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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탐방144회] 서울대 규장각
[역사문화탐방144회] 서울대 규장각
+3월6일(수) 13:00
+해설 : 14:00 시작
+인원 : 30명
+사회공헌금 : 1,000원(당일수납)
● 만나는 곳(13시까지 오시는 분만) : <2호선 서울대입구역 3번출구 5511, 5513번 버스정류장>
● 13:00이후 오시는 분은 위 참고하시어 서울대 내에 있는 규장각으로 바로 오세요.
● 줄서있다 버스 오는대로 출발하여 서울대 법대나 정문 하차 ㅡ규장각 1층 로비에서 만나요.
● 버스정류장에서는 인원체크 하지 않고 규장각 로비에서만 합니다. 규장각을 아시는 분은 바로 규장각으로 13:40까지 오셔도 됩니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위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네이버 플레이스
《정조》
● 정조가 즉위식 후 처음으로 한 말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고 있던 정조의 이 한마디로 정국은 긴장 속으로 빠져 듭니다. 거기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자 어린 정조는 머리에 쓰고 있던 관과 도포를 벗어 던지고 아버지의 몸 위에 엎드려 울며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 애절한 손자의 간청을 외면한 채 영조는 비정하게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갔습니다.
● 정조는 여자는 멀리하고 술과 담배를 즐겼던 불같은 성격을 가진 인간적인 왕이었다 합니다.
● 그는 영조와 같이 탕평정치를 펼쳤으며 규장각과 장용영을 만들어 자기 세력을 갖추고 수원에 화성을 건축해 천도를 계획했습니다.
● 그러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개혁은 미완으로 남습니다. 그가 조금 더 살았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거라고 합니다.
● 14년이라는 긴 세손 세월을 견뎌낸 정조는 영조 사후 엿새만에 경희궁에서 즉위하면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정조가 정면 승부로 나서자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자들은 새파랗게 질립니다.
● 정조는 정실부인 한 명에 세 명의 후궁을 들였는데 정실부인 효의왕후는 석녀여서 원빈 홍씨를 후궁으로 들이나 홍씨는 몸이 약해 입궐 1년만에 병사합니다.
● 첫 후궁이 죽은지 3년째 되는 해, 궁녀 성씨가 아들을 낳았으나 의빈도 왕자가 7살 되던 해에 죽습니다.
● 마지막으로 등장한 후궁이 수빈 박씨로 동시에 후궁을 두 명 이상 둔적은 없다 합니다.
● 1년 반에 한 명꼴로 새 여자를 들인 태종에 비하면 성종은 2년에 한 번, 현종은 15년 재위 기간 내에 단 1명의 부인만을 두었다 합니다.
● 정조는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다는데 기록에 의하면 폭탄주를 제조하고 권하는 걸 좋아했다 합니다.
● 사발같은 잔에 가득 따라 권해 모두들 인사불성이 될 정도였고 끝까지 말짱한 사람은 정조와 정약용 뿐이었다 합니다.
● 규장각은 겉보기엔 왕실의 도서관입니다. 일종의 위장전술이고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자기 사람을 키웠던 것입니다.
● 왕이 대놓고 자기 사람을 키우겠다 할 수는 없어 일단 규장각을 세우고 37세 미만의 신진 관료 중에서 똘똘한 사람이라면 신분 상관없이 발탁해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시켰습니다.
● 여기서 정약용과 유득공 같은 인재가 발탁됩니다.
● 사도세자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영조를 대신해서 국정을 처리했을 정도로 총명했다 합니다.
● 특정 세력이 권력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도세자를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이 좋아했을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 사도세자는 뚜렷한 정치감각이 있었으나 그에겐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 노론은 집요하게 사도세자를 공격해 마침내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하는데 성공합니다.
● 영조는 노론과 반목하면서 소론을 신뢰하는 사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경우 왕조 자체가 위태로워질거라 판단합니다.
● 지난번 창경궁 탐방 때 들렀던 휘령전 앞 마당에서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 명하자 사도세자는 허리띠로 목을 맵니다.
● 자결을 만류하는 신하들에게 화를 내며 큰 뒤주를 가져 오게해 그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 한여름 밀폐된 공간에서 8일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사도세자는 죽어갑니다.
● 사도세자가 죄인의 신분으로 죽임을 당하자 죄인의 아들을 세자로 삼을 수 없어 영조는 세손의 신분을 세탁하기로 합니다.
● 이미 죽은 영조의 큰 아들 효장세자에게 입적시켜 효장세자의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하려고
● 정조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혈맥을 잇기 위해서라도 아버지를 죽이지는 못했을거라 생각하여 \"나는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사람이다\"
● 좌의정 홍인한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는 왕의 하교를 받아 쓰려는 승지를 가로막는가 하면 대리청정을 취소하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 노론은 처음에는 세손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세손이 자신들을 배척하자 바로 등을 돌려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영조 》
● 영조가 세손의 대리청정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홍인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 당시 좌의정 홍인한은 이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했는데 이를 <삼불필지설>이라 합니다.
● 영조가 세상을 뜨고 정조가 즉위한 날 제 1성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으니 노론의 앞날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입니다.
● 정조의 암살 계획은 홍인한과 함께 노론의 대표격이었던 홍계희 집안에서 추진되였습니다.
● 홍계희는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과장되게 고하여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인물입니다.
● 홍계희는 이미 죽었으나 그 집안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은 궁중에 암살단을 난입시켜 정조를 살해하려 합니다.
● 홍상범은 천민 출신의 전흥문을 포섭하여 정조가 머물렀던 존현각의 지붕위로 올라가게 했고 홍상범도 20여 명의 행동대원을 이끌고 뒤를 따랐으나 정조의 호위무사에게 발각되어 정조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 갑니다.
● 홍봉한 :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며 정조의 외할아버지로 사도세자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사위인 사도세자를 공격하는 이복동생 홍인한과 아들 홍낙임을 막지도 않았습니다.
● 홍봉한은 영조에게 뒤주를 갖다 바친 일과 동생 홍인한과 함께 권력 남용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으나 정조가 커버해 줍니다.
● 규장각이 있게 한 정조 주변에 관하여 미리 생각해 보고 규장각을 탐방하는 게 좋을 듯 하여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외갓집 얘기를 올립니다.
●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은 정조의 어머니가 태어난 두 달 뒤 송시열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상소를 올립니다.
● 상소가 못마땅했던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홍봉한은 유부남인 관계로 출석 점수가 나빠 5년간의 자격정지라는 징벌적 처벌을 받습니다.
● 출석불량은 2년간의 자격정지였건만 영조는 특명을 내려 5년간 자격정지라는 징벌을 합니다.
● 영조는 사돈지간이 될 홍봉한과 첫 대면은 un happy였지만 8년이 흐른 뒤 자식의 혼사문제로 다시 만납니다.
● 개인의 능력보다는 가문의 배경이 뒷바침되어 홍봉한의 여식이 세자빈으로 내정됩니다.
● 사도세자가 9살에 관례를 치르고 성균관을 참배하는 자리에서 영조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알성시(비정기적인 과거)를 시행하였는데 여기서도 홍봉한은 떨어졌다 합니다.
● 영조의 배려에도 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홍봉한이 왕실과 혼인하면서 자주 떨어졌던 과거에 합격하였고 그후는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 홍봉한의 여식이 세자의 배필로 내정되자 그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첫 번째 간택에 참여한 100명의 처녀들 중 두 번째, 세 번째 간택을 통하여 세자빈이 됩니다.
● 간택 자리에 가기도 전에 사도세자 어머니와 누나인 화평옹주가 홍규수를 불러다가 예절 교육도 시켰다 합니다.
● 혜경궁 홍씨는 시아버지,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궁중 생활을 시작했으나 태평인 세자와 함께 아침 문안인사 가는 것도 힘들었다 합니다.
●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영조의 편애는 별난 수준으로 화평옹주를 엄청 예뻐했다 합니다.
● 고달픈 세자 부부에게 후견인이었던 화평옹주가 난산 끝에 숨을 거두게 되는데 영조는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했다 합니다.
● 영조의 과도한 슬픔은 세자부부에게 격랑을 몰고 오는 결과가 됩니다.
● 죄인의 신분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로 왕위에 오른 그에게 무엇보다 절실했던 것은 강력한 왕권.
● 자신의 개혁 정치를 도울 인재가 필요했던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하여 젊은 인재들이 모여 학문을 연구하게 합니다.
● 창덕궁의 규장각으로 가는 길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이 있는데 가운데 큰 문은 <어수문>이라 하여 왕이 지나는 문이고 양 옆의 작은 문은 신하가 지나는 작은 문입니다.
● 임금은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통과하고 신하는 고개를 숙여 지나갈 수 밖에 없게 한 것인데, 여기서도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 이처럼 정조는 미묘했던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휴식공간이었던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두어 개혁 정치의 산실로 만듭니다.
●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에 설치되었던 규장각이 너무 좁아 1781년(정조5년) 창덕궁의 궐내각사 지역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 창덕궁의 규장각이 서울대에 있는 이유는 1910년 한일병합으로 규장각은 폐지되고 규장각의 도서는 이왕직에서 관리하다가 조선총독부로 넘어 가게 됩니다.
● 그리고 1923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 규장각의 도서는 그쪽으로 이관되고 창덕궁에 있던 건물은 헐립니다.
● 1945년 광복이 되고 경성제국대학이 경성대학으로 개편되고 이듬해에 서울대가 개교하면서 규장각 도서도 자연스럽게 서울대로 이어집니다.
● 2015년 12월의 규장각 탐방때 특별한 분의 도움으로 규장각 수장고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들어가보니 아무나 입장시킬 수는 없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 지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폭격에도 안전하게 설계되었다 하고 조금만 이상해도 자동 시스템이 작동되어 관계기관에 바로 싸인이 간다 합니다.
● 다중의 육중한 철제문을 통과하여 보관된 조선왕조 실록을 대하면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경이롭기도 했던 그 날이 다시금 생각납니다.
● 실현되기는 어려운 일이나 수장고 관람을 다른 루트를 통해 부탁했습나다. 부탁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여러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해서 수장고 관람은 하늘의 뜻이라 하겠습니다.
● 15년 규장각 탐방 때 오셨던 분이라면 수장고 입장때의 일을 회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작년 12월에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하는 <캄보디아 문화유산 답사> 때 아직 전시된 일이 없는 캄보디아 국보급 문화재의 수장고를 방문했습니다.
● 불교의 나라답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불상을 보았습니다. 석상, 목상, 금장식의 불상들이 빼곡히 들어 있는 공간에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 최첨단 보관법에 의한 우리나라 박물관에 비하면 중요하게 보이는 보물들이 직사광선도 피할 수 없는 콘크리트 건물 속에 담겨진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 그것도 우리나라의 연구팀이 조언하여 조금 정리된 상태라 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지키는 그 젊은이들이 대견하게 생각되었습니다,
● 규장각 탐방 후에 서울대박물관을 갈 수도 있습니다. 규장각 해설 듣고 다시 보고 싶을 수도 있고 서울대 산책(연못)을 원하시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해 당일 결정하겠습니다.
● 3월6일에는 LG아트센터에서 <러시아워 콘서트>가 있어 일부는 서울대 규장각 탐방후에 함께 역삼역으로 가시게 될 것입니다.
● 서울대규장각에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국보 7점과 대동여지도, 동의보감, 용비어천가 등 26점의 보물이 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승정원일기 국보 3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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