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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역사탐방] 노량진 사육신묘

2015. 07. 09. 오전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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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역사탐방] 노량진 사육신묘 <단종복위운동과 사육신>

 


역사탐방 17차 차기답사지는 단종과 정순왕후 와 연관하여 노량진의 사육신묘입니다 주제는.단종복위운동과 사육신입니다

전문 해설사와 함께하는 사색의향기 역사탐방은 회원님들께 특별한 인문학 체험이 되실 것입니다.



+ 탐방일시 : 2015년 7월 15일(수요일) 오후 2시



+ 만남시간 및 장소 : 2015년 7월 15일 오후 1시 50분 
                                - 노량진 사육신묘 정문(1호선 노량진역 1번 출구 400m, 9호선 노들역 1번 출구 400m)


+ 운영진 : 회장 장남기  010-5218-0001

                총무 전지애  010-7325-6958
                사무국 : 02-489-5100



+ 회비 : ₩5,000원(사회공헌금, 탐방일체 비용)

    - 회비는 현장에서 받습니다.



+ 탐방일정



+ 참가 인원 : 20명


+ 복장 : 편한옷, 운동화


+ 탐방해설 : 장남기 회장



+ 탐방지 소개  


1455년 윤6월 마침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세조의 등극이다. 단종 원년(1453) 정사(正史)에서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기록하고 있는 정변을 일으켜 이미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그가 마지막 수순을 밟은 것이었다. 형식적으로는 단종의 양위를 받아 국왕이 된 것이지만 명백한 찬탈이었다.




절의와 대의명분을 숭상하던 사대부 사회에서 이런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권력의 등장에 저항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일이었다. 세종과 문종의 총애 속에 성장한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은밀히 단종의 복위운동이 추진되던 중 절호의 기회가 왔다. 세조 2년(1456) 6월 1일 왕이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를 창덕궁에서 열기로 하였는데, 그때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무인 성승(成勝)과 유응부(兪應孚) 등이 별운검(別雲劍)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별운검이란 운검을 차고 왕 옆에 시립하는 무관의 임시관직이었다.
그러나 일이 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세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무장인 유응부는 기밀 누설을 염려하여 거사를 그대로 강행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동지인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등이 다음 기회를 노리자며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거사는 일단 보류되었다.
일이 차질을 빚자 복위운동의 동지였던 김질(金礩)이 지레 겁을 먹고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사건을 밀고하였다. 연회가 있은 다음날인 6월 2일의 일이었다.
이로써 단종 복위운동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그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은 굴비 두름 엮이듯 줄줄이 엮여 죽음을 맞이하여 70여 명에 이르는 사람이 희생되었다. 복위운동에 가담한 본인들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척들까지도 연좌율에 따라 처벌되었다. 집안의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까지도 모조리 지방 관아에 관비(官婢)로 박혔으며 직계 후손 가운데 사내들은 죽임을 당하고 가산도 모두 몰수되었다. 말 그대로 멸문(滅門)의 화(禍)를 당한 것이다.


민간에서 전승되어오던 사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이다. 그후 꾸준히 관리되어오다가 1977년 하위지와 유성원의 허묘를 마련함으로써 여섯 무덤이 온전히 갖추어지게 되었다. 사진은 의절사 오른쪽에 있는 묘역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을 당하였지만 오늘날 단종 복위운동 하면 간단히 사육신(死六臣)만을 떠올린다. 그 까닭은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1454~1492)의 문집 『추강집』(秋江集)에 실린 「육신전」(六臣傳) 때문이다. 그는 이 글에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다 희생된 70여 명 가운데 단지 여섯 사람-뒷날 사육신으로 불리게 된 박팽년, 성삼문,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만을 기록하였다. 때문에 이들만이 단종 복위운동의 핵심 주역으로 부각되고 다른 사람들은 잊혀지는 오해 아닌 오해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들 사육신의 묘는 애당초 남기도 어려웠고, 한데 모이기는 더욱 힘든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반죄로 죽임을 당한 그들의 시체를 감히 수습할 수도 없었거니와 일가친척까지 모두 풍비박산이 나 그럴 만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육신묘가 있는 이곳이 그들의 사형이 집행된 장소라는 말도 전하지만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사육신 가운데 박팽년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고, 유성원은 모의가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결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거열형(車裂刑)1)에 처해져 효수(梟首)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세월이 흐르고 차츰 이들 사육신이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면서 언제부턴가 민간에서는 한강가 노량진 언덕에 있는 몇 기의 무덤을 사육신묘라 하여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의로운 뜻을 기리게 되었고, 또 이곳에서 그들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그럴 듯한 얘기도 생겨난 것이리라.
아무튼 이곳에는 일찍부터 朴氏之墓·兪氏之墓·李氏之墓·成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석이 서 있는 네 개의 무덤과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어왔고, 민간에서는 네 개의 묘소를 사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의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 전해왔다.
이렇게 민간에서만 전승되던 사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이다. 숙종은 재위 5년(1679) 노량에 군대를 사열하러 갔다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육신묘의 봉분을 가꾸도록 했으며, 숙종 17년(1691)에는 묘역 안에 사육신의 사당인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우고 18년(1692)에는 이 서원에 사액(賜額)하여 편액을 하사하였다. 사육신의 충절이 국가적으로 크게 현창되기에 이른 것이다. 또 정조 6년(1782)에는 사육신의 묘비인 신도비가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태학사 조관빈(趙觀彬)이 짓고 글씨는 중국 당(唐)의 명필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민절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라지는 비운을 겪었다.




그후 1977년부터 이듬해에 걸친 사육신묘 성역화 사업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허묘(虛墓)를 마련함으로써 여섯 무덤이 비로소 온전히 갖추어지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될 때 작은 소동이 하나 벌어졌다. 행적으로 볼 때 김문기(金文起)가 사육신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논란 끝에 김문기 역시 허묘를 쓰고 위패를 봉안하는 것으로 정리되어 일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를 포함한 7인의 무덤이 있는 셈이다. 성역화 사업 때는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의절사(義節祠)와 묘역의 정문인 불이문(不二門), 신도비의 보호각 등이 새로 세워져 대체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9,370여 평의 대지 위에 자리잡은 사육신 묘역의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김문기를 포함한 7인의 위패를 봉안한 의절사가 건너다보이며, 그 앞마당 왼편에는 보호각의 그늘에 잠긴 신도비가, 오른쪽으로는 1954년 서울시가 세운 6각의 사육신비가 자리잡고 있다. 이 특이한 모양의 육각비 상단에는 시인 김광섭이 짓고 서예가 김충현이 쓴 비문이 돌아가며 새겨져 있고, 하단에는 면마다 사육신의 이름과 그들이 지은 시나 시조가 한글 혹은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하단의 글씨는 일본까지 가서 추사의 〈세한도〉를 국내로 되들여온 서예가 손재형의 솜씨인데, 현대 서예의 한 전범을 보는 듯 글씨가 아름답다. 사당을 돌아나가면 보이는 사육신묘는 여느 무덤과 다름없는 봉분들이 차례로 나열되어 낮은 봉우리 자락을 두르고 있다.


사육신묘는 어쩌면 민심이 만들어낸 허구의 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사실을 넘어선 진실을 만날 수도 있다. 현실의 패자가 역사의 승자로 남은 곳, 사육신묘는 그런 곳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육신묘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초판 2004., 5쇄 2009., 돌베개)






댓글 21개

이경숙 2015. 07. 09. 오전 10:25

밴드에서 신청하였으나 다시 참가 신청 합니다. -이경숙(1)

김혜련 2015. 07. 09. 오후 12:10

김지선님. 정정옥님. 최규자님. 문선리님 카톡방에 신청하셨습니다.

김혜련 2015. 07. 09. 오후 12:34

일등 신청 감사합니다.^^

한정숙 2015. 07. 09. 오후 06:35

참가 신청 합니다.

김혜련 2015. 07. 09. 오후 06:43

한정숙님. 밴드에 신청하셨죠? 그동안 많이 기다렸어요. 그날 뵈요.^^

김혜련 2015. 07. 09. 오후 06:45

전지애 총무님도 그날 오신댔어요.^^

문선리 2015. 07. 09. 오후 07:36

제 친구 박선미 문영미도 함께 가겠습니다.

김혜련 2015. 07. 09. 오후 09:28

녜. 녜. 박선미님, 문영미님 환영, 대환영이요.^^

이청미 2015. 07. 09. 오후 10:15

참가 신청합니다.

김혜련 2015. 07. 09. 오후 10:49

반갑습니다. 이청미님. 격하게 환영합니다.^^

김혜련 2015. 07. 09. 오후 10:53

참가합니다.

장경철 2015. 07. 10. 오전 09:49

수고하십니다.아내(곽종례)만 함께 합니다.감사합니다...^^

김혜련 2015. 07. 10. 오전 10:21

장경철님, 반갑습니다.곽종례님께 좋은 선물하셨군요. 신청 잘 하셨어요.^^

성범모 2015. 07. 10. 오후 02:26

처음으로 참가신청 합니다.

김혜련 2015. 07. 10. 오후 02:50

성범모님. 처음이어도 전혀 문제없는 곳이 사색의 동호회입니다. 아무 염려 마시고 15일에 뵈요..^^ 폰번호는 전지애 총무님께 문자주시면 진행에 도움되겠습니다. 환영합니다.

한정숙 2015. 07. 13. 오전 09:03

친정 엄마가 어제 저의 집에 오셔서 역사탐방 못가게 되었습니다.모처럼 좋은 기회였는데 너무나 아쉽네요

김혜련 2015. 07. 13. 오전 09:14

엄마가 오셨군요.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엄마가 건강하시니 딸네 집도 오신것 아닙니까? 엄마랑 좋은 시간 갖으시고 역사탐방은 다음 기회로~^^

권성연 2015. 07. 13. 오후 10:07

처음 저도 참석합니다,,

김혜련 2015. 07. 13. 오후 10:18

오호~ 권성연쌤, 반가워요. 어서 오시오. 환영 합니다.^^

성범모 2015. 07. 14. 오전 08:53

의미있는 시간되기를 기대합니다. 사적으로는 조상 뿌리 현장 탐방의 좋은 기회입니다. 연락처: 010- 9275- 1242

김혜련 2015. 07. 14. 오전 10:00

네. 네. 폰번호 감사합니다. 훌륭한 조상님을 다같이 조명하는 보람진 답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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