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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되어 버린 내 동생
누야 2004. 08. 19. 오전 12:00
8157
누야 2004. 08. 19. 오전 12:00
8157
또 꿈을 꾸었습니다.
누군가를 안고 서럽게 서럽게 통곡하다 깨었습니다.
얼굴도 안 보여 주는 그 사람은 아마 별이 되어 버린 내 동생이겠지요.
동생은 재작년 5월 1일 친구를 데려다 주다 빗길에 미끄러져 그 자리에서 먼 길 떠났습니다.
친구는 너무나 멀쩡한데 어떻게 동생만 가 버렸는지...
지금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 가슴이 아립니다.
동생은 오남매 중 넷째입니다.
여자보다 더 예쁜 쌍거풀을 가진 눈이 큰 아이지요.
한 밤중이라도 친구가 데려다 달라고 하면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던 아이.
누나인 내가 너무 걱정되어 그러지 말라고 말리면
'내 친군데...'
씩 웃으며 하는 딱 한마디!
친구라면 불원천리 먼 길도, 궂은 일도 마다않던,
내 동생이지만 정말 착한 녀석이지요.
동생이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문제로 고민할 때 장학생으로 오라는 00공고로 가려고 했지만
제가 반대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대학교에 보내 준다는 큰 소리로 인문계로 가게 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열 아홉, 고 3이었지요.
진학한지 얼마 지나지않아 동생은 학교를 자퇴하겠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공고로 진학해서 집안을 돕는게 더 낫다는 말이었지요.
동생을 아끼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모공고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염없이 우는 엄마에게 위로를 하며 걱정하지 말라던 녀석!
전학을 가는 날에도 그렇게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저는 거창에 있는 대성고등학교 앞을 지날 때면 늘 눈물이 납니다.
동생이 다니고 싶어했던, 잠시나마 다녔던 학교라서...
동생은 고등학교에서 자격증을 따고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학교에서 대학를 다녔습니다.
제가 쓸 돈도 부족할텐데 어머니께 드리는 용돈은 늘 제일 두껍게 챙겼지요.
자기가 군대가면 엄마가 힘드시니까 군대에 가고 싶어하면서도 군에 안가는 조건으로 취업을 하더군요.
일은 너무 힘든데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는 착취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틈틈이 저금을 해 어머니께 아주 예쁜 새 집을 지어 드렸지요.
형님 사업이 망하면 생활비까지 주었고, 목돈을 빌려가서 한 푼도 받지 않아도 달라고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막내 대학등록금도 동생 주머니에서 나왔다는걸 누구나 알면서...
누구나 다 알면서도 동생 혼자에게만 미뤘습니다.
동생은 조카들을 아주 많이 너무나 많이 좋아해서 어디든 데리고 다녔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빠라고 할 정도로 잘 돌봐주었습니다.
조카가 교통사고로 입원을 했는데 엄마 아빠가 있는데도 혼자서 조카를 돌본다고
자격증을 찾으러 가야되는데 포기했습니다.
외삼촌을 좋아한 조카가 잠시라도 곁에서 떨어지는 걸 싫어해서...
보다 못한 제가 멍청한 짓 좀 그만하라고, 이젠 제발 너만을 위해 살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시험이야 또 보면 되는데 뭐~
걱정 마이소.
또 봐도 붙을 자신 있으니까...'
세상에 이런 바보가 또 있을까요?
동생은 다음 해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자격증을 찾았습니다.
저는 공부하는 남편을 만나 두 딸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생활비는 당연히 저 혼자서 감당하고 있지요.
반대하는 결혼을 10년만에 겨우 설득해서 한 결혼이라 친정에 도움을 청하는 일만은 죽어도 하지않겠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도 친정 한번 가지 않았지요.
서먹함도 있었지만 더 급한건 돈문제니까요.
이런 저의 사정을 알고 도움을 주던 이가 바로 동생입니다.
매형이 알면 마음 불편하다고 말 하지 말라며 자기 월급 다음 날 달달이 통장으로 생활비를 보내주었습니다.
힘들게 번 돈을 내가 가로채 써서 미안하다고 다음에 꼭 갚겠다고 하면
'고마 됐어요.'
이 한마디로 피식 웃던 녀석.
동생이 먼 길 떠나고 난 뒤 남편에게 그 말을 하자 남편도 통곡하더군요.
우리 아이가 너무 귀엽다고 새벽까지 잠도 자지않고 손을 잡고 안아 주던 정도 많았던 녀석이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딸애들이랑 전화를 하더니...
여덝살 큰 아이는 지금도 삼촌이라면 무조건 동생이름을 말합니다.
동생은 엄마에겐 기둥이었습니다.
서울로 와서 같이 살자고 하면
시골에 계시는 엄마때문에 안된다며 부산에서 산다던 녀석!
자기가 서울로 오면
엄마에게 자주 못 찾아가고 농사철에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농사일도 못 도와 드려 안된다더니...
얼마되지않는 밭이지만 콩타작이라도 할라치면
부산에서 일을 하고 3시간을 차로 달려와 농사일을 하고
새벽에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다시 3시간을 달려 출근하던 동생.
직장에서도 표창장을 받는 성실한 사원이었는데...
친구들이 한밤중이라도 부르면 언제 어디로든 달려가던 아이.
그 날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였습니다.
진해가 집이라는 직장동료를 태워 주다가 사고가 났나봅니다.
119구조대가 동생을 옮긴 병원은 진해가 아닌 부산00병원.
저는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 울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한 병원이었고,동생들이 나를 찾아 대기실에서 수술이 끝날때까지 기다리던 곳,
또 언니 아이들이 태어났던 병원이었으니까요.
마지막 가는 장소도 가족과 함께한 병원이 좋았나봅니다.
지난 4월 29일은 동생의 서른네번째 생일이였고
일주일 뒤는 동생이 우리곁을 떠난지 두해가 되는 날이였습니다.
생일날 미역국도 못 먹었다고 웃더니...
동생은 시작도 가족과 함께였고
생을 정리하는 날도 가족들과 함께였는데
저는 화장터에서 제 머리카락과 동생이 그렇게 예뻐한 딸아이 머리카락을 뽑아 동생과 함께 했습니다.
위로가 되었던건 장례식장을 꽉 채울만큼 많은 친구들이 와 주었고
학교 다닐 때 은사님들께서 오셨던겁니다.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와주었는지 자리가 모자라 장례식장 밖까지 서 있었으니까요.
오열하는 친구들 모습을 보면서 동생이 헛살지는 않았구나 위로도 되었습니다.
지금 동생은 김해 '은하사'라는 절에서 쉬고 있습니다.
산세가 아름다운 그 곳은 평소 산을 좋아하던 동생에게 좋은 안식처인것 같습니다.
저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음 생에서 꼭 한번 동생이 다시 제 동생이길 원합니다.
여태껏 받기만 하고 누나면서도 늘 어리광만 부리던 제가
정말 동생에게 좋은 누야가 되고싶습니다.
이생에서 너무 힘들게 살았지만 너무 보람차게 살다간 내 동생!
지금도 삼촌이라면
'봉균이 삼촌이야?'
묻는 꼬맹이들 말에 언제쯤이면 평온한 마음으로 웃으며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슬플때보다 기쁠때 더 많이 생각나고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가슴 아픕니다.
가슴 저미도록
눈물이 납니다.
누군가를 안고 서럽게 서럽게 통곡하다 깨었습니다.
얼굴도 안 보여 주는 그 사람은 아마 별이 되어 버린 내 동생이겠지요.
동생은 재작년 5월 1일 친구를 데려다 주다 빗길에 미끄러져 그 자리에서 먼 길 떠났습니다.
친구는 너무나 멀쩡한데 어떻게 동생만 가 버렸는지...
지금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 가슴이 아립니다.
동생은 오남매 중 넷째입니다.
여자보다 더 예쁜 쌍거풀을 가진 눈이 큰 아이지요.
한 밤중이라도 친구가 데려다 달라고 하면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던 아이.
누나인 내가 너무 걱정되어 그러지 말라고 말리면
'내 친군데...'
씩 웃으며 하는 딱 한마디!
친구라면 불원천리 먼 길도, 궂은 일도 마다않던,
내 동생이지만 정말 착한 녀석이지요.
동생이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문제로 고민할 때 장학생으로 오라는 00공고로 가려고 했지만
제가 반대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대학교에 보내 준다는 큰 소리로 인문계로 가게 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열 아홉, 고 3이었지요.
진학한지 얼마 지나지않아 동생은 학교를 자퇴하겠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공고로 진학해서 집안을 돕는게 더 낫다는 말이었지요.
동생을 아끼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모공고로 전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염없이 우는 엄마에게 위로를 하며 걱정하지 말라던 녀석!
전학을 가는 날에도 그렇게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저는 거창에 있는 대성고등학교 앞을 지날 때면 늘 눈물이 납니다.
동생이 다니고 싶어했던, 잠시나마 다녔던 학교라서...
동생은 고등학교에서 자격증을 따고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학교에서 대학를 다녔습니다.
제가 쓸 돈도 부족할텐데 어머니께 드리는 용돈은 늘 제일 두껍게 챙겼지요.
자기가 군대가면 엄마가 힘드시니까 군대에 가고 싶어하면서도 군에 안가는 조건으로 취업을 하더군요.
일은 너무 힘든데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는 착취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틈틈이 저금을 해 어머니께 아주 예쁜 새 집을 지어 드렸지요.
형님 사업이 망하면 생활비까지 주었고, 목돈을 빌려가서 한 푼도 받지 않아도 달라고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막내 대학등록금도 동생 주머니에서 나왔다는걸 누구나 알면서...
누구나 다 알면서도 동생 혼자에게만 미뤘습니다.
동생은 조카들을 아주 많이 너무나 많이 좋아해서 어디든 데리고 다녔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빠라고 할 정도로 잘 돌봐주었습니다.
조카가 교통사고로 입원을 했는데 엄마 아빠가 있는데도 혼자서 조카를 돌본다고
자격증을 찾으러 가야되는데 포기했습니다.
외삼촌을 좋아한 조카가 잠시라도 곁에서 떨어지는 걸 싫어해서...
보다 못한 제가 멍청한 짓 좀 그만하라고, 이젠 제발 너만을 위해 살라고 했더니 하는 말이
'시험이야 또 보면 되는데 뭐~
걱정 마이소.
또 봐도 붙을 자신 있으니까...'
세상에 이런 바보가 또 있을까요?
동생은 다음 해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자격증을 찾았습니다.
저는 공부하는 남편을 만나 두 딸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생활비는 당연히 저 혼자서 감당하고 있지요.
반대하는 결혼을 10년만에 겨우 설득해서 한 결혼이라 친정에 도움을 청하는 일만은 죽어도 하지않겠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도 친정 한번 가지 않았지요.
서먹함도 있었지만 더 급한건 돈문제니까요.
이런 저의 사정을 알고 도움을 주던 이가 바로 동생입니다.
매형이 알면 마음 불편하다고 말 하지 말라며 자기 월급 다음 날 달달이 통장으로 생활비를 보내주었습니다.
힘들게 번 돈을 내가 가로채 써서 미안하다고 다음에 꼭 갚겠다고 하면
'고마 됐어요.'
이 한마디로 피식 웃던 녀석.
동생이 먼 길 떠나고 난 뒤 남편에게 그 말을 하자 남편도 통곡하더군요.
우리 아이가 너무 귀엽다고 새벽까지 잠도 자지않고 손을 잡고 안아 주던 정도 많았던 녀석이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딸애들이랑 전화를 하더니...
여덝살 큰 아이는 지금도 삼촌이라면 무조건 동생이름을 말합니다.
동생은 엄마에겐 기둥이었습니다.
서울로 와서 같이 살자고 하면
시골에 계시는 엄마때문에 안된다며 부산에서 산다던 녀석!
자기가 서울로 오면
엄마에게 자주 못 찾아가고 농사철에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농사일도 못 도와 드려 안된다더니...
얼마되지않는 밭이지만 콩타작이라도 할라치면
부산에서 일을 하고 3시간을 차로 달려와 농사일을 하고
새벽에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다시 3시간을 달려 출근하던 동생.
직장에서도 표창장을 받는 성실한 사원이었는데...
친구들이 한밤중이라도 부르면 언제 어디로든 달려가던 아이.
그 날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였습니다.
진해가 집이라는 직장동료를 태워 주다가 사고가 났나봅니다.
119구조대가 동생을 옮긴 병원은 진해가 아닌 부산00병원.
저는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 울지도 못했습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한 병원이었고,동생들이 나를 찾아 대기실에서 수술이 끝날때까지 기다리던 곳,
또 언니 아이들이 태어났던 병원이었으니까요.
마지막 가는 장소도 가족과 함께한 병원이 좋았나봅니다.
지난 4월 29일은 동생의 서른네번째 생일이였고
일주일 뒤는 동생이 우리곁을 떠난지 두해가 되는 날이였습니다.
생일날 미역국도 못 먹었다고 웃더니...
동생은 시작도 가족과 함께였고
생을 정리하는 날도 가족들과 함께였는데
저는 화장터에서 제 머리카락과 동생이 그렇게 예뻐한 딸아이 머리카락을 뽑아 동생과 함께 했습니다.
위로가 되었던건 장례식장을 꽉 채울만큼 많은 친구들이 와 주었고
학교 다닐 때 은사님들께서 오셨던겁니다.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와주었는지 자리가 모자라 장례식장 밖까지 서 있었으니까요.
오열하는 친구들 모습을 보면서 동생이 헛살지는 않았구나 위로도 되었습니다.
지금 동생은 김해 '은하사'라는 절에서 쉬고 있습니다.
산세가 아름다운 그 곳은 평소 산을 좋아하던 동생에게 좋은 안식처인것 같습니다.
저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음 생에서 꼭 한번 동생이 다시 제 동생이길 원합니다.
여태껏 받기만 하고 누나면서도 늘 어리광만 부리던 제가
정말 동생에게 좋은 누야가 되고싶습니다.
이생에서 너무 힘들게 살았지만 너무 보람차게 살다간 내 동생!
지금도 삼촌이라면
'봉균이 삼촌이야?'
묻는 꼬맹이들 말에 언제쯤이면 평온한 마음으로 웃으며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슬플때보다 기쁠때 더 많이 생각나고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가슴 아픕니다.
가슴 저미도록
눈물이 납니다.
댓글 5개
운영자
2004. 08. 19. 오전 12:00
참 많이 아픈 사연이군요.....
sinna
2004. 08. 19. 오전 12:00
사랑하는 동생을 보내셨군요..그 슬픔이 전해져 오는 듯 합니다.
은비녀
2004. 08. 19. 오전 12:00
착하게 사는 사람들을 하느님은 왜 더 빨리 불러가시는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누님에게도 마음의 위로를 보냅니다.
해탈
2004. 08. 21. 오전 12:00
눈물울 훔칩니다. 인생이 그렇게 아름다움만을 남기고 가기가 쉽지만 않은데.... 서른 두살의 젊은 영혼이 어찌 그리 아름다울수가 있을까? 다시금 나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인의 삶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누야
2004. 09. 01. 오전 12:00
지난 토요일! 벌초를 다녀왔습니다. 앨범을 봤더니 사진 속 내 동생은 여전히 해맑은 웃음으로 저를 보더군요. 아직도 여전히 잠 못 드시는 홀 어머니를 두고 떠나 왔습니다. 엄마는 동생이 가 버린 후 일 년 동안 집에서 주무시지 않고 동네 회관이나 이웃 집에서 주무셨지요. 동생 생각이 나서... 여러분! 지금 내 곁에 있을 때 조금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세요. 떠나면 정말 너무나 후회한답니다. 가슴이 시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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