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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옛 향기 찾아가는 역사학교 공동기획 -조선통신사를 조명하는 특별해외탐방 대마도-

2016. 07. 11. 오후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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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함께하는 역사탐방]과 [제1회 옛 향기 찾아가는 역사학교] 공동기획
 조선통신사를 조명하는 특별해외탐방 대마도



조선과 일본의  정치, 외교, 문화 교류를 위해 존재했던 '조선통신사'를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하여 내년 7월이면 등재여부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등재가 결정된다면 하나의 유산이 두 국가에 등재되는 첫 번째 사례가 되겠습니다.
이번 “함께하는 역사탐방”과 공동기획에 참여하는 “옛 향기 찾아가는 역사학교”를 소개합니다. 경기도 교육청 산하 '경기마을교육공동체'가 각 지자체와 협력으로 학교와 마을이 연계한 다양한 마을교육공동체 주체들이 참여하되, 학생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학생이 스스로 기획, 운영하고 진로를 탐색하면서 학생들의 꿈이 실현되도록 도와주는 학교 밖 학교인 ‘경기꿈의학교’를 공모하였습니다.
‘함께하는 역사탐방'의 이상례 총무가 근무하는 용인포곡고등학교에서는 '옛 향기 찾아가는 역사학교'로 응모를 했고, 높은 경쟁률을 뚫고 7월 6일 최종 선정되었습니다.
‘옛 향기 찾아가는 역사학교’의 꿈짱(꿈의학교를 실제로 운영하는 학생)과 사색의 향문화원 커뮤니티‘함께하는 역사탐방’이 협약을 맺고 내년 1월까지 해외특별탐방과 주말역사탐방을 함께 할 예정입니다.
우리의 미래인 꿈나무들과의 뜻 깊은 협약의 첫 기획인 대마도탐방에 회원님들을 초대합니다.

1. 일시 : 2016. 08. 08. (월) ~ 08. 10 (수)  2박 3일 (일정표 참조)


2. 출발 : 2016. 08. 07. (일)  23 : 00 교대역 9번 출구 네오여행버스 탑승
              부산에 아침 일찍 도착해야 하므로 전날 밤 11시에 출발합니다. (이점 유의하세요)
              23:20 죽전정류장(신갈에서는 정차하지 않습니다)


3. 인    원 : 30명 (최소 출발인원 25명)


4. 회    비 : 479,000원(서울~부산 왕복 버스비 6만원 포함)
             부산에서 직접 오시는 분은 419,000원
             예약금 10만원(원활한 진행을 위해 신청시 입금 부탁드립니다.)
             잔금은 7월 18일까지 입금 완료 (신청시 전액입금도 가능합니다.)
            [입금계좌] 국민은행 443101-01-129315 (예금주: 사색의향기 문화원)


5. 여행안내 사항 : 7월 18일까지 여권사본을 회장(010-3743-8089)에게 카톡이나 문자로 보내주세요. 선표예약 및 여행자보험 가입을 위해 필수사항입니다.

######  취소 및 환불은 여행사 규정에 따라야 하므로 이 점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6. 세부 일정
    8월 7일(일)   * 22:50~       네오관광버스 탑승 완료
                       * 23:00~       정시 출발
                       * 23:20~       죽전정류장


    8월 8일(월)   * 05:00~06:20  부산해운대 해수욕장 도착 및 해돋이, 개인별 아침식사
                       * 06:20~07:00  해운대 출발, 부산신(新)국제여객터미널로 이동
                       * 이후 일정은 아래 일정표 참조     



7. 여행정보
 (1) 날씨 / 의류 챙기기
    가. 날씨 : 우리나라의 날씨와 비슷하며,  부산에 비가 내리면 대마도 또한 비가 내릴 가능성이 큽니다. 기온은 부산보다 1-2도 정도 더 높습니다.                                
    나. 의복준비 : 계절에 맞는 여행 복장 및 편한 신발 / 체온감소 대비한 가벼운 외투
 (2) 준비물
    가. 여권 / 비상약 - 소화제, 감기약, 해열제, 지사제, 개별 복용약 등
    나. 모자 / 개인물병(등산 시 별도의 약수터가 없음)                                                
    다. 썬크림, 카메라, 휴대용 티슈, 손목시계, 우산 등                                   
    라. 간단한 간식 - 이동 또는 휴식 시 체력 유지에 도움이 됩니다.
    마. 대마도 입국 시  육류(족발, 소시지, 햄 등)는 반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 외 밑 반찬류(김치, 김, 깻잎, 고추장 등)는 반입 가능하오니 필요 시 개별 준비 바랍니다.
        한국 소주는 대마도 내에서는 구매가 어려우므로 미리 구입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과일(사과, 배 반입금지) 은 식물검역소의 검역을 거쳐야 통관 가능합니다. (절차 간편) 
(3) 환전 : 엔화 (¥100 = 1,000원)
    - 대마도에서는 지역의 특수성 때문에 환전 및 신용카드가 결제되는 곳이 거의 없으므로
       출국 전 국내 은행 또는 부산국제여객터미널 내 환전소 등에서 엔화로 미리 환전 바랍니다.
       (단, 일본 면세점에서는 해외에서 사용 가능한 신용카드 및 한화 사용 가능) 
(4) 전화 : 대마도에서 한국으로 발신 시 국제전화 요금이 발생됩니다.
(5) 휴대폰 로밍 : 휴대폰 해외 사용의 경우 기종에 따라 해외 자동로밍이 가능 여부가 다를 수 있으므로 로밍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이용 하는 이동 통신사에  직접 확인이 필요합니다.
       ※ 주의 : 스마트폰의 해외 데이터 로밍의 경우 사용하지 않더라도 요금이 별도 부과될 수 있으므로 해외 데이터 로밍을 직접 차단하시거나 또는 이동 통신사별로 저렴하게 이용 할 수 있는 해외데이터로밍 요금제 서비스를 미리 신청하셔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6) 세면도구 : 현지 호텔 및 민숙마다 칫솔, 치약, 면도기, 빗, 타월 등의 구비 여부에 차이가 있으므로 개인적으로 준비 바랍니다. 
(7) 전기제품 : 일본의 전기제품은 모두 110v 이므로 우리나라와 콘센트가 다릅니다.
                 한국에서 사용하시는 전기제품을 대마도에서 사용하실 경우 전압을 변경할 수 있는
                 멀티 탭(11자형 돼지코)은 현지에서 무료로 빌려 드리니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8) 여행 시 주의사항
    가. 대마도는 거제도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발달이 되지 않아 지킬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습니다. 반면에 편의 시설, 숙박 등의 현지 사정이 조금 불편 하실 수도 있는 점은 이해 부탁드립니다.      
    나. 대마도는 일본이므로 여권은 꼭 지참하셔야 합니다.                                                     
  

[대마도 소개]



소속 :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쓰시마 시.
면적 : 708㎢ (울릉도의 약 10배, 제주도의 약40%, 섬 전체 89%가 산림지대)
거리 : 대마도에서 한국까지 49.5㎞  (일본 후쿠오카까지 138㎞)
인구 : 약 3만 4천명(2014년 2월 집계)

동서 폭은 18㎞, 남북의 길이 82㎞이며 본 섬 외에 107개의 섬이 있고 그 중 5개 섬이 유인도입니다. 본섬은 두 개의 섬으로 나눠져 있고, 이를 만제끼 다리가 연결하고 있습니다.
행정을 살펴보면 1市 6町 (쓰시마市,이즈하라마치, 미츠시마마치, 토요타마마치, 미네마치, 카미아가타마치, 카미쓰시마마치)입니다.


[탐방지 소개]
1. 쓰쓰자키 해변

쓰쓰자키는 쓰시마 최남단에 위치한 곶(갑)으로, 대한해협에서 쓰시마해협으로 돌아 들어오는 곳에 돌출되어 있습니다. 거친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작은 섬들과 암초들, 그리고 바다 저편의 새 하얀 등대가 절경을 이루는 곳입니다.
쓰시마난류를 타고 북상하는 선박들에게는 항해 위치를 파악하기에 용이한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쓰시마 난류의 분기점으로 해류가 빨라 쓰시마의 최북단과 더불어 항해하기 어려운 난코스이기도 합니다.
1909년 항로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곶의 앞바다에 등대를 건설하였으며 현재의 20m높이의 등대는 1987년 새롭게 세워졌습니다. 해류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어종이 풍부하고 성게, 소라, 전복뿐만 아니라 가을에는 방어도 많이 잡힙니다.



2. 아유모도시공원
아유모도시란 말은 은어가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세강은 쓰시마에서 제일 높은 산인 야타테야마(矢立山)와 다테라야마(龍良山)에 둘러싸인 우치야마 분지에서 발원하고 있습니다. 이 세강 유역을 포함한 다테라야마 원시림의 산기슭 약 26ha가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습니다. 산속 깊은 곳까지 수량이 풍부하여 은어(아유,鮎)가 많이 거슬러 올라오는 것으로 유명하나, 세강의 거친 물살로 인해 상류인 우치야마 지역까지는 올라오지 못합니다.
공원 입구의 주차장에는 이시야네(石屋根,돌지붕) 휴게소가 마련되어 있으며 세강 위에 걸쳐 있는 구름다리에서 강을 내려다보면 계곡 전체가 천연의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웅대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표고 144m의 높이에 마련되어 있는 만남의 광장을 중심으로 세강의 사면에 스포츠 슬라이더, 잔디 썰매장, 퍼팅골프장, 캠프장, 삼림욕장 등이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 이시야네

섬의 89%가 산림지역으로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쓰시마는 식량의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또 예로부터 화재가 많이 발생하였으며, 대한해협에 면해 있는 서해안 지역은 겨울이 되면 강한 계절풍이 불어 왔습니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초가지붕과 너와지붕으로는 강풍과 화재로부터 소중한 식량을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농민이 기와로 지붕을 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쓰시마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평평한 돌(혈석)로 지붕을 이게 되었고, 고상식(高床式: 기둥을 세워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올려 설치하는 가구 구조)으로 지어 바람과 화재, 그리고 습기에도 강한 형태의 창고를 짓게 된 것입니다. 창고 내부는 쌀, 보리 등의 잡곡, 의류 및 각종 생활 도구 등을 구별하여 수납할 수 있도록 구획하였습니다. 또 창고를 화재로부터 지키기 위해 본채로부터 떨어진 곳에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건축 형태는 일본에서도 쓰시마 시이네(椎根)지방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4. 코모다하마 신사
섬의 89%가 산림지역으로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던 쓰시마는 식량의 보존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또 예로부터 화재가 많이 발생하였으며, 대한해협에 면해 있는 서해안 지역은 겨울이 되면 강한 계절풍이 불어 왔습니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초가지붕과 너와지붕으로는 강풍과 화재로부터 소중한 식량을 지켜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농민이 기와로 지붕을 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쓰시마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평평한 돌(혈석)로 지붕을 이게 되었고, 고상식(高床式: 기둥을 세워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올려 설치하는 가구 구조)으로 지어 바람과 화재, 그리고 습기에도 강한 형태의 창고를 짓게 된 것입니다. 창고 내부는 쌀, 보리 등의 잡곡, 의류 및 각종 생활 도구 등을 구별하여 수납할 수 있도록 구획하였고 창고를 화재로부터 지키기 위해 본채로부터 떨어진 곳에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건축 형태는 일본에서도 쓰시마 시이네(椎根)지방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5. 면암 최익현선생 순국비와 수선사
대마도에 들러 반드시 찾아야 할 곳으로 최익현선생 순국비가 있습니다.
이즈하라 시내에 위치하여 찾아가기도 쉬우며 특히 순국비가 위치하고 있는 수선사는 백제의 비구니인 법묘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 최익현 선생 약력 [1833 (순조 33)~1906 (광무 10)]



본관은 경주(慶州). 아명은 기남(奇男).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아버지는 대(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입니다.
9세 때 김기현(金琦鉉)에게 유학의 기초를 배우고, 14세 때부터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1855년(철종 6)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어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이조정랑·신창현감(新昌縣監)·성균관직강 등을 지냈습니다. 1866년(고종 3) 어머니 상을 당해 3년 상을 치른 후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이 되었습니다.
그해 10월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聚斂政策)의 혁파, 당백전(當百錢)의 폐지, 사대문(四大門) 문세(門稅)의 폐지 등을 주장하며 대원군의 대내정책을 비판했습니다. 이 상소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곧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양주 직곡(直谷)으로 내려가 학문에 힘썼습니다.
1873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임명되자 사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했습니다.
대신을 비롯한 관리들과 성균관 유생들이 그를 극렬히 비난했으나 당시 친정(親政)을 생각하고 있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받아들이고 호조참판에 임명했습니다. 그해 11월 다시 상소하여 앞서의 상소내용을 부연설명하면서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비롯한 대원군의 실정을 통박하고, 하야를 요구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으나 상소문의 문구 가운데 지나치게 과격한 내용이 있어 삼사(三司)를 비롯한 대신들의 탄핵으로 국문(鞫問)을 받고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1875년 2월 풀려났습니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위정척사론). 그는 이 상소에서 첫째, 일본과의 강화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무비(武備)를 갖추지 못하여 고식책으로 강화를 추진한다면 앞으로 적의 무한한 탐욕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며, 둘째, 일본의 물화(物貨)는 모두가 요사기완(搖奢奇玩)으로서 우리나라의 유한한 농업생산품으로 적의 무한한 공업생산품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며, 셋째, 일본을 왜(倭)라고 일컬었으나 실은 양적(洋賊)과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일단 강화가 성립되면 금수와 같은 양인(洋人)의 사교(邪敎)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했습니다.
이 상소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1879년 풀려나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약탈·잔학행위를 일삼는 집단으로 간주하고 격렬히 비난했습니다. 그해 6월 경복궁 쿠데타가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친일 개화파정권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개화정책의 전반적 폐지를 요구했으며,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의 처단과 역적들을 비호하는 일본에 대한 문죄를 요구했습니다.
1895년 8월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습니다.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이 보낸 순검(巡檢)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되어 있다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자 풀려나 향리로 내려갔습니다. 이어 고종에 의해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을 회유하여 해산시키기 위한 선유대원(宣諭大員)으로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습니다.
1898년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12조의 시무책을 올렸습니다. 여기서 그는 강렬한 화이관(華夷觀)과 양이주의(攘夷主義)의 입장에 서서 갑오개혁을 부정하고 구래의 봉건적 지배체제의 회복을 주장했으며,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을 추진하는 독립협회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또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라 칭하며 연호를 제정함은 종사(宗社)가 거의 멸망 지경에 이른 현시점에 있어서 명실(名實)이 일치하지 않는 헛된 일이라며 그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그해 말에는 중추원의 설치를 건의한 자 및 박영효의 등용을 상소한 자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만민공동회가 열려 헌의6조(獻議六條)를 제출하는 등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자 독립협회류는 일체 혁파할 것이며 주모자를 모두 처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1900년 거주지를 충청도 정산으로 옮긴 후 홍천·지평·제천·안동·경주 등지를 여행하면서 친척과 벗들을 방문하고 강회를 여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습니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2월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8월에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은 그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상경하여 자문에 응할 것을 요청하고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등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1905년 1월 고종을 면담하고 국세가 금일과 같이 위란(危亂)에 직면하게 된 가장 큰 까닭은 민비학살사건 이후 복수심이 결여된 때문이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왕이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재택용(人才擇用)·취렴금지(聚斂禁止) 등 5조의 시무책을 올렸습니다. 고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거듭 상소를 올려 일본의 침략을 비판했습니다. 그의 반일활동을 계기로 김학진(金鶴鎭)·허위(許蔿) 등의 반일상소가 잇따르자 그해 3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포천으로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며칠 후 다시 상경하여 상소문을 작성했으나 재차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疏〉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상소운동이 실패하자 전국에 걸쳐 반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포고팔도사민 布告八道士民〉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는 동시에 비통한 전도(前途)를 예시하고, 오직 우리는 궐기 투쟁해야 할 것과 을사5적을 토륙(討戮)할 것, 이들이 국왕을 압박하여 일본의 포로로 하려는 등의 흉악한 음모를 방지할 것, 결세(結稅) 상납을 거부하고 일본이 경영하는 철도를 타지 말고 군기(軍器)·총포(銃砲) 이외의 일본상품을 사지 말 것 등을 촉구했습니다. 1906년 1월 충청남도 노성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어 전라북도 태인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고, 113명의 지사들과 〈동맹록 同盟錄〉을 작성한 후 호남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동참을 촉구했습니다.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창의구국(倡義救國)을 결의하고,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했으며, 격문을 열읍(列邑)에 보내 호응을 촉구했습니다.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인 〈기일본정부 奇日本政府〉에서는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이 저지른 기만적 배신행위를 16조목에 걸쳐 열거하면서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해 하루 속히 물러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어 태인읍을 무혈점령하여 그곳의 무기와 세금을 접수했으며, 이튿날 정읍에 도착해 무기와 병력을 증강했습니다. 다시 순창으로 행군, 많은 주민과 이속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여 소총과 화약 등 무기를 수합했으며, 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여 의병의 수는 500명에 달했습니다. 이때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가 출동하자 이를 물리쳤고 6월 8일 곡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의 의병 수는 900명으로 증가했으며 소총 등의 무기를 갖추게 되어 전력이 증강되었습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고종의 선유조칙을 전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이날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진위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임병찬·고석진(高石鎭) 등 12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 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임병찬과 함께 쓰시마 섬[對馬島]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嚴原衛戍營)에 감금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식으로 사절(死節)하기로 결심하고, 임병찬에게 구술(口述)로 유소(遺疏)를 전했습니다. 유소에서 그는 왕에게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하고, 국제관계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은 반드시 미구에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단발조치가 철회되자 단식을 중지했으나 그해 11월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했으며 이듬해 1월 유해가 봉환되었습니다.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습니다.


6. 덕혜옹주비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종이 회갑연에 얻게 된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습니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습니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고,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친 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습니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습니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해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였습니다. 하나 있는 딸마저도 결혼에 실패하고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습니다.



7. 서산사
서산사는 조선통신사가 대마도를 들렀을 때 유하던 장소로서 지금도 그것이 인연이 되어 특이하게도 유스호스텔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마도 유일의 유스호스텔을 사찰이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서산사를 찾아가면 3군데의 볼거리가 있는데 이태안의 건축물과 김성일 선생의 시비(詩碑), 그리고 현소스님의 석상입니다.
● 이태안(1611 ~ )
현재의 건축물은 화재로 손실 된 것을 복구한 것이나 입구부분의 구조물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조선통신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옛 대조선 외교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학봉 김성일 선생 시비 (鶴奉 金誠一 先生 詩碑)
김성일 선생 1538(중증 33)~1593 (선조 26) 본관은 의성이며 영남의 대 유학자라 일컬어집니다.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입니다.
조선 선조 대왕이 왜국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황윤길과 함께 통신사로 파견하였습니다.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기를 필히 왜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황윤길의 의견과 반대의견을 보고하여 당시 동인과 서인의 세력 갈등의 상황에서 우위였던 동인 세력인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되었습니다. 같은 동인이었던 유성룡 선생과의 교분이 깊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대왕의 처벌의지에도 유성룡 선생이 적극 변호하였다 전해집니다.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로 종군하다 병사하셨습니다. 서산사 뒤 산 기슭에 원래의 시비가 현소 스님의 부도탑과 함께 나란히 서 있으며 경내에 있는 시비는 의성 김씨 문중에서 설립하였습니다.



● 현소 스님 석탑
현소 스님은 하카다(博多) 세이후쿠사(聖福寺)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름을 받고 그의 수하 승려가 되어 1588년(선조21년)부터 조선에 드나들며 자국의 내부사정을 설명하고, 일본과 수호관계를 맺고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許筬)등의 통신사 일행이 풍신수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했으며,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의 국정을 살피고 토요토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159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습니다.
이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고니시(소서행장)의 제의로 이루어진 중추부 동지사(中樞府同知事) 이덕형 등과 강화회담에 [야나가와 초신]과 함께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하였습니다.
서산사 뒤 산기슭에 스님의 부도탑이 안치되어 있고 김성일 선생의 시비도 나란히 서있습니다.
 



8. 대마역사자료관
조선통신사 행렬도, 초량 왜관도 등 다양한 유물과 쓰시마 야마네꼬(산고양이), 쓰시마 사슴, 물수리 등 천연기념물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대마도의 포경어업(고래잡이)의 기록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어 옛 대마도인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민속자료관 일대에는 '조선통신사비', '고려문', '성신지교린비' 등이 있습니다.
 



9. 조선통신사비
1697~1811(210년)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두었습니다. 대마도에는 이곳 외에 수많은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을 가져 다 주었고 당시 통신사 일행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를 '누에'와 비교할 정도이니 그 광경을 짐작할만합니다.
1811년 일본의 역지빙례(易地聘禮)- 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역에서 예를 다함- 정책에 의하여 12차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서 머물다 귀국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통신사의 왕래는 끊기고 말았습니다. 통신사는 원래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10. 성신지교린비
아메노모리호슈(1668-1755) 선생이 주창한 '성신지교린'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아메노모리호슈 선생은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 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1727년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서 생겨나기도 하였습니다.

 



 

댓글 17개

이상례 2016. 07. 11. 오후 02:39

제1회 옛향기 찾아가는 역사학교 꿈짱 조재호군, 정효진양,꿈지기이상례,박원정 신청합니다.

이상례 2016. 07. 11. 오후 02:40

경기꿈의학교 학생 변지은양, 김예원군, 김인애양, 이수빈양 신청합니다.

김혜련 2016. 07. 11. 오후 02:49

최인자님 이장의님 이기향님 나인향님 나인희님 나인월님 정정옥님 최금식님 김태일님 권명자님 김경옥님 최경옥님 이석하님 설경화님 한정숙님 나선희님 성백석님 배영민님 김혜련 (이상 밴드에서 신청하신 분입니다) 현재 28분 신청하셨습니다.^^

김혜련 2016. 07. 11. 오후 04:26

황명옥님 신청하셨습니다. 반갑습니다.^^

김혜련 2016. 07. 13. 오후 03:07

한정순님, 하상은님, 이종탁님, 백명숙님 밴드에 신청하셨습니다.^^

김혜련 2016. 07. 13. 오후 03:22

33분 신청되어 마감합니다.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이상례 2016. 07. 13. 오후 06:07

박성은과 그 친구 신청합니다.

김혜련 2016. 07. 13. 오후 06:16

이화자님 대기로 신청하셨습니다.

이석하 2016. 07. 13. 오후 06:58

회장님! 회사일정으로 불가피하게 이석하,설경화 금번 대마도 특별해외 역사탐방에 동참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함께 하지 못하게 되어 대단히 아쉬우며 즐겁고 유익한 역사탐방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혜련 2016. 07. 13. 오후 07:54

그런 일이 있으시군요. 아무 염려 마시고 일 잘 보세요. 다음 기회에 뵈요.^^

김혜련 2016. 07. 13. 오후 10:36

급한 일로 취소하신 분이 있어 이화자님 함께 하게 되었어요.^^

김혜련 2016. 07. 14. 오전 09:28

이종원님, 최해숙님 밴드에 대기로 신청하셨습니다.

김혜련 2016. 07. 19. 오후 12:49

이종원님, 최해숙님 함께 하게 되셨습니다. 대기자로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부영 2016. 07. 25. 오후 06:46

대마도여행 대기자명단에 <정부영외1명>을 넣어주세요.8월8일전에 포기자가 있으면 일행과 함께했으면 합니다.

정부영 2016. 07. 26. 오전 06:05

비밀글이아닌데 어쩌다 잘못 찍었네요.두사람 대기신청입니다.

김혜련 2016. 07. 26. 오후 04:22

대기신청하셨군요. 혹시 취소하시는 분 있으면 전화 드리겠습니다. 관심 감사합니다.

김혜련 2016. 08. 10. 오후 05:46

역사탐방 첫 해외답사를 무사히 마치고 모든 회원님들 건강하게 돌아 오셨습니다. 염려해 주신 회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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