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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탐방 138회] 국립고궁박물관의 《세조 특별전》과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특별전
[역사문화탐방 138회]
국립고궁박물관의 《세조 특별전》과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특별전
+1월2일(수) 오후 1시20분
+정규해설 : 13: 30분 시작 (일괄 해설)
+고궁박물관은 맞춤해설 없고 일괄해설
+사회공헌금 : 1,000원
+국립고궁박물관 1층 로비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이용
《순종효황후의 어차》
● 고궁박물관 지하 전시실에는 조선 왕실의 예술, 의례, 수준 높은 과학 문화 전시가 있고
● 1층에는 황제국을 선포하고 근대국가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전시실이 있으며 황실 가족의 어차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 2층 전시실엔 조선 왕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상징물과 기록물이 있고 조선 왕과 5대 궁궐의 역사와 왕실 가족들의 생활모습이 있습니다.
● 여기까지는 상설전시장 얘기입니다. 상설 전시라 해도 전시 내용은 자주 바뀝니다. 한번에 다 볼 수 없을 만큼 재미난 전시물이 많습니다.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어서 말해보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말이야》영화 관상의 세조
※※※ 세조 특별전 ※※※
● 수양대군으로 알려진 세조는 형제와 많은 신하를 죽인 정변으로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왕좌에 올랐습니다.
● 도덕과 명분이 없는 세조의 즉위 과정에 대해서는 누구도 다 비판적이나 통치와 업적면에서는 다르게 봅니다.
● 왕권과 국방을 강화하고 국정의 기본이 되는 법전 체재를 확립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 이번 전시는 국립고궁박물관이 2016년에 구입한 <세조 어진 초본>을 최초로 공개하면서 세조의 생애와 업적에 관련된 유물을 선보입니다
● 세조란 묘호(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올리는 이름)가 의미하듯 그의 사후 왕릉과 어진을 모신 진전에서 <나라를 재건한 왕>으로 숭배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 이를 통해 야심차고 비정한 군주로 알려진 세조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경남 성주군의 세조 태실》
● 세조에겐 무인 기질만 있는 게 아니어서 문학도 상당했다 하고 천문, 수학, 음악, 의술 등에도 능했다 합니다.
● 실지로 국악사에 한 획을 긋는 부분이 있는데 절대 음감의 세종이 세조의 음감을 알아 보았다는 대목이 있고 종묘제례악이 세종과 세조에 의해 정리되었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단종의 자취와 충신들의 절의가 깃든 장소를 8폭의 그림으로 제작한 화첩, 월중도》
●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는 단종 복위를 시도하는 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고 단종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 단종을 위해 목숨을 건 신하들의 이야기는 역사에 '충'으로 기록되고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는 비정한 군주로 자리매김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
● 세조 사후 광릉 근처 봉선전에 봉안된 세조어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정묘호란에서 극적으로 살아 남았습니다.
● 이후 여러차례 보수 작업을 진행하다 1735년 모사본을 제작했습니다. 200년 뒤인 1935년 이왕직은 화사 김은호에게 세조 어진 모사 작업을 맡겼습니다.
《세조 어진 초본》
● <세조 어진 초본>은 이 때 김은호가 1735년 본을 본뜬 밑그림입니다. 한국전쟁을 피해 부산국악원 창고로 옮겨 보관되었던
● 조선 어진 대다수가 1954년 용두산 화재로 소실된 상태에서 이 초본은 세조의 모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라고 합니다.
《영조가 광릉 참배 후 직접 쓴 글을 새긴 현판》
● 왕위 찬탈을 했음에도 후대 왕들은 세조란 묘호가 시사하듯 세조를 이성계에 버금가는 임금으로 숭배했다 합니다.
● 그런 연유로 후대 왕들은 종종 세조의 릉인 광릉과 어진을 모신 진전에 들러 제향을 지냈다 합니다.
※※※리히텐슈타인 특별전※※※
● 리히텐슈타인은 유럽의 입헌군주국이자 공국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사이에 있으며 영토는 서울의 1/4로 인구는 약 38만명, 유럽에서 네번 째로 작은 국가라 합니다.
● 가문의 성을 국가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는 나라 중 하나로 리히텐슈타인은 유럽의 수많은 왕가 사이에서 900년 동안 가문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가문의 역사와 함께 지속적으로 왕실 컬렉션을 조성해 왔습니다. 지금도 이어지는 미술품 수집 전통은 예술의 후원 가문으로서 왕가의 명성을 높히고 있습니다
●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보물>은 왕실컬렉션을 통해 리히텐슈타인의 긴 역사와 문화를 선보이는 특별전시로
● 가문의 기원을 보여주는 문헌자료와 전쟁에서 사용된 무기, 화려한 생활용품과 바로크 시대의 수준 높은 미술 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 이번 전시가 보석처럼 빛나는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역사 ㅡ 빈 부근 귀족 가문에서 시작된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1608년 카를 1세가 대공 지위에 오름으로서 기반을 다졌습니다.
● 이어 셀렌베르크와 파두츠 지역을 구입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실의 연방국가로 인정받습니다.
● 라인동맹, 독일연방 등을 거쳐 완전한 독립국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었나 대공들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하여 작지만 부강한 나라로 성장하였습니다.
《아이스크림 냉각기 용기》
●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귀족에서 왕가로 승격되었던 절대주의 시대에는 통치자를 인간이 아닌 신으로 여겼습니다.
● 이에 따라 리히텐슈타인의 대공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고 보통사람들과 구별되는 품격있고 화려한 생활을 추구하였습니다.
● 이들은 거대한 정원이 딸린 궁전에서 거중하고 호화로운 의복을 입었으며, 연회를 개최하고 예술가의 후원자로 활동하였습니다.
《리히텐슈타인 식기 중 주름이 진 그릇》
●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도자기와 식기 ㅡ 도자기는 리히텐슈타인 왕실컬렉션의 중요한 수집대상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된 도자기를 비롯하여 도자기 공장이 설립된 뒤에는 그곳에서 제작한 도자기를 주로 구입하였다 합니다.
● 빈 도자기공장은 깨끗한 색채와 특유의 도자양식을 정립하여 명성을 얻었다 합니다.
● 장인들의 섬세한 솜씨로 제작된 도자기는 그 자체로 예술품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화려한 생활문화를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1760년 리히텐슈타인의 왕가 문장 마구》
● 근세 유럽에서 말 사육과 사냥은 귀족문화의 정수였습니다.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전원 지대에 사냥터를 소유하였으며 이곳에서 사냥을 즐겼습니다.
● 이들에게 사냥은 취미이자 운동이었고 전쟁을 대비한 훈련이었다 합니다. 승마와 사냥은 평민과 다른 신분을 보여주는 상징적 활동이어서
그를 위힌 도구는 화려하게 세공되었다 합니다.
●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미술품 수집과 후원은 공국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미술품 수집은 1대 대공인 카를 1세부터 적극적으로 수집합니다.
●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예술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미술품을 구입함으로써 개인 콜렉션 가운데 최고 수준의 예술품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공국은 대공이 다스리는 나라이며 대공은 황제 또는 왕에게 통치권을 인정받아 독립적인 영토를 다스리며 왕위 계승권이 있는 군주를 의미합니다.
● 리히텐슈타인은 남북 25km, 동서 6km에 불과한 작은 나빠지만, 유럽의 중심적 위치라는 잇점을 활용하여 경제,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유럽의 왕실 중 가장 부유하고 GDP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합니다.
● 왕실에서 국가 예산을 부담하기 때문에 국민들은 납세의무도 없다 합니다.
● 리히텐슈타인 왕가는 수세기 동안 다채로운 예술품을 수집하고 예술가를 후원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 국내 외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참여한 아름다운 우표 디자인으로도 유명합니다.
● 리히텐슈타인 왕가가 소유한 영지는 넓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에 속하는 영지를 모두 몰수당해 지금의 면적이 되었습니다
● 유럽에서 제일 작은 나라 《바티칸 시국》
● 유럽에서 두번째로 작은 나라 《모나코》
● 《유럽 3위 소국 산마리노 공화국》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라고 산마리노인들은 자부합니다. (산마리노는 도시가 이니고 국가임)
● 국민 대부분이 3개국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유럽에서 4번째 소국《리히텐슈타인》
●《유럽 소국 5위 몰타 공화국》강화도 보다 조금 더 넓은 면적의 몰타를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인테내셔널 리빙>지가 발표함
● 배우에서 왕비로 동화같은 삶을 살았던 그레이스 켈리를 소개합니다.
● 뛰어난 미모로 연기로 명성을 날린 그레이스 켈리의 아버지는 올림픽 스컬링에서 금메달을 세번이나 딴 스포츠맨, 사업가, 정치인이었습니다
● 그레이스 켈리는 배우가 되기 위해 춤과 춤과 연기를 배운 후 배우로서 명성을 얻었고 화보를 찍기 위해 모나코를 방문했습니다.
● 이때 모나코 통치자인 레에니에 3세가 켈리를 궁으로 초대했는데 그는 32세의 미혼이었습니다
● 그는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며 켈리와 가까워져 결혼을 발표합니다.
● 1956년 켈리는 대형 여객선을 타고 가족과 들러리, 결혼을 위한 각종 물품을 싣고 모나코로 떠났습니다.
● 워낙 세계적인 화재를 모은 결혼이다보니 400명이 넘는 취재진이 그 배를 타겠다고 신청했다 합니다.
● 그러나 켈리 가족은 이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모나코 거리에는 2만명의 시민들이 나와 왕비가 될 그레이스 켈리를 환영했다고 합니다.
● 세기의 결혼식은 1956년 4월18일과 19일에 일반 결혼식과 카톨릭 결혼 미사로 두차례 올려졌고 결혼식은 생중계되었다고 합니다.
● 결혼행사는 일주일간이나 계속되었고 그레이스 켈리는 이때부터 <그레이스 공비>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 그레이스 켈리는 아들과 두 딸을 낳았습니다. 왕가에 후손이 없으면 모나코는 프랑스에 귀속된다는 조약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준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인들에게 독립을 유지해 준 은인으로 추앙받았습니다.
● 그레이스 켈리가 공비가 된 후 모나코에는 관광객이 몇 배로 늘어났고 카지노도 호황을 누려 공비로 인해 모나코는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 같은 그레이스 켈리였지만 까다로운 궁중생활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아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고 늘 위엄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합니다.
● 가치관이 다른 남편 레에니에 3세와의 갈등으로 우울증 증세까지 보였다 합니다.
● 켈리는 결혼 후에도 미국 국적을 그대로 유지했고 미국의 문화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합니다.
● <그레이스 공비 ㅡUSA>는 지금까지 미국에 있는 100여 개 기관에 500여 명의 예술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합니다.
● 켈리는 언젠가 다시 헐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기를 바랐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다 합니다
《켈리의 장례식장 성니콜라스 대성당》
● 1982년 9월18일 세계는 충격적인 뉴스를 듣게 됩니다. 모나코의 그레이스 공비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 그레이스 공비는 직접 차를 몰고 막내딸과 별장에 갔다 돌아 오는 길에 갑자기 뇌졸증을 일으켜 37m높이의 절벽으로 떨어졌습니다.
● 공비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으나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그녀 나이 52세.
● 1982년 9월18일 모나코의 성니콜라스 대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영화배우 케리 그란트, 미국 대통령 부인 낸시 레이건, 프랑스 대통령 부인 미테랑 여사,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 등 400여 명의 저명인사가 참석해 명복을 빌었다 합니다.
● 동화같은 일생을 마감한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 왕족 묘지에 안장되었고 남편 레에니에 공은 그후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다 2005년 그레이스 곁에 묻혔다 합니다.
※※※ 여기까지는 공식적인 기록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논란을 소개합니다.
● 그레이스 켈리 죽음에 모나코 왕실이 연관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 역사학자 로버트 레이시는 그레이스는 정략결혼의 희생자였다고 합니다.
● 레에니에 3세가 독신으로 후사가 없어 프랑스에 귀속당할 처지에 놓이고 경제난까지 허덕이게 되자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던 선박왕 오나시스가 레에니에 3세에 제안했다 합니다.
● 모나코는 헐리우드 영화배우와 결혼함으로서 미국 부자 관광객을 유치해 경제를 살리고 프랑스와의 합병 바람을 잠재우려 했다 합니다.
《선박왕 오나시스》
● 오나시스의 연출하에 세기의 결혼이 성사되었다는 것. 실지로 모나코는 그 후 세계적인 관광도시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그레이스 켈리는 왕실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술과 남자에 빠져 왕실의 골치덩어리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 로버트 레이시 역사학자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켈리를 사고를 위장해 죽였다고 주장했습니다.
● 그 근거로 사고 후 장시간 왕비가 방치되었고 즉시 치워진 사고현장과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목격자를 내 세운 점 등을 들었습니다.
● 이에 대해 왕실에서는 사고당시 동승했던 스테파니 공주의 증언을 들어 뇌졸중을 앓아오던 왕비가 운전 미숙으로 사고사를 당했다고 논란을 일축시켰습니다.
● 그녀의 죽음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댓글 2개
역사문화탐방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33명 참여하는 뜨거운 장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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