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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회 역사문화탐방 긴 잠에서 깨어난 도심의 오아시스
제130회 역사문화탐방 긴 잠에서 깨어난 도심의 오아시스<청계천>
● 조선시대 대표적인 석교인 광통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다녀온 모습을 그린 정조반차도, 빨래터, 소망의 벽, 하늘물터, 버들습지로 이루어진 <청계천 8경>을 만나러 갑니다.
● 야담집에 의하면 숙종이 수표교를 지날 때 문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소녀를 보게 됩니다. 그 소녀가 바로 장옥정, 장희빈입니다.
+ 탐방경로 : 광통교 ㅡ 삼일교 ㅡ 수표교 ㅡ 새벽다리 ㅡ 광장시장 ㅡ 오간수교 ㅡ 이간수문
+ 10월 17일 (수) 오후 1시40분까지 오세요.
+투어 : 오후 2시 시작
+만남 장소 : 5호선 광화문역 5번과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 이용하여 동아일보사앞 광장
+ 회비 : 5,000원
+ 참가 인원 : 20명
+ 복장 : 편한옷, 운동화
● 청계광장 : 청계천의 시작지점으로 동아일보사앞의 광장을 말합니다.
● 광통교 : 한양도성 최고의 다리로 아래사진은 어가 행렬이 지나가는 모습입니다.
●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와 태종 방원은 원래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함경도 변방의 무인집안의 아이 방원을 태조의 경처 신덕왕후 강씨가 귀족들의 세계로 인도하여 정치수업을 시켰고 나중에는 방원이 과거급제하게 됩니다.
● \"네가 어찌 내 배에서 나오지 않았느냐~ \" 할 만큼 각별하기도 했습니다. 정몽주를 척살한 방원을 죽이려는 태조 이성계에게서 방원을 지켜 주었고 방원의 과거 급제에는 신덕왕후 강씨의 뒷바라지가 상당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 이성계 또한 방원의 급제에 눈물을 흘린 기록도 있는 걸 보면 이성계 자녀들의 개경 삶에 강씨는 써포터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 신덕왕후 강씨는 신의왕후 소생과도 관계가 좋았고 중앙 귀족과도 원만한 관계였던 것은 좋은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 강씨의 작은 아버지가 노비 출신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집안이 몰락했음을 알 수 있고 신덕왕후의 처세도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강한 집착이 결국 자신의 아들 곧 방번과 방석을 죽음으로 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건국에 자기의 지분이 있다 생각을 했고 이성계나 정도전도 그 부분을 인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 방원의 정몽주 척살보다 이성계를 중앙귀족과 연결시켜 주어 인맥을 만들어 준 강씨의 처세가 조선건국의 큰 힘이 되었을 것이라 합니다.
● 그러한 연고로 자신의 소생인 방석을 왕위에 앉힐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 향처인 한씨는 조선 개국 전에 죽고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가 되자 강씨는 조선의 최초 왕비가 됩니다.
● 신덕왕후 강씨는 방번과 방석, 경순공주를 낳고 태조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한씨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을 제치고 10살 조금 지난 방석을 세자로 밀었습니다.
● 세월이 흘러 태조는 힘이 없어지고 방원은 1차 왕자의난으로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자식들간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으로 삶의 회의를 느낀 태조는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 줍니다.
● \"방원이 네 이~놈~\" ㅡ 함흥행 ㅡ 두문불출 ㅡ함흥차사로 이어집니다.
《신덕왕후의 정릉》
● 방원 등극 후 정릉의 숲은 베어지고 태조마저 숨지자 이듬해 정릉을 성밖의 양주(지금의 정릉동)로 옮기고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또 릉을 묘로 격하시킵니다.
● 태조가 정성들여 만든 병풍석 등의 석물들을 팽개쳐 두었다가 후에 청계천에 물난리가 날 때 광통교 보수 공사에 그 병풍석을 사용했습니다.
● 병풍석도 없는 초라한 정릉의 신덕왕후가 현종 때 송시열의 상소로 260년만에 복권되어 다시 신덕왕후가 되었습니다.
● 태조는 살아 생전에 강씨 옆에 묻어줄것을 부탁했으나 태종에 의해 거절되자 고향인 함흥에 묻어 달라고 합니다.
● 태종은 이마저도 들어주지 않고 구리의 건원릉에 아버지를 모시고 함흥의 억새풀을 뽑아와 봉분을 덮습니다.
《태조의 건원릉》
● 태조는 구리 동구릉의 건원릉에, 신의왕후 한씨는 이북땅의 제릉에, 신덕왕후 강씨는 정릉에 각각 홀로 모셔져 있습니다.
《신덕왕후의 정릉》
● 당시의 법을 무시하고 태조는 덕수궁 위 러시아공사관 자리로 추정되는 정릉에 강씨를 묻고 능침사찰인 흥천사를 세워 흥천사의 예불소리를 듣고야 잠이 들었다 합니다.
● 방원은 1차 왕자의난을 일으켜 방석과 방번, 그리고 실세였던 정도전, 남은 등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
● 지금의 종로구청자리가 정도전의 집이었고 정도전은 가벼운 마음으로 가까이있는 지금의 한국일보사 자리에 있었던 남은의 집으로 갔는데방원측의 급습으로 그만 목숨을 잃고 맙니다.
● 광통교의 이 아름다운 석물은 정릉, 지금의 덕수궁쪽에 있었던 신덕왕후 강씨의 릉을 파헤쳐 릉은 지금의 정릉동으로 이장했고 석물은 당시 통행량이 제일 많은 광통교의 교각으로 사용.
● 태종이 신덕왕후 강씨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릉의 병풍석들이 이렇게 뒤집혀 있습니다.
● 삼일교 :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이를 기념하여 삼일로 인근에 위치한 이 다리를 삼일교라 명명하였습니다.
● 수표교 :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석을 세운 후 수표교라 하였고 청계천 복개할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숙종과 장희빈의 사랑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옵니다.
● 빨래터
● 조선시대에 비가 많이오면 청계천이 범람하여 궐내로 물이 넘쳐 익사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 영조는 청계천을 준설하는 대역사를 벌였는데 영조 스스로 자신의 3대 업적으로 탕평책과 청계천준설, 균역법을 꼽고 있습니다.
● 사도세자의 장인인 호조판서 홍봉한을 준설작업의 책임자로 할만큼 큰 공사였고 위 사진은 준설현장을 오간수문위에서 지켜보는 영조입니다.
● 도성 안 주민 모두가 식수로 사용했던 청계천이 산에 나무가 없어지면서 비만오면 토사가 밀려들어 물길이 하상보다 높아지자 홍수가 자주 발생했습니다.
● 청계천 준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과거시험 문제로도 출제하고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공청회도 하면서 준설의 첫삽을 뜨는 세리머니도 펼쳤다고 합니다.
● 청계천 프로젝트가 성공하였기에 영조는 힘을 받아 개혁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아들과는 그리 불통하면서도 백성들과는 소통하려 애썼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 동대문DDP : 동대문의 브랜드 가치를 회복하고 강북상권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 건립되었고 지금은 휴식, 문화, 역사가 공존하는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 \"고2\" \"고3\" 이런 오더가 있는 연탄불구이 생선골목을 아시나요? <고등어와 이면수>, <고등어와 삼치>의 주문입니다. <오갈>은 오징어와 갈치죠. 동대문종합시장 부근의 생선골목은 냄새따라 가면 나옵니다.
● 청계천 1부 탐방끝내고 1/n 생선구이 뒷풀이가 있습니다. 가게규모가 적어서 한 집에 같이 앉을 수도 없습니다. 빈 자리찾아 삼삼오오 흩어져서 소그룹단위의 식사가 될 것입니다.
● 원단을 실어나르는 오토바이 홍수속에 아직도 지게꾼이 남아 있는 동대문 종합시장 언저리의 연탄구이 생선골목갑니다.
댓글 5개
역사문화탐방은 주중 2회, 주말 1회 운영됩니다 자주 만나다보니 밴드가 활성화 되었고 싸이트공지 전에 밴드에서 먼저 얘기됩니다. 한 달 세번 탐방에 번개도 자주 있습니다. 그리고 싸이트 공지하는 날은 룰로 정해저 있는데 한달에 세번은 기본이고 수시로 있는 번개모임을 행사 임박해서 공지하여 진행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밴드에서 미리 얘기되고 어떤 행사는 밴드에서 마감되기도 합니다. 싸이트 공지후에 진행하면 좋을 일이지만 어려움이 많아 밴드에서 미리 얘기되는점,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밴드에 관심있는 분은 본 글에 있는 초대장 누르고 들어 오세요. 언제든지, 누구든 다 환영합니다. 들어 오세요.
'사색의향기 - 역사문화탐방' 밴드로 초대합니다. 아래 링크를 눌러 들어오세요. https://band.us/n/ada1X4Pal6H7n From 김혜련 이사/역사문화탐방회장
밴드에서 마감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 청계천의 모습이 훈훈해 보입니다.
역탐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들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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