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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탐방161회] 양녕대군의

2019. 10. 01. 오전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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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탐방161회] 양녕대군의 <지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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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and.us/n/a7a91bA0deS1W


+10월2일 오후 1시20분까지 오세요
+해설 : 오후2시 시작
+회비 : 5,000원(사회공헌금 포함)
+7호선 상도역2번 출구 지상에서 만나요
+상도역2번 출구~마을버스 8번 승차~ 정류장 3개?, 4개? 경과 후 지덕사 하차


● 지덕사로 바로 가실 분은 <지덕사>라고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지덕사 주변에 예쁜 둘레길이 있다 합니다. 지덕사 답사 후 지덕사 주변 산책하는 기분으로 예쁜 둘레길 짧게 걷고 전철역으로 갑니다.



● 지덕사는 양녕대군 부부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정식 명칭은 <지덕사부묘소>입니다



● <지덕>과 <청권>이라는 말은, 옛날 중국 주나라 때 태왕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 아들 <우중>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셋째 아들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고 하자


● 우중이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머리를 깎고 은둔하며 왕위를 사양한 일에서 비롯된 일인데 훗날 공자가 <태백은 지덕>, <우중은 청권>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 이러한 고사를 바탕으로 양녕대군을 모신 사당을 <지덕사>, 효령대군을 모신 사당을 <청권사>라 하였습니다.



● 이번에는 양녕대군을 만나러 <지덕사>를 갑니다만, <효령대군의 청권사>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문중의 재산을 따지는 건 아니나, 효령대군 문중 재산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 <지덕>이란 말은 공자가 논어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에게 내린 찬사 중 최고의 찬사였다 합니다.


● 양녕대군이 동생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을 두고 후세의 뜻있는 선비들은 그의 큰 덕이 중국의 태백에 못지 않다하여 <동방의 태백>이라 칭송했다 합니다.



●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후손이고 이승만과 함께 국정농단을 벌였던 이기붕은 효령대군의 후손입니다.



● 우리나라 국보 1호인 숭례문(남대문) 현판은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왔으나  요즘은 아닐 수도 있다는 학자도 있습니다.


● 숭례문 현판의 글자체와 글자 크기가 똑같은 오석이 지덕사에 있습니다


● 광해군 시절 청파동 배다리 밑 도랑에서 밤마다 서광이 비추어 파 보았더니 임진왜란 때 실종된 숭례문 현판이었다 합니다.



● 2008년 토지보상금이 적다고 불만인 사람이 남대문에 불을 질러 남대문이 잿더미가 되는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 양녕대군의 친필 <숭례문> 목판은 전남 담양의 몽한각에서 2008년에 도난 당했고, 양녕대군 친필을 기반으로 제작된 후적벽부 (後赤壁賦) 목판도 이때 도난 당했습니다.


● 공조팀은 2017년 한 경매장에서 해당 목판이 판매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출품자 B씨를 특정했습니다.



● 중국의 문호 소동파의 명작으로 알려진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양녕대군이 초서체로 쓴 것입니다.


● 소동파가 유배생활 중 <적벽부>와 <후적벽부>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 중 후적벽부는 겨울 달밤의 쓸쓸한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라 합니다.



● 양녕대군이 이천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후적벽부>를 쓴 것으로 보아, 당시 대군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 초서는 옛부터 서예의 꽃으로 불렸으며 제대로 쓰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합니다.


● 그 중 양녕대군의 필체는 서예가들도 극찬할 만큼 빼어났다는 평입니다.


● 목판에 새겨진 양녕대군의 친필은 지덕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오석에 새긴 것입니다.



● 이후 공조팀은 올 5월에 경기 양평의 비닐하우스에서 <숭례문> 목판 2점과 <후적벽부> 목판 4점을 회수했습니다.


● B씨는 목판을 구입한 것일 뿐, 제작시기나 가치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했지만 경찰은 B씨가 오랜 기간 골동품을 수집했으며 목판 탁본에 조예가 깊은 점


● 또, <후적벽부> 목판에 '몽한각에 보관한다' 는 내용이 각인돼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고의로 목판을 감춘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 문화재청에서는 <방사성탄소연대>로 측정한 결과 14~15세기쯤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며 숭례문 서체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자료라고 설명했습니다.



● 문화재사범 대부분은 문화재를 훔친 게 아니라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이나 이미 사망한 인물에게서 산 것이라고 한답니다.


● 양녕대군 후손들은 찾고 싶은 것을 찾아 이루 말 할 수 없이 기쁘다며 문중에서 보관하기가 어려워 문화재청이나 박물관에 보관하는 방법을 생각 중이라 합니다.


● 문화재를 개인이 보관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통풍과 습도 조절이 잘 되는 고급진 창고가 아니면 문화재가 훼손된다는 점을 유념하시어 전문기관에 기증이 어렵다면 위탁하는 방법도 좋겠지요.


● 가치가 있다 싶은 골동품일수록 전문기관에 기증하셔서 훼손도 방지하고 후손들에게 현명한 조상으로 남길 바랍니다



● 조선 건국 후 태조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의 독주 속에 절치부심하고 있던 방원은 정도전과 방석의 제거를 추진하나 정도전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 기세 등등한 정도전은 왕자들이 보유한 사병을 폐하고 무기 반납을 추진하며 방원을 압박해 방원은 도리없이 사병을 폐하고 무기들을 불태웠습니다.



● 그러나 민씨는 친정의 경제력으로 몰래 병장기를 준비해 변고에 대응하는 시스템에 돌입하였던 것입니다.


● 이 때 준비해 두었던 무기가 1차 왕자의 난 때 위력을 발휘해 1차 왕자의 난 당일 아버지 태조 곁에서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자신의 복통이 심하다는 핑게로 불러내어 정도전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 그녀의 동생들과 함께 친정으로 빼돌렸던 무기와 사병을 동원해 <남은>의 집을 기습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 정도전의 집이 현 종로구청이었고 남은의 애첩 집이 지금의 한국일보사로 가까운 거리라 방심하고 있던 <정도전>과 <남은>을 한꺼번에 공격했던 것입니다.


● 2차 왕자의 난 때도 주저하는 방원에게 갑옷을 입혔다고 정종실록에 씌어 있습니다



● 왕이 되려는 남편에게 갑옷을 입힌 부인으로 방원 처, 민씨와 까막눈이었다는 수양의 처 정희왕후가 있습니다.


● 까막눈이었으나 타고난 감각으로 성종의 대리청정도 무사히 해 성종을 키워냈던 정희왕후에게는 훗날 인수대비가 되는 한씨 며느리와 한명회 사돈이 있었습니다.



● 두 왕비는 여걸 기질이 있었는데 남편이 왕이 되고난 이후 원경왕후는 남편에 의해 정치 참여도 봉쇄되고 태종의 후궁 문제로 불화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 정도전의 신권 강화에 불만을 가졌던 태종은 즉위 후 왕권 강화에 총력을 기울여 외척의 발호를 원천적으로 차단했습니다.


● 자신의 즉위에 최고의 공을 세웠던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을 불충으로 몰아 유배를 보냈다가 제거해 버렸습니다.



● 처가를 멸문시키려는 태종의 의도를 눈치챈 친정 식구들과 은밀한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갈등은 깊어만 갔습니다.


● 왕권 강화를 위해 후궁을 11명? 18명? 이나 둔 것도 원경왕후를 괴롭게 했습니다.


● 당시에는 왕권 강화 차원에서 후궁이 몇이 되었든 문제 될 일은 아니었겠지요.


● 역사가들은 천하의 킹메이커 아내가 즉위 직후 토사구팽 당했다고 합니다.



● 양녕은 자유분방하여 엄한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사냥을 좋아했으며 여자문제로 자주 말썽을 부렸다 합니다.


● 세자의 비행을 감싸주던 장인 김한로도 귀양 가게 되고 세자를 두둔한 양녕 측근도 처벌을 받는 등 세자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귀양을 가거나 목숨을 잃습니다.



● 양녕은 김한로의 딸과 혼인한 13세 9월, 명나라 사신으로 임명되어 다음 해 4월에 귀국하는 긴 여정 속에서 국제 정세와 문화도 익히는 등 이때 까지는 괜찮았으나


● 성인으로 접어들면서 부왕의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곤 했습니다. 문제는 같은 일들이 반복되어 일어났던 것입니다.


● 알려진 대로 양녕의 탈선은 주로 여색에 관한 문제로 윤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관계의 여인들을 탐했다 합니다.


● 양녕을 출궁시키자 양녕이 잘못했다며 맹세문을 보내와 태종은 용서하고 환궁케 했으나 양녕은 같은 문제를 또~



● 어느 날 양녕대군은 사대부 곽선의 첩인 어리가 매우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데려오라 명합니다.


● 어리의 거절에도 양녕은 굴하지 않고 세자의 신분을 이용해 어리를 취합니다.


●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크게 노하여 양녕을 그의 장인 집으로 쫓아 버립니다.


● 반성문을 쓰고 종묘에서 소리내어 읽고서야 궁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양녕은 어리를 다시 궁으로 불러 들입니다.


● 동궁에서 유모를 구한다는 소문을 들은 태종은 어리를 궁 밖으로 내쫓고 양녕의 바깥 출입을 금지시킵니다.



● 이때 \"이 첩(어리)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은 적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스스로 새 사람이 되어 조금이라도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ㅡ 태종실록 태종18년5월


● 이를 정리하면 <어리를 막으면 좋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아부지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지 않겠다> 이런 뜻입니다.


● 참을만큼 참고 기다렸던 태종이 폐세자를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 만약 이때 양녕이 다시 한번 잘못을 빌고 정신을 차렸다면 양녕은 왕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세자는 사랑에 눈이 멀어 이런 글을 올리고 익선관을 포기합니다.


● 결정적 한 방이 나오기 전까지 양녕에 대한 태종의 사랑은 매우 깊었다 합니다.



● 태종과 원경왕후는 위로 두 아이를 잃고 얻은 양녕이기에 이 부부에게 양녕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다 합니다.


● 계속되는 양녕의 탈선에도 잘못을 덮어주고 타이르고 세자 주변 사람들을 벌주며 세자를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 기다려도 기다려도 반성하는 기미는 없고 도리어 원망만 표출하자 태종은 양녕을 포기하고 충녕을 세자에 봉합니다.


● 왕위를 포기하고 얻은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녕과 어리의 사랑은 아름답게 끝맺지 못합니다.


● 어리는 주위 비난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하고 또, 어리는 자신 때문에 양녕이 폐세자 되었다는 죄책감에 목숨을 끊었다고도 합니다.



● 어리를 취하기 위해서 동원된 수족들은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데도 양녕대군의 일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 일탈인지, 일상인지도 모를 만큼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길을 갔던 양녕대군입니다.



● 조선시대 최대의 스캔들은 <양녕대군과 어리>입니다. <어우동>도 있다 하겠으나 <양녕대군>의 이 사건이야말로 태종에겐 용서되지 않는 항명이었습니다.


● 간이 큰 것인지, 간이 부은건지~  세상에 어느 세자가 \"아부지는 여자를 궁으로 잘도 불러 들이면서 나는 왜 안 되느냐?\"


● 양녕대군을 살펴보면 책 보다는 사냥과 여자였습니다. 폐세자가 되고는 한량으로 살았고 탐할 수 없는 관계의 여자들까지~



● 심지어 큰 아버지인 정종의 애첩 초궁장과도 스캔들을 뿌렸습니다.



● 양녕대군은 폐세자가 된 어리사건을 충녕이 고자질했다고 생각했답니다.


● 어느 날 우연히 양녕과 충녕이 만났는데 양녕이 \"너지?\" 그랬을 때 충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합니다.


● 이 대목에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충녕이 잘 한 것이냐~\"  \" 양녕을 무시한 것 아니냐~\"  패널들은 \"양녕이 의심할 만도 하네~\"


● 이때 \"약한 사람은 복수를 하고, 강한 사람은 용서를 하고, 더 강한 사람은 무시를 한다\"는 논조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역사 토크쇼를 본 일이 있습니다.


●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얘기지만, 쇼킹한 토크여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 충녕이 세종이다보니 좋게만 썼는지는 모르나 말썽부리는 형님을 한번도 핀잔주었다는 대목이 없다 합니다.


● 태종이 충녕에게 양녕을 단디 부탁했다 합니다. 형을 잘 챙겨 달라는 아버지와의 약속때문이었는지 수시로 올라오는 양녕을 비난하는 상소를 깡그리 무시했다 합니다.


● 세종이 성군은 성군인가 봅니다. 세종실록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 내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파서 10여 년에 이르러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 부종으로 아픈지가 오래다.


※ 아플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 눕지도 못하여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 지난 계측년 봄에 溫井에 목욕하고자 하였으나 대간에서 폐가 백성에 미친다고 말하고, 대신도 그 불가함을 말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두세 사람의 청하는 바로 인하여 온정에서 목욕하였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 그 뒤에 간혹 다시 발병할 때가 있으나, 그 아픔은 전보다 덜하다. 또 소갈증이 있어 열 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시 조금 나았다. 지난해 여름 또 임질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


※ 지난 봄 講武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을 가리는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인해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은 알겠으나 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지난 봄에 강무한 것을 후회한다.


※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 衰老함이 심하다. 나는 큰 일만 처결하고 작은 일은 세자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고자 하나, 너희들과 대신들이 모두 말리기에 내가 다시 생각하매 내가 비록 병이 많을지라도 나이가 아직 늙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가볍게 말을 낸 것을 후회한다.


● 이상은 세종실록(세종 21년 6월 21일 기록)에 실린 화려함 속에 가려진 인간 세종의 고뇌라 하겠습니다.


● 위 내용을 보면 인간 세종은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책무를 다하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 각종 질환의 고통 속에서도 최고의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 양녕대군을 조명하면서 세종대왕의 얘기가 길어진 것은 양녕의 폐세자로 인해 우리가 한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입니다.


● 만약에 양녕이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고 동생을 힘들게 했다면?


● 아버지의 유언대로 끝까지 兄第愛를 지킨 충녕과 불만이 왜 없었을까만 동생을 존경했던 양녕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 역사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역사관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요.


● 제 머릿 속의 양녕은 詩와 書에 밝고 낭만적이며 피를 뿌렸던 아버지를 보면서 권력과 정치에서 멀리하려 했던 인간미 넘치는 대군으로 세팅되어 있습니다.


● 요즘 각도가 다른건지, 제가 잘못 알고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만, 詩와書는 맞고 낭만과 인간적인 면은 다르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 킬러 본능의 태종도 양녕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는 사실입니다.


● 어머니 원경왕후도 양녕이 대를 잇기 바래 공부 잘하고 효성스러운 충녕을 미워하기까지 했다 합니다.


● 태종 최대 약점인 서열을 지키지 못한 왕위 등극을 커버하기 위해서라도 장자 양녕이 이어 가기를 바래고 바랬다 합니다.


● 그런 태종이 양녕을 폐세자 결정하기 까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 보고 차마 세자를 벌할 수 없어 잘 모시지 못한 책임을 물어 많은 사람을 날리기까지 했다 합니다.


● 태종이 양녕에게 \"너로 인해 몇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 제발 좀~ ~ \"  그래도 양녕은 수그러 들지 않았다는 기록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 세종때도 양녕을 벌하라는 상소가 수도 없이 올라 왔지만, 세종은 \"형님이 그러 하신 게 어제 오늘 일이더냐~\"며 전혀 들으려 하지도 않고 덮어 버렸다 합니다.


● 나이가 지긋 함에도 양녕의 비행을 문제 삼는 상소가 계속되었다니 양녕대군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가 봅니다.



《효령대군》


● 효령이 머물고 있는 절에 찾아 온 양녕이 사냥한 고기를 구워 먹을 때 효령이 \"형님, 제발 여기서는~\"


● 그때 양녕은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님(효령을 뜻함)의 형인데 걱정은 무슨 걱정~\"



● 태종이 무얼 잘못했고 무얼 잘 했는지 대강은 짐작되실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종이 제일 잘 한 것은 <세자교체>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양녕이 어지간만 했어도 충녕이 왕이 되는 일은 없었을 일이라 태종이 속을 끓였던 양녕의 비행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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