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알림
게시물 상세보기
[제159회 역사문화탐방] 광평대군묘역
[159회 역사문화탐방] 광평대군묘역
+9월4일(수) 오전10시까지 오세요.
+회비 : 5,000원
+3호선 일원역 2번 출구 지상에서 만나요.
+인원 : 20명
+회비 : 5,000원(당일 현장 수납)
● 3호선 일원역 2번 출구에서 10시 정각 출발. 10시 이후 도착하신 분은 광평대군 묘역으로 직접 오셔야 하는데 15분은 족히 걸립니다.
● 일원역에서 광평대군 묘역 가는 길은 정비가 잘 되어 있고 풍광도 좋아 매미도 우는 소풍길 같습니다.
● 여름방학 때 보았을 것 같은 숲이 연상되는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는데 이것만도 상큼한 추억이 될 것입니다.
● 오후 3시에는 디큐브 아트센터의 뮤지컬 <마리 앙투와네트>가 있어 신청하신 분은 다 함께 신도림역으로 갑니다.
※ 광평대군 묘역과 필경재
● 광평대군 묘역 답사는 <개별관람 불가>로 공문으로 신청 후 진행됩니다.
●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깜짝 놀랄만큼 묘역관리가 잘 되어 있는 <광평대군 묘역>과 광평대군파의 종손이 살았던 <필경재>를 갑니다.
● 정문을 들어서면 밖에서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자연과 함께 왕릉처럼 잘 조성되어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 광평대군파는 이번 회비 면제의 특전이 있습니다. 광평대군파 손들어 주세요.
● <필경재>는 조선조 성종때 건립된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전통가옥으로서 1987년 문공부에 의해 전통건조물 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종손인 정안부정공 이천수가 건립하여 현재까지 19대째 그 종손들이 살고 있음.
● 당시 개인의 가옥으로는 최대 허용치였던 99칸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내려 오면서 많은 부분이 유실되고 나머지만 원형대로 보존되어 오다 1994년 해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 전주이씨 광평대군 정안부정공의 종갓집으로 내려오고 있는 이 가옥에서는 북한산성을 축조한 숙종 때의 영의정 <이유>와 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후원>, 헌종 때 우의정을 지낸 <이지연>등 3정승을 탄생시켰다 합니다.
● 순종 때 장원급제를 하여 도승지를 지낸 이윤종까지 15명의 종손들이 모두 과거급제를 하는 등 수 많은 공신이 이 필경재에서 태어났습니다.
●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 이범석 장군과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이준, 이상설 열사와 함께 망국의 한을 품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활약하신 이위종 열사도 광평대군의 직계 후손입니다.
● <필경재>는 일제치하에서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기 위해 설립된 <중앙고등학교> 광주분교로도 사용되었던 유서 깊은 가옥입니다.
● <필경재>란 \"반드시 웃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는 뜻으로 건축 당시에 지어진 이 집의 옥호라 합니다.
● 세종대왕도 공부 잘 하는 왕자를 예뻐했답니다. 왕자들 18명 가운데 발군은 다섯째인 광평대군으로 엄친아였다 합니다
● 전주 이씨 종파 중 효령대군파 다음으로 자손이 많은 광평대군파 묘역입니다.
● 광평대군은 20세에 요절하였으나 그 아들 영순군 이후 자손이 번창하여 이씨 왕족 중에서도 후손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 이씨 문중의 700여기 묘소가 있어 이 마을을 궁말, 궁촌이라 불렀습니다.
● 꽃미남 왕자, 광평대군묘역에는 소나무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 광평대군의 묘는 원래 강남구 삼성동 선릉에 있었는데 이곳에 성종의 능인 선릉이 들어서게 되어 수서동으로 옮김.
※ 광평대군 묘역 일원은 서울 근교에 있는 왕손의 묘역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됨.
《태조의 건원릉》
● 태조 이성계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를 총애했고 강씨의 친정은 권문세가로 태조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 이성계가 왕위에 오를 때는 전처 소생들이 이미 장성하여 있었습니다.
● 장남, 방우는 건국 직후 병사하였고 둘째 방과와 셋째 방의는 권력에 욕심이 없었고
● 물론 신덕왕후 강씨의 청도 있어 강씨 소생의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됩니다.
● 넷째 방간과 다섯째 방원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세력이 너무 커져 태조가 불안했던 측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 신권을 주장한 정도전의 견제에 방원의 불만은 극에 달해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복 동생인 방번과 방석을 살해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 무안대군 방번묘》
● 세종대왕께서는 무안대군의 후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시어 광평대군으로 하여금 무안대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는 봉사사에 명하시었습니다.
● 그러한 연고로 무안대군 방번의 묘도 광평대군 묘역에 있습니다.
● 강남구 일원동, 수서동 일대를 광평군의 군호를 딴 <광평로>로 하였고 수서와 가락동을 잇는 다리인 <광평교> 역시 그의 군호에서 따 온 것입니다.
● 광평대군은 부왕 세종 못지않게 국어, 음률, 산수에도 밝고 성품이 너그럽고 용모도 출중하며 또, 총명하였다고 합니다.
● 세종은 광평대군을 제일 사랑하여 광평이 위독할 때 밤을 새워 자지 않았고 광평이 죽자 수라를 들지 않았다 합니다.
●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세종대왕은 종종 동대문지역으로 암행을 나갔다 합니다.
● 어느 날 광평대군과의 동행에서 맹인이 젓가락으로 점치는 모습을 보고 사랑하는 광평대군의 점괘를 부탁했다 합니다.
● 귀하고 뛰어난 자질과 복록을 갖추었으나 굶어 돌아가신다는 점괘에
● 세종대왕은 '임금의 자식이 굶어 죽다니~' 속으로 웃어 넘겼다 합니다.
● 웃긴 했으나 깜짝 놀란 세종은 광평이 자손 만대에 먹고 살 수 있도록 많은 토지를 하사하였다 합니다.
● 실지로 광평대군은 준치가시가 목에 걸려 먹지 못해 20세에 요절하였고 지금도 후손들은 준치는 먹지 않는다 합니다.
● 광평대군에게는 부인 신씨와 태어난지 여섯 달 밖에 되지 않은 갓난 아들 영순군이 있었는데 광평대군 부인은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 영순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여 과거에도 급제한 유능한 관료가 되었다 합니다.
● 그런데, 광평의 핏줄인 영순군 또한 27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영순군 부인 역시 시어머니를 따라 비구니가 됩니다.
《예전 봉은사 입구》
● 비구니가 된 고부는 필경재 뒷편 산에 있던 <견성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원당으로 삼고 하사받았던 광대한 토지(강남 수서 일대)와 노비 절반을 희사해 대대적인 불사를 벌였다 합니다.
● 실록에 의하면 \"높은 집과 아로새긴 담에 금벽이 빛나고 승려 300~400명이 재를 닦고 이 절에는 1,000여 명의 노비와 70결의 토지가 속해 있었다.\"
● 70결을 요즘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60만평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
● 결국 이 사건은 조정에까지 올라갔고 광평대군 부인을 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침.
● 할아버지 세종이 그토록 아꼈던 광평대군을 위한 불사였기에 성종은 그들을 나무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 조정 대신들은 남편을 위해 절을 짓는 것을 문제 삼은 게 아니라 왕실 재산을 절에 갖다 바쳤느냐를 문제 삼은 것입니다.
● 광평대군의 묘가 수서로 이장되면서 선릉에 성종이 모셔졌고 광평대군 부인이 지은 견성사가 선릉의 능침사가 됩니다.
● 그 후에 견성사는 봉은사가 되는데 견성사는 봉은사 이전에 이미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하사받은 토지의 절반을 견성사에 시주하였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견성사 60만평, 광평대군묘역 60만평.
● 세종대왕이 점괘에 놀라 광평에게 내린 땅은 120만평으로 봉은사와 수서동의 광평대군묘역이 원래 한 덩어리 땅?
● 광평대군과 봉은사는 이렇게 엮여 있습니다. 역사는 퍼즐 맞추기입니다.
● 14일 민속극장 풍류의 <경기명창 이춘희의 공연에 앞서 선정릉 들러 보실것을 권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 역사가 조금씩 연결이 될 때 역사에 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 우리는 배우되 여유있는 자세가 낫지 않을까 하여 숨도 고르면서 즐길 수 있는 역사문화탐방에 초대된 것입니다.
● 광평대군묘역 답사에 초대합니다.
《오래전 봉은사》
● 지금의 <봉은사>도 대단하지만, 조선시대 봉은사도 왕릉을 능가하는 규모로 강남지역의 랜드마크였다 합니다.
《한전부지 이전 조감도》
※ 삼성동 코엑스와 한전 부지가 그것.
※ 1970년대 강남개발과정에서 봉은사 소유 10만평의 금싸라기 땅이 한 평당 5,300원씩 총5억3천만원에 정부로 넘어감
※평당 5,300원에 <합계액은 4억 8천만원> 이런 설도 있으나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님.
《성종실록의 견성사(봉은사) 얘기》
● 신 등이 일찍이 삼가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광평대군 부인이 불사를 세우고 그 전지와 노비의 반을 시납하니 모두 70여결이고 노비가 모두 930여 명이었으니 병술년 이후 출생한 자를 모두 속하게 하였으므로, 지금 이를 계산하면 이미 1,000여 명이 넘습니다.
※ <930여 구>, <1,000여 구>라 되어 있는데 한자로 <입구>를 써놓아 <930여 명, 1,000여 명>으로 위에 적었습니다.
※갑자기 한자 변환이 안 되어 우리 글로 쓰려니 <입>을 뜻하는 입구를 <명>으로.
● 오래된 봉은사 신도들은 그 당시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뺏겼다는 개념이었고 정부의 셈법은 봉은사와는 달랐을 것입니다
《현재의 봉은사》
● 봉은사의 유래에 정현왕후, 문정왕후 (명종 모친)와 보우대사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렿게 광평대군의 아내와 며느리의 슬픈 이야기도 담겨져 있습니다.
● 세종은 \"광평이 일찍 죽어 내가 심히 슬프다. 후사가 포대기에서 고고히 울고 있으니 더욱 불쌍하구나\" 하여 다섯 살 때까지 궁중에서 영순군을 길렀다 합니다.
● 세종은 문종과 세조에게 부탁하기를 \"너희들이 나의 뜻을 받들어 이 아이를 잘 보살피거라\" 그랬건만, 강보에 싸였던 그 영순군도 27세에 세상을 떴습니다.
● 필경재는 한 해 약 3만명의 외국인이 다녀가는 궁중음식점이라 합니다.
● 우리나라 전통을 대표하는 명소로 인정받아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과 최고경영자, 석학이 주로 찾고 있다 합니다.
● 필경재가 궁중음식점으로 바뀐 것은 1999년, 2000년 아시아, 유럽정상회의와 2002년 한ㆍ일 월드컵을 앞두고 정부가 요청해 왔기 때문입니다.
● \"외빈들에게 한국 전통가옥의 모습을 소개하고 음식도 맛 보이는 장소로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 녹천 이유의 11대 종손은 \"양반 집안 종손이 음식점을 할 수는 없다\"는 문중의 반대가 심했지만 고민 끝에 \"나라를 위한 일이니 하자\"고 결론 짓습니다
● 서울에서 유일하게 500년 전통을 지닌 집인 필경재를 대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저녁식사 십만원대인 필경재》
● <필경재>는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너무 음식점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 그래서 조리 시설은 안채 뒷편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마련했고 간판도 <필경재>라는 이름 석 자만 넣고 음식점 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 <필경재>는 일반관람이 되지 않습니다. 열려진 문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는 정도의 탐방임을 알려 드립니다.
● 필경재 별채를 돌아 들어가면 <이호당>이 나오는데 주요 외빈들이 비공식 만찬 장소로 즐겨 사용한다 합니다.
● '가문의 명예와 전통, 두 가지를 지킨다' 는 뜻을 담은 이름처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 보존돼 있다 합니다.
● 이 가운데 이유의 영정과 숙종, 헌종 등 조선 왕이 내린 교지와 교서는 어느 박물관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진귀한 유물이라 합니다.
● 중국 국가 부주석 시진핑과 교황 베네딕트16세 등 필경재를 찾은 외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그들이 보낸 감사 서신도 곳곳에 걸려 있다 합니다.
● 상견례 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는 <필경재>는 역사탐방 동호회라면 꼭 한번 둘러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 종손이 종택을 지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어렵고 힘들기도 할 것입니다.
● 하지만 그런 고단함도 주변 사람들의 칭찬 한마디에 사라진다 합니다.
● 집안 행사 때 종친들이 \"집안 관리 잘 했다\"거나 관광객들이 \"훌륭한 문화유산을 잘 지켜줘 고맙다\"고 하면 그걸로 족하게 생각하는 것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사이에는
문종, 세조,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웅대군과 정소, 정의공주가 있었습니다.
●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과 세조에 대해서 가끔씩 얘기 되었고 무계원 공연을 통하여 안평이 얘기되었습니다.
● 이번엔 <광평대군 편>. 대군 중에선 임영,금성,평원,영응이 남았다 하겠습니다.
● 정소공주는 일찍 죽었고 정의공주는 영화 <나랏말싸미> 공지글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 임영대군은 연산군 부인 신씨의 오라비이자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인 신수근의 외할아버지입니다.
● 임영대군은 계유정란으로 수양대군이 즉위할 때 일조하여 안평, 금성대군과 달리 큰 시련은 겪지 않았습니다.
●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이를 반대한 금성대군은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 세조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 서양에선 황새가 아기를 물어온다 하고 우린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합니다.
● 금성이 거사를 도모하기도 전에 관노의 밀고로 발각되면서 함께 한 영남 선비들이 최후를 맞는데 멸족을 면하고자 피신시킨 아이들이 다리 밑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 사람들은 고아들의 집성촌으로 변한 그 다리 밑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면서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란 말이 생겨났습니다.
● 금성대군이 위리안치 되었던 순흥도호부는 폐지되었고 한강 이남에서 제일 큰 고을 중의 하나였던 순흥은 역모의 땅이 되어 버립니다.
● 처마만 따라가면 10리도 비를 맞지 않을 정도라던 순흥의 집들은 불바다가 되어 인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 평원대군은 19세에 후손없이 죽어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뒤를 잇습니다.
● 영응대군은 글씨와 그림, 음률에도 밝아 세종이 아꼈다 합니다.세종은 영응의 동별궁으로 옮겨가 이듬해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하였습니다.
댓글 0개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