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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시모음 91편

김용호 2025. 04. 02. 오전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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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시모음 91편 ☆★☆★☆★☆★☆★☆★☆★☆★☆★☆★☆★☆★ 《1》 가을 타고 싶어라 유안진 벤치에 낙엽 두 장 열이래 달처럼 삐뚜름 멀찍이 앉아 젖었다 말라가는 마지막 향기를 나누고 있다. 가을 타는 남자와 그렇게 앉아 달빛에 젖은 옷이 별빛에 마를 때까지 사랑이나 행복과는 가당찮고 아득한 남북통일이나 세계평화 환경재앙이나 핼리혜성을 까닭모를 기쁨으로 진지하게 들으며 대책 없이 만족하며 그것이 고백이라고 믿어 의심없이 그렇게 오묘하게 그렇게 감미롭게. ☆★☆★☆★☆★☆★☆★☆★☆★☆★☆★☆★☆★ 《2》 가 을 유안진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 보다도 마른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면 눈 감은 채 고즈넉이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써 등불 하나 켜 놓고 싶어라 서 있는 사람은 앉아 있어야 할 때 앉아서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 두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거라 ☆★☆★☆★☆★☆★☆★☆★☆★☆★☆★☆★☆★ 《3》 가을만이 안다 유안진 제 슬픔의 키만큼 다 자란 풀밭에 비가 내린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 완벽한 화음(和音)의 길로 가을이 오고 있다 열꽃 앓는 시인이 불러줘서 봄이 왔듯이 시인이 울어야 가을이 오는 줄을 가을만이 알뿐이다 가을에는 귀뚜리가 제일가는 시인이다. ☆★☆★☆★☆★☆★☆★☆★☆★☆★☆★☆★☆★ 《4》 가을밤 유안진 누구에겐들 잠이 오랴 이 처절한 시간에 푸른 잎새 검붉게 피멍이 드는 진통을 누군들 아니 겪으리마는 하늘이며 땅이며 열두 번 더 개벽하고 나서 부시시 날이 새는 새벽녘 낙엽 지듯 제자리서 엎푸러지며 신의 이름 부를까 그대 이름 부를까 아직도 나는 몰라. ☆★☆★☆★☆★☆★☆★☆★☆★☆★☆★☆★☆★ 《5》 갈대꽃 유안진 지난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 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쌓는 손 그대의 흰손 갈대꽃은 피었어라 ☆★☆★☆★☆★☆★☆★☆★☆★☆★☆★☆★☆★ 《6》 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 유안진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가야 했던 동네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 장마 끝 무너지다 남은 토담 위에 걸터앉은 몸 무거운 호박덩이 보름달보다 밝은 박덩이가 뒹구는 방앗간 지붕에는 빨간 고추밭 어느 것 하나라도 피붙이가 아닐 수 없는 것들 열린 채 닫힌 적 없는 사립을 들어서면 처마 밑에 헛기침 사이사이 놋쇠 재터리가 울고 안마당 가득히 말라 가는 곶감 내음새 달디 단 어머니의 내음새에 고향은 비로소 콧잔등 매워오는 아리고 쓰린 이름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가 추억이 되고 허물어져 가는 것은 모두가 눈물겨울 것 비록 풍요로움일지라도 풍성한 가을열매일지라도 추억처럼 슬픈 것, 슬퍼서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서 못내 그립고 그리운 것 그렇게 고향은 비어가면서 속절없이 슬픈 이름이 되고 있다 허물어져 가면서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욱소리 기다리고 섰다. ☆★☆★☆★☆★☆★☆★☆★☆★☆★☆★☆★☆★ 《7》 같은 꿈을 꾸다 유안진 백지 한 장에다 검은 글자 몇 개로 찬란한 세상 한번 일으켜 세우라고 잘만 조합하면 스물넉 자¹로도 넉넉히 나 홀로의 왕조(王朝)를 일으킬 수 있다는 씻나락 까먹는 귀신 소리에 홀렸다가 눈을 드니 유성(流星) 하나 은하계를 탈출한다 천애고아로 독립하기 위하여 계통발생과 개체발생을 스스로 단절하고 단신으로 탈출하는 작은 별 하나 어둠 너머 숨어버린다 저렇게 작고 여린 것이 맨몸으로 저 홀로의 우주를 만들겠단 말이지 유일무이한 광채로 자라나서 광막한 어둠을 밝겠단 말이지 그믐달도 걱정스러운지 외눈 뜨고 내다본다 ☆★☆★☆★☆★☆★☆★☆★☆★☆★☆★☆★☆★ 《8》 건망증 유안진 잊을 것은 열쇠나 거스름돈이 아니다 약속시간도 원고도 아니다 나이를 잊어라 종교를 잊어라 집을 잊어라 직업을 잊어라 아아 까맣게 잊고 싶은 내 모오든 것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거리를 헤맨다 잊기 위하여 꿈꾸는 죄 잊기 위하여 기울이는 잔 잊기 위하여 부르는 노래도 만드는 웃음마저도 깜박깜박 잊어라 새하야니 지워라. ☆★☆★☆★☆★☆★☆★☆★☆★☆★☆★☆★☆★ 《9》 11월 유안진 무어라고 미처 이름 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달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 마디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 《10》 겁난다 유안진 토막 난 낙지다리가 접시에 속필로 쓴다 숨가쁜 호소(呼訴) 같다 장어가 진창에다 온몸으로 휘갈겨 쓴다 성난 구호(口號) 같다 뒤쫓는 전갈에게 도마뱀 꼬리가 얼른 흘려 쓴다 다급한 쪽지글 같다 지렁이도 배밀이로 한자 한자씩 써나간다 비장한 유서(遺書) 같다 민달팽이도 목숨 걸고 조심조심 새겨 쓴다 공 들이는 상소(上疏) 같다 쓴다는 것은 저토록 뜨거운 肉筆이란 말이지 몸부림치며 혼신을 다 바치는 거란 말이지 ☆★☆★☆★☆★☆★☆★☆★☆★☆★☆★☆★☆★ 《11》 겨울 사랑 유안진 나 혼자서 정리하고 나 혼자서 용서하며 얼었다가 풀렸다가 한겨울도 깊어 갑니다 비바람이건 눈보라이건 나 혼자의 미친 짓입니다 ☆★☆★☆★☆★☆★☆★☆★☆★☆★☆★☆★☆★ 《12》 겨울 축복 유안진 아모리 조고마한 아낙이어도 어머니라 부르면 무한 커지듯 눈이 내리면 겨울도 따뜻해라 눈 덮인 동네마을도 대지 같아라 도시 변두리도 고향 같아라 아아 이 축복 더 크게 받고싶어 눈 속에 얼굴 박고 따뜻이 울자 대지의 체온이 느껴지도록 어머니의 젖가슴이 느껴지도록 한 두 끼쯤 굶어 보자. ☆★☆★☆★☆★☆★☆★☆★☆★☆★☆★☆★☆★ 《13》 계란을 생각하며 유안진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트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뜨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란 그런 거겠지 ☆★☆★☆★☆★☆★☆★☆★☆★☆★☆★☆★☆★ 《14》 고독한 영혼 유안진 눈물을 흘려본 이는 인생을 아는 사람입니다. 살아가는 길의 험준하고 뜻있고 값진 피땀의 노력을 아는 사람이며, 고독한 영혼을 아는 사람이며, 가녀린 사람끼리 기대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귀하게 평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눈물로 마음을 씻어낸 사람에게는 사랑이 그의 무기가 됩니다. 용서와 자비를 무기로 사용할 줄 압니다. 눈물로 씻어낸 눈에는 신의 존재가 어리비치웁니다. 강퍅하고 오만하고 교만스러운 눈에는 신의 모습이 비쳐질 수 없지만, 길고 오랜 울음을 거두고, 모든 존재의 가치를 아는 눈에는 모든 목숨이 고귀하게 보이고, 모든 생명을 고귀하게 볼 줄 아는 눈은 이미 신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 《15》 고운 세 살배기로 유안진 하루 앞서 설날을 연습하는 까치 설날색동옷 설빔 졸라서 미리 입어도 말 잘 들어 얻은 이름 고운 세 살배기야 널도 뛰고 밤윷도 던져보고 가자가자 감나무, 오자나무 옻나무, 십리절반 오리나무, 따금따금 가시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양반동네 상나무, 깔고 앉자 구기자나무, 마당 쓸어 싸리나무, 가다보니 가닥나무, 오다보니 오동나무, 방귀 뽕뽕 뽕나무, 데끼이눔 대나무, 참을 인자 참나문가, 칼에 찔려 피나문가… 보는 만큼 듣는 만큼 세상이 재미나는 아이로 돌아가 설날을 기다리며 까치설날 눈썹 셀라 잠 못 자는 세 살 짜리로. ☆★☆★☆★☆★☆★☆★☆★☆★☆★☆★☆★☆★ 《16》 공부 유안진 풀밭에 떼 지어 핀 꽃다지들 꽃다지는 꽃다지라서 충분하듯이 나도 나라는 까닭만으로 가장 멋지고 싶네 시간이 자라 세월이 되는 동안 산수는 자라 미적분이 되고 학교의 수재는 사회의 둔재로 자라고 돼지 저금통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자랐네 일상은 생활로, 생활도 삶으로 자라더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도 오랜 공부가 필요했네 배우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미적분을 몰라도 잘 사는 이들 잘 살아서 뭣에다 쓰게 쓸데가 없어야 잘 산다는 듯이 꽃다지들 저들끼리 멋지게 피어 웃네 ☆★☆★☆★☆★☆★☆★☆★☆★☆★☆★☆★☆★ 《17》 공부 유안진 풀밭에 떼 지어 핀 꽃다지들 꽃다지는 꽃다지라서 충분하듯이 나도 나라는 까닭만으로 가장 멋지고 싶네 시간이 자라 세월이 되는 동안 산수는 자라 미적분이 되고 학교의 수재는 사회의 둔재로 자라고 돼지 저금통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자랐네 일상은 생활로, 생활도 삶으로 자라더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도 오랜 공부가 필요했네 배우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미적분을 몰라도 잘 사는 이들 잘 살아서 뭣에다 쓰게 쓸데가 없어야 잘 산다는 듯이 꽃다지들 저들끼리 멋지게 피어 웃네 ☆★☆★☆★☆★☆★☆★☆★☆★☆★☆★☆★☆★ 《18》 귀울음 유안진 눈울음이 다했는가 귀울음으로 터지는 병 갈가마귀 소린 듯도 불자동차 소린 듯도 눈 코 입 귀 차례로 울면 마침내 악기樂器 되겠지. ☆★☆★☆★☆★☆★☆★☆★☆★☆★☆★☆★☆★ 《19》 그리운 몽매(蒙昧) 유안진 떨어지는 꼬리별을 볼 때마다 걱정했지 저 별들이 다 떨어져 밤하늘이 깜깜해지면 어쩌나 하고 세상의 강물들이 다 바다로 간다는 선생님 설명에 겁났지 바다가 넘치면 어쩌나 하고 그 몽매(蒙昧)를 어디서 다 잃었나 아는 것이 너무 많아 죄다 모르고만 싶어지는 괴롭고 슬프다가 무서워지는 세상뉴스. ☆★☆★☆★☆★☆★☆★☆★☆★☆★☆★☆★☆★ 《20》 그리운 종소리 유안진 교회마을 십 리 밖에 나는 살았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새벽이면 들려오는 댕그랑앙앙아아 댕그랑앙아 문풍지 소리만큼 여린 숨소리를 잠귀가 밝았을까 나는 들었다. 일어나아아아 일어나아아아 귀에 익은 어린 음성 소년 예수가 내 귓불에다 그렇게 소곤댔다. 일어나도 잠에 취하여 베개에 얼굴 묻고 무어라 기도했나 생각하지 않지만 아직도 생생한 40년 전 종소리 창호문에 배어드는 새벽물벌 같은 파르스름 열리는 소년의 숨결이여 십리 길 멀다 않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까망머리 덮고 자는 내 소라귀로 새벽마다 달려오던 그 맑은 숨소리여 서울까진 못 오는가 안동군 엄동면 장터마을 중평교회 나의 첫 교회의 그리운 그 종소리는- ☆★☆★☆★☆★☆★☆★☆★☆★☆★☆★☆★☆★ 《21》 꽃으로 잎으로 유안진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며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은 아름답다고 돌아 온 꽃들 낯붉히며 소근소근 잎새들도 까닥 까닥 맞장구치는 봄날 속눈썹 끄트머리 아지랑이 얼굴이며 귓바퀴에 들리는 듯 그리운 목소리며 아직도 아직도 사랑합니다 꽃 지면 잎이 돋듯 사랑 진 그 자리에 우정을 키우며 이 세상 한 울타리 안에 이 하늘 한 지붕 밑에 먼 듯 가까운 듯 꽃으로 잎으로 우리는 결국 함께 살고 있습니다 ☆★☆★☆★☆★☆★☆★☆★☆★☆★☆★☆★☆★ 《22》 꽃 지는 날에 유안진 열매 맺기 위해서 꽃은 떨어져야 한다 된서리를 맞아야 열매 또한 무르익음을 이 확실한 자연법칙을 믿으며 인간 세상 눈비 속을. ☆★☆★☆★☆★☆★☆★☆★☆★☆★☆★☆★☆★ 《23》 꿈 유안진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 《24》 꿈같은 친구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 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한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기를 바란다. ☆★☆★☆★☆★☆★☆★☆★☆★☆★☆★☆★☆★ 《25》 끔찍스럽고 놀라운 것 유안진 세종로 퇴계로 을지로 충무로를 지나다니며 세종임금 퇴계선생 을지문덕 충무공......만 길인 줄 알았다가 눈으路 입으路 손으路 발路 귀路코路 내 몸 오대삭신이 다 길이라는 것 사랑으路 미움으路 눈물路 웃음으路 믿음으路 의심으路 길 아닌 것 아무 것도 없다는 것 큰길 골목길 갓길 샛길 굽은 길 곧은 길 길 아닌 길...... 가리지 않고 서로들 서로에게 길이었다는 것. ☆★☆★☆★☆★☆★☆★☆★☆★☆★☆★☆★☆★ 《26》 끝까지 봐 주시다 유안진 혀(舌)에 아부하려면 많은 조미료가 필요하고 귀(耳)에 아부하려면 많은 말이 필요하지만 하느님께 아부하려면 뜨건 눈물 한 방울로 충분한데 눈물이 없다 속은 쓰리고 따갑고 송곳으로 에이는 듯 아파도 그 많던 눈물 무엇에 소진했냐는 문책 대신에 약국 가서 인조人造눈물 사 넣으라시는 자비 자체이신 나의 하느님. 출처 : 격월간 《현대시학》 (2022년 7∼8월호) ☆★☆★☆★☆★☆★☆★☆★☆★☆★☆★☆★☆★ 《27》 끝까지 십자가 유안진 바위절벽 틈에 발목 잡혀 땡볕과 눈비 평생을 살아온 나무를 편안히 눕히셨다 외나무다리로 오가는 발길에 밟히고 짓밟혀야만 위아래와 좌우 동네가 하나 된다고 그것이 마지막 임무라고 출처 : 《창작과 비평》 (2022년 여름호) ☆★☆★☆★☆★☆★☆★☆★☆★☆★☆★☆★☆★ 《28》 나는 허파이다 유안진 좌골신경통을 앓으며 되짚어본다 왼손잡이가 아닌데도 딸이라는 이유로 오른쪽이 못 되어 왼발로 걷고 왼눈으로 보고 왼쪽 귀로 듣고 왼손*의 혀로 말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걷다보면 저절로 좌측통행(左側通行)이 되지만 나는 좌파가 아니다 우파나 남파 북파도 아니다 대파나 쪽파는 더구나 아니다 미국에서 잠깐 공부한 적은 있지만 양파는 아니다 물론 구라파도 아니다 다만 여성인 까닭으로 1.3.5.7.9…의 길수(吉數)나 양수(陽數)가 못되고 짝 없이는 못 산다는 2.4.6.8…의 짝수 음수(陰數)이다 길방(吉方)인 東과 南 아닌 西와 北이다 하늘 아닌 땅이고, 해가 아닌 달이고, 대낮 아닌 야밤이고 밖[外]이 아닌 안[內]이고 위[上]가 아닌 아래[下]이고 먼저[先]가 아닌 나중[後]이고, 머리 아닌 꼬리이니 저절로 꿈보다는 해몽에 불공보다는 잿밥에 소리보다는 추임새에 원님 행차보다는 나발불기에 골몰하다가 사람보다는 귀신 도깨비 허깨비에 치우쳐 겨우 숨통 틔워 온 허파다, 말짱 허파(虛派)일 따름이다. ☆★☆★☆★☆★☆★☆★☆★☆★☆★☆★☆★☆★ 《29》 나이가 수상하다 유안진 치아가 편치 않다 나이가 들쑤신다 아아주 옛적에는 떡이나 과일을 깨물어 치아 자국으로 임금을 뽑았다니 이가 좋아야 임금이 될 수 있어 잇금이다가 이사금이다가 임금이라 불렀다니* 나이도 나의 치아, '나의 이'의 줄임말 아닐거나 나이[年齡]라는 한자에 이 치(齒)를 넣은 중국인들도 '나의 이' '내 이'를 나이로 기준 삼아 연령을 뜻했는가 사과 한쪽을 집으려다 얼른 주춤한다 보기만 해도 시리고 저린 나이 치과 한번 간 적 없는 나의 이가 쑤신다 정말 이젠 낡은 나이인가. ☆★☆★☆★☆★☆★☆★☆★☆★☆★☆★☆★☆★ 《30》 낙엽 쌓인 길에서 유안진님 한 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 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 팽개친들 도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 《31》 내 소망 하나 유안진 생각날 때 전화할 수 있고 짜증날 때 투정 부릴 수 있는 더없이 넓은 가슴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이 혼자 보기엔 안타까워 같이 보고 이렇게 퇴근길이 외롭다고 느껴질 때 잠시 만나서 커피라도 한 잔 할 수 있고 가슴 한아름 아득한 미소를 받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거울 한번 덜 봐도 머리 한번 덜 빗어도 화장하지 않은 맹숭맹숭한 얼굴로 만나도 전혀 부끄럽지 않고 미안하지 않고 서로의 겉모습보다는 둥그런 마음이 매력 있다면서 오히려 그게 더 친숙해져서 이쁘게 함박웃음 웃을 수 있고 언제 어디서 우연히 길을 가다가 은행을 가다가 총총히 바쁜 걸음에 가볍게 어깨를 부딪혀서 아~하고 기분 좋게 반갑게 설레 일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열 마디의 종알거림에 묵묵히 끄덕여 주고 주제넘은 간섭을 시간이 흐른 후에 깨우쳐 주는 넉넉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가끔씩은 저녁 값이 모자라 빈 주머니를 내보이면서 웃을 줄도 알고 속상했던 일을 곤드레 술이 취해 세상에 큰소리 칠 줄도 알고 술값도 지불케 하는 가끔은 의외의 면이 있는 낭만스러운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부모님의 수고스러움을 늘 감사하고 형제들의 사랑을 늘 가슴 깊이 새기며 자신을 조금은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거기에 썩 어울리는 사람이 나였으면 더욱 좋겠다. ☆★☆★☆★☆★☆★☆★☆★☆★☆★☆★☆★☆★ 《32》 내가 가장 아프단다 유안진 나는 늘 사람이 아팠다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아프고 아파서 X-ray, MRA, 내시경 등등으로 정밀 진단을 받았더니 내 안에서도 내 밖에서도 내게는, 나 하나가 너무 크단다, 나 하나가 너무 무겁단다 나는 늘, 내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잘못 아프고 잘못 앓는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피멍들게 한 누가 없었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대적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사랑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망쳐준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내 세상을 배반한 누가 없단다 나는 늘 나 때문에 내가 가장 아프단다 ☆★☆★☆★☆★☆★☆★☆★☆★☆★☆★☆★☆★ 《33》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유안진 내 청춘의 가지 끝에 나부끼는 그리움을 모아 태우면 어떤 냄새가 날까 바람이 할퀴고 간 사막처럼 침묵하는 내 가슴은 낡은 거문고 줄 같은 그대 그리움이 오늘도 이별의 옷자락에 얼룩지는데 애정의 그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사람아 때없이 밀려오는 이별을 이렇듯 앞에 놓고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를 안을 수 있나 내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그대 사랑을 내 것이라 할 수 있나 ☆★☆★☆★☆★☆★☆★☆★☆★☆★☆★☆★☆★ 《34》 눈 깜박 할 사이 유안진 눈 깜박 사이에는 사고만 생기는 줄 알았는데 젊음만 가 버리는 줄 알았는데 마음만 변하는 줄 알쌌는데 금붕어 한 마리를 어항에 넣었더니 어항 주둥이가 지느러미가 되었다 장미 한 송이를 꽃병에 꽂았는데 푸드득 소리가 났다 병 손잡이가 날개가 되었다 나비가 앉았던 풀잎도 꽃잎이 되었다 빨갛게 상기 된 채 꽃향기까지 진동했다 정말이지, 눈 깜박 할 사이였는데. ☆★☆★☆★☆★☆★☆★☆★☆★☆★☆★☆★☆★ 《35》 눈물로 눈을 씻어내면 유안진 눈물을 흘려본 이는 인생을 아는 사람입니다. 살아가는 길의 험준하고 뜻있고 값진 피땀의 노력을 아는 사람이며, 고독한 영혼을 아는 사람이며, 이웃의 따사로운 손길을 아 는 사람이며, 가녀린 사람끼리 기대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귀하게 평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눈물로 마음을 씻어낸 사람에게는 사랑이 그의 무기가 됩니 다. 용서와 자비를 무기로 사용할 줄 압니다. 눈물로 씻어낸 눈에는 신의 존재가 어리비치웁니다. 강팍하고 오만하고 교만스러운 눈에는 신(神)의 모습이 비 쳐질 수 없지만, 길고 오랜 울음을 거두고, 모든 존재의 가치를 아는 눈에는 모든 목숨이 고귀하게 보이고, 모든 생명을 고귀하게 볼 줄 아는 눈은 이미 신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 《36》 눈사람 유안진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 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히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 하나 지어 눈 맞춤 하리라 ☆★☆★☆★☆★☆★☆★☆★☆★☆★☆★☆★☆★ 《37》 단풍잎 언덕 유안진 피 묻은 이 발자국들은 누구들의 무엇인가? 이 발자국들을 업고 엎드린 이 언덕은 누구의 등때기인가? 몰라서 묻는 게 아닌 자문자답自問自答의 버릇이여. 출처 : 《문학사상》 (2021년 8월호) ☆★☆★☆★☆★☆★☆★☆★☆★☆★☆★☆★☆★ 《38》 더 잘 보려고 유안진 한발 물러서니 미소가 보였고 두발 물러서니 차림새가 보였고 더 물러서니 눈물이 보였다 사랑아, 무엇을 더 보랴 ☆★☆★☆★☆★☆★☆★☆★☆★☆★☆★☆★☆★ 《39》 동백꽃 유안진 엄동 눈바람에 어쩌자고 피느냐 좋은 세월 다 놓치고 이제야 피느냐 목숨마저 켜 드는 등불임에도 별무리마저 가슴 죄어 차마 지켜 새우는 겨울 뜨락의 한 자루 촛불 나의 신혼이여. ☆★☆★☆★☆★☆★☆★☆★☆★☆★☆★☆★☆★ 《40》 뒷소리 유안진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뽈 발레리는 이렇게 말했다지. 프랑스 그 남자의 이 잎 소리를 내게 맞는 무슨 뒷소리로 받아낼까. 아아 나는 나는 언제나 앞보다는 뒤가 좋고 낮보다는 밤이 좋다. 그늘이 양지보다 더 편안하고 하늘보다 땅이 좋아 땅에서 살고 싶다. 죽으면 가서 행복하다는 하늘보다는 불행해서 울더라도 땅에서 살고 싶다. 어둔 하늘에 돋아나는 별보다는 날 저무는 들길에 고개 살랑 저어 피는 쬐꼬만 들꽃이고 싶다 숨 가쁜 초록으로 숨차 오르는 진초록으로 바람이 분다. 혼자서도 향기롭게 꽃다지로 살아야겠다. ☆★☆★☆★☆★☆★☆★☆★☆★☆★☆★☆★☆★ 《41》 들국화 유안진 한얼산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소슬히 웃고 선 막달라 마리아 멸시를 이기더니 통곡을 삼키더니 영원한 남성의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만 여자 어리석은 그 여자가 지혜롭게 곰삭인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 보라빛 연보라 천상의 웃음 띠고 마중 나오신 성녀 막달라 마리아 ☆★☆★☆★☆★☆★☆★☆★☆★☆★☆★☆★☆★ 《42》 들꽃 언덕에서 유안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것을 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 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 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 《43》 때로는 한눈팔아도 된다 유안진 선생님, 색칠이 자꾸 금 밖으로 가요 괜찮다, 지금 아니면 언제 그러겠냐 뻥튀기 구경하다 지각했어요 괜찮다, 지금 한눈팔지 않으면 언제 그러겠냐 길가의 강아지풀 꼬리가 패였는지 개미와 송장메뚜기를 구경해도 된다 낮달과 구름을 쳐다봐도 된다 소나기에 흠뻑 젖어 와도 된다 쇠똥구리네 집이 쇠똥인지 땅 구멍인지 놀며 구경하다가 와도 된다 어디나 언제나 학교이고 공부시간 누구나 무엇이나 선생님이란다 때로는 길 밖에서 더 잘 자랄 거야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럴 시간 있겠느냐. ☆★☆★☆★☆★☆★☆★☆★☆★☆★☆★☆★☆★ 《44》 마주 본다 유안진 짧지 않게 살았다는데도 순간만 같았다 싶고 많은 이들을 만났을텐데도 한 사람뿐이었다 싶고 우연마다 기회였을텐데도 허투루 흘렸다 싶고 많은 걸 누렸을 텐데도 늘 춥고 허기(虛飢)졌다 싶은 날 겨울나무 여윈 가지 끝 바람 떨며 매달린 마른 잎과 마주 본다 한나절 내내 출처 : 《생명과 문학》(2021 가을호) ☆★☆★☆★☆★☆★☆★☆★☆★☆★☆★☆★☆★ 《45》 마카커피와 전다지커피와 맹커피 유안진 젊은 할머니 한 떼가 한 다방으로 빨려들면서 나는 커피, 나도 커피 나도 같다 나도 나도… 그래 마카 커피 줘요라고 왁자지껄 졸지에 정신이 나간 듯 종업원들은 서로 머주 보기만 했다 얼른 다오 왜 늦노? 성질 급한 할머님들이 재촉하고도 좀 시간이 지나 사장이 들어오자, 손님 중 사장과 친구인지 사장아! 야야 커피 왜 안 주노 커피콩 따러갔나? 얼른 내어드려? 왜 그리셨노? 종업원의 말은 사장님 우리집에는 마카커피 없잖아요, 다 마카커피래요 그래 전다지커피구나 얼른 끓여드려? 전다지 커피도 없는데요? 종업원의 대답에 어이 이이 비잉· · · 맹같은 커피아이가 맹커피야! 이런 실갱이 끝에 나온 마카커피 전다지커피 맹커피는 여고 선후배 인사를 나누는 동안 사장님 커피값 무료로 웃음바다가 되었다. 마카커리, 전다지커피, 맹커피는 1960년대 중반부터 무료가 많아졌다는 데 아직도 유효한가? 몰라. 출처 : 《시와정신》 (2024년 겨울호) ☆★☆★☆★☆★☆★☆★☆★☆★☆★☆★☆★☆★ 《46》 마흔 살 유안진 강물이 끝나는 그 자리가 바다이듯 젊은 눈물 마른 나이에는 눈물의 바다에 이르고 마는가 이제 나의 언어는 소리 높은 파도 한번을 외쳐도 천만 마디 아우성이며 이제 나의 몸짓은 몸부림치는 물결 천만 번을 풀어내도 한 매듭의 춤사위일 뿐 그래 마흔 살부터는 눈물의 나이 물길밖에 안 보이는 눈물의 나이 ☆★☆★☆★☆★☆★☆★☆★☆★☆★☆★☆★☆★ 《47》 만나면서 못 만나는 유안진 꽃은 소리 없이 피고 바람은 모습 없이 불어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소리 안에 갇힐 수 없는 음성이 소리로 안 들린다고 모습 안에 갇힐 수 없는 모습이 모습으로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한다 별이기도 눈물이기도 한 잔의 생수이기도 하는 온갖 모습인 줄 몰라, 언제 어디서나 마주치면서도 알아보지 못한다 풀벌레 소리이기도 아기 옹아리 소리이기도 하는 온갖 소리인 줄 몰라,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데도 알아듣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가 내년을 몰라도 내일과 내년이 있는 줄은 알면서 모습은 귀로 들으려 하고 소리는 눈으로 만나려다가 늘 어긋나고 만다 아무리 마주쳐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싡을 닮았어도 모품模品은 이렇다 ☆★☆★☆★☆★☆★☆★☆★☆★☆★☆★☆★☆★ 《48》 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 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 《49》 먼 훗날에도 우리는 유안진 먼 훗날에도 우리는 서로 눈에 어리는 아지랑일까 앞머리 헝클리는 봄바람일까 여름 볕에 뼈가 시려 진땀나는 고독일까 왈칵왈칵 울고 가는 먹구름일까 비 오는 밤 유리창에 젖어 우는 낙엽일까 눈사태로 퍼붓는 한숨일까 탄식일까 나에겐 아직도 허망의 꿈이 되는 이여 훗날 먼 훗날에도 우리는 서로 잠 없는 별일까 새벽마다 어룽지는 풀잎의 이슬일까 ☆★☆★☆★☆★☆★☆★☆★☆★☆★☆★☆★☆★ 《50》 멀리 있기에 유안진 멀어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어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 《51》 무 유안진 한때는 나도 잘 나가는 잎채소 배추였지 성깔 하나 괴팍해서 어디서나 뒷걸음질 쳐 도망치고 싶었지, 모가지도 몸뚱이도 오그라들고 옴추려 들다가 뿌리채소가 되었지 나도 한 시절은 남자 일수 있었지 활개쳐 세상을 휘젓고 쏴 댕기며 기고만장 거친 사내, 그런 나한테 서 달아나고 망명해서 드디어 해방되었지, 해방되고 보니 여자였지 나는 결국 지금의 내가 되었지 나는 누구 아닌 나한테서 가장 오해받으며 살고 있지. ☆★☆★☆★☆★☆★☆★☆★☆★☆★☆★☆★☆★ 《52》 밤하늘에 쓴다 유안진 언젠가 그 언젠가는 저 산 저 바다 저 하늘도 너머 빛과 어둠 너머 잘 잘못들 넘어 사랑 미움 모두 넘어 머언 머언 너머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우린 다시 만날 거지요?! ☆★☆★☆★☆★☆★☆★☆★☆★☆★☆★☆★☆★ 《53》 배꼽에 손이 갈 때 유안진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다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도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 《54》 백자 항아리 유안진 여인이여 당신의 공간으로 휘어드는 하늘깃은 해도 달도 별도 꽃도 아닌 흙이 玉옥이 되는 모순이고 기적인가 오오 절묘한 변신은 사랑인가 종교인가. ☆★☆★☆★☆★☆★☆★☆★☆★☆★☆★☆★☆★ 《55》 봄 유안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흘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라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 각담을 기어오르는 봄 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랑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박꼭질 노니는 산골 자기에는 뻐꾹뻐꾹 사랑 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러움증 산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흥 빛 봄 ☆★☆★☆★☆★☆★☆★☆★☆★☆★☆★☆★☆★ 《56》 비가는 소리 유안진 비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 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다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 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죄다. ☆★☆★☆★☆★☆★☆★☆★☆★☆★☆★☆★☆★ 《57》 사리 유안진 가려주고 숨겨주던 이 살을 태우면 그 이름만 남을거야 온몸에 옹이 맺힌 그대 이름만 차마 소리쳐 못 불렀고 또 못 삭여낸 조개살에 깊이 박힌 흑진주처럼 아아 고승(高僧)의 사리(舍利)처럼 남을거야 내 죽은 다음에는. ☆★☆★☆★☆★☆★☆★☆★☆★☆★☆★☆★☆★ 《68》 살아온 세월이 아름다워 유안진 살아온 세월이 아름다웠다고 비로소 가만 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황금저택에 명예의 꽃다발로 둘러 쌓여야 만이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길지도 짧지도 않았으나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주는 사람과 얘기 꺼리도 있었노라고 작아서 시시하나 안 잊히는 사건들도 이제 돌아보니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있었노라고 그래서 우리의 지난날들은 아름답고 아름다웠으나 앞으로 절대로 초조하지 말며 순리로 다만 성실을 다하며 작아도 알차게 예쁘게 살면서 이 작은 가슴 가득히 영원한 느낌표를 채워 그것들은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우리의 추억의 재산이라고 우리만이 아는 미소를 건네주고 싶습니다. 미인은 못되어도 일등은 못했어도 출세하지 못했어도 고루 고루 갖춰놓고 살지는 못해도 ? 우정과 사랑은 내 것이었듯이 아니 나아 가서 우리의 것이듯이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그대 내 가슴에 영원한 느낌표로 자욱져 있듯이 나도 그대 가슴 어디에나 영원한 느낌표로 살아 있고 싶습니다. ☆★☆★☆★☆★☆★☆★☆★☆★☆★☆★☆★☆★ 《59》 상처가 더 꽃이다 유안진 어린 매화나무는 꽃 피느라 한창이고 4백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 섰다 둥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 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勳章)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符籍)으로 보이는가 백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도 맡아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더 꽃인 것을 ☆★☆★☆★☆★☆★☆★☆★☆★☆★☆★☆★☆★ 《60》 서리 꽃 유안진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붙이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 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 꽃 내 이름을 어쩔래 ☆★☆★☆★☆★☆★☆★☆★☆★☆★☆★☆★☆★ 《61》 설록차를 마시는 때 유안진 생활을 눈 따악 감고 구름 되어 흐르고만 싶을 때 설록차 한 잔 물에 구름 띄워 마셔본다 맛없음의 참맛이야말로 부처님 미소로 데려가주는 듯 더는 못 참겠다 깜박 넋이 나가려는 때 한 모금 설록차를 두 모금에 나눠 마신다 그 사이 부딪치는 찻잔소리 타일러주는 드맑은 음성 잔 안에 가두어지는가 그리움아 섧은 꿈아 차가운 흰눈의 빛깔 백설의 향기와 함께 폐허를 어루만지듯 늘 내 마음에 찰랑거려라. ☆★☆★☆★☆★☆★☆★☆★☆★☆★☆★☆★☆★ 《62》 세상과 나 사이 유안진 왜들 이러지 이제 갓 피고 있는데 다 늙은 할미꽃이라니 서리맞아 볼품 없이 시들었는데도 애기 똥풀 이라니 까치발로 키만큼 일어섰는데도 앉은뱅이 꽃이라니 작고 여리고 앙징스럽기만 한데 무지막지 오랑캐꽃이라니 부르기도 듣기도 서로 민망스럽게 며느리 밑 씻게 개 부랄 꽃 말똥비름 쇠똥굴레 쥐 오줌 풀 여우오줌 쥐똥나무……등등 세상과 나 사이, 너무 멀다, 주파수가 너무 달라. ☆★☆★☆★☆★☆★☆★☆★☆★☆★☆★☆★☆★ 《63》 세월은 아름다워 유안진 살아온 세월은 아름다웠다고 비로소 가만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황금저택에 명예의 꽃다발로 둘러 싸여야만이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길지도 짧지도 않았으나 걸어온 길에는 그립게 찍혀진 발자국들도 소중하고 영원한 느낌표가 되어 주는 사람과 얘기 거리도 있었노라고 작아서 시시하나 안 잊히는 사건들도 이제 돌아보니 영원히 느낌표가 되어 있었노라고 그래서 우리의 지난날들은 아름답고 아름다웠느니 앞으로도 절대로 초조하지 말며 순리로 다만 성실을 다하며 작아도 알차게, 예쁘게 살면서, 이 작은 가슴 가득히 영원한 느낌표를 채워 가자고 그것들은 보석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우리의 추억과 재산이라고 우리만 아는 미소를 건네 주고 싶습니다 미인이 못 되어도 일등을 못 했어도 출세하지 못했어도 고루고루 갖춰 놓고 살지는 못해도 우정과 사랑은 내 것이었듯이 아니 나아가서 우리의 것이듯이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그대 내 가슴에 영원한 느낌표로 자욱 져 있듯이 나도 그대 가슴 어디에나 영원한 느낌표로 살아있고 싶습니다. ☆★☆★☆★☆★☆★☆★☆★☆★☆★☆★☆★☆★ 《64》 세한도 가는 길 유안진 서리 덮힌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힌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시란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 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 《65》 소금밭 유안진 나 죽으면 맛으로만 남아라 향기도 색깔도 모양도 버리고 오직 짜디짠 맛 정신으로만 남아라 살아 내 먹장가슴은 나 죽으면 연꽃 눈부신 진흙 못이 되지 말고 향기 황홀한 백합의 골짜기도 되지 말고 삼복 타는 불볕 아래 비로소 살아나는 소금맛 하나로 결단코 썩지 않는 정신의 텃밭 되거라 한 뙈기 소금밭이 되거라. ☆★☆★☆★☆★☆★☆★☆★☆★☆★☆★☆★☆★ 《66》 송년에 즈음하면 유안진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년이 한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거룩하신 신의 이름이 절로 덤겨집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 《67》 슬픈 약속 유안진 우리에겐 약속이 없었다 서로의 눈빛만 응시하다 돌아서고 나면 잊어야 했다. 그러나 하루만 지나도 어김없이 기다려지는 너와의 우연한 해우. 그저 무작정 걸어봐도 묵은 전화수첩을 꺼내 소란스럽게 떠들어 봐도 어인 일인가, 자꾸만 한쪽 가슴이 비어옴은. 수없이 되풀이한 작정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가 닿았음직한 발길을 찾아나선다. 머언 기약도 할 수 없다면 이렇게 길이 되어 나설 수밖에. 내가 약속이 되어 나설 수밖에 ☆★☆★☆★☆★☆★☆★☆★☆★☆★☆★☆★☆★ 《68》 시가 나에게 유안진 아직도 모르겠어? 한번 발들이면 절대로 못 빠져나오는 사이비종교가 ‘나’라는 것을 <ㄴ>받침 하나가 모자라서 <말씀>이신 신(神)이 못되는 어눌한 말인 걸 쓸수록 배고파지는 끝없는 허기 쓰고 보면 제정신 아닌 남루뿐인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소설가 화가 음악가… 와는 달라서 만 번을 고쳐죽어도 일가는 못되느니 시 쓰며 인간이나 되라고 <시인(詩人)> 아닌가 꿈 깨게, 문여기인(文如其人) 잊지 말고. ☆★☆★☆★☆★☆★☆★☆★☆★☆★☆★☆★☆★ 《69》 시인의 빈소에서 유안진 모인 우리는 오늘 밤 하늘에 새별이 돋을 거라며 미소 환한 영정 앞에서 산문시와 시 잡지의 업적을 기리고 기리다가 저절로 추억으로 들어갔다 한참 전에 떠난 시인 권탱고와 이가린스키에 이어 정지루박 시인이라고 달려와 같이 한 이디스코, 오부르스, 유삼바, 신무드, 문막춤, 훌라초이, 유소시얼리스트 등등 시인들의 공인된 별명을 모르면 간첩이라던, 에피소드를 웃어가며 슬퍼했다 말당 서정주 선생님부터 정한막님 김남작님 유안율과 신달자 시인까지 대가 선배님들 끄트머리 끝 끝에 이어지는, 버르장머리 없이 어리광도 피우면서 시단 한 생애의 소득이라곤 왜인지도 모르게 얻어진 별명뿐이라고 울음을 울었다 그리고는 옷깃 여미어 별이 되신 선배님들마다 너무 겸손하여 스스로 빛내지 않아서 불타버리지 않는 밤하늘과 여기 우리 세상이 멀쩡하다고 나 또한 과학적 도덕적 철학적 문학적…을 갈팡질팡하다가 드디어는 지극히 종교적이 되어 잔을 들어 스스로를 감사했다 신이 못되는 시의 다행을 지금껏 써온 나의 시(詩) 나부랭이가 말씀이 될 수 없는 천만다행까지를…… ☆★☆★☆★☆★☆★☆★☆★☆★☆★☆★☆★☆★ 《70》 실패할 수 있는 용기 유안진 눈부신 아침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찬란한 그대 젊음도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어질머리 사랑도 높푸른 꿈과 이상도 몸부림친 고뇌와 보석과 같은 눈물의 가슴앓이로 무수히 불 밝힌 밤을 거쳐서야 빛이 납니다. 젊음은 용기입니다. 실패를 겁내지 않는 실패도 할 수 있는 용기도 오롯 그대 젊음의 것입니다. ☆★☆★☆★☆★☆★☆★☆★☆★☆★☆★☆★☆★ 《71》 아름다운 고백 유진하 먼 어느 날 그대 지나온 세상 돌이켜 제일로 소중했던 이 그 누구였느냐고 묻는 말 있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당신이라 말하겠습니다 먼 어느 날 꽃잎 마저 어둠에 물들어 별리의 문 닫힌 먼 어느 날 그대 두고 온 세상 기억 더듬어 제일로 그리웠던 이 그 누구였느냐고 묻는 음성 들리면 나는 다시 주저 없이 그 사람 당신이라 대답하겠습니다 혼자 가는 길 끝에 어느 누구도 동행 못하는 혼자만의 길 끝에 행여 다음 세상 약속한 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겐 늘 안개 같은 이름 당신을 말하겠습니다 당신 사연 내들은 적 없고 내 사연 또한 당신께 말한 적 없는 그리운 이 세월 다 보내고 쓸쓸히 등 돌려 가야 하는 내 막다른 추억 속에서 제일로 가슴 아픈 사랑 있었느냐고 묻는 말 있으면 그 사랑 당신이었노라고 내 마지막 한 마디 그 사랑 당신이었노라고 고백하겠습니다. ☆★☆★☆★☆★☆★☆★☆★☆★☆★☆★☆★☆★ 《72》 아지랑이조 유안진 문득 눈을 드니 사방에 임의 얼굴 일어서 붙잡으면 오지랖도 잡히리만 그 사이 잠긴 눈 밀고 눈물 한 줄 주르르 떠나며 버린 정 저도 한스러웠나 차마 못 떨쳐 맴도는 허깨빈가 어릿어릿 현기증에 내가 까무러친다 마침내 미치고 말면 오히려 고마운 일 핏자국 진 산비탈에 바람기도 숨죽였다 필릴리 진혼곡조에 잠이 드는 봄아 봄아. ☆★☆★☆★☆★☆★☆★☆★☆★☆★☆★☆★☆★ 《73》 아침 기도 유안진 아침마다 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 어제 처럼 빕니다. 살아봐도 별수없는 세상일지라도 무책이 상책인 세상일지라도 아주 등 돌리지 않고 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 그래서 더러 용서도 빌어가며 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가며 신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 늘 용서 구할 꺼리를 가진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여 있어 늘 미안한 자격미달자로 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 《74》 약속의 별 유안진 몹시 외롭고 쓸쓸해지는 때는 걸어온 옛길로나 돌아가게 되나봅니다 못내 초라하고 서글퍼지는 때에도 보물찾기하듯 그 길섶을 뒤적이게 되나봅니다 긴긴 겨울밤 얼어붙은 깜깜 하늘에는 왠지 낯익은 듯 눈물 머금은 별 하나 물끄러미 시선을 맞추다가 까맣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약속 하나, 언약 하나, 맹세 하나를 Ⅱ 내 어려서 철없던 꼬맹이적에 심심해서 별이나 헤아리며 혼자 놀던 어느 밤에 문득 아름다운 별 하나에 넋이 빠져 단박에 나의 별로 점찍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별 이담에 나도 너처럼 빛날 거야」 턱을 괸 두 손 풀고 발딱 일어서며 나 혼자 중얼거려 약속했습니다 그 별도 기뻐서 더 크게 더 밝게 빛났습니다 그 이름은 놀림말로 개밥바라기라고 하지만 초저녁엔 금성이고 장경성(長慶星)이고 태백성(太百星)이며 새벽녘엔 샛별이고 명성(名星)이고 계명성(啓明星)이라 부르는 줄은 한참 뒤에 가서 알게 되었습니다만 애들한테 따돌림받고 슬퍼지는 외토릴 때 손등으로 눈물 닦다가도 고개 들면 웃어주는 별 「힘을 내! 하마 잊었니 우리의 약속을?」 그때 이레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밤중에 잠이 깨어도 문 열고 내다보며 눈맞춤도 눈흘김도 눈쌈도 하였고 신새벽 뒷간 가는 나를 불러 세워놓고 짓궂게 놀려대어도 나는 행복했습니다 Ⅲ 꿈이 너무 많고 너무도 화려하여 눈물도 웃음도 변덕스럽던 여학생때는 단짝 친구랑 나는 서로 사랑했습니다 영원한 우정을 기막힌 야망을 여름밤 하늘의 별 하나를 정해놓고 손가락을 걸어서 우린 언약했습니다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아득한 훗날 그 어디에서라도 우리의 우정은 언약의 별같이 밝고도 찬란할 것이라고 언약의 별 같은 인물이 되자고 새끼손가락을 세 번 잡아당겼습니다 Ⅳ 애인이라고는 차마 부르지 못했지만 난생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여 숫되고 서툴던 내 처녀적에 별 하나에 사랑을 맹세해 주던 이여 별 하나에 포부를 다짐해 뵈던 이여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몰라도 지금의 하늘에는 맹세의 그 별이 그날처럼 밝고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사는 일이 피곤할 때 더러더러 생각날까요 뜨거운 그 호소 그 맹세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할까요 Ⅴ 덧없고 부질없어라 우정과 사랑이면 더욱 그러하여라 세월이 지나간 휑하니 빈자리에는 그 약속, 그 언약, 그 맹세 모두 어처구니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달픈 퇴근길에 헛발을 디디다가 잠 안 오는 밤중에 안경알을 닦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약속의 별 하나 아이적 내 별이여, 우정의 우리별이여 영원을 맹세하던 첫사랑의 별이여 어느 한 가지의 약속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살아온 오늘은 그저 할말이 없습니다 오직 미안할 뿐입니다 아이처럼 다리 뻗쳐 마구 울고 싶습니다. ☆★☆★☆★☆★☆★☆★☆★☆★☆★☆★☆★☆★ 《75》 여자다움 유안진 소문에 시달리던 허위도 진실도 세월로 씻길 만치 씻기고 나면 회복되는 여자다움 마침내는 사람이구나 인간이구나 갖 빚어내신 바 하느님의 작품이구나 ☆★☆★☆★☆★☆★☆★☆★☆★☆★☆★☆★☆★ 《76》 연말 유안진 언어는 떠나가고 휘파람 한 소절이 찾아와 준 입술이여 그 써늘한 깊이를 깊이 알아 더 춥지 춥고 쓸쓸한 끄트머리는 바닥없이 깊어질 뿐이지 생각 없이 살면 남들이 괴롭고 생각 깊게 살면 제자신만 괴롭지 깊어지지 말자, 깊어져 일상이 침몰되고 무의미 무책임 텅 빈 자유와 망각이 될 뿐 가슴 옥죄는 기다림을 기다리게 하지 슬픔도 깊어지면 황홀도 되지, 그래서 더 슬프다 오래전에 속속들이 알아버렸구나 인생이란 것에 다시 발 디밀어 다리뻗기는 글러먹었으니 분수없지 말자, 끝이 곧 처음이라는 그럼에도 불구함이여. ☆★☆★☆★☆★☆★☆★☆★☆★☆★☆★☆★☆★ 《77》 연인의 자격 유안진 초가을 햇살웃음 잘 웃는 사람 민들레 홀씨 바람 타듯이 생활은 품앗이로 마지못해 이어져도 날개옷을 훔치려 선녀를 기다리는 사람 슬픔 익는 지붕마다 흥건한 달빛 표정으로 열이레 밤하늘을 닮은 사람 모습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사랑하기에 너무 작은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 모든 목숨은 아무리 하찮아도 제게 알맞은 이름과 사연을 지니게 마련인 줄 아는 사람 세상사 모두는 순리 아닌 게 없다고 믿는 사람 몇 해 더 살아도 덜 살아도 결국에는 잃는 것 얻는 것에 별차이 없는 줄을 아는 사람 감동 받지 못하는 시 한 편도 희고 붉은 피톨 섞인 눈물로 쓰인 줄을 아는 사람 커다란 것의 근원일수록 작다고 믿어 작은 것을 아끼는 사람 인생에 대한 모든 질문도 해답도 자기 자신에게 던져서 받아 내는 사람 자유로워지려고 덜 가지려 애쓰는 사람 맨살에서 늘 시골집 저녁 연기 내음이 나는 사람 모름지기 이런 사람이야말로 연인삼을 만하다 할지어다 ☆★☆★☆★☆★☆★☆★☆★☆★☆★☆★☆★☆★ 《78》 예의란 무엇일까 유안진 땡볕아래 복숭 따는 할머니에게 그늘에서 복숭을 선별하는 쉬운 일을 주었다 시원한 그늘에서 편히 앉아서 따다 주는 복숭아를 상 중 하로 가리기만 하다가 다시 땡볕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봉숭따기가 더 좋다고 간청했다 까닭을 묻는 주인에게 할머니의 대답은 간단했다 복숭아 등급 결정하기가 너무 어렵고 애써 살아온 복숭아에게도 미안해서 그런다고 ☆★☆★☆★☆★☆★☆★☆★☆★☆★☆★☆★☆★ 《79》 용서받는 까닭 유안진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고 들리지 않아도 소리내는 것이 있다 땅바닥을 기는 쇠비름나물 매미를 꿈꾸는 땅 속 굼벵이 작은 웅뎅이도 우주로 알고 사는 물벼룩 장구벌레 소금쟁이 같은 그것들이 떠받치는 이 지구 이 세상을 하늘은 오늘도 용서하신다 사람 아닌 그들이 살고 있어서 ☆★☆★☆★☆★☆★☆★☆★☆★☆★☆★☆★☆★ 《80》 자화상 유안진 한 오십년 살고 보니 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 눈과 서리와 비와 이슬이 강물과 바닷물이 뉘기 아닌 바로 나였음을 알아라 수리부엉이 우는 이 겨울도 한밤중 뒤뜰 언 밭을 말달리는 눈바람에 마음 헹구는 바람의 연인 가슴속 용광로에 불 지피는 황홀한 거짓말을 오오 미쳐볼 뿐 대책 없는 불쌍한 희망을 내 몫으로 오늘 몫으로 사랑하여 흐르는 일 삭아질수록 새우젓갈 맛나듯이 때 얼룩에 쩔을수록 인생다워지듯이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 묻히고 더럽혀지며 진실보다 허상에 더 감동하며 정직보다 죄업에 더 집착하며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나란히 누웠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리 멀리 떠나갈수록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다 갈 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는 것이다 하늘과 땅만이 살 곳은 아니다 허공이 오히려 살 만한 곳이며 떠돌고 흐르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 문득 돌아보니 나는 나는 흐르는 구름의 딸이요 떠도는 바람의 연인이라. ☆★☆★☆★☆★☆★☆★☆★☆★☆★☆★☆★☆★ 《81》 작정 유안진 모르며 살기로 했다. 시린 눈빛 하나로 흘러만 가는 가을 강처럼 사람은 무엇이며 삶은 왜 사는 건지 물어서 얻는 해답이 무슨 쓸모 있었던가 모를 줄도 알며 사는 어리석음이여 기막힌 평안함이여 가을 하늘빛 같은 시린 눈빛 하나로 무작정 무작정 살기로 했다. ☆★☆★☆★☆★☆★☆★☆★☆★☆★☆★☆★☆★ 《82》 잘못 유안진 잘못하면 알아진다. 너무나 많은 진실과 너무나 많은 거짓이 인생 한마디로 졸아들고 마는 것을 마흔의 나이에도 일흔의 생애도 결국 인생이란 두 글자에 담겨지고 마는 것을 그래서 인생은 봄날 꽃일 수 없고 녹음일 수도 없는 것을 오히려 인생은 밤에 우는 고목의 썩은 등걸인 것을 잘못해 봐야 알아진다. 마흔 다섯이 마흔 살과 진배없고 마흔 아홉이 쉰 살보다 더 늙은 것을 마음의 헤매임이 몸의 헤매임보다 더 거칠고 황량하다는 것도 제 주먹보다 작은 술잔 속에 빠져 죽고 싶고 운명에 복수하듯, 되살아나고 싶은 것이 인생이란 것은 잘못해 봐야 알아진다. 거짓말일지라도 진리처럼 믿게 해줄 무모한 용기가 그립고 그런 거짓말쟁이 한 사람이 그리운 게 인생이란 것을 잘못하면 알아진다. ☆★☆★☆★☆★☆★☆★☆★☆★☆★☆★☆★☆★ 《83》 전설도 하 많은 고향 들녘 뜸 유안진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고향은 신비로운 동화의 세상 그래서 꿈도 희망도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세상 산봉우리, 고갯마루, 산골짜기, 냇물과 바윗돌, 한 그루 나무에까지 전설을 품어 신비로운 힘과 꿈과 위로과 웃음의 비결이 되었지 집채만한 거북이가 마을로 기어드는 거북바위마을도 입향조가 이름하신 구입리 씨족마을 거북처럼 오해 살며 번성하는 장수마을 거북바위는 생남 등과 와 승진 합격 치병들 어던 소원도 다 이루어준다는 거북바위는 주민의 신령스런 종교가 되어, 거북들, 거북뜸, 거북봉, 거북재, 거북골, 거북내, 거북다리목... 조상들의 함자도 구봉이 구형이 구문이 구동이 구호 구식 구놈이 구순이... 그 어르신네 고손자들 아명도 거복, 거남, 거북, 거돌, 거식, 거남, 거봉... 새댁네 모두는 아이 아닌 거북새끼를 낳으니 거북처럼 크게 되어 돌아오는 정기 서린 길승지 명당마을 어떤 가뭄에도 풍년농사가 된다는 거북뜸을 들녁으로 농사지어 사는 농촌마을 태풍과 장마에도 거북뜸 올벼는 잘도 익은 풍년 도깨비와 불귀신과 서낭신도 거북을 닮아서 어른 아리 없이 한 두가지 이야기를 지어 보태는 이야기꾼 마을 아무리 초라하고 볼품 없어져도 고향은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더욱 고향다웁고 알수 없는 영험스런 힘으로 타관 땅 어디에서도 굳세게 살아 성공하여 돌아가는 주인공이 되게 하는 바로 그런 그곳. ☆★☆★☆★☆★☆★☆★☆★☆★☆★☆★☆★☆★ 《84》 착해지는 날 유안진 살았던 곳들은 모두 다 고향들이었구나 괄시받은 곳일수록 많이 얻고 살았구나 행차 지나간 뒤에 나팔 부는 격이지만 갈지자로 세상을 살고 나서 불현듯 마음 착해지는 날은 울고 싶은 사람 뺨쳐주는 적선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악역이라도 자청하고 싶어진다. ☆★☆★☆★☆★☆★☆★☆★☆★☆★☆★☆★☆★ 《85》 천국 유안진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과천 현대 미술관 앞산 골짜기 먹이 찾는 토끼 다람쥐...... 이름 모를 멧새들 바람 없어도 눈가루 터는 마른 갈대 마른 향기 나만 없어지면 여기가 천국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이 더 좋다 나 있어서 땀내나는 나 있어서 용서가 필요한 이 세상이 더 좋다 해마다 새 기회로 설날이 찾아오는. ☆★☆★☆★☆★☆★☆★☆★☆★☆★☆★☆★☆★ 《86》 침묵하는 연습 유안진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 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 《87》 키 유안진 부끄럽게도 여태껏 나는 자신만을 위하여 울어 왔습니다 아직도 가장 아픈 속 울음은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하여 터져 나오니 얼마나 더 나이 먹어야 마음은 자라고 마음의 키가 얼마나 자라야 남의 몫도 울게 될까요 삶이 아파 설운 날에도 나 외엔 볼 수 없는 눈 삶의 기뻐 웃는 때에도 내 웃음소리만 들리는 귀 내 마음 난장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 《88》 파도를 보며 유안진 파도를 본다 도도한 목숨이 추는 어지러운 춤이여 울고 사랑하고 불타오르고 한탄하는 아아 인생은 위대한 예술 그 중에도 장엄한 敍事詩의 한 대목 바라건대 나는 그 어느 絶頂에서 까물치듯 죽어져라 죽어지기를 ☆★☆★☆★☆★☆★☆★☆★☆★☆★☆★☆★☆★ 《89》 훗날이 오늘이다 유안진 나 밖을 떠도는 내가 찾아다니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그 우주는 어딘가 머리 속 전두엽과 후두엽사이 틈 없는 틈새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내 안에 들어와서 거꾸로 흐른 시간 안에 나를 잡아두고 싶어 하는 내눈 응시하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는 눈동자 그 너머로 얼핏 잡힘 뻥 뚫린 거긴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먼 데가 가까운 데라고 훗날이 오늘이라고 고개드니 입구이자 통로이자 출구의 문인 내 눈동자 너머의 광할한 허공 여기 지금 너머 나를 열지 않고는 나갈 수도 없는 훗날의 거기를 오늘 여기로 살아야 한단다 ☆★☆★☆★☆★☆★☆★☆★☆★☆★☆★☆★☆★ 《90》 휘파람을 불어다오 유안진 이 허황된 시대의 한구석에 나를 용납해 준 너그러움과 있는 나를 없는 듯이 여기는 괄시에 대한 보답과 분풀이로 가장 초라하여 아프고 아픈 한 소절의 노래로 오그라들고 꼬부라지고 다시 꺾어 들어서 노래 자체가 제목과 곡조인 한 소절의 모국어로 내 허밍아 휘파람을 불어다오 ☆★☆★☆★☆★☆★☆★☆★☆★☆★☆★☆★☆★ 《91》 11월 유안진 무어라고 미처 이름 붙이기도 전에 종교의 계절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사랑은 차라리 달디단 살과 즙의 가을 열매가 아니라 한 마디에 자지러지고 마는 단풍잎이었습니다 두 눈에는 강물이 길을 열고 영혼의 심지에도 촉수가 높아졌습니다 종교의 계절은 깊어만 갑니다 그대 나에게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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