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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목(오두막) 제32편

김병국 2016. 09. 04. 오후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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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에 시달린 그녀가 이렇게 그를 위해 밥을 해서 상을 차렸다는 사실에 준석은 기뻤다. 흰쌀밥을 보니 갑자기 신 김치가 먹고 싶었다. 찬장을 열어 그동안 몰래 먹고 있었던 김치를 꺼내어 상에 놓았다. 너무나 오래된 김치지만 곰삭은 냄새가 오히려 식욕을 땡기게 했다. 잡곡으로 쑨 멀건 죽도 한 그릇 퍼 놓고 상을 가지고 들어가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밥은 조금도 먹을 수 없었던 정인이가 밥그릇에 수저가 갔다. \"괜찮아? 아직 먹을 수가 없을 텐데...\" \"꼭꼭 씹으면 단맛이 느껴져요. 먹을 만 해요.\" \"안돼 아직은.\" 생식만 하던 그녀가 밥이 무척 먹고 싶었나 보다. 준석은 이상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무척 반가웠다. \"힘이 나고 막 움직이고 싶어요. 이제 나으려나 봐요.\" 그녀의 얼굴에서 조금은 생기가 도는 듯 했다. \"어제 당신이 다려 놓은 약을 먹어서 그런가?\" \"뭐, 아니, 그럼 어제 그 약을 먹었단 말야?\" \"네, 저 먹으라고 다린 거 아니였어요?“ 그녀의 또렷한 음성은 오랜만에 듣는 맑은 목소리였다. 얼른 부엌으로 나가 그 찌꺼기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건 준석이 찾고 있었던 그 신비스런 약초임에 틀림없었다. 어쩐지 그도 평소 싫어하는 신 김치가 먹고 싶은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었다. 언제 왔는지 인진쑥을 한웅큼 들고 지혜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저 왔어요\" \"어, 언제 왔어?\" \"아침에 일찍 왔어요. 차가 막혀서 밤에 떠났어요.\" \"밥은 지혜씨가 해 놨구나.\" \"네, 급하게 오느라 반찬거리를 준비 못했어요.\" \"정인씨는 좀 어때요? 자는 것 같아서 산에 올라가서 인진쑥을 좀 잘라왔어요.\" 지혜는 인진쑥을 부뚜막에 내려놓고는 준석에게 힌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한섭씨가 전해 드리라고 해서요.” 준석은 힌 봉투를 받아 주머니에 꾸겨 넣었다. 무슨 편지인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지혜와 얘기하고 싶었다. \"아니! 이게 뭐예요? 가슴에 피가!...\" 지혜는 준석의 가슴 쪽 옷에 피가 묻을 걸 보고 놀라며 말했다. “응, 응 괜찮아!“ 정인은 부엌에서 두런거리는 소리에 귀를 모았다. \"누가 왔어요?\" 그녀는 반사적으로 방문을 열었다. \"어머! 지혜씨 언제 오셨어요?\" 정인은 지혜를 보고 반가워 인사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주보고 웃으며 얘기하는 모습을 본 정인은 그들과 자신사이에 거리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정인은 상냥하고 밝은 지혜에게 친밀감이 갔으나 웬지 오늘 준석과 마주한 그녀는 자신을 외롭게 하고 있었다. \"정인씨! 건강해 보이네요.\" 지혜는 저번에 올 때보다 훨씬 더 혈색이 좋아진 정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정인은 그녀의 자상함이 고맙긴 하지만 무언가 확실치 않은 감정이 그녀를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이리 들어오세요.\" 정인은 마지못해 몸을 한쪽으로 비키며 지혜를 들어오라고 말했다. \"선생님도 들어오세요. 상처를 봐 드릴게요.\" 준석이 들어오자 정인은 통증이 오는지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배를 움켜잡았다. 지혜는 정인을 부축하려 했으나 정인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물리치며 괜찮다고 했다. 지혜는 머쓱한 기분이 들어 부축하려던 손을 슬그머니 뒤로 하고 물러섰다. 윗목에 놓여 있는 의료 상자에서 소독약과 지혈제를 꺼내 놓고 지혜는 준석에게 웃옷을 올리라고 했다. 정인은 누운 채 준석의 상처를 더듬으며 말했다. \"내가 치료했는데 엉성하죠?\" 덕지덕지 붙어 있는 반창고지만 그런 대로 상처를 잘 덮고 있었다. \"정인씨가 치료를 잘해 주셨네요. 그냥 둬도 되겠어요.\" 지혜는 어설픈 정인의 치료였지만 준석의 옷을 그냥 내리고 말았다. 준석은 정인이가 치료해준 가슴을 실실 쓰다듬으며 지혜에게 말했다. \"산에 갔다 올게, 같이 얘기하고 있어, 맛있는 산나물 캐 올게!\" 준석은 코스모스의 꽃잎이 다 떨어져 씨를 실하게 만들어 가는 서늘한 가을바람에 기분이 상쾌한지 콧노래를 부르며 산으로 올라갔다. 지혜는 준석의 뒷모습을 보며 웬지 그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정인의 혈압과 맥박을 재어준 지혜는 그녀와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뭔가 불편한 듯한 정인의 태도에서 그녀는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서둘러 오두막을 내려 왔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서울서 힘들게 찾아왔지만 지혜의 방문이 환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 같아 그녀는 신경이 쓰였다. 지혜는 환자의 과민한 신경을 자극하고 싶지도 않았고, 더구나 자신이 그녀의 눈에 그렇게 비친다는 것이 싫었다. 지혜는 오두막을 내려오다가 그녀의 키 만큼이나 큰 억새밭으로 들어갔다. 가벼워진 억새꽃들은 바람에 흩어져 날아다니고, 저녁노을에 비친 억새의 행렬은 은빛과 금빛사이를 넘나들며 물결처럼 출렁이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 소 큼 지나가는 강한 바람에 넘어질 듯 일어서는 억새의 무리는 ‘휘-잉’ 휘파람을 불고, 그녀는 그 속에서 자신이 갈대처럼 느껴졌다. 마른 억새의 바시락 거림은 고독을 품어 내는 소리 같아 지혜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한 다발의 갈대를 뽑아 드는 순간 섬찟하게 새끼손가락이 아렸다. 억새 잎에 손이 비었는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혜는 새끼손가락을 누르며 준석과 손을 잡고 갈대숲을 뛰어다니던 어젯밤 꿈을 생각 했다. 그녀는 꿈속에서의 다정했던 준석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억새밭을 내려오면서도 그이가 부르는 것만 같아 몇 번이나 오두막을 돌아다보았다. 그들의 오두막 굴뚝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혜는 손가락을 움켜잡은 채 차 있는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뒷좌석에 억새를 내려놓고 일회용 반찬고를 붙였다. '그래 그냥 둘 걸 왜 욕심을 냈지? 당연한 댓가를 치른 거야.' 지혜는 밴드가 감긴 새끼손가락을 보며 마음을 비우지 못한 자신에게 씁쓸한 웃음을 보냈다. 그녀는 늦가을의 시골 풍경을 뒤로 하고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서울로 향했다. 산에 오른 준석은 얼마를 헤매다 몇 가지의 나물을 한아름 뜯어 안고 오두막으로 내려 왔다. \"지혜시는 어디 갔어?\" 준석은 지혜가 보이지 않아 정인에게 물었다. 정인은 준석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조금 전에 갔어요. 이젠 안 와도 된다고 했어요.\" \"왜?\" \"병원에 출근하기도 힘들고 아이 학교 보낼라 바쁘잖아요. 저한테까지 신경 쓰게 할 순 없잖아요.\" \"응, 그래 잘했어.\" 준석은 정인이가 생각이 깊은 것 같아 칭찬을 했으나, 지혜에게 나물을 보내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쉬운 것 같았다. \"그럼 나물을 말려야 겠네.\" 준석은 안고 있던 나물을 멍석에 널어놓으며 이다음 지혜가 오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인은 준석이 나물을 펴 널고 있는 뒷모습에서 지혜가 인사도 없이 간 것을 서운해 하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말대로 여동생에 대한 오빠의 애틋한 마음으로 여겨져 그녀 자신이 잠시 옹졸했다는 생각을 했다. 정인은 지혜가 사 온 일용품들을 정리하다 '암을 정복하는 길' 이란 책과, 바늘과 실을 발견하고 이렇게 작은 것에까지 신경을 써주는 그녀의 섬세함이 새삼 고마웠다. 정인은 혹여 라도 지혜가 서운한 마음으로 가지 않았는지 염려가 되어 내일은 그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할 땐 자신감도 있고 여유도 있었는데 몸이 아픈 이후로는 매사에 과민해져, 작은 일에도 서운해 하고 외로움을 타는 자기 자신이 서글퍼졌다. 준석은 시무룩해진 정인을 보고 또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도 그녀만큼이나 과민해 있었다. \"왜? 배가 아파?\" \"아니예요, 당신이 나 때문에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 미안해요.\" \"괜찮아. 신경 쓰지마. 난 당신과 있으니까, 이렇게 좋은데.\" 정인이 눈물을 글썽거리자 준석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갑자기 눈앞이 뽀얗게 흐려지며 희미한 방안 풍경이 들어왔다. 정인은 그의 목에 매달린 채 춤을 추듯 천천히 움직이며 방안을 돌고 있었다. 이곳에 온지도 몇 달이 지났다. 그와 덮고 자던 이불과 베게, 머리맡에 늘 있는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와 소독약을 담은 종이상자, 알 수 없는 글이 적힌 종이들과 침통, 위로의 하모니카가 서류가방 위에 외롭게 놓여 있었다. 한쪽 벽으론 몇 권의 책이 쌓여 있었고, 구식스런 팔각성냥과 석유등잔은 그 옆으로 밀쳐져 있었다. 그의 손때 묻은 통기타는 벽에 기댄 채 쉬고 있고, 쪽거울 위에 모서리가 떨어진 벽시계는 쉬지 않고 똑딱 거렸다. 사방 황토벽에 매달린 크고 작은 누런 약봉지들이 각자의 냄새를 풍기며 대롱거리고 있었다. 정인은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참고 있던 눈물이 투둑 그의 어깨에 떨어졌다. ‘이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넓은 것일까?’ 정인은 아주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는 그에게서 무한한 빛이 전신을 감싸고 있는 듯한 포근한 느낌에 온몸이 저려 왔다. 그녀는 한참이나 그의 품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부엌에 나갔다 올게.” 준석은 힘들어하는 그녀를 자리에 눕혔다. 어느덧 어둠이 깔리고 뒷뜰에 있는 늙은 소나무에 걸친 초승달은 오두막을 스산하게 비추고 있었다. 언제 부턴가 산에 올라갔다 올때쯤은 항상 앞마당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그녀를 생각하며 시 한편을 지어 보았다. “이슬맞은 머릿결은 참빗으로 빗었는가 ! 머언길 바라보며 님의소리 들어볼제 적막한 이 한밤에 삽살이는 짖어대고 늙은 송에 걸터앉은 초승달은 떠나려만 하누나 ! 달아달아 초승달아 우리님 오시면 너를 깨워 보낼테니 밤안개 이불 덮고 한잠 푹 자려므나”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찌리릭 찌리릭' 들려 왔다. ‘이 곳에 봄에 왔는데 벌써 가을이 왔구나! 연주와 연지는 잘 있겠지. 어머니는 지금쯤 무얼 하실까? 오늘도 두 분이 마주앉아 자식들 걱정에 잠을 설치지는 않으시는지.’ 그는 세월의 빠름을 느끼고 있었다. 준석은 부엌에 들어가 어제 닳인 풀을 다시 한 번 더 닳여 보았다. 한번 닳인 재탕인데도 처음과 같이 빨간 색깔의 물이 우러나와 참으로 이상한 풀이라고 생각했다. 준석이 약사발을 들고 들어가니 그녀는 베개를 허리에 받치고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힘이 드는지 준석이 건네주는 약 사발을 받아 들고 조금씩 조금씩 쉬어 가며 마셨다. 잠시 후 그녀는 약에 취해 금방 잠이 들었다. 다른 때 같으면 작은 통증이라도 있었을 텐데 오늘은 그것마저도 없었다. 이따금 그런 날도 있어서 그러려니 했다. 이 약이 효과가 있다면, 내일 아침에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다 하늘엔 별들이 반짝이며 그들을 부르는 것 만 같았다. 밤 공기가 찬지 정인이는 이블을 여미고 있기에 방문을 닫고 그녀 옆에 누웠다. 등잔 불빛은 은은하게 방안을 비추고 그녀가 간간히 몰아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준석은 새삼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직은 말라있지만 언젠가는 예쁜 살 오른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그는 지혜가 왜 아무 말 없이 그냥 갔는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지혜가 전해준 한섭이의 편지 생각이 나서 그는 방바닥에 벗어놓은 바지 주머니에서 힌 봉투를 꺼냈다. ‘준석아! 고생이 많지? 내가 직접 전해 주려 했는데 네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구나. 말린다고 들을 네가 아니라 그저 정인씨의 병이 빨리 낫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가 뭐 도와줄 것이 없는지 필요한 게 있으면 지혜씨를 통해서 연락해라. 며칠 전에 연주한데서 전화가 왔었다. 내 주소를 좀 알려 달라는 거야, 그래서 알려 주었지. 그런 후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더구나. 마침 지혜씨가 간다기에 여기 동봉하니 읽어보아라. 그 글을 보고 너에게 말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 보이기로 결심했다. 그럼 몸 건강히 잘 있어라. 한섭이가.‘ 준석은 갑자기 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집 생각을 했다. ‘지금쯤 아이들은 공부를 하느라 책상앞에 앉아 있겠지? 연주는 연지를 나무라며 엄마처럼 굴거고, 연지는 그런 언니를 미워하면서도 졸졸 따라 다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밥은 굶지 않고 학교에 잘 다니는지? 처제는 내가 없으니 아이들에게 잘해 주겠지?‘ 준석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옆에 누워 있는 정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숨을 고르게 쉬며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준석은 흔들리는 등잔불 밑에서 딸의 편지를 펼쳐 들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저씨가 가끔씩 전화를 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아저씨 우리아빠 어디 계신지 아세요? 아시면 좀 알려 주세요.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요. 아빠가 너무 오래 안오셔서 걱정이 되요. 아빠는 더 말랐을 거에요. 연지이는 매일 아빠를 찾으며 울어요. 동생을 달래주다 저도 같이 울었어요. 요즘 이모는 우리를 야단만 쳐요. 아마 아빠가 안 계셔서 그런가 봐요. 아저씨! 아저씨는 우리 아빠 어디계신지 아시죠? 아빠는 늘 아저씨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아빠가 중국 가시기전 아저씨 전화번호를 제게 적어 주셨어요. 무슨 일 있으면 아저씨에게 연락하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아저씨가 알려 주세요. 아저씨 우리아빠 있는 곳을 가르쳐 주세요. 네? 아빠가 좋아하시는 김이라도 갖다 드리고 싶어요. 아빠가 어디에 가셨는지 아저씨는 친하니까 아실 거예요. 요즘은 이모도 아빠를 기다리는 것 같아요. 제 방에 들어와서 가족사진을 한참이나 보고 나가곤 해요. 아저씨 꼭 알려주세요. 아니면 편지라도 하게 주소라도 알려 주세요. 아빠 말씀대로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꼭 알려주셔야 해요. 기다릴게요. 꼭 기다릴게요. 착한 우리 아저씨 이렇게 두 손 모아 이렇게 빌게요. 꼭 알려주세요. 그럼 안녕히 계셔요. 김연주 올림‘ 준석은 딸 연주의 편지를 도로 접으며 두 눈을 감았다. ‘연주야! 연지야! 미안 하구나 정말 미안하다. 이 아빠를 용서해 다오. 그리고 조금만 참아 주렴, 밥 잘 먹고 이모 말 잘 듣고......‘ 그의 감긴 눈에선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는 누워 있는 정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람도 없는 방안에서 흐릿한 등잔불빛이 흔들리며 그녀의 얼굴이 움직이고 있었다. 준석은 순간 움찔 했으나 어금니를 깨물고 연주의 편지를 가방 속 깊숙이 넣었다. 그는 딸들의 눈물 젖은 얼굴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옆에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잠을 청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정인이 몰래 산으로 올라갔다. 허리춤에 찼던 하모니카를 꺼내 아이들을 향해 불러주었다. ‘사랑하는 딸들아 아빠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산에 올라서 하모니카를 들려주는 것 밖에 못하는 구나!’ 준석은 산을 내려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죽을 끓이려고 잡곡을 불려 놓고 준석은 방에 들어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어느새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잘 잤어? 오늘 내가 업어줄까?“ “당신이 힘들잖아요.”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괜찮아, 내가 고친 물레방아 구경시켜 줄게.” “정말요!” “응, 그래.” 그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외출할 준비를 했다. 준석은 정인의 목에 따듯한 머풀러를 감아주고 겉옷 위에 쉐터를 덧입혔다. 가을바람에 감기라도 걸릴까 준석은 두터운 옷으로 몸을 감쌌다. 준석의 등에 업힌 정인은 넓지도 않은 그의 등이 너무도 편안하고 따뜻했다. 그녀는 아주 조그만 애기가 되어 그의 등에 업혀 그가 가는 곳엔 어디든지 따라 다녔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준석은 정인을 업고 산바람을 쐬며 물레방아 간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몸무게는 처음보다 훨씬 더 무거워져 있었다. 준석은 힘들었으나 그녀의 병이 낫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 성큼성큼 걸었다. 따스한 가을 햇살이 머무는 널찍한 바위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어때?” “네, 너무너무 상쾌해요. 날아갈 것 같아요.” 그녀는 온돌바위에 앉아 쉼 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에 눈길을 주었다. 그가 고쳐놓은 물레방아는 세월의 연륜을 말하듯 찍찍 소리를 냈으나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손이 닿기만 하면 저렇게 모든 것이 완벽해져 제 구실을 잘하고 있는데......’ 정인은 자신의 병도 틀림없이 그가 고쳐 주리라 생각하며 계곡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보는 그의 얼굴은 많이 야윈 것도 같았으나, 약간은 검어져 있어 건강해 보이기도 했다. 정인은 파란하늘과 물오른 단풍과 물레방아를 보고 있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그가 있고, 자연의 음악이 흐르고, 가을단풍이 있어, 그녀는 한없이 행복했다. 준석은 찬 계곡 물에 손을 담그며, 행복해 하는 그녀를 그윽히 바라보고 있었다. 준석은 물속에서 예쁜 조약돌 몇 개를 주워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정인은 받아든 조약돌을 바위에 널어 물기를 말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노랑나비 한 마리가 정인의 무릎에 날아왔다. “어머나! 나비야.” 깜짝 놀란 그녀는 무심코 나비를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비가 아닌 샛노랗게 물이든 아카시아 잎이었다. “정말 나비인줄 알았어요.” “응, 정말 나비 같네?” 그녀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너무나 예쁜 그 색깔에 도취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손바닥에 노란 물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심술궂은 가을바람이 ‘휙’ 불어왔다. 정인의 손바닥에 있던 나뭇잎은 바람에 날려 흐르는 계곡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아쉬운 듯 멀어져 가는 나뭇잎을 보고 있었다. 준석은 그녀에게 무엇이든 다 떠나는 건 순리요 진리라고 말해주었다. “바람이 차지. 내려갈까?” 그는 정인을 다시 업고 계곡을 따라 내려오며 노래를 불렀다. “옛날, 옛날, 산 속에서 정이랑 준이랑 살았대요. 그들은 물레방앗간에서 몰래 몰래 사랑을 했더래요.” 그의 등에 바짝 달라붙은 그녀는 준석의 목에 팔을 걸고 투정부리듯 애기처럼 행복해 했다. 그녀의 손엔 조그맣고 동그란 새알 같은 조약돌이 들려 있었다. 그날 밤 꿈인지 생신지 흰 수염을 한 노인이 풀뿌리를 하나 주고 갔는데 그걸 솥에 넣고 삶았더니 고구마처럼 부풀었다. 그걸 먹은 정인은 금새 살이 쪄 살을 빼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해야 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너무나 황당한 꿈이었다. 옆에 있어야 할 정인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에 어딜 갔을까?' “정인아, 정인아!” 몇 번을 불렀으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준석은 보자기에 싼 책들과 몇 년 전부터 연구 해 왔던 암 치료에 관한 자료를 다시 꺼내어 방안 가득히 늘어놓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위암이라는 존재는 과연 한방이나 현대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약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암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을 준석은 그가 한의원을 개원 후 10여 년 동안 줄곧 연구해왔던 것이다. 첫째로는 환자가 가지고 있는 희망적인 마음이라 생각했다. 만병은 섭생과 마음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인체는 원래대로 돌아가려 하는 항상성이 있지 않은가. 될 수 있는 한 정인에게 병자라는 마음을 잊게 해주는 것이 우선 이라 생각하며 늘 그녀로 하여금 시간에 여유를 주지 않았다. 약초를 캐는 시간 이외에는 그는 늘 그녀 옆에 붙어 있었다. 혼자서 공상 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그래서 재미있는 이야기나 동화책을 읽어 주곤 했다. 가을이 지나 어느덧 초겨울이 되었다. \"시를 한번 져 볼래? 누가 잘 짓나 내기 해 볼까?\" \"좋아요. 그런데 심사는 누가 하지요?\" 정인은 학창시절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 한적이 있다며 무척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심사는 마을에 내려가 동네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거기서 결정하지.” \"그럼 상은 뭐죠?\" 그녀는 언제부턴가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고 준석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는 얼른 말했다. \"지붕이 자동으로 열리는 빨간 스포츠카로 할까?\" 그녀는 손벽을 치며 기뻐했다. \"그래요. 빨리 시작해요.\" 정인은 마음이 부푼 듯 했다. 준석은 그녀가 낫기만 한다면 그녀가 원하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 정인은 마치 시험 볼 때 옆 친구가 볼까 봐 손으로 가리듯 하고는 열심히 글을 썼다. 그가 보는 척 하면 그녀는 몸까지 돌려가며 무엇인가를 마구 적어 내려갔다. 준석은 정인이가 이토록 신이나 한적이 없었는데 글짓기 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정인이 이토록 좋아하는걸 보니 너무너무 흐뭇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는 아무렇게나 글을 지었다. 준석은 동네 사람들은 분명 정인이 글이 좋다고 할 거라며 속으로 좋아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뇌물 주기 없기다.\" 하며 정정당당히 하자고 말했다. 다 지은 글을 서로 바꿔서 보았다.

댓글 2개

정 승 원 2016. 09. 08. 오전 10:42

주인공 준석의 지극한 정성 어린 간호가 드디어 효험을 보이는군요 제발 건강해 져서 아름답고 행복한 부부로 생기 넘치게 살아 가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별에서 왔니??? 지구에서 찾아 보기 힘든 캐릭터를 가진 준석.... 너무 멋 있고 훌륭해서 바라 보기만도 아까운 님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 부는 데로 고귀한 인격의 향 날리어 뭇 남성들의 DNA유전자에 정착되어 다 복제되었음... 감동의 글 올려 주신 선생님께 진심 감사드립니다 건강히시고 행복하게 독자들 곁에 오래오래 계셔주세요 piease~~~

이 정현 2016. 09. 13. 오전 10:22

\"이슬맞은 머리결은 참빗으로 빗었는가! 머언길 바라보며 님의 소리 들어볼제 적막한 이 한밤에 삽살이는 짖어대고 늙은 송에 걸터앉은 초승달은 떠나려만 하누나 ! 달아 달아 초승달아 우리님 오시면 너를 깨워 보낼테니 밤 안개 이슬 덮고 한 숨 푹 자려무나... 다음 연재 기다리며 자주 들어와서 헛탕 치고 지난 글 다시 읽어 보고 나갑니다 새 글 올려 주세요~~~ 선생님 덕분에 행복한 시간 가져봅니다 ^!^ 한가위... 따듯하고 정다운 시간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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