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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목(그대 눈꽃이여)9편
김병국 2016. 02. 01. 오후 09:07
3823
김병국 2016. 02. 01. 오후 09:07
3823
준석은 철민을 보자마자 섬뜩함에 말문이 막힌 채 멍한 상태로 철민을 바라만보고 있었다.
준석은 이곳에 올 때 잠시 생각했던 얘들 엄마의 교통사고에 대해 철민을 연상시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어릴적 철민과 싸움사건으로 철민은 늘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낭걸이 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준석아 ! ”
철민은 아리랑 담배 휠터를 질끈 문채 준석의 어깨를 툭 치며 재미있게 놀라며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철민은 4명의 일행들 중 팔목에 문신을 한 덩치가 큰 한사나이를 보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덩치 큰 사나이는 철민에게 흰 봉투를 건네고는 사라졌다.
한편 어정쩡하게 서 있는 준석의 행동을 본 정인은 “아시는 분인가 봐요?” 라며 준석과 같이 광란의 음악을 뒤로하고 클럽 밖으로 나왔다.
시린 바닷바람을 타고 눈송이는 이리저리 그들의 몸 주위를 감싸왔다.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땀에 젖은 온몸에 차가운 한기를 느끼며 그들은 손을 잡고 잠시 경포호수주변을 걸었다.
말수가 적어진 준석을 바라보며 무순일이냐고 물었지만 준석은 정인의 손을 꼭 쥐고만 있었다.
정인은 그의 손에서 따뜻한 열기가 전달되자 자신의 몸에 훈기가 도는 듯 했다.
잠시 동안이지만 그녀는 준석을 만나 행복한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살면서 이 같은 행복감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두 살짜리 딸아이 하나 두고 살지만 매일 술에 절어 있고 의처증으로 온갖 수모를 주는 남편과는 전혀 다른 준석과 비교하고 있었다.
나이트클럽 네온이 깜박일 때마다 밝게 보였다 흐리게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그로 하여금 측은한 연민의정을 느끼고 있었다..
펑펑 내리는 눈은 그들의 몸을 계속 덮고 또 덮었다.
하얀 눈을 머리에 잔뜩 이고 있는 그녀는 청아해 보였다.
\"옷이 젖겠어요.\"
준석은 주차한곳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그녀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 주었다.
옷에 묻은 눈을 털다 그만 그녀의 앞가슴에 손이 스쳤다.
\"아 ! 미안 ! \"
그의 외마디소리에 그녀는 쑥스러운 듯 미소만 지었다.
준석은 차에 앉아서도 철민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에 느꼈던 정인의 몰캉한 앞가슴의 감촉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막 출발하려는 데 그녀는 운전을 하겠다고했다.
좀 전 철민과의 모습에서 피곤해 보이기도 했지만 술 마신 준석을 대신해서 운전을 해야만 했다.
\"음주운전하시면 안돼요? 산길도 아니니 걱정 마시고 좀 쉬세요? 천천히 갈게요.\"
\"위험하니 조심하세요.\"
\"네, 알았어요. 잠시 눈을 붙이세요.\"
'붕' 차는 달렸다.
\"피곤해 보여요. 의자를 뒤로하고 누우세요.\"
“괜찮아요...”
그녀는 준석의 말문을 막으며 손으로 살짝 그의 가슴을 눌렀다.
남을 배려하는 그녀의 따스한 마음에 준석의 마음도 한결 푸근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다리를 쭉 뻗고 의자에 비스듬히 누웠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잠잠했던 그의 마음이 또 다시 설래 이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혼자 오래된 탓일까?'
가슴이 두근거리며 맥박이 빨라졌다.
행여 방망이질하는 심장의 박동소리가 그녀에게 들킬까 가파지는 숨소리를 죽이려고 애를 썼지만 가슴은 더욱 쿵당 거렸다.
준석은 음악을 틀었다.
아베마리아가 흘러나왔다.
\"아베마리아는 언제 들어도 좋아요.\"
\"좋은 곡이 많으시네요. 제가 다 좋아하는 음악들이에요. 나중에 녹음해서 하나 구워 주실래요?\"
그녀는 차안에 있는 CD를 이것저것 들여다보며 말했다.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아내인 경숙과 비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모처럼의 휴일을 거실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고 음악 감상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아 눈을 떠보니 성경책을 든 아내가 오디오를 끄고 등을 보이며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러한 아내의 행동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으나 아무 말 없이 볼륨을 줄이고 다시 오디오를 켰다.
순간 경숙의 앙칼진 목소리가 방안에서 들려 왔다.
\"그놈의 음악소리 시끄러워 죽겠네, 기도가 안 되잖아요.\"
준석은 그만 오디오를 꺼 버렸다.
그 날 이후 그는 아내가 집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오디오를 켜지 않았다.
'지금의 정인이 처럼 집에서 같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 왈츠 곡이 나오면 춤도 추고......'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덜컹하더니 붕, 붕, 갑자기 차 앞바퀴가 눈에 빠져 헛바퀴만 돌고 있었다.
준석은 밖으로 나가 보았다.
움푹 파인 얼음 구덩이에 빠져 도저히 빠져나오기가 힘들어 보였다.
좀처럼 차는 출발하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고 있었다.
\"또 빠졌네요. 전 차만 빠트리나 봐요. 어떻해요? 미안해요.”
타이어는 더 깊어져 그들의 힘만으론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주위엔 다니는 차량도, 사람도, 도움을 청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잠시 두리번거리자 멀리 모텔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우선은 좀 쉬고 싶었다.
\"날이 밝으면 사람들에게 도와 달랩시다.\"
마침 차는 한 쪽 길옆에 있어서 그들은 차를 그대로 놔둔 채 뽀드득 소리를 내며 쌓인 눈을 밟고 모텔 쪽으로 걸었다.
카운터 문을 두두리자 작은 쪽문이 열렸다.
준석은 가만히 말했다.
“방 둘 주세요?”
준석의 말에 모텔 주인은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다 하나밖에 없다는 주인의 말에 준석은 정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피곤한 듯 무표정하게 준석의 뒤에 있었다.
준석의 뒤를 따라 정인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지정한 룸에 들어섰다.
겉보기와는 달리 안은 비교적 넓고 깨끗했다.
벽에 걸린 벽시계는 새벽2시를 가르키고 침대 옆 현탁 위엔 찻잔 두 개와
커피포트가 놓여있었다.
작은 스탠드만이 그들을 기다리는 듯 뽀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방바닥 구석에는
깨끗한 이불 한 채가 놓여있었다.
'침묵의 속에 어색함, 이럴 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준석은
모르고 있었다.
조금 전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은 듯 준석은 상기된 어조로 말했다.
\"피곤하실 텐데 먼저 샤워하세요?\"
그녀는 빨간 점퍼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준석은 어쩌면 이렇게 자신이 태연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준석은 이불을 베개 삼아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샤워하는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렸다. 날씬한 알몸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분이
묘했으나 잠시 준석은 자기가 왜 잘 알지도 못한 여인과 여기에 와 있는지 마치
여우에게 홀린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욕실에서 옷을 입고 나오는 그녀를 교차해 준석은 얼른 일어나 욕실로 들어섰다.
거울 앞 세면대 위에 놓인 칫솔엔 치약이 짜여 져 있었다.
그녀의 세심한 배려에 그는 작은 감동을 받고 있었다.
따스한 물이 그의 몸을 적시자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풀렸다.
욕실을 나오자 그녀가 전해주는 냉수 한 컵을 마시고 창가로 다가갔다.
준석은 어색한 분위기에 바다로 향해 있는 창문을 열었다.
잠시 전 까지도 내렸던 눈은 그치고 가까이 보이는 파도의 흰 거품이 철석거리며
눈앞에 펼쳐지다 사라지곤 했다.
정인은 창가에 서 있는 준석의 옆에 나란히 다가서며 말했다.
\"바다를 보면 마음이 넓어져요. 마치 엄마 품처럼 편해지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래요. 모든 생물은 바다에 있는 해면체(海綿體)와 같은 다세포
유기체(有機體)로부터 생성되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어머니 품처럼 편해지는
거겠죠?\"
\"정말 우리 인간도 그렇게 태어났을까요? 참 신비스러워요.\"
조용한 둘만의 방안으로 '쏴악-철석' 거리며 규칙적으로 들려 왔다.
“저기 불빛들은 뭐에요? 아름다워요.”
“오징어잡이 배들입니다. 저렇게 모여서 불을 밝히면 오징어들이 모여들어서 잡는
겁니다.
어스름 달빛은 구름에 반쯤 가려 져 있었고 수많은 별들은 반짝이고 있었다.
\"아! 저기 별똥이 떨어지네요.\"
준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했다.
\"저도 봤어요. 지금 소원을 비세요.\"
정인이 눈을 감자 준석도 따라 감았다.
준석은 연지와 연주의 두 딸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해 달라고 빌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요?\"
\"그건 비밀입니다.\"
\"그럼 저도 비밀이에요.\"
\"저기 저 은하수에요. 별들이 너무 많이 모여 있어요.
저 별들은 몇 개나 될까요?\" 정인이 물었다.
\"글쎄요 수천억 그 이상 셀 수 없을 만치 많겠죠? 저 은하수 속에 가장 가까운
별끼리의 거리는 약 4 광년이나 된다니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몰라요.\"
\"별에 대해서 많이 알고 계시나 봐요.\"
\"학교 다닐 땐 천체에 관심이 많았어요.\"
\"네에, 전 어릴 때부터 별을 무척 좋아했어요. 깜깜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너무 예뻐서 아빠한테 막 조른 적도 있어요.
“별을 따 달라고요.”
“그래서, 별을 따 주셨어요?”
준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녀도 따라 웃었으나 진지하게 말했다.
“아빠는 저를 무릎에 앉히시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별은 따는게 아니라 가슴에 담아두는 거란다.’ 라고,
전 홀로계신 아빠의 표정이 슬픈 것 같아 더 이상 떼를 쓸 수가 없었지요.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도 같아요.“
준석은 약간 슬퍼 보이는 그녀의 기분을 바꿔주고 싶었다.
“저기 좀 보세요. 별들이 모여서 구름처럼 보이죠?
저걸 성운(星雲)이라고 해요.
저 성운안엔 저기 저런 은하수가 셀 수 없이 많이 들어 있대요.\"
\"네에“ \"그런데 저런 성운이 이 우주에는 셀 수없이 있고요.\"
\"어머 그래요. 그럼 우주가 얼마나 넓은 거예요?\"
\"무한대죠. 인간이 추측하기 힘들 만큼...\"
\"얘길 듣고 보니 우리 인간이 너무나 작아 보여요.\"
\"우주로 보면 먼지처럼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런데도 서로들 티걱,태걱 살고 있지요.\"
\"그래서 별은 인간들에게 무한한 꿈을 주나 봐요. 저기에 내 별도 있을까요?\"
정인은 밤하늘에 별을 은은히 쳐다보며 말했다.
\"누구나 가슴에 새겨둔 별이 있지 않나요?
저는 어렸을 때 초등학교 다니는 누나와 형이랑 하늘을 보며 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릴 때 별을 세곤 했어요.
아! 저기 저별, 저것이 내 별이고 저것은 형 것, 저만큼 떨어져서 반짝이는 별은
누나별이에요.\"
준석은 별을 가리켰다.
\"누나 별은 왜 떨어져 있어요?\"
\"누나는 여자잖아요. 어릴 때는 여자들하고 잘 놀지도 않았거든요.\"
\"그건 너무하네요.\"
정인이 의자에 앉자 준석도 따라 앉았다.
“제가 즉흥시 한편 지어 볼가요?”
“어머 그래요. 기대 되네요”
\" 제목은 '학춤'으로 하지요\"
그는 별이 쏟아지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그녀와 부둥켜안고
우아한 학춤을 추고 싶었다.
준석은 약간 더듬거리며 그러나 진지하게 시를 읊기 시작했다.
\"해변엔 현란한 별빛이 쏟아지고
우리는 바다로 향하는 창을 열었다.
창백하리 만치 파리한 달빛 아래서
우리는 천천히 학춤을 추었다.
해변에 부딛치는 파도소리에 귀를 열고
하얗게 일어나는 물거품에 시선을 주며,
우아하리 만치 풍경스런 몸짓으로
우리는 서투른 학춤을 추었다.
긴 목에 두 팔을 감고
가는 허리에 손을 두른 채
서로에게 몸을 의지하며
우리는 천천히 우주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인은 손벽을 치며 좋아했으나 준석은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
한동안 그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멋 적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러나 준석은 시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전한 것 같아 내심 속이 후련했다.
정인은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테이블에 있는 찻잔에 더운물을 부으며
준석에게 내 밀었다.
\"멋진 시에요. 제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어요. 자스민 찬데 선물로 드릴게요.\"
\"향이 좋네요?\"
준석은 차를 마시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도 그윽한 표정으로 차를 즐기는 듯 했다.
\"전, 이 차로 향수를 만들어 써요.\"
\"자스민향은 머리를 맑게 해주지요.\"
\"저는 이 향을 맡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아요.\"
\"예, 그런 것 같네요. 피곤하실 텐데 그만 주무세요.“
“제가 바닥에서 잘게요.\"
\"아니예요. 침대에서 주무세요. 저는 온돌방이 좋습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뜰 텐데요.\"
준석은 비스듬이 기대앉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빈 찻잔을 내려놓고 말없이 침대위로 올라갔다.
준석은 따스한 차 기운으로 온몸이 나른해 지며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침엔 제가 깨워 드릴게요.\"
그녀의 말은 너무나 다정스러워 마치 오랜 연인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침대 옆 스텐드 불을 끄고 벽 쪽으로 돌아눕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방안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만
간헐(間歇)적으로 들려 왔다.
준석은 방바닥에 깔아 놓은 자리에 어린아이처럼 몸을 동그랗게
하고 누웠다.
몇 번인가 돌아눕는 그녀의 움직임에 온통 신경이 쓰였다.
손만 뻗으면 닿는 가까운 거리에서 신비스런 그녀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그는
야릇한 흥분과 황홀감으로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몸의 일부가 이상해져 오는 것을 느꼈으나
준석은 인격의 자제력을 발동하여 억누르고 있었다.
'아! 아! 아-!' 갑자기 옆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남녀의 사랑하는 소리 같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연상하고 있던 준석에게는
오히려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았다.
육체적인 욕망에만 전념하는 듯한 옆방의 소리는 감수성 예민한 준석에게
수치심마저 들게 했다.
순간 한꺼번에 몰려오는 피곤함이 준석의 눈을 감기게 했다.
얼마를 잤을까? 드르륵 소리에 준석은 졸린 눈을 반쯤 떴다.
그녀가 열려진 창문을 닫는가 했더니 그에게 다가와 걷어찬 이불을 살며시 덮어
주곤 침대위로 스르르 올라가고 있었다.
준석은 숨소리를 고르게 내며 가슴에 스치는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가벼운 한숨소리를 들으며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어느덧 창가엔 해가 훤하게 밝아오고 준석은 졸린 눈을 비비고 습관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한 쪽 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스럽게 자고
있는듯했다.
그녀의 희멀건 한 쪽 다리가 이불 밖으로 나와 준석을 자극했으나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그녀도 눈을 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가 인사를 하자 그녀는 쑥스러운 듯 모기 소리만하게 대답했다.
\"네\"
“차를 빼야하니 준비하고 계세요?”
준석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빨리 해방되고 싶어 서둘러 모텔을 빠져 나왔다.
\"아! 공기가 참 맑아요.\"
언제 나왔는지 그녀가 등 뒤에서 두 손을 벌리고 숨을 들어 마시고 있었다.
정인은 무언가 싱그러운 감이 자신의 주변을 돌고 있는 것을 느꼈다.
준석은 차 있는 곳까지 가면서 장난꾸러기처럼 발 미끄럼을 타며 그녀에게도
한번 해 보라고 했다.
\"전 구두 때문에 많이 가지 못해요.\"
\"앉아요. 내가 끌어 줄게요.\"
정인은 쪼그리고 앉아 준석이 뒤로한 두 손을 잡고 차 있는 곳까지 미끄럼을 탔다.
정인은 자신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마냥 즐거웠다.
짧은 시간에 스스럼없이 친해지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정인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준석에게 끌리고 있음을 느꼈다.
눈에 빠진 차는 어제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닥이 얼어서인지 차는 한 번에 빠져 나왔다.
그들은 모텔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 근처 식당에서 출렁이는
파도를 들으며 아침 식사를 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잠시 해변가를 걸었다.
눈 덮인 백사장과 검푸른 바다는 흰 거품을 내고 밀려오는 파도가 중간색을 띄고
괴이하게 생긴 바위들은 오랜 세월 파도를 맞으며 견뎌온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겨울 바다의 정취(情趣)에 한껏 젖어있었다.
\"이제 그만 스키장으로 가야죠?\"
\"...네\"
그녀는 아쉬운 듯 준석의 발자국을 따라 차에 올랐다.
대관령 고개엔 제설차가 다니며 아침부터 눈을 치우고 있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멀리 동해 바다가 펼쳐 있고 오밀조밀한
강능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대관령 휴게실을 지나 어느새 마을로 접어 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집과 상점 앞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었다.
길옆에 밀어 놓은 눈덩이가 허리츰 높이에 담처럼 길게 뻗어 벽이되어 있었다.
그런 길은 스키장 까지 연결되어 있었고, 가끔씩 스키를 매단 차들이 차창문을
열고 소리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콘도입구에는 스키를 둘러멘 사람들이 알록달록 스키복을 입고 분주히
스키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로봇트 발 같은 둔탁한 스키화를 신고 어그적 거리며 걸어 다녔다.
\"어제는 이상한 날이 였어요.\"
\"네, 저도 그래요... 여기 까지 바라다 주시고...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짐을 내려놓다 말고 검은 가방을 들고 준석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저......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
\"가방을 좀 맡아 주시면 안 될까요? 스키를 타다 보면 간수할 수가 없어서요.\"
그녀는 까만 가방을 그에게 내 밀었다.
\"중요한 건가요?\"
준석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가방을 받으며 물었다.
\"예 조금...... 잘 부탁드릴게요. 연락처는?\"
준석은 명함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잠시 명함을 보더니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서울가는대로 찾아뵐게요.\"
정인은 받아 든 명함을 핸드빽 깊숙이 넣고 짐들을 마저 내렸다.
“가방은 잘 보관하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그녀는 아쉬운 듯 손을 내밀었다.
준석은 그녀가 내민 손을 지긋이 힘주어 잡았다.
“재미있게 타세요.\"
정인은 그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준석은 서울로 오면서 그녀와 있었던 어제의 일들을 생각했다.
진부라는 이정표가 지나가자 그가 잊고 있었던 친구 한섭이가 생각났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로 인해 한섭을 만나지도 못하고 그냥 가야하는 그의 마음은
아쉬웠지만 한편으론 무언가 가슴 뿌듯했다.
준석은 고속도로에서 그녀가 맡긴 가방을 보며 삐죽이 나와 있었던 돈을 생각하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가방을 흔들어 보니 무슨 종이뭉치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 속에든 것이 서류일까? 아니면 돈일까?'
돈이라면 어째서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준석은 여러 가지 궁금증이 한꺼번에 몰려 왔으나, 어쨌든 그는 그녀에게서
믿음으로의 초대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기분이 몹시 좋았다.
집에 도착한 준석은 대문 옆에 쪼그리고 있는 조그마한 눈사람을 보며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초인종을 눌렀다.
\"아빠- 오셨어요?\"
\"응, 그래, 눈사람 만들어 놓았구나 자 이거.\"
\"어, 호두 과자네.연지야!\"
아빠를 마중 나온 연주는 과자 봉지를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 오셨어요. 언니랑 눈사람 만들었다.\"
연지는 밥을 먹다 말고 뛰쳐나왔다.
그가 거실에 들어섰는데도 이모는 식탁에 앉아 반찬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준석은 머쓱한 기분에 얼굴이 붉어지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모의 그런 행동이 처음은 아니지만 오늘은 웬지 경숙에게 죄를 지은 것만 같아
이모에게까지 미안하기도 했다.
\"아빠, 식사하셨어요?\"
연주가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물었다.
\"응, 먹었어.\"
준석은 배가 고팠으나 무관심한 이모의 얼굴과 마주하기 싫었다.
그는 옷을 대강 벗어 던지고 침대에 벌렁 들어 누웠다.
준석은 갑자기 순이 누나가 생각났다.
그가 어린 시절 이북에서 피난 나온 그의 부모님은 생활에 기반을 잡기 위해
밤낮없이 일을 하셔야만 했다.
그런 이유로 자식들에게 일일이 신경을 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유난히 정이 많고 부침성이 많은 준석은, 그의 집에서 일을 돌봐 주던 순이 누나를 무척 따랐다.
순이 누나는 엄마대신 그의 형제들에게 먹을 것을 해주고 씻겨 주고 돌봐 주었다.
순이누나는 6.25 전쟁통에 부모와 형제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전쟁 고아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순이 누나가 불쌍하기도 했고 또 집안일도 거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한 집에서 기거를 하고 준석을 돌보며 살았다.
순이 누나는 준석이가 전쟁 때 잃어버린 막내 동생을 닮았다고 유난히 예뻐하고
귀여워했다.
어린 준석은 그런 순이 누나에게 엄마에게 하듯 어리광을 부리고 품에 안겨 잠이
들 때도 많았다.
그러던 중 순이 누나는 그의 아버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만복이 아저씨와
서로 좋아하게 되었고 만복이 아저씨도 전쟁통에 가족들을 모두 잃고 혼자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나 오른쪽 다리에 파편을 맞아 쩔룩거리고 다녔다.
만복이는 매우 성실하고 성품이 착하다며 준석의 아버지는 가끔 칭찬하셨다.
순이 누나는 만복이 아저씨가 비록 불구였지만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만복이 아저씨가 집에 심부름을 오면 순이 누나는 괜히 수줍어하며 먹을 것 도
갖다 주고 가끔 둘이서 으슥한 곳에서 얘기도 하곤 했었다.
준석의 아버지는 그들 두 사람을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약간의 가제도구를 장만해
결혼을 시켰다.
결혼한 순이 누나는 만복이 아저씨가 살고 있는 산동네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어린준석은 그들 부부를 따라가겠다고 울고불고 야단을 했었다.
순이 누나도 준석과 헤어지는 것을 매우 섭섭해 하는 눈치였다.
이사 가는 날 아침, 순이 누나는 준석을 꼭 안고 눈물이 글썽해져 말했다.
'준석아, 울지마 누나자주 올께, 응? 약속.'
순이 누나는 울고 있는 준석의 눈물을 닦아주며 새끼손가락을 내 밀었다.
준석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몇 번씩 약속을 했다.
준석은 그 후로 자고 나면 순이 누나를 찾으며 밥도 먹지 않고 보채기만 했다.
보다 못한 그의 부모님은 할 수 없이 그들 부부에게 집 가까이 방을 얻어 주고
순이에게 준석을 돌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준석은 신이 나서 눈만 뜨면 순이 누나네로 달려갔다.
밤에도 순이 누나와 같이 자겠다고 떼를 썼으나 그것만은 허락되지 않았다.
눈이 많이 오던 그 해 겨울 준석은 엄마가 사준 털신을 신고 자랑이 하고 싶어,
아침 일찍 눈을 비비며 순이 누나네로 달려갔다.
웬일인지 사립문이 닫쳐 있어 준석은 사립문 옆으로 나 있는 조그만 개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어 준석은 작은 발자국을 내며 방문 앞으로
가서 누나를 불렀다.
\"누나, 누나 야.\"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문을 두드리고 잡아 당겨 보았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준석은 쪽마루에 앉아 누나를 한참을 기다리다 춥기도 하고 배도 고파 집으로
돌아왔다.
준석은 털신에 묻은 눈을 ‘톡톡’ 털어 마루 위에 올려놓고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있다 금새 잠이 들었다.
밤늦게 일을 끝내고 군고구마 한 봉지를 들고 그의 아빠랑 엄마가 들어오시며
누워있는 준석을 깨웠다.
준석은 따끈한 고구마 껍질을 벗기며 엄마께 순이 누나가 없다고 글썽거리며
말했다.
그의 엄마는 준석의 말을 듣고 불이나케 순이 누나네로 달려갔다.
그 날 이후 준석은 그들 부부를 보지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조개탄 까스에 질식해 죽었다는 것이다.
어린준석은 몇날 며칠을 울며 순이 누나를 찾았다.
준석은 사춘기를 거치면서도 어린 시절 순이 누나의 환상을 떨치지 못하고
은연중에 순이 누나와 같은 따뜻한 여자를 찾고 있었다.
준석은 경숙에게서 그러한 느낌을 받고 따스한 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는 그런 저런 이유로 경숙과 서둘러 결혼을 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신접살림을
차렸다.
신접살림은 옹색했지만 아기자기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게 상냥하고 다정하던 아내는 날이 갈수록 점점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억센 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둘째 딸을 낳은 후부터 남편은 물론 시댁의 행사에도 소홀하고 있었다.
경숙의 이유 없는 늦은 귀가와 무관심은 준석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정이 많고 성격이 모질지 못한 그도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그는 가능한 한 아이들 앞에서 그녀와 부딪치고 싶지 않아 자연히 모든 생활패턴은
아내 위주로 바뀌어 갔다.
그러던 중 오해 일수도 있는 담배 사건으로 인해 그들은 내면적으론 완전한
냉각기에 접어들고 말았다.
준석은 어린 딸들을 생각하며 최소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참고 살아왔다.
아이들에게 아빠의 존재를 막살 하면서까지 자신의 입지를 나타내려는 경숙의
가정교육은 참으로 참기 힘들었다.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엄마라는 존재가 더 부각되는 것이 좋을 성 싶었다.
이다음 아이들이 어른이 되서 인생을 알 때 그때는 이 아빠를 이해해 줄 날이
있겠지 하며 살았다
겉으론 잠잠해 보이는 그들의 결혼생활도 수면아래에선 무수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기본적인 믿음과 존경이 사라진 결혼생활이 얼마나 삭막한 것인지를 준석은 새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해 아내를 잃고 나니 그동안 더 이해해주고
사랑해주지 못했던 자신을 죄책하고 후회하며 살고 있다.
젊은 나이에 얼마나 한이 서렸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울화가치밀어 올랐다.
아내의 한을 꼭 풀어 주리라 생각했다.
준석은 어제 아주잠시 어릴적 순이 누나의 그 따뜻한 손길을 느꼈던 순간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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