기의 작은 마음 안에 섞여 있다. 그러나 마음 다스리는 법을 모르면 위태로운 인심이 더욱 위태롭게 되고 은미하게 나타나는 도심이 더욱 미미하게 되며 마침내 천리의 공정(公正)이 끝내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밀하게 도심과 인심사이를 살피고 분별하면 곧 혼잡하지 않으며 아울러 도심을 한 결 같이 지키고 간직하면 도심에서 이탈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인 이상 인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나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없다. 그러나 형기(形氣)와 육체적 욕구를 과도하게 이기적으로 채우려고 하면 곧 악한 인욕으로 돌변한다. 그래서 주자(朱子)는 '마음이 몸의 주체다(心者 身之主也)'라고 하여 마음에 따라 몸과 행동이 다르다고 하였다. 즉 착한 마음은 착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이는 도를 따르려는 이성이고 악한 마음은 악한 행동으로 나타나며 자기만의 탐욕을 채우려는 욕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본체는 본래 허정(虛靜)하나 외부의 사물에 응하게 되면 마음이 발동한다. 이때에 이성을 바탕으로 한 마음이 도심이며 욕심에 흐린 마음이 인심인 것이다. 결국 하나의 마음이지만 '도심적(道心的)'으로 나타나느냐 '인심적(人心的)'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 ① 인심(人心) : 오직 동물적 욕구와 이기적 탐욕을 채우려는 악덕한 마음. - ② 도심(道心) : 사람은 동물과 다른 숭고한 정신과 도덕성을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를 《중용》에서는 '하늘이 내린 본성(天命之謂性)'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본성적으로 천도(天道)를 깨닫고 행하는 마음이 있으며, 이 마음이 도심이다. * ⒀ 《孟子》「告子章句上 第15 從其大體爲大人章」, '公都子問曰, 鈞是人也, 或爲大人, 或爲小人, 何也. 孟子曰, 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 曰, 鈞是人也, 或從其大體, 或從其小體, 何也? 曰, 耳目之官不思, 而蔽於物, 物交物. 則引之而已矣, 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此天之所與我者. 先立乎其大者, 則其小者不能奪也. 此爲大人而已矣.(공도자가 묻기를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대인이 되고 어떤 사람은 소인이 되는 까닭은 무슨 이유입니까? 맹자는, 대아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소아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 그러면,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을 소아를 따라가고 어떤 사람은 대아를 따름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귀나 눈이라는 기관은 생각할 능력이 없으니 사물에 지배되니, 그것에 접하게 되면 끌려가기 마련이다. 마음이라는 기관은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게 되면 사리를 알게 된다.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해 준 것을 비교해서 먼저 자기의 큰 것을 확립해 놓게 되면, 자기의 작은 것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대인이 되는 길이다.)' * ⒁ 인간이면 누구나 첨예하게 여기는 '화(禍)와 복(福)은 같은 문을 쓰고 있고, 이(利)와 해(害)는 가까운 이웃 간이다. 화는 남이 해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요, 복도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일 뿐이다.①' 한 가지로 이(利)를 얻는다고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지며 화(禍)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길(吉)도 별개가 아니요, 흉(凶)도 다른 게 아니다. 옛말에 '천하의 일은 사려(思慮)에 의해 시작되지만 그 성공은 노력여하에 달렸다.(事者生於慮成於務)/《관자》「목민편」'고 하였듯이, 인간이 무엇을 행함에 앞서 지혜로서 생각하고 헤아린 후에야 감히 모책(謀策)을 세우지 않는 일이 없다. 그러나 그 결과가 혹은 이롭고 혹은 해로운 것은 어리석었거나 지혜로움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지혜를 들어 사용한다고 전혀 어려움에 부딪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만약에 지혜가 옳다고 여긴다고 하여 일이 반드시 행해진다면 천하에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 또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려(知慮)는 화복의 문호(門戶)이며, 동정(動靜)은 이해(利害)의 추기(樞機)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며, 올바름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혹 이롭게 하고자 한 것이 끝내는 해를 끼치는 결과가 되는 것을 막는 길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인간의 생각이 독실함에서 벗어나 경조부박(輕佻浮薄)하고, 바르게 근본을 세울 의지도 없으면서, 삿된 생각을 깊이 품고는 요순시대를 닮는다고 아무리 좋은 제도를 내세워 정치를 한다고 해도 구현될 수가 없다. 수메르시대의 이상향인 딜문(Dilmun)②을 찾겠다고 지금의 바레인 땅을 마음을 비웠다고 거짓 증언하며 샅샅이 뒤져봐야 무엇 하나 찾을 것이 없다. 에덴동산을 찾겠다고 '에덴의 들판③'을 해변 백사장의 모래 한 알갱이까지 들추어내도 별무신통일 것이다. 결국은 교만함이 미련스럽게도 자신의 어리석음까지도 들추어낼 뿐으로 돌아오느니 화(禍)와 해(害)이다. 그래서인지 회남자에서는 '신성한 사람이 아니면 이들을 구분하지 못하다고(非神聖人 莫之能分)'까지 하였는지 모른다. - ① 《회남자(淮南子)》「人間訓篇」, '夫禍之來也 人自生之 福之來也 人自成之 禍與福同門 利與害爲隣' - ② 딜문(Dilmun) : 메소포타미아 칼데아의 수메르(Sumer)인들이 생각했던 낙원으로 후에 성경 창세기의 '에덴동산'도 비슷한 사유의 산물이다. 수메르인은 딜문을 '해가 뜨는 곳' 또는 '생명의 나라'라고 불렀다. '수메르 대홍수'의 영웅 지우수드라(Ziusudra)가 영원히 살도록 신들에 의해 마련된 곳이다. 일설에는 현재의 바레인지역으로 보기도 한다. - ③ '들판'은 수메르어 '에덴(eden)'의 우리말 번역이다. 메소포타미아남부의 두 강 사이지역을 수메르인은 '에덴'이라고 불렀다. 이 들판에 들짐승이 살았고, 사람들은 수로를 만들어 경작지를 넓혔다. 에덴은 주로 '들판에 일궈놓은 밭'이란 뜻의 'gan-eden'으로 일반명사로 쓰였으나 고유명사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도시국가인 움마(Umma)에서 동쪽으로 25km가량 떨어진 기르수(Girsu) 사이에 있었던 들판 이름을 '에덴의 강둑(Gu-eden)'이라고 불렀다. 남쪽으로 그 만큼 떨어진 바드티비라(Bad-tibira) - 신화에 의하면 에리둑(Eridug)이 무너지고 다음 왕권을 이어받았다./《수메르 왕 계보(The Sumerian King List)》 1-19행 - 를 삼각점으로 하면 대략 300 ㎢ 남짓쯤 되는 면적이다. 성경 창세기의 에덴동산은 수메르어 명사인 'gan-eden'과 같은 단어다. 또 수메르의 들판(에덴)에 들짐승들이 살았으며 들판을 일구어 밭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이나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들짐승과 살았고 밭을 일구었다는 이야기는 상통한다. 즉 에덴(들판)과 같은 일반명사이거나 가나에덴(들판에 일궈놓은 밭) 같은 수메르 지역명이 창세기에서는 고유명사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땅을 기는 것들(즉 뱀)과 들짐승과 서로 즐겁게 살았다는 부분도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아담이 온갖 들짐승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뱀과도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살았다는 이야기와 관련된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