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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회 역사문화탐방] 삼전도비와 뮤지컬 타이타닉
[104회 역사문화탐방] 삼전도비와 뮤지컬 타이타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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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7일 오후 1시
+2호선 잠실역 3번 출구 지하에서 뵈요.
+보온병 휴대하시기 바랍니다.
+삼전도비 해설 ㅡ 샤롯데씨어터 ㅡ 뮤지컬 <타이타닉>관람
+뮤지컬 타이타닉 티켓 없습니다.
● 샤롯데 씨어터 위치(클릭)
https://m.store.naver.com/attractions/detailMap?id=12091168
● 명나라는 조선을 도와 임진왜란에 참전한 뒤 국력이 약해지죠.
명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여진족은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명나라를 공격합니다.
● 명나라가 몰락하고 후금이 승승장구하는 과정에서 광해군은 후금을 적으로 만들어선 안 되겠다 생각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칩니다.
● 광해군은 복잡다단한 국제정치 상황에 대응해 중립외교로 조선을 전란에서 구한 <외교정책의 대가>였다 평가되고 있습니다. 반면 그를 몰아내고 임금이 된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난한 결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 정계에서 밀려나있던 세력들은 광해군을 의리와 명분이 없는 정권이라 몰아세우며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왕위에 올리는 인조반정을 일으킵니다.
●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없으면서 광해군을 쫓아냈던 무리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명분을 져버릴 수 없어 후금(훗날 청나라)과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 광해군은 세자시절만 16년 경험하였으나 아버지인 선조의 사랑도 받지 못했고 나이어린 계모에게서는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해 광해군은 입지가 좁은 상태로 임진왜란 때 분조(임시 정부)를 잘 끌어나갔습니다.
● 광해군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은 영창대군을 죽입니다.
● '왕권에 부담되는 존재였기에, 정치는 비정한 것이어서~' 이렇게 평하는 사람들은 광해의 현실 외교감각을 최고라고 합니다. 광해군은 왕족 중에서 보기 드물게 전쟁을 체험한 사람으로 그의 대외 정책 최우선 순위는 '전쟁 방지'였습니다.
●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명을 중시하고 청을 멸시하는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우면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반정을 일으켜 인조가 왕이 되면서 후금과는 더욱 어렵게 됩니다.
● 왕은 예쁜 여자만을 사랑하진 않았나 봅니다. 광해군이 너무도 쉽게 왕위를 빼앗긴 이면에는 '얼굴이 차마 피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 김개시(김상궁)가 있습니다. <차마 피지 못한 궁중의 여인>들 중 영친왕을 낳은 엄귀비와 김개시는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는 대목을 본 일이 있습니다.
● 광해군은 역모의 조짐을 읽었으나 아무 일 없을 것이라는 김개시의 말만 듣고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광해군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김개시는 천한 이름으로 오래 살기를 바래 개똥으로 이름지어졌기에 똥이란 뜻의 '시'를 넣어 김개시, 김개똥으로 불리워진 김상궁입니다.
● 왕실 기록에 외모를 올리는 일이 거의 없는데 광해의 여인 김상궁에 대해서는 '얼굴이 차마 피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건국대 신병주 교수는 TV에서 말했습니다.
● 임진왜란때 조선에 도움을 준 명나라가 후금과 싸우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지요.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섬기던 명분을 따르려했고 광해는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리외교를 펼치려 했습니다.
● 17세기 중국대륙에는 기울어져가는 명나라와 날로 부강해지는 후금(훗날 청나라)이 중국대륙을 놓고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명나라를 섬겼던 조선은 후금을 적대시하여 후금으로 부터 첫번째 침략(정묘호란)을 받고 <형제의나라> 라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 조선은 겉으로는 후금을 형제지국이라 하나 실상은 명나라를 따르고 지원하였지요. 만주전역을 차지한 후금은 형제지국에서 군신관계로 고칠것을 주장하며 사신을 보냈으나 인조는 사신 접견도 거절하고 후금에 강경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 이에 청의 10만대군은 1636년 12월 2일, 조선을 침공하는데 청나라 선봉대가 개성을 지날 때인 12월 13일에야 알아차린 인조는 14일 밤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청나라 군에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합니다.
● 12월 16일부터 청나라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에는 청태종이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도착하지요. 당시 남한산성내에는 군사 1만 3천명이 절약해야 50일 정도롤 버틸 수 있는 식량밖에 없는데다 강화도에 피난가 있던 봉림대군(인조의 둘째 아들, 훗날 효종)이 1월 30일에 항복하기로 합니다.
● 남한산성에 피신한지 한 달이 넘어 식량은 바닥나고 매서운 추위로 사람들이 지쳐있을 때 청은 계속하여 항복을 요구합니다.
● 청과 끝까지 싸우자는 편과 싸움을 멈추고 화해를 주장하는 편으로 나뉘어진 상태에서 청에 대항하던 인조는 47일만에 항복하고 맙니다.
● 그 결과로 조선과 청은 신하와 임금의 관계를 맺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많은 조선사람들이 청에 인질로 끌려 갔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은 청에 조공을 하게 되었고 청이 전쟁할 때는 지원군을 보내야 했습니다.
● 나라의 수치를 <국치>라고 하지요. 조선시대에는 두 번의 국치가 있었으니 병자호란때 청 태종에게 항복하며 올린 <3배 9고두례>와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승리한 청 태종의 강요로 세워진 비석으로 실은 청나라 전승비인 <대청황제공덕비>입니다. 비문은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행위를 공덕으로 찬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인조가 서문을 통해 청태종에게 항복하러 갑니다.
《남한산성 서문 》
● 인조는 2만 명의 적병이 도열해 있는 사이를 걸어 청 태종에게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라는 치욕적인 항복례를 하는데 청태종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다시 할 것을 요구해 인조는 사실상 수 십 번 이마를 부딪쳐 인조의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 서문》
● 용포를 벗고 청의로 갈아 입은 뒤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 서문을 통해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하지요. 신하된 주제에 용포는 안 되고 죄를 지었으니 정문으로 나올 수 없어 서문으로 나와야하며 항복했으니 백마를 타게 한 것입니다.
●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거하던 인조는 곤룡포 대신 쪽빛 평민복을 입고 맨발로 삼전도의 청 태종 군막까지 걸어나와 군막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청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이마를 땅에 대고 조아림)로 치욕적인 항복을 합니다.
《삼전도 굴욕 동판》
● 인조는 땅에 엎드린 채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고 이에 청태종은 신하들에게 조선 국왕을 용서한다는 칙서를 내리게 하였다고 합니다.
● 청 태종은 항복 의식 도중에 고기를 베어 개에게 던져 주었다고 했으니 항복한 조선(개)에 은전(고기)을 베푸는 꼴이 되었지요. 조선의 임금이 당했던 그날의 일을 <삼전도의 굴욕>이라 합니다.
● 아래는 <산성일기>에 적힌 청나라 조공물품 목록입니다.
● 청나라가 조선의 항복을 받아 들이는 조건으로 요구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은 청사라의 신하국으로 예를 지킨다.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대신들의 아들을 인질로 보낸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징벌할 때 조선은 지원군을 보낸다.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 50척을 보낸다.
+조선인 포로가 도망쳐 오면 청나라로 보낸다.
+내외 제신과 혼연을 맺어 화호를 굳게 한다.
+조선은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지 않는다.
+2년 뒤부터 청나라에 조공을 보낸다.
● 청나라 군대는 철수하면서 조선인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그 수가 60만 명에 이르렀고 당시 조선 전체 인구는 1천만 명 정도였으니 인구의 6%가 포로로 잡혀 간 셈입니다.
● 청나라가 이렇게 많은 포로를 끌고 간 것은 경제적인 이유때문이었으니 포로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할 속셈이었습니다.
● 포로 송환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졌지만 재정상 한계가 있어 백성들은 사비로 포로를 데려와야 했고 1인당 25~30냥, 비싸게는 150~250냥을 주고 데려 왔다고 합니다.
● 양반가에서는 가족을 하루빨리 데려오기 위해 비싼 가격을 제시하는 바람에 포로 가격은 1500냥까지 치솟았다고 합니다. 당시 농촌의 하루 품삯이 한 냥이었으니 포로 가격이 얼마나 비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 포로 가격이 오르자 가난한 백성들은 잡혀간 가족을 데려 올 수 없어 눈물을 삼킬 수 밖에 없었는데 가족이 데려오지 못한 포로들은 청의 수도 심양에서 공개 매매가 이루어져 청나라 사람들에게 노예나 첩으로 팔려 갔다고 합니다.
●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 젊은 여인이 20만 명이나 되었고 어렵게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들은 오랑캐들에게 몸을 더렵혔다는 이유로 조선에 돌아와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으니 이 때부터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를 기리켜 <환향녀 또는 화냥년>이라 했다 합니다.
● 그들이 낳은 아이들은 오랑캐 노비의 자녀를 이르는 <호로자식>으로 천대하는 등 큰 사회적 후유증을 남깁니다.
● 여자의 정절을 중시했던 사대부 양반들은 돌아온 부인을 반기지 않았고 양반들의 이혼 신청이 줄을 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음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 나라에서는 홍제동(널리 구제하는 동네)에서 몸을 씻고 오면 과거를 묻지 못하게 했으나 양반들은 이런저런 핑게를 대며 이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 조선의 왕과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무능하여 자신들의 여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여인들이 몸을 더렵혔다는 사실에만 분노했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 비문을 새긴 이경석은 자신에게 글을 가르쳐준 형에게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고 말했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였으며 훗날 제자들에게 수모를 당합니다.
● 삼전도비는 인조 17년에 세워져 청일전쟁으로 청의 세력이 약해지자 고종황제는 비석을 강물에 수장시켰는데 일제가 한강에서 건져내 다시 세웠습니다. 이는 조선은 침략을 잘 받는 나라로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 삼전도는 송파나루가 있던 곳으로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고 1980년대 한강개발로 나루터는 사라지고 롯데월드 건축 당시 늪지를 호수로 조성해 호수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국치의 기록이라하여 문교부에 의해 1956년 땅에 묻혀졌다가 1963년 홍수로 모습이 드러나면서 다시 지상에 세워지게 됩니다.
● 삼전도비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보다 남서쪽 10m라하나 그곳에 설치하면 물속에 잠기는 까닭으로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고 송파구청은 말합니다.
● 삼전도비는 우리에게 <국제정치에서는 명분보다 실리가 중요하다는 점과 유비무환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삼전도 비문은 3면에 한자(당시 조선, 명, 청, 일본)와 만주어와 몽골어로 씌어졌으니 세 언어의 기록비이기도 합니다.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수난을 많이 당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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