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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목 (망각의 저편) 제 38회 1권 마지막회

김병국 2016. 11. 07. 오후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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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저편) 준석은 무의식적으로 악세레다를 밟고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양화대교를 건너 홍대 입구를 지날 때 차안으로 매캐한 냄새가 들어 왔다. 데모를 하는 학생들과 그들을 진압하는 전경들이 서로 뒤섞인 채 아수라장이었다. 거리는 온통 체류탄 깨스에 덮여 있어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돌멩이들이 날아 다녔다. 삽시간에 도로는 사람들과 차들로 뒤범벅이 되어 버렸다. 엉겨 붙은 차들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학생들과 시민들...... 그 때였다. 도로 가장자리에서 남학생과 여학생 둘이 경찰들에 둘러 쌓여 원시적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그들은 삽시간에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지나는 시민들은 서로들 각자 체루깨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에 급급했다. 경찰들이 소홀한 틈을 타 준석은 그들 앞에 차를 세우고 얼른 문을 열었다. 그들을 차에 태운 준석은 차선을 바꿔가며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몇 명의 경찰이 곤봉을 들고 달려 왔으나 차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끄응, 끙\" 남학생의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빨리 병원에 가야지.' 준석은 복잡한 거리에서 난립되어 있는 간판을 두리번거리며 다급하게 차를 몰았다. 준석은 데모 군중을 간신히 헤쳐 나왔으나 아직은 정신이 멍한 상태였다. 신촌 로터리 쪽 에서도 학생들이 몰려나와 차량들은 중앙선을 넘어 연희동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준석도 급한 마음에 연희동 쪽으로 급회전을 했다. 순간 반대쪽에서 달려오는 차는 준석의 차를 들이받고 말았다. 학생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차는 튕겨져 한 바퀴를 돌았다. 앞 유리는 바스러지고 본네트는 우그러져진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길을 오가 던 사람들은 쭈그러진 그의 차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차안을 기웃거리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죽었나 봐.\" \"아냐 움직이는 것 같아.\" \"빨리 구급차를 불러요.\" “학생들도 다쳤어요.” 자전거를 탄 사람이 외쳤다. “저기서 기름이 흘러요. 폭발하겠어요.” “어서 문을 엽시다.” “안 열려요.” “유리를 깨요. 유리를.” “빨리요. 연기가 나요.” 구경하던 사람들은 제각각 소리쳤다. 사람들은 우루루 모여 서로 합심을 해 간신히 준석을 차에서 끌어내렸다. 실신한 그는 이마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저 사람은 죽으면 안돼요.” 자전거를 타고오던 한 청년이 말했다. 지나던 사라들과 데모군중은 서로들 의지하며 준석을 치료하고 있었다. 차 밖으로 빠져 나온 학생들도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앰브란스가 앵 앵 거리며 나타나 그들은 병원으로 옮겨졌다. 응급실 간호사는 준석의 가족을 찾기 위해 옷을 뒤져 나온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받질 않았다. 준석의 옷에서 나온 전화번호는 정인의 전화 번호였던 것이다. 그 때 그녀의 집에선 정인이 살아 왔다고 온 가족이 모여 자축을 하느라 전화 소리조차 못 들었던 것이다. 정인은 주연이를 안은 채 식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품에 안겨 낯선 듯 서먹해 하는 어린 딸이 안쓰러워 꼭 안고만 있었다. \"허 참, 하나님이 도우셨구만.\" 술 냄새를 풍기며 빈정거리듯 말하는 경철이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정인은 그를 경멸하듯 째려보았다. 한편 연락을 받고 달려온 준석의 식구들...... 산소 호흡기를 한 준석을 붙들고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아빠-아빠-아빠--\" \"죽지마! 아빠.\" 연주와 연지는 다리를 동동 구르며 준석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이모는 옆에서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수술을 빨리 해야 합니다. 접수를 하세요.\" 의사와 간호사는 침대에 눕혀진 준석을 끌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린 지 몇 시간만에 의사가 나왔다. 병원으로 달려온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우루루 의사에게 모여들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유리조각이 머릿속 깊이 들어가서 좀 힘들었지만 수술은 잘 됐습다 만 한 가지 뇌에 지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준석의 형 준원이가 의사에게 물었다. \"환자의 보호자 되시는 분만 따라오세요.\" 의사를 따라 들어간 준석의 형과 이모에게 의사는 심각하게 말했다. \"수술은 성공적입니다만, 전에 무슨 사고가 있었는지요?\" \"네, 전에도 교통사고로 턱과 팔다리가 부러져 3 개월간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어요.\" \"네에 역시 그렇군요. 이번 사고로 충격이 가중된 것 같습니다. 경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하지만 어쩌면 말을 못하거나 기억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환자의 손에 이것이 들려 있었습니다.\" 의사는 이모에게 싸파이어를 건네주었다. 의사의 얘길 들은 어머니는 아무나 붙잡고 설움에 북받쳐 울었다. \"할머니 아빠가 죽으면 어떻게 해요.\" 연주가 말했다. \"죽지 않을 거야, 네 아빠는 수명이 길다고 사주팔자에 나와 있으니 괜찮을 거다. 괜찮을 거야.\" 그의 어머니는 손녀에겐 지 자신에겐 지 괜찮을 거란 소리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준석의 어머니는 얇은 입술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몇 시간째 그들은 준석의 옆을 지켰다. 초췌한 어머니의 모습을 본 그의 아버지는 이제 수술이 잘 끝났다 하니 집에 가자며 팔을 부축하며 병원을 나갔다. 준석은 일반병실로 옮겨지고 그 날부터 아이들과 이모는 준석의 옆을 떠나지 않고 극진히 간호를 했다. 그녀는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형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이모는 지난날 자신의 언니인 경숙의 과거로 인한 자격지심으로 오히려 형부에게 무심하게 대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가 기억을 되찾으면 어떻게 될지...... 이모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동안 형부의 배려로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도움과 지금까지 살고 있었던가를 생각하며 엄마 없는 조카들만이라도 자신이 돌볼 것이라고 다짐 했었다. 더구나 어린 딸들을 엄마 아빠도 없는 고아로 만들긴 더욱 싫었다. 식구들의 간호 때문인지 준석의 회복은 이상하리만치 빨라 입원한 지 두 달만에 퇴원을 할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일러준 약간의 기억상실증만 아니면 그는 건강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가족들이 도와주면 빠른 회복을 기대해도 된다고 했다. 이모는 딸들에게 아빠가 기억상실증이란 것을 말해 주고는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 주었다. 연주와 연지는 아빠의 기억을 찾아 주려고 앨범을 보여 주기도 하고, 그가 기분이 좋을 때 늘 흥얼거렸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리고 버릇 같은 걸 자세히 알려 주었지만 준석은 딸들이 하니 그저 따라 하는 것 뿐 노래를 말고는 어떤 것도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통증도 자연히 사라졌다. 그런 중에도 준석은 날이 갈수록 정인과의 기억 말고는 조금씩 기억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모는 많은 생각 끝에 기억에 도움이 될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준석에게 싸파이어를 내 주었다. \"사고 났을 당시 이것이 손에 들려 있었대요.\" \"그게 왜 내 손에 있었을까?\" 그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기억이 날 듯 날 듯 하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어느 날 이모는 빨래를 하다 바지 주머니에서 빼 놓은 싸파이어를 그만 하수구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 싸파이어를 찾기 위해 준석은 욕실을 다 뜯어 낸 사건도 있었다. 그 후론 그것이 마치 자기의 분신인양 준석은 항상 지니고 다녔다. \"아빠 공원에 나가요. 아빤 왜 그것만 만지작거려요?\" 딸들은 아빠의 이상한 버릇에 이해가 안 갖지만 그것이 무척 소중한 것이란 건 느꼈다. \"응, 그래 공원에 가자.\" 준석은 딸들과 같이 다니던 공원도 산책을 해보고, 동네 사람들도 만났다. 준석이 조금씩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의 지극한 간호 덕분이기도 했다. 지나온 일들은 어렴풋이 기억을 되 찾아가고 있었으며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준석은 여름 방학을 이용해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여행을 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나갔다. 큰딸 연주가 일등을 하면 외국 여행을 시켜 준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빠, 우리 정말 비행기 타고 외국에 가는 거예요?\" 연지는 아빠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그래, 태국으로 가는 거야 넌 그것도 모르니?\" 옆에서 듣고 있던 연주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준석이 출국장으로 나가고 있는데 하얀 투피스차림의 젊은 여자가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앞서가고 있었다. 준석은 그녀의 옆을 스치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도 준석을 힐끗 쳐다보는 것이 아마 낯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빠 빨리 와요. 빨리 \" 연지는 아빠의 손을 잡고 끌었다. \"연지아, 왜 이래, 아직 시간이 있는데, 그렇게 좋으니?\" \"응, 아빠.\"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연지는 마치 나비처럼 아빠사이를 뛰어 다니며 신이 나 있었다. 준석은 조금 전 지나친 흰색 투피스를 입은 여인에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녀는 출국장 쪽으로 가다가 몸을 돌려 준석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녀는 남편과 한동안 옥신각신 하더니 아이를 안고 빠른 걸음으로 공항 밖으로 빠져 나가고 있었다. 준석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 올랐다. 아내도 행복한 듯 준석에게 다가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비행기가 구름 위로 떠오르자 준석은 눈을 감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후 준석은 영어를 잘하는 낭걸이와 같이 일본 등 동남아시아 5개국을 왕래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금광 사업으로 손해를 보았지만 그 곳 목재 등을 수입해서 복구를 했다. 그는 돈벌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준석은 중부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산허리에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한방종합병원을 지었다. 그 곳은 양수리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무의식 속에서도 그의 추억이 담긴 곳은 각인 되어 있었던지 ...... 병원 3층 그의 방에서 보이는 고속도로 진입로를 오늘도 버릇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문을 열다 날아 들어온 눈 한 송이가 준석의 얼굴에 날아 와 앉고는 금새 녹아 버렸다. 그 눈 한 송이가 주는 작은 촉감이 잊고 있었던 정인과의 날들을 이렇게 되살려 주다니...... 잊혀졌던 10 여년 전의 희미한 추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준석은 망연자실 했다. 모든 시간은 멈추어 섰다. 그녀와 함께 지냈던 수없이 많은 추억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가슴 가득한 그리움이 그를 눈 내리는 뒤뜰로 이끌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병원 뒤뜰, 그가 만들어 놓은 넓고 깊은 연못, 수많은 비단 잉어가 살고 있는 연못 한 가운데에는 성모 마리아상 같은 하얀 미사보를 쓴 여인의 형상이 서 있었다. 작은 아치형 다리가 연못 가장자리로 걸친 듯 연결되어 있었고, 연못 주변에 빙 둘러 심어 놓은 수양버들잎은 떨어진 나뭇가지 위엔 하얗게 눈꽃이 피어 있었다. 준석은 아치형 다리 중간에 서서 미사보를 쓴 여인상 과 마주했다. 온통 눈을 뒤집어쓴 마리아 상이 정인이로 변해버린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눈 웅덩이에서 보았던 미사보를 쓴 듯한 그녀의 모습으로...... 병원 방송실에서 저녁식사 시간을 알리는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 나왔다. 준석은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듯한 여인상을 바라보았다. 정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 행복해요...... 이렇게 당신 가까이에서 당신을 매일 지켜보고 있으니...... 당신이 창가에 서서 저를 보실 때마다 전 늘 행복했어요.' 준석은 사각거리는 눈 소리를 정인의 속삭임으로 듣고 있었다. 여인상이 마치 정인이나 되는 것처럼 그녀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쏟아지는 눈은 준석의 얼굴에 닿아 눈물과 함께 물이 되어 흘러 내렸다. 주위는 온통 백색의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도 하얗게 눈이 쌓였다. 준석의 감색 양복이 하얀 눈옷을 입고 그는 그렇게 눈사람처럼 서 있었다. 그의 입에선 가슴속 깊이 묻혀있던 말이 새어 나왔다. \"정인아! 보고 싶어......\" 지혜는 건물창가에 서서 눈물어린 눈으로 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정인씬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 예요. 미안해요. 선생님께 알리지 못한 것이...\" 지혜의 손에 들고 있던 정인이의 루비반지에 ‘주루룩‘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지혜는 눈을 감았다. 그녀가 운명하기 사흘 전 그녀의 병실에 들렀을 때 앙상한 손을 내밀며 희미한 웃음으로 맞이하던 그녀... 재발로 인해 복수가 차 불룩해진 그녀의 배는 힌 모포에 가려진 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하던 그녀... 지혜의 손을 힘없이 잡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가 끝내 다물어 버리고 눈물 젖은 눈망울로 창밖을 향하던 그녀 의 모습이... “무슨 얘기든 해 보세요.” “그이가 보고 싶어요.” 지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깡마른 손을 만지작거리다 목이 메었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대화였다. 정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한참동안이나 지혜를 바라보는 듯 했다. 그리곤 빗방울이 하나둘 부딪쳐 흘러내리는 유리창에 그녀의 시선 은 힘없이 고정되고 그녀의 눈에선 끝내 참았던 눈물이 주루룩 쏟아지고 말았다. 정인을 바라보던 지혜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이틀 후 링거주사를 팔에 꽂은 채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다음날 늦은 오후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던 준석을 남겨둔 채 정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혜는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엔가 그녀가 살아 있었으면 하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혜는 한 남자를 목숨처럼 사랑하다 이슬처럼 사라져 버린 가련한 한 여인에게 참을 수 없는 연민의 정을 느꼈다. 지혜는 손에 들려있는 반지에서 정인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 원무과 과장인 낭걸이가 지혜 방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윤 선생님, 소녀처럼 센치하게 눈 오는걸 바라보고 계시네요.\" \"아, 예.\" 지혜는 눈을 껌벅이며 어정쩡한 자세로 대답했다. \"아까 날 찾았다는데, 원장님이 안보이네요.\" 낭걸은 지혜가 내다보는 창밖을 무심코 바라 보다 장승처럼 서 있는 준석을 발견했다. \"아니! 원장님이 왜 저리 눈을 맞고 계시죠? 기관지도 약한데... 원장님, 원장님- \" 낭걸이가 창문을 열고 준석을 불렀으나 그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가서 데리고 와야 겠구만.\" 아무 것도 모르는 낭걸은 지혜 방에서 나갔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이 하나 둘 켜졌다. 수은등 불빛은 서서히 밝아지며 주변의 눈꽃나무를 온화하게 비추고 있었다. 준석은 한동안 잠잠했던 가슴의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숨을 들여 마시면 찢어질 듯한 가슴의 통증을 이기느라 준석은 아주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 가슴이... 으 윽......' 그는 몸을 구부린 채 통증과 싸우고 있었다. 다리 난간에 몸을 의지하던 준석은 손에 쥐고 있던 사파이어를 연못 속으로 떨어트리고 말았다. '퐁당' 떨어진 싸파이어는 잔잔한 동그라미를 만들어 놓고 연못 살얼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얼음 속에 숨어 있던 크고 작은 비단 잉어들이 싸파이어가 떨어진 곳으로 모여들었다. 비단 잉어는 마치 울긋불긋한 꽃잎이 되어 물속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준석은 갑자기 몸을 틀어 주차장 한가운데로 뛰어갔다. \"준석아, 준석아......\" 낭걸인 소리치며 그의 뒤를 좇아갔다. 그러나 준석은 검은 색 승용차에 몸을 싣고 시동을 걸기가 무섭게 속력을 내고 있었다. 차안 에선 그가 즐겨 들었던 카치니의 아베마리아가 흐느끼듯 그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마치 정인이가 울먹이며 그를 원망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준석은 터질 것만 같은 그리움이 솟구쳐 가슴을 콱 메우고 있었다. 핏발이선 눈동자는 오로지 한 곳을 향해 있었고, 핸들을 잡고 있는 그의 손등엔 힘살이 불끈 튀어 올랐다. 준석은 평창산속 그들의 오두막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정인아!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가고 있어' 준석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연신 중얼거리며 가속 페달에 온 힘을 가하고 있었다. 그의 차가 문막 인터체인지를 벗어나려 할 때 함박눈이 더욱 거세게 퍼붓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내린 눈은 도로를 메우고, 준석은 위험한 어둠속 눈길을 한동안 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의 눈앞에 아련하게 빨간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며 판초를 뒤집어쓴 두 명의 경찰관이 준석의 차를 세웠다. 그가 차창 문을 열자 매서운 눈바람이 그의 얼굴을 마구 때렸다. 준석은 움찔하며 경찰관을 향해 말했다. “요 고개 너머 평창에 갑니다.” \"돌아가십시오. 대설경보로 통행 금지령이 내렸어요.“ 경찰은 발을 동동 구르며 귀찮은 듯 내 뱉았다. 준석의 얼굴은 굳어졌다. 정인이가 오두막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요 고개 너먼데, 보내주십시오\" \"안됩니다, 가시다 사고라도 나면 우리가 문책을 당해요.\" 준석은 차에서 내려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보내 주십시오. 제발 보내 주세요.\" \"아니...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마세요.\" 키 큰 경찰관은 준석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가야 할......\" \"꼭 가야 합니다, 빨리 가야해요. 환자가 기다리고 있어요. 환자가......\" \"평창이면, 고개 너먼데 보내 드립시다.\" 옆에 있던 키 작은 경찰관은 동료에게 말했다.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지?\" \"천천히 가면 괜찮을 거예요. 얼마나 절박하면 저러겠어요.\" 그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준석에게 다가왔다. \"천천히 조심해 가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준석은 차에 오르면서도 몇 번씩이나 인사를 했다. 그의 차는 고개를 넘어 평창군 노동리 아랫 삼거리를 지나 이름 없는 마을로 들어섰다. 고향 같은 그 길을 준석은 오로지 정인만을 생각하며 안으로 안으로 눈 쌓인 오르막길을 기어들어갔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산밑에 차를 세우고 어두운 눈길을 헤치며 오두막을 향해 달렸다. '아! 저... 저기 오두막이 보인다.' 달빛에 비쳐진 오두막이 눈 속에서 희뿌옇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물 젖은 두 눈엔 마치 굴뚝에서 연기가 몽골몽골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정인이가 저녁을 짓고 있는 것일까?......' 그의 마음은 더욱 북받치고 있었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던 낯익은 길인데도 준석은 몇 번이고 넘어지며 오두막을 향해 달렸다. \"정인아 ! 정인 아 ---\" 그는 그녀의 이름을 수없이 불러대며, 숨이 턱에 닿도록 ‘헉헉‘ 거리며 기어올랐다. 준석은 주위를 살필 여지도 없이 방문을 확 열어 젖혔다. 어두컴컴한 방안은 마치 싸늘한 동굴처럼 적막에 쌓여 있었다. 그는 방안을 살피며 숨어 있는 정인을 찾아내려는 듯 두리 번 거렸으나 그의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틀어 닫쳐진 부엌문을 열었다. '삐끄덕' 소리를 내며 부엌문이 열렸으나 무쇠 솥과 약탕기 만 보일 뿐 거기에도 정인은 없었다. 준석은 미친 사람처럼 이리저리 오두막 주위를 뒤지고 다녔다. 푸르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빨래터에도, 갈대밭에도, 물레방아간에도, 그녀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준석은 허탈감에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은은한 자스민 향이...... 준석은 코를 벌름거리며 그녀가 방 어디엔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아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캄캄한 방안에서 그는 주위를 더듬거렸다. 웃목에 늘 놓아두었던 성냥을 찾아 등잔에 불을 밝혔다. 창호지 바른 문에는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밖을 내다보곤 했던 손때 묻은 문구멍도 그대로,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준석은 방안 구석구석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았다. 그가 아무렇게나 발랐던 울퉁불퉁한 벽지, 그 벽지에 무엇인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준석은 등잔을 들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벽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때론 대각선으로, 때론 거꾸로, 남자 여자 얼굴이 맞닿은 그림도 있고, 언덕에 앉아 하모니카 부는 모습도 있었다. 손으로 가리며 글을 짓던 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준석은 그림을 어루만지며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녀와 같이 덮고 잤던 이불과 베개도 그대로 방바닥에 깔려 있었다. 준석은 이불과 베게를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정인이 냄새가 묻어 나왔다. '아! 그녀의 살 내음이......' “정인아! 어디에 있는 거야! 내가 왔어.” 준석은 정인을 부르며 중얼거렸다. 순간, 준석은 이불 속에서 손때가 묻은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수첩을 집어 들고 등잔불 밑으로 기어갔다. 일기처럼 써 놓은 글씨가 깨알같이 박혀 있었다. 눈물 자국인 듯 군데군데 얼룩이 져 글씨가 번져 있었다. 비 오는 날 '오늘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요. 여보! 오랜만에 당신을 불러보네요. 불러도 불러도 부르고 픈 당신!...... 처음엔 당신을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살았어요.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어요. 당신과 같이 듣던 음악이 나오면 아무 데서나 눈물이 줄줄 쏟아졌어요. 당신이 기억상실증이란 소식을 듣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저만 아니면 당신은 행복하게 사실 거라 생각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했어요. 그러나 공항에서 당신과 당신 가족을 보고 전 한국을 떠나기가 싫었어요. 당신이 숨쉬는 이곳에서 당신을 느끼며 살고 싶었어요. 천둥치는 날 '지금 밖에는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 져요. 혼자 있으니 무섭긴 해도 당신 생각을 하면 모든 걸 잊어버리게 돼요. 당신이 고쳐놓은 물레방아는 오늘도 쉼 없이 돌고 있네요. 물이 흐르는 동안은 언제까지나 돌고 있겠죠? 그러나 제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4개월, 아니 100일정도 남았대요. 지금쯤 집에선 절 찾고 있겠지만 며칠만이라도 여기서 지내고 싶어서 몰래 왔어요. 몇 달 후엔 제가 볼 수도, 걸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쳐요. 전, 은혜도 모르는 몰염치한 여자인가 봐요. 당신이 목숨을 바쳐 고쳐주셨는데...... 당신의 사랑이 너무나 깊어 신들이 시기를 했나 봐요. 우리가 같이 걸었던 언덕을, 숲을, 갈대밭을, 매일 조금씩 걷고 있어요. 당신은 예전처럼 저를 고칠 수 있는데...... 아! 그러나 전 당신에게 갈 수가 없어요. 여기도 간신히 왔는걸요. 기분 좋은 날 오늘은 아침부터 까치가 울어대더니 지혜씨가 왔어요. 지난번에 부탁한 병원 사진을 예쁜 액자에 담아 왔네요. 숲속에 위치한 병원 전경이 아담하게 운치가 있더군요. 강렬한 아침 햇살이 병실 창을 비추고 있어 희망이 솟구치는 것 같아요. 병원 이곳저곳에 환자를 생각하는 당신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아 하루 종일 사진만 보았어요. 그래도 자꾸 자꾸 보고 싶어요. 당신이 걸어 들어갔을 현관문을 손으로 더듬으며 몇번이나, 몇번이나 따라 갔어요. 마치 제가 걸음을 걸어서 들어가는 생각을 하면서 몇 번이나 반복했어요. 당신의 피땀이 서린 병원이라 그런지 보기만 해도 힘이 절로 나네요. 그렇게도 소원하시던 연구에 몰두하시게 됐으니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흐뭇해하며 웃으시는 당신모습이 눈에 선해요. 지혜씨는 당신 병원에 입원하라고 했지만 전 그럴 수 없다고 했어요. 이미 늦은걸요. 혹시 당신이 고치지 못하면... 당신을 믿고 찾아온 환자들이 얼마나 실망을... 아니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지혜씨는 저에게 자상한 언니처럼 대해 주었어요. 그녀에겐 제 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어요. 제가 이렇게 여기와 있는 것도 그녀는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제겐 소원이 하나 있어요. 만약에 귀회가 되신다면 지혜씨를 생각해 보세요. 그녀는 당신을 포근하게 감싸줄 수 있는 따뜻한 여자예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태국에서 사주신 루비 반지를 그녀에게 주었어요. 지혜씨는 극구 사양했지만 당신을 지켜 달라며 떼를 썼어요. 당신은 제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 주셨으니까 꼭 그러리라 믿어요. 당신만 행복하면 전 아무래도 좋아요.‘ 감꽃 줒던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감나무에 꽃들이 활짝 피었네요. 제가 오던 날은 한두 송이만 보이더니 날씨가 따뜻해지자 며칠사이에 활짝 폈어요. 조그맣고 귀여운 미색의 꽃들은 마치 내게 속삭이듯 말했어요. 왜, 혼자 왔냐구요. 당신과 같이 감나무를 심을 때가 생각나네요. 당신이 보고 싶다던 그 주근깨 아저씨는 지금도 살아 계실까요? 우리가 심은 감나무는 잘 자라고 있지만, 한두 가지가 동해를 입었는지 앙상한 가지만 흔들고 있네요. 마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떨어진 감꽃을 하나하나 주워 모아 목걸이를 두 개 만들었어요. 전 아무도 하지 않았을 감 꽃 목걸이 두 개를 세트로 하고 거울을 봤어요. '예쁜데!' 하며 당신이 뒤에서 웃고 계신 것 만 같았어요. 그래서 몇 번씩이나 뒤를 돌아다보았어요. 그런데...그런데... 당신은 보이지 않았어요. 당신이 제 귓밥을 만지시며 잔잔하게 미소 짓던 그 모습이 미치도록 그리워요. 제가 죽기 전에 이 목걸이를 당신 목에 걸어주는 행운의 날이, 그런 행운의 날이 제게 올까요?......' 빗물 새던 날 '아침부터 비가 또 오네요. 요즘은 하루걸러 비가 내려 부엌에 빗물이 새고 있어요. 비가 샌다고 순덕이 어머니와 강 노인이 저를 많이 도와 줬어요. 엉성이 할아버진 제가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 돌아가셨대요.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 그이만 계셨으면, 할아버진 돌아가시지 않았을 거라고 막 으시대며 말했었는데, 당신은 오시지 않았어요. 절위해 그토록 애쓰신 당신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동안 제가 모아온 재산을 연구하시는데 쓰시라고 당신 에게 보냈어요. 당신이 만약, 만약에 이 글을 보신다면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은 저로 인해 너무 많이 슬퍼 하셨잖아요. 당신을 만난 제 인생은 너무나 값진 삶이었기에 전 행복해요.' 당신 꿈꾸던 날 '어젯밤엔 당신 꿈을 꾸었어요. 그래서 언덕에 올라가 마을 쪽을 내려다보았지요. '정인아! 정인아!' 하면서 팔을 휘젓고 막 뛰어오시는 것만 같아 언덕을 몇 번이나 내려갔었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산바람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오랜만에 가져 보는 상쾌함으로 머리가 맑아져 오네요. 그런데, 당신이...... 당신이 자꾸 보고 싶어요. 정말, 정말 보고 싶어 미치겠어! 여보!.....나 살고 싶어요. 아! 당신은 어찌하여 절 그토록 사랑하셨나요? 당신은 제게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 해주셨지요. 자상한 아버지로, 다정한 오빠로, 격의 없는 친구로, 알뜰한 남편으로, 아니 정열적이고 따스한 연인으로...... 오! 당신께 부칠 찬사는 너무도 많군요. 하나님! 어째서 제게 이 사람을 선물로 주셨나요.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제가 이 세상에 나들이 나와서 당신 같이 멋진 사람을 만나, 분에 넘치도록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요. 이제 전 행복하게 죽을 수 있어요. 그런데, 당신 목소리가 너무너무 듣고 싶어요. 제발 저를 한번만이라도 불러봐 주세요. 단 한번만이라도.' \"정인아, 정인아------\" 준석은 수첩을 떨어뜨리며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글씨들이 아롱아롱 눈물을 매달고 그에게 달려드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에선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준석은 수첩을 다시 집어 들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힘이 없어요. 자꾸만 자꾸만 기운이 빠져 가네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정인아! 힘을 내, 내가 옆에 있잖아.' 라고요. 이젠 글 쓰는 것도 힘이 들어요. 눈이 자꾸만 감겨오네요. 꿈속에서 당신 만나러 그만 자야 겠어요.'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안보였다 하네요. 무서운 통증이 다가올 땐 차라리 목숨이 끊어졌으면 해요. 아침에 눈을 뜨면 무거워진 제 몸둥아리는 가자미처럼 납작해진 것 같아요. 이러다가 죽으면 지옥에 갈까요? 이젠 죽음도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네요. 단지 당신을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이 더 두렵고 무서워요. 한번만이라도 봤으면...... 목소리만이라도......‘ 준석은 그만 방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인아, 정인아.“ 그는 이불을 움켜잡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비통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정인아, 내가 왔어. 내가 왔어. 바보! 이 바보야!, 왜, 진작 나를 찾지 않고. 왜, 혼자 ...얼마나 힘이 들었니! ” 준석은 이불을 쥐어뜯으며 한참이나 꺼이꺼이 소리를 질러댔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수첩을 찾아 소중하게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채웠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이미 촛점을 잃고, 행동은 과격해 지고 있었다. 그는 방안 윗목에 놓여 있는 낡은 바구니를 쏘아보고는 그것을 틀어잡았다. 그 안엔 털실로 짠 노란색 조끼가 동그마니 놓여 있었다. '정인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는 미칠 것 같은 아쉬움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준석은 조끼를 가슴에 품어 안고 쓰다듬었다. '빨리 입어 보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허둥지둥 노란 조끼를 감색 양복 위에 걸쳐 입고, 쪽 거울 앞으로 다가섰다. '따뜻하죠?' \"응, 따뜻해, 정말 따뜻해!\" 준석은 정신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거울 앞엔 새까맣게 오그라져 형태조차 알 수 없는, 말라빠진 감 꽃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는 바스러지는 감 꽃 목걸이를 목에 걸고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준석은 마치 도깨비처럼 희미한 등잔불빛 아래서 방안을 서성거리며 중얼거렸다. “산 속 오두막에 정이랑 준이랑은 많이많이 사랑을 했드래요.” 그때 였다. 사나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방문을 뒤흔들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정인이다 소리치며 준석은 방문을 걷어차고 뛰어나갔다. 고라니 한 마리가 후다닥 달아난 뒷편에... 아!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정인이가, 정인이가 눈밭에 '우뚝' 서 있었다. “당신이 살아 있었구나!” “정인아----” 준석은 꼬꾸라지듯 달려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정인아!- 정인아!-\"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그녀에게 자신의 얼굴을 마구마구 비벼 댔다. 그녀와 같이 심었던 눈꽃이 활짝 핀 감나무를 끌어안은 채...... 그의 얼굴에선 피가 흘러내려 노란 조끼를 물들이고 있었다. 순간,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눈밭에 주저앉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의식은 가물가물 멀어지고 있었다. '준석아, 준석아.' 그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엄마가 눈물 젖은 얼굴로 그를 불렀다. 뒤이어 순이 누나가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내 밀었다. '준석아! 일어나야지?' '선생님, 빨리 일어나세요.' 어스름 달빛 아래서 지혜가 슬픈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준석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온몸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점점 더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푸르르 떨었다. 정인이가 환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제 손을 잡고 일어나세요. 어서요.' 준석은 필사적으로 팔을 뻗쳐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잡힐 듯 잡힐 듯 그녀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정인아! 가...가-지-마. 정 인 아...... 아! 가슴이---” 준석은 두 팔을 벌려 허공만 ‘휘 휘’ 내 저었다. 그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는 하얀 눈 위에 얼룩을 그리며 번져 가고 있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눈보라가 휘몰아쳐 미동도 않는 준석을 덮고 또 덮었다. 멀리서 마른 갈대의 처절한 울음만이 그의 귓전에서 윙-윙 거렸다. - 끝 -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랑은 영원합니다. 후회하지않는 사랑으로 참된인생을 살았다 말할 수 있기를 ...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제 1권을 마칩니다.

댓글 2개

이정현 2016. 11. 07. 오후 11:09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연재소설 읽으며 흥미있고 즐거웠습니다. 겨울에 시작해서 가을까지 보내고 다시 초겨울 마중나왔네요 설화목~~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생소설이 되었군요 노고에 깊은 감사드리며 건강하시고 2부 연재 부탁드립니다 멋지고 훌륭하십니다 최고!!!

김병국 2016. 11. 23. 오후 04:35

가울이 흐르듯 흘러 보내면 흔적은 지워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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