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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목 ...... 제28회
김병국 2016. 07. 25. 오후 07:10
5146
김병국 2016. 07. 25. 오후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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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준석도 홀로 남는다는 외로움이 엄습해 왔다.
'사랑이란 이렇게 괴로운 것인가!' 준석은 한탄스러웠다.
괴로움을 이기느라 애태우다 그는 또다시 가슴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예리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 때면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어쩌면 정인을 만나지도 못한 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준석은 정인이가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는 생각을 하노라면 어느새 가슴에 통증은 멎어있었다.
오늘은 유독 더 가슴을 찌르고 아파왔다.
준석은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사향을 꺼내 향을 맡으며 가루를 조금 찍어 혀에 깔았다.
정인이도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지금은 잘 살고 있을 정인에게 다시 시련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리움을 가슴에 묻기로 했다.
보고픈 그리움의 가슴앓이는 그가 살아 있는 한 괴로움으로 감수해야 하는 그의 몫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준석의 몰골은 말할 수 없이 말라 가고 있었다.
미치도록 견디기 힘들 때는 높은 산에 올라가 정인을 목 놓아 불렀다.
“정인아 --- 난 잘 있어, 당신도 잘 있겠지?......”
애절한 메아리는 여지없이 돌아와, 준석의 고막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변비로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마자인(麻子仁)을 넣어 약을 조제해 드렸다.
남은 마자인을 들여다보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씨를 벗기고 있었다.
그 껍질을 담배처럼 말아 피우면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리화나였다.
그의 행동이 여기까지 이르자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해 미쳐 버리는 사람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연히 찾아오는 것은 가금에 통증이었다.
준석은 될 수 있는 한 정인을 잊고 살고 싶었다.
그가 서울에 있으면 가는 곳마다 보는 것마다 그녀와 연결이 되지 않은 것이 없어 더욱 참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녀와의 추억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게 만들었고, 못 다한 사랑은 준석을 사회로부터 서서히 침몰시키고 있었다.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짙어만 가고 그리움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야, 사업에 몰두하자. 이대로 이렇게 무너질 순 없어!’
그 후 준석은 광적으로 돈 버는 일에 전념을 했다.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벌렸다.
노후 생활을 하려고 사 두었던 땅을 팔아 사업자금을 했다.
그 돈으로 중국 연변주 훈춘시에다 합자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1994년
중국 연변일보 일면 상단 중앙에 준석의 기사가 크게 실렸다.
51:49로 지분을 가지고 중국과 합자로 호텔을 건설 한다는 기사였다.
당시 한국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던 연변자치 주에서는 한국과의 합자 회사를 적극 권장을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준석을 아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준석이 처음 중국 연길에 가서 알게 된 중의원을 하고 있던 조동채라는 사람도 찾아 왔다.
그는 준석에게 연길에다 현대식 의료기를 갖추고 병원을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연길에다 조동채 이름으로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를 둔 자그마한 병원을 개원했다.
환자들은 새로운 의료 시설에 너도나도 찾아와 마치 야시장처럼 붐볐다.
바쁘게 지나다 보니 정인의 생각은 차츰 희미해 졌다.
일정기간이 지나면 한국에 들어와 비자를 갱신해야하는 기간에 그가 없는 틈을 타 의료 기계들은 하나씩 없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조동채는 기계들을 다른 데로 빼돌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중고 X-LAY 기계라도 중국에선 평생을 쓰고도 남을 돈이었다.
그는 중국 공안부에 호소도 해 보았지만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점을 알게 된 걸로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병원은 개원 한지 6개월 만에 정리를 해야 했다.
조동채는 북한에서 도망 나온 사람이라며 북한 공작원도 찾고 있다고 했다.
준석은 많은 손해를 보았지만 그는 그렇게 원통하지는 않았다.
그런 돈은 중국에서 번 돈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남을 위해 쓸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북한 사이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도문 과 훈춘에는 많은 북한 주민이 도망 나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참으로 처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남의 집 뒷간에 움막을 짓고 사는 사람, 거렁뱅이 짖을 하고 다니는 사람, 밤에 물건이 아닌 밥을 훔쳐 먹는 사람, 하여튼 우리 동포가 그렇게 처참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준석은 수없이 많이 보았다.
그들은 공산주의의가 몰고 온 빈곤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그들이 안정되게 살 수 있게 하겠다고 준석은 호텔 뒤쪽에 부속 건물로 창고 몇 동을 지었다.
처음엔 창고로 사용하지만 유사시엔 그들이 머물 수 있도록 개조가 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일하고 살 수 있게끔 일자리도 준비를 해야겠다고 계획하고 있었다.
준석은 그들을 보면서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너무나 화려한 고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중국에서 가끔 만났던 도식이라는 조선족과 개산춘에서 좀 떨어진 어느 산골마을로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산수가 수려하고 바위의 생김이 우리나라 산과 비슷해 마치 설악산을 연상했다.
그 곳 마을 뒷산에는 야생으로 자란 가래나무가 많았는데, 한 노인이 말하길 가래나무 가지의 진액으로 복수 찬 간암(肝癌) 환자를 살린 적이 있다고 한번 연구해 보라고 했다.
중국 사람들은 술을 많이 먹어 을형(B형) 간염이 많았다.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지구상의 모든 자연은 아직도 인간에게 많은 것을 제공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용되어 현대의학은 그 방법을 꾸준히 연구해 온 것이다.
준석도 그런 맥락에서 식물을 이용한 약재 개발에 늘 신경을 써온 터라 이런 산골마을에서 중요한 단서를 얻은 적도 있었다.
준석은 할아버지 말씀대로 언젠가는 실험을 한번 해 보리라 생각하고 수첩에 그 방법을 자세히 적어두었다.
도문에 사는 도식이를 따라서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집 뒷뜰에 아름다운 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 탐스러운 꽃들은 모두가 양귀비였다.
도식은 꽃이 떨어진 호두 알만한 둥그런 봉우리에 주머니칼로 능숙하게 '찍' 흠집을 냈다.
갈라진 자리에서 하얀 진이 송골송골 맺혀 나왔다.
도식은 하얀 진을 칼로 걷어 담배 한가치를 뽑아 '쓱' 바르고는 준석에게 내밀었다.
조금 있으니 진을 바른 곳이 까맣게 변해 버렸다.
준석이 사양하자 도식은 잘 켜지지 않는 라이터를 여러 번 켜대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몇 모금 빨더니 무표정한 상태로 멍하게 서 있었다.
그것은 아편이었다.
중국은 아편 전쟁으로 많은 인명을 잃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였는데도 아직도 양귀비를 집집마다 재배하고 있었다.
\"이 지방은 양귀비가 많은 곳입니다.\"
\"집집마다 없는 집이 없군, 한국에선 마약이라고 해서 키울 수가 없는데 여긴 단속도 안 하는가 보군.\"
\"여기 까지 손이 미치지 못해요. 장사 한번 해 보시겠어요. 제가 수집을 할 수 있어요. 헤로인을 만드는 것도 알아요.\"
도식이의 말을 들은 준석은 잘못하다가 범죄조직에 휘말려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양을 수집해 놓았다는 도식이는 무게와 판매 금액 등을 계산해 준석에게 써 주었다.
한국에서는 몇 천배의 이득을 볼 수 있다며 어마어마한 액수의 금액이 적힌 종이를 보고 준석은 잠시 동안 잘못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천문학적인 금액에 준석의 의지가 조금만 약했더라도 어쩌면 받아 드릴 뻔한 사건이었다.
그 보다도 현재 진행 중인 호텔 일에 더 신경을 쓰자며 준석은 거의 중국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중국 경제 특구인 훈춘에 고층 건물을 지을 계획도하고 있었다.
소련과 (러시아), 중국, 북한 등 삼각지대에 유엔에서도 지원을 하고 건설 중인 경제 특구에 그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내친 김에 나라국익도 생각하면서 헌신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중국 정부에서도 그가 추진하고 있는 호텔이 90 % 이상 진척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중앙에선 또 다른 사업을 알선하기 위해 그에게 많은 배려를 하고 있었다.
중앙당에서 파견한 안내원과 정부 고위관리와 통역 겸 운전수 그렇게 3명은 마치 준석을 납치해 가듯 준석을 데리고 새벽 4시에 작은 찦차에 몸을 실은 채 벌목장으로 향했다.
일찍 출발을 해야 하는 국경지역이 왜 그리도 긴장을 하게 했는지, 그는 나라와의 국경이라는 단어 한마디로 우리나라와 북한과의 적대 관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국경이지 그들은 서로 대화를 해 가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경제 특구 끝자락에 위치한 목재 생산지였다.
무수히 많이 잘려진 굵은 목재더미가 산만큼이나 높게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준석은 우리나라의 자원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다시 한 번 실감하고 있었다.
아름 들이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광활한 지역에 새벽안개가 자욱히 드리워져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준석은 언젠가 정인과 강원도 정선에 갔을 때 안개 낀 숲속을 뛰어 다니며 술래잡기 할 때를 연상하고 마치 그녀가 나무 뒤에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정인아! 지금 어디 있니?'
그런 시간에도 그녀를 그리워해야 하다니 준석은 정말 그녀를 잊을 수 없는 것일까?
나무사이를 헤집고 칼날 같은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나무 사이사이 마다 햇빛이 내리 깔리는 광경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멋지다, 멋져!' 언젠가 보았던 미션 영화 속의 주제곡이 그의 귀에 들리는 것 같은 야릇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준석은 미친 듯이 안개를 헤집고 아름 들이 나무 사이를 마구 돌아 다녔다.
마치 그것들이 자신의 소유인양 꿈에 부푼 준석은 마냥 흥분에 쌓여 있었다.
정인과의 추억도 함께 이곳에다 묻어 버리고 건물을 짓겠다고 생각했다.
가늘게 적셔진 그의 눈가엔 어느새 흥건히 고여 있었다.
동해를 통해 한국은 물론 일본 등 아시아에서의 무역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 생각하며 언젠가 찾아올 정인을 생각하며 마지막 남은 인생을 걸고 싶었다.
이곳을 통해 원목과 대륙의 지하자원이 쏟아져 나온다면,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로서도 상당한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중공업 부분도 이 곳 경제 특구를 통해 진출하게 되고 자연히 북한과도 교류가 되어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 날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도 했다.
경제 교류로 인한 군축문제와 불가침 조약도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준석은 정신없는 의욕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애국자가 되어 있었다.
준석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H그룹의 K 회장님을 만나 80층 건물에 대한 논의도 했다.
훈춘의 호텔은 그러한 그의 계획의 일환으로 전초 기지인 셈이었다.
준석은 중국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중앙 당원들과의 잦은 만남으로 이제는 그들과 중공제 따발총을 들고 사냥도 같이 다닐 정도로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준석은 중국에서 가끔 시간이 있을 때 마다 남쪽 밤하늘의 별을 보며 정인이가 부디 행복하길 빌었다.
‘정인아! 건강해야 돼! 나도 잘 지내고 있어.’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올 때까지 정인은 몇 달째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준석은 그냥 정인이가 행복하게 살기만을 빌고 있었다.
한편 정인은 밖에도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는 침대생활로 오로지 창밖을 내다보며 준석과의 추억만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병실 침대에 누워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유난히 새털구름이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저건 새털구름, 저건 아기 구름, 저것 봐 말 타고 달리는 것 같아! 그치?'
정인은 언젠가 한강 시민공원 뚝방에서 그의 무릎을 베고 구름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던 한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자기야 ! 나, 많이 아파요. 이러다 죽으면 당신을 영영 볼 수 없을 텐데......'
간호사가 링거병을 들고 들어왔다.
\"주사 맞으세요.\" 간호사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정인에게 말했다.
정인은 허공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창 밖에서 준석이 부르는 것만 같았다.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혹시, 혹시, 정인은 말라있는 자신의 얼굴에 예쁘게 화장을 해본다.
점점 말라 가는 자신의 몰골을 혹시 찾아오면 추한 몰골을 그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작은 손거울을 숨겨 두고 자신의 변화를 살피던 정인은 손거울을 아예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이젠 찾아와도 안 만날 거예요.’
정인은 몸이 아프다보니 자신도 통제 안 되는 변덕을 부리고 있었다.
그와 사랑을 나누던 생각이 날 때엔 정인은 정신병자처럼 눈동자가 넘어가곤 했다.
지혜는 그런 정인을 동정하며 늘 신경을 쓰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정인의 병실을 들르곤 했다.
지혜는 정인씨가 많이 아프다며 준석에게 여러 번 전화를 했으나 중국에 가 있는 준석에게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도 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 토록 사랑했던 여인인데...
하지만 지금은 잘 살고 계실 선생님에게 지혜는 또다시 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정인은 하루가 다르게 병색이 짙어만 갔다.
\"좀 어때요?\"
\"그냥 그래요.“
정인은 힘없이 말했다.
\"지혜씨, 저 T V 좀 켜 주세요. 여기 오래 있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요.\"
지혜가 T V 를 켜자 마침 뉴스가 나왔다.
뉴스가 끝날 무렵 사기 공갈죄로 붙잡혀 가는 수갑 찬 남녀의 모습이 비쳤다.
\"아니 잰, 요숙이 아니야!\"
화면사이로 휙 지나가는 사이로 요숙의 얼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말이 튀어 나왔다.
\"네, 요숙이요?\"
지혜는 언젠가 준석이 간통사건으로 연루된 요숙이라는 여인을 생각했다.
\"틀림없나요?\"
\"네, 요숙이에요. 어쩌다 저 지경까지.\"
부부가 간통 사기로 돈을 뜯어내려다 들통이 났다는 뉴스는 정인에게 충격을 주었다.
\"저...저 여자가 결국 또...\"
\"요숙이를 아세요?\"
\"네, 선생님...아, 아닙니다.\"
\"선생...님...이요?\"
지혜는 떠올리기도 힘이 들었는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 졌다.
반쯤 가려진 요염한 요숙의 얼굴이 T V 화면을 가득히 메웠다.
그녀의 핏기 없는 얼굴에서 정인은 친구로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
비록 한때는 그녀를 미워한 적도 있었으나 그녀의 파란 많은 인생에 동정도 갔다.
정인은 순간 살짝 보이는 요숙의 이마에 골이 깊게 패인 상처를 발견했다.
\"아니! 저 상처......\"
\"어쩌다 이마에...\"
크로즈업된 화장기 없는 그녀의 이마엔 흉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저 상처는 대학 시절 미팅 때 그녀의 파트너와 오해로 인해 작은 몸싸움을 하다 남자 파트너가 말리다 그만 상처를 냈어요.”
\"그 때 날 무척 원망했었어요. 얼굴 때문에 시집도 못 가겠다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인은 준석으로부터 대충 들었던 간통사건을 지혜로부터 자세히 듣고 그간의 오해를 풀었다.
병중인 정인의 애틋한 사랑에 지혜는 고개를 돌려 눈시울을 붉히기를 여러 번 이었다.
세월은 어느덧 초가을로 접어들어 가랑비가 내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준석은 피곤한 몸을 침대의 베개를 높게 놓고 등을 의지하며 무역센터 서류를 꺼내어 마지막 검토를 하고 있었다.
중국과의 접촉으로 인해 하나하나 계획대로 추진이 되어 있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마침내 중국정부로부터 토지 임대와 약간의 융자를 해 주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런 일들이 순탄치 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중국이란 나라는 원래 대륙의 기질이 있어 만만디라고 해서 모든 것을 느긋하게 다지고 다지는 나라였다.
우리나라처럼 빨리 빨리 문화가 팽배한 나라 사람들은 모두 중국에서 실패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 했다.
그가 중국을 알아 가는데 만도 많은 시간과 돈을 허비한 후라, 그들과 상대하는 데는 '이에는 이' 라는 속담을 적용시키고 있었다.
중국에선 무엇이든 다 되고 무엇이든 안 된다는 말을 꼭 명심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준석은 한국에 오면 모든 상황 분석을 컴퓨터에 등록하고 또 분석해 왔었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준석도 그들이 말하는 이번에 성사를 시키겠다는 그런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있지 는 않았다.
하지만 중국 측에서 고위급 중앙당 간부와 정부요인이 나온다는 것은 많은 비중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성 싶었다.
나라 대 개인이 그것도 나라의 명예를 걸고 거대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는 것에 대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준석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것이 비록 성사가 안 된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중국과의 관계 위상이 높아 있어 또 다른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 우위를 차지 할 수 있었다.
중국 경제 특구에 건설할 80층 건물은 연 건평 5만평 규모의 초대형이었다.
일차 모임은 3 일 후 중국에서 고위급 중앙당 간부와 연변자치주 주장과의 계약서작성을 결정하는 날이라 다음날 오후에 출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준석은 세심하게 자료를 살피고 있었다.
우리나라 모 은행에서도 서류만 갖추어 지면 적극 협조하기로 한 상태였다.
벌써부터 준석은 빌딩 제일 위층에다 자신의 터를 만들어 놓고 중국과 북한 그리고 소련을 굽어보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동북아 교역의 중추 역할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성취감에 미리부터 도취되어 있었다.
준석은 이번 일로 중국에다 하나의 이정표를 남길 것이라 생각하며 잠을 설치고 있었다.
조용한 한밤중 적막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준석은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방학 동안에 수원 외가에 놀러 간 작은딸 연지가 몸이 아프다며 저녁에 전화가 왔었다.
다음날 새벽에 가기로 했기 때문에 그 일인가 하고 지레짐작을 한 것이다.
급하게 전화를 받으니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김준석씨 계신가요.\"
\"네 접니다, 누구십니까?\"
\"이렇게 밤늦게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그녀의 목소린 의기소침하게 들렀다.
\"이정인이라고 아시죠?\"
정인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준석의 식어져가는 마음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잊으려고 고민해왔던 생각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잠을 설쳐 움푹 들어간 그의 두 눈엔 갑자기 생기가 돌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 얼마나 보고 싶었던 정인인가! 얼마 만에 들어보는 이름인가! 그의 모든 정열과 열정을 다 받쳐 사랑했던 정인이......'
\"네 압니다, 알고말고요.\"
\"전, 동생 영인인데요. 아시겠어요? 전에도 몇 번...... \"
\"네 안녕하세요.\"
\"언니는 지금 병원에 있어요.\"
\"넷, 뭐라 구요?\" 준석은 소리를 질렀다.
\"위암인데요......\"
\"뭐욧, 위암이요?\"
\"병원에서 지금 식구들이 모여서 유언 중인데 선생님을 한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영인은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말을 계속 이었다.
\"하루 종일 바뀐 연락처를 찾느라 시간을 지체해서 언니가 오늘내일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실례를 무릅쓰고 전화를 했어요. 오실 수 있나요?\"
그녀가 죽어가면서 까지 자기를 만나려 한다는 말에 그는 한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준석은 혼이 빠져나가는 듯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건강하게만 살아가라고 늘 빌었는데 유언이라니 정인이가 죽어간다는 말인가!'
그가 조금 전 까지 보고 있었던 중요한 서류들은 휴지조각처럼 그의 발밑에 흩어져 버렸다.
S 병원 중환자실 00 호실이란 말만 듣고 수화기를 맥없이 떨어뜨리고 허둥지둥 옷을 입었다.
손이 떨려와 겉옷 단추가 잘 끼워지지 않았다.
정신없이 뛰어나가는 아빠를 보며 연주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아빠 ! \"
연주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아빠의 당황한 행동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급한 환자가...\"
연주를 뒤로하고 뛰쳐나갔다.
준석의 눈에 비친 가로등과 주위의 불빛이 희뿌옇게 번져 보였다.
‘쌩긋쌩긋 웃어 주던 정인이...... 웃을 때 한쪽 볼에 보조개가 더욱 매력적인 정인이......‘
'자기야!' 하고 애교 부리며 부를 땐, 빨아 드릴 듯한 그녀의 시선에 준석의 온몸이 저려 오곤 했었다.
준석은 벌써부터 정인이 모습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의 내면에 숨어 있던 그리움은 마치 동면의 어둠 속에서 방사에너지를 받으려고 햇빛을 따라 굴 밖으로 나온 곰처럼 무지하게 탄력을 받아 북받치고 있었다.
정인이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고 눈물은 자꾸만 흘러내렸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옷소매로 눈물을 연신 흠치며 차를 몰고 있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주체할 수 없는 흥분된 상태로 몇 번씩이나 사고가 날 뻔 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병목현상으로 차량은 정체되어 도로를 가득 메웠다.
교통체중은 준석의 마음을 더욱 달구고 있었다.
준석의 마음은 벌써 정인에게 가 있는데 몸은 아직도 도로 한 복판에 있었다.
‘암이라니 ! 정인아 내가 잘못 했어! 차안에서 뛰는 바보가 여기 이렇게 느리게 당신한데 가고 있어 정인아 조금만 기다려.’
준석의 두 눈은 초점이 풀린체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신호등에서 정지를 했는데 옆 차선이 비어 있어 그는 옆으로 차선을 바꿨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가 미처 속력을 줄이지 못해 그의 차를 들이받았다.
뒷 차 운전수는 그에게 다가와 보험처리를 하겠다고 했지만, 준석은 문도 열지 않은 채 덜렁거리는 뒷밤바를 이끌고 빠르게 지나쳤다
\"참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뒷 차 운전수는 극 극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는 준석의 차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어느덧 병원에 도착한 준석은 차를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 두고 뛰었다.
즐비하게 나열되어 있는 병실의 호수인데도 그녀가 입원한 병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밤늦은 시간인데도 하나 둘 복도에 나와 앉은 보호자들, 그들에게 물었으나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마침 링거 병을 들고 지나가는 간호사를 만나 그녀에게 물었다.
\"오른쪽 을 돌아서 세 번 째...\"
준석은 간호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실로 달려갔다.
노크도 없이 병실 문을 확 열어 젖혔다.
서너 명의 초췌한 얼굴들이 일제히 준석에게 쏠렸다.
준석은 그제 서야 정신이 들어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댓평 남짓한 사각 방 창가에 놓인 음료수 캔들, 어울리지 않는 꽃바구니는 작은 테이블 위에 잎이 늘어진 채 놓여 있었다.
한쪽 벽으로 밀쳐놓은 듯한 침대 위에 하얀 시트만큼이나 창백한 여인의 깡마른 얼굴, 링거 주사에 힘없이 팔을 맡기고 누워 있는 여인은 정인이 어머니가 암에 걸린 걸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닌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일 년 전 그가 만났던 정인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녀와 준석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눈 웅덩이에 빠져서 손전등에 비쳤던 바로 그 눈빛...
토끼의 눈빛처럼 막연히 그에게 도움을 청하던 애처롭고 힘없어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준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쳐 왔다.
그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정인은 힘없는 손을 허공에 내 저으며 사람들에게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들은 노크도 없이 들어온 준석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며 하나 둘 병실에서 빠져나갔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나이든 여인도 뒷걸음으로 준석을 쳐다보며 나갔다.
준석은 말을 잊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정인은 일어서듯 반기며 손을 벌리고 있었다.
손에 꽂은 주사기와 연결된 링거병은 마구 흔들렸고, 피가 주사기를 타고 호스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준석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얼마나 보고 싶었던 그들인가! 얼마나 그리웠던 그들인가!'
그녀는 뼈만 남은 앙상한 두 팔로 그의 목에 매달렸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그의 체온인가.
정인은 따스한 준석의 체온을 느끼며 온몸에 힘이 솟아올랐으나
그에게 매달린 그녀의 팔에 스르르 힘이 빠지고 그녀는 침대 위로 넘어지듯 쓰러졌다.
갑작스런 충격에 그녀의 심장 박동은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풀 없이 쓰러져 있는 정인을 바라보며 맥없이 흐르는 눈물은 그녀의 베개닛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정인의 감겨진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내렸다.
두 사람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서로 비비며 말을 잃고 있었다.
정인은 힘없이 눈을 뜨고 준석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응 그래, 나도\"
준석은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많이 아파?\"
\"아뇨, 하나도 안 아파요.\"
정인은 그에게 안심을 시키려 노력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그런 말들이 준석을 더욱 가슴 아프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자기의 얼굴에 갖다 대고 눈을 스르르 감았다.
\"내가 잘못 했어. 이런 줄도 모르고.\"
준석은 눈물로 얼룩진 정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대고 그녀의 머리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준석은 수없이 많은 고통의 그리움을 소리 없는 통곡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정인의 감은 눈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맨손으로 미련스럽게 닦아주며 준석은 참담한 심정으로 그녀를 한동안 안고 있었다.
잠시 후 울다 지친 그녀는 잠이 들었다.
준석은 잠이든 그녀의 앙상하고 창백해진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을 잡고 있는 뼈만 남은 그녀의 손가락은 핏기라곤 찾아 볼 수도 없었다.
답답한 듯 가끔씩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보며 준석도 가슴이 답답해 오기 시작했다.
병실로 들어선 그녀의 어머니는 준석에게 집에 가서 쉬라고 했지만 그는 자기가 병실을 지키겠노라고 했다.
준석은 그날 밤 그녀 침대 옆에 앉아서 밤을 꼬박 새우며 많은 생각을 했다.
아침결에 눈을 뜬 정인은 침대 옆에 기대어 앉아서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준석을 보았다.
정인은 꿈에도 그리던 준석이가 이렇게 자기 옆에 앉아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정인은 준석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살그머니 만져 보았다.
졸고 있던 그가 깜짝 놀란 듯 눈을 떴다.
\"잘 잤어?\"
준석은 잠결에 그녀를 보고 물었다.
\"예, 오랜만에 푹 잔 것 같아요.\"
정인은 준석을 보자 살고 싶은 의욕이 솟구쳤다.
\"나 살 수 있을 까요? 당신을 보니까 살고 싶어요.\"
\"그럼 살 수 있고말고.\"
\"아니예요. 전 가망이 없대요? 이렇게 당신을 본 것만으로도 전 만족해요.\"
정인은 갑자기 현실을 직시 한 듯 그에게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은 나을 수 있어.\"
정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이라도 한 듯 눈을 지긋이 감았다.
준석은 까실 하고 홀쭉해진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어머니가 들어오시며 초췌한 준석의 얼굴을 보시고 피곤할 테니 그만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집에 갔다 다시 올게.\"
준석은 눈을 감고 있는 정인에게 말을 했다.
그녀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물었다.
\"꼭 오실 거죠?\"
\"응, 그럼 오고말고.\"
준석은 집으로 가면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지만 중국 문제에 봉착해서는 난감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방안에 널려 있는 서류를 주섬주섬 챙기며 어제의 일들이 꿈이었으면 하고 바래 보았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죽어가는 정인의 모습을 본 그는 갑자기 지구가 거꾸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어제 흥분되어 서류를 보던 그의 모습은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인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 위험한 강물도 서슴없이 뛰어들지 않았던가! 나는 왜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단 말인가! 위암, 위암이란 정말 치료가 불가능한 걸까?'
준석은 암에 대해 연구해오던 것을 중지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배우면 써먹을 때가 있다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준석은 온종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는 중국에서 추진 중인 사업에 대해선 머리가 아팠다.
처음시작과는 달리 그의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사업이니 만큼 그는 섣불리 결정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인아! 내가 어떻게 해야 돼지? 응, 정인아!'
준석은 비상 약을 꺼내려고 머릿장 서랍을 열었다.
그 속엔 아직도 그대로 있는 아내의 부롯지가 그를 더욱 서글프게 하고 있어 그는 서랍을 ‘꽝’ 닫아 버렸다.
준석은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살려 주세요. 살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그는 중국에서 추진 중인 사업을 마무리하고 오고 싶었지만 그 때는 이미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녀를 잊기 위해 그토록 수많은 날들을 고통 속에 헤매 오다 이제 중국에서의 사업이 계약만 남았는데, 또다시 그녀로 인해 그 사업을 포기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운명처럼 여겨졌다.
준석은 갑자기 한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섭아! \"
\"준석이구나! 웬일이야 .\"
그는 잠에서 덜 깬 듯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무슨 일이 있어? 무슨 일이야!\"
한섭은 좀 전 보다는 다소 맑은 목소리였다.
\"아냐. 그만 자라, 잠을 깨워서 미안하구나.\"
\"그래. 그럼 내일 전화 해 응...\" 한섭은 다시 잠에 취한 듯 비몽사몽인 것 같았다.
준석은 이번 일은 자신에 의지대로 처리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손으로 정인을 치료해야만 된다는 생각으로 굳혀지고 있었다.
준석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작은딸 연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픈 곳은 좀 어떠냐.\"
\"아빠 괜찮아요. 좀 체했었나 봐요.\"
\"그래, 다행이구나, 할머니 음식이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지 말아라, 내가 안가도 되겠니?\"
\"안 오셔도 돼요. 할머니랑 집으로 가려던 참이에요.\"
\"응, 그래 다행이구나. 집으로 와라.\"
준석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중국에도 전화를 했다.
일일이 통역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말 몇 마디인데도 통화는 무척 길었다.
준석은 현재 진행 중인 사업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연기해야겠다고 말했다.
중국 측에선 이미 높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일단은 만나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준석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중국에 같이 갈 일행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서조욱에게 전화를 했다.
\"전 사정이 있어 이번에 못 갈 것 같아요.\"
\"아니, 당사자가 가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고.\"
\"우선 가셔서 연기를 좀 해 보세요.\"
\"허, 참,\"
그는 어이가 없어 했다.
\"당사자가 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갈 이유가 없어요.\"
\"...... 알았습니다. 생각 해 보고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 날 준석은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그는 가뜩이나 마른 데다 이틀 밤의 고민으로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다음날 오후 준석은 병원으로 달려갔다.
인기척이 났는데도 고개를 떨군 채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측은해 보였다.
준석은 그녀의 머리를 들고 베개를 바로 놓는 순간 그만 온 몸이 굳어져 버렸다.
베개 밑에선 도금이 벗겨진 탈색된 싸구려 목거리와 파란색 줄무늬의 벙어리장갑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가 처음 만나 그녀에게 사준 그 목걸이 그 장갑이었다.
“아니! 이것이......“
준석은 그것을 집어 들고 그만 마음이 북받쳐 가슴이 꽉 메어 왔다.
'그녀는 이렇듯 안쓰러웠는데, 도대체 나는 그 동안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정인아! 정인아! 날 용서해줘! 이런 줄도 모르고...... \"
그녀는 인기척에 힘없이 눈을 떴다.
정인은 준석이 들고 있는 목거리를 보자마자 ‘휙‘ 낚아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준석은 순간 움찔했다.
\"정인아! 나야...\"
그는 정인의 손을 잡고 안심 시켰다.
정인은 그제 서야 안심이 되는지 다시는 놓지 않으려는 듯 준석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정인은 목거리를 얼굴에 부비며 말했다.
\"당신이 없을 때 내게 힘을 준 당신의 체온이었어요.\"
정인은 목이 메어 목소리가 ‘꺽 꺽’ 거렸다.
\"그래 미안해. 나를 용서 해줘. 정말 미안 해!\"
준석은 눈물 젖은 그녀의 볼에 자신의 얼굴을 비벼 대며 용서를 빌었다.
그는 그녀가 자기와 헤어져 있던 지난 일 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남자인 자기도 참기 힘들었던 고통을 그녀가 참아 내느라 이런 병까지 얻었다고 생각하니 그는 가슴이 더욱 메어져 왔다.
“나 살고 싶어요? 당신에게 이런 병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알았어 내가 고쳐 줄게.\"
\"정말! 정말예요?\"
정인은 애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배를 움켜잡았다.
\"간호원, 간호원.\"
준석은 병실 문을 열고 간호원을 찾았다.
그는 많은 환자의 고통을 봐 왔지만 이토록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껴 보진 않았다.
간호원이 들어오더니 주사 한대를 놓고는 나갔다.
그녀는 언제 그랬나 싶게 편한 상태로 또 잠이 들었다.
'정인아! 당신을 살릴 거야!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꼭 살리고 말거야'
준석은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가 병실에서 나오자 언제 오셨는지 그녀의 어머니가 복도 의자에 멍하니 앉아 계셨다.
준석은 어머니 옆에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어머니 정인이를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한번 치료 해 보겠습니다.\"
\"아니, 어떻게 고쳐요. 여기서도 못 고친다는데...\"
\"그래도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대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정인이 어머니는 딸도 딸이지만 그런 준석의 몰골이 무척이나 안쓰러워 보였다.
그녀 어머니는 들고 계시던 음료수 캔을 따서 그에게 내밀며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쟤를 살릴 수 있을까요?\"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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