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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당신께 쓰는 편지

present 2004. 09. 14. 오전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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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침 운동을 하면서 별로 땀을 흘리지 않는 자신을 느끼곤 좀 놀라운 마음입니다.

어느덧 가을의 문턱을 밟고 들어섰나 봐요.

밤이 이슥해지면 아래 감귤밭에서 풀벌레 울음소리가 2층의 서재 창문을 타고 오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가을날>을 이렇게 노래했지요.

<가을날......,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라고.


일찍이 글쟁이로 입신(入身)습니다만,

그 이후 오랫동안 가장(家長)의 고뇌(苦惱)를 핑계 삼아 상업적인 글쓰기에 몰두(沒頭)했었지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처럼, 그런 일탈(逸脫)과 퇴폐(頹廢)를 즐겼던 면도 있었을 겁니다.

그 해 봄날이었어요.

잡지사 편집부 사람들 몇과 어울려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여 자정을 훨씬 넘겼던 것 같아요.

어떻게 귀가했는지도 모르겠고요.

아무튼 이튿날 심한 두통 때문에 잠이 깼어요.

눈을 뜨자 바람에 불려 젖혀진 커튼 너머에서 강렬한 햇살이 화살처럼 무자비하게 눈을 찔러왔지요.

나는 두통과 바늘을 가득 담은 듯 쓰라린 눈 때문에 비틀대며
   창의 커튼을 제대로 여미려고 애를 쓰다가 창문턱 가까이에서 쓰러지고 말았어요.


얼마 후에 눈을 떠보니 나는 침대 모서리 구석진 곳에 얼굴을 처박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장롱과 화장대의 거울이 용광로처럼 불타며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거실의 소파는 한낮의 길바닥처럼 하얗게 색이 바랜 채 미세한 먼지를 피워 올리며
   시간의 덧없음 속에서 소멸(消滅)해가고 있는 듯했습니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베란다에 놓인 화분에서, 마치 생전 처음 붉은색을 보기라도 했듯이,
   제라늄이 붉디붉은 꽃들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114에 문의하여 인천연안여객선 터미널로 전화를 걸었지요.

그 날, 2002년 5월 17일 오후 7시에 인천항을 출항하는 카훼리호는
   이튿날 오전 9시 30분에 나 자신과 을파소(乙坡蘇)를 낯선 땅 제주섬에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나는 문(門)의 문고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밀면 열릴 것을 나는 기를 쓰고 당기고만 있다든가

당기면 열릴 것을 막무가내로 밀어 열기를 바라고 있다는 혼란스런 생각이었지요.


제주섬에서 어느덧 세 차례의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요즈음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밀고 당기고 할 문(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지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무엇, 도달해야 할 어느 지점,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 따위는

애시당초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우리의 욕망과, 그 욕망의 그림자일 뿐인 두려움이 만들어낸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입니다.


그것이 향후(向後) 내 작품의 주제가 될 것이고,

그 주제 자체가 소설을 형상화(形象化)하는 방법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상채기 하나 남기지 못한 채 가볍고,

이미지와 관념(觀念)과 관능(官能)의 숲에서 숱한 밤을 보냈던 나의 <문장(文章)>은

아직도 얼마나 나를 배반(背反)하려는지 나는 모릅니다.


<별의 고향>을 쓴 이후로 오랫동안 붓을 꺾었던 작가 최인호가 <상도(商道)>로 다시 데뷔했던 그 날이
   나에게도 오고야 말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삶은 길(道)일 따름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는> 법이니까요.


추신(追伸):  을파소는 시인(詩人) <고은(高銀)>의 詩에 등장하는 조랑말 이름인데 내 승용차에 이름을 붙여 준 것이지요. 지금은 조랑말이 아니라 당나귀로 말을 바꿔 탔지만은요.



댓글 8개

채 원 2004. 09. 14. 오전 12:00

저도 어서 문고리를 놓아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주에 가을은 어떤 빛으로 오고 있을까요?

김경수 2004. 09. 16. 오전 12:00

아마.. 주홍빛으로 오지 않을까 싶네요.. ^^ 그래서 가을이면 모든 산과 들이 주홍빛으로 물드는게 아닐까요?^^

바이닥터 2004. 09. 16. 오전 12:00

진지한 자기 성찰과 고뇌가 가슴에 가득 느껴집니다. 사색...진정한 의미의 사색의 향기가 느껴지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느린풀섶 2004. 09. 17. 오전 12:00

세 번의 가을로서 깨달음을 얻은 님에게 축원을 보냅니다. 그 곳의 가을을 여러 해 겪고 살았었지요. 어린 시절 떠나 기억에 남는게 별로 없지만 문은 없었습니다. 문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지요.

ipresent 2004. 09. 18. 오전 12:00

느린풀섶님께 세 번의 가을뿐이겠어요? 아마도 쉰 다섯 해의 연륜과 그 동안 읽었던 책들과 만났던 사람들과.... 저도 실은 아직 문이 없습니다. 그리고 느린풀섶님과 전 다른 문인 것도 같지요, 아마?

느린풀섶 2004. 09. 18. 오전 12:00

연륜이 깊으니 그윽한 멋이 있지요. 책을 많이 읽고 많은 사람을 만났으니 깊은 지식이 있지요. 그러나 알건 모르건 문 밖에 나오니 보이는 하늘은 같겠지요.

김동원 2004. 09. 30. 오전 12:00

저도 글을 써 봤더니, 그것 정말 쉽지 않더군요. 전혀 문학과는 거리가 먼 곳에 있다가 경험과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글로 만들어 보려니 그 고통은 글을 처음부터 쓰려고 했던 사람에 비하면 비교할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숨긴사랑과숨겨진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지금 사색의 향기 '독자가쓴글'란에 옮겨 놓고 있지만 230쪽이 넘는 분량이 한번에 옮길수도 없고, 요사이 매일 크나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중간에 포기할수도 없고, 정말 좋은 글은, 쓴사람의 땀이 얼마나 함유되어 있는지 알것 같습니다. 부디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글이 만들어 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ipresent 2004. 10. 17. 오전 12:00

느린풀섶님께, 제주에서 경북 상주로 귀농합니다. 문 밖에서 보는 하늘은 같겠지요. 인연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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