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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1
“부서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오전 이른 시간, 간밤에 과음한 덕에 회의실에서 잠시 눈을 부치고 있는 총무과 정춘팔과장을 같은과 김양이 깨웠다. 그녀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정춘팔은 선잠을 깬 터라 짜증이 났지만 그를 깨우는 이가 김양 이라는 사실에 얼른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과장님들 모두 회의실로 오시랍니다.”
“무슨 일이냐니까?”
“그건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급히 모이시랍니다.”
정춘팔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부장님 사모님께 골프클럽 선물한 게 벌써 귀에 들어갔나? 아닌데, 그렇다면 혼자 불렀어야 하잖아.’
정과장은 일어서면서 김양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불편한 거 없어? 뭐든지 말해.”
“나가 보겠습니다.”
싸늘한 대답과 함께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훔쳐보던 정과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는 게 힘들긴 힘드나보군.’
회의실에는 정춘팔을 비롯해서 각 과의 과장들이 이미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광록 부서장이 들어오는 정춘팔을 향해 소리 질렀다.
“정과장, 잠은 집에서나 자게.”
정춘팔은 비굴한 자세로 조광록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작은 아버님 상가집에서...”
정춘팔은 대한자동차에서 최고참 과장이다. 그가 대한자동차에 입사한 것은 억세게도 좋은 운이 작용한 덕이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삼촌이 운영하던 입시학원에서 영어를 강의하고 있을 때였다. 대한 그룹에서 대한대학을 설립하고 초기에 홍보를 목적으로 학자금지원 장학생 특채 전형이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학사편입과정에 응시했는데 덜컥 합격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현장실습보고서로 교육을 대체한다면서 대한자동차 생산기술본부에 배치됐다. 장학금을 거저 주는 게 아니라 그만큼 노동력을 일찍 확보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그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졸지에 든든한 일자리가 생기고 게다가 학벌까지 보장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가 학원에서 영어강의를 한 것은 대기업 인사에서 아주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대기업 인사규정이라는 게 일단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 두 번째 영어시험을 잘 치면 되는 일이었다. 전문대를 다니면서 친척 집을 전전 하는 것은 눈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윗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은 오히려 영어 시험을 치르는 것 보다 쉬운 일이었다.
더구나 강의는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졸업식 날 받아든 졸업장은 비교적 순탄하게 승진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날 처음 현장에서 만났던 같은 직장 소속의 일단의 무리들이 그와 같은 케이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묵계적인 비밀을 공유한 셈이 되었고 그 흔한 동문회한번 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그는 현장에만 매달려 본의 아니게 열심히 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조건 열심히만 하는 것으로는 무한경쟁사회에서는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타고난 처세술로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부하직원들 조차 정과장의 손바닥에는 지문이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능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어서 입사한지 20년이 흐른 지금에도 총무과장 자리를 겨우 유지하는 신세였다.
최근 부임한 조광록 부서장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공장이 새로이 설립되는 곳이면 항상 투입되는 인물이었다. 뷰젤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은 단일공장으로 세계 10위권의 자동차생산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생산관리부서장은 공장장의 최측근 참모로 공장장이 감독이라면 수석 코치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그는 부서장에 취임할 당시 모든 축하행사를 전폐하고 사무직의 출근시간을 한 시간씩 앞당기라고 지시하고 여섯시에 출근을 했다. 여기저기서 볼멘소리 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가장 먼저 출근하는 부서장에게 감히 대놓고 얘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야간반의 교대를 지켜보면서 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주간반이 시작될 때 공장을 한바퀴 돌았다.
정춘팔은 그런 그가 지극히 못마땅하고 전혀 자기와 다른 류(類)의 인간이라고 치부하면서도 비굴한 조아림과 특유의 아부로 직원들의 불만을 온몸으로 사수해야했다. 그것만이 그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보강된 신입사원들은 쟁쟁한 학벌의 소유자들이었다. 정춘팔은 신입사원 OJT(On the Job Training)를 통해서 공장 전반에 걸친 교육을 하면서 20년 경력의 노련미를 펼칠 기회를 신입사원들의 질문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함으로써 교육이 엉망이 되어버린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들은 공정과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공정과 신호근 과장의 경력으로 따지면 자기보다 10년이나 뒤지지만 공장자동화설비를 시작하면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초고속 승진하더니 자신과 동일한 반열에 오른 것이 가뜩이나 배가 아팠던 터였다. 그나마 부서장 사모님에게 골프클럽을 선물하면서 약을 쳐놓고 위안을 삼고 있었다.
“정과장, 듣고 있는 거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회의 안할 거야?”
정춘팔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고쳐 잡고 대답했다.
“회의 해야지요. 다 듣고 있습니다.”
“그럼 제시한 문제에 대한 대안을 내려보시오.”
“예? 저, 그게...”
공정과장 신호근이 입을 열었다.
“지금 현재 전체 공장의 평균 UPH(Unit Per Hour:시간당 생산대수) 는 80입니다. 92까지 가능하나 이런 사태를 이미 예상한 바 있어서 가동률을 올리지 않던 중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현재 도장의 CAPA(capacity 생산능력)는 공장 전체 평균 UPH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공장의 안정성을 더 높이고 더 섬세한 product mix(평준화생산)를 통하여 even(평준화)화의 향상을 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실분은 어떻게 채워 넣나?”
“조금 있으면 노사협상 기간입니다. 노조는 이번 기회에 공장의 위기 상황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현재의 가동률을 유지하는 데만 신경 쓴다면 주말 잔업은 확실하게 없어도 될 것 같고 평일 잔업도 기존의 재고가 적체될 것을 감안하여 없앤다면 협상 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협상이 타결될 시점이면 리콜이 마무리 될 것으로 보고 평일과 주말 잔업을 풀로 돌리면 무난히 생산량은 목표치를 달성할 것입니다. 자료는 보고서에 자세히 쓰여 있습니다.”
보고서를 한참 들여다보던 조광록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과장 공장장님 브리핑자료 준비해. 자 다른 얘기 없으면 각자 맡은 바 일들을 해요.”
자재과 유철호 과장이 신호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좌우지간 자네 알아줘야겠어. 언제 이런 자료 준비했나? 보물이야, 보물.”
모두 빠져나간 회의실에서 정춘팔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먹다 남긴 커피 잔 속으로 빨려 들어간 성냥개비가 짧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만 같았다.
오후 2시에 과장급까지 참여하는 확대간부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정춘팔은 식사가 끝나는 대로 신호근을 회의실에서 보자고 했다.
떨떠름한 표정의 신호근이 회의실로 들어서자 정춘팔은 얼굴 가득 비굴한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커피 마시겠나?”
“곧 회의입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시죠.”
“이 친구, 갑자기 왜 이러나. 우리사이에 이러지 말고.”
정춘팔은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김양, 회의실에 커피 두 잔 좀 부탁해.”
신호근이 조소 띤 얼굴을 하면서 정춘팔에게 물었다.
“부하 여직원에게 반말하지 말라는 지침이 하달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무리 총무과장이라 하시더라도 지킬 건 지키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냥 딸 애 같아서 그러지 뭐. 자네는 그런 게 적응이 될 지 모르지만 우리같은 사람은 숫제 적응이 안돼요. 직급이 낮은 것도 아니요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잖아. 모르는 척 하게.”
신호근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얼어 죽을...’
정춘팔은 가슴에서 봉투를 꺼내 신호근에게 내밀었다.
신호근이 눈을 흘기며 따지듯이 물었다.
“이게 뭡니까?”
“넣어두게. 중앙스포츠센터 VIP 회원권이야. 사우나, 수영, 골프 모두 무료일세. 기한은 금년 말 까지고 말이야.”
“왜 이런 걸 제게 주시죠?”
“자네가 우리 공장에서 제일 고생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후배에게 이 정도는 해 줘야 선배로서 위신이 설 것 같아서 그런 것일세.”
김양이 커피를 들고 들어오다 신호근을 보면서 멈칫하더니 조용히 커피를 두 사람 앞에 올려놓고 돌아서서 작은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신호근이 정춘팔에게 훈계조로 말했다.
“선배님, 이제 윗사람들 작업은 끝나신 겁니까. 저는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아니 안 받습니다.”
순간 정춘팔은 김양의 눈치를 살피며 손가락을 입술위에 얹으며 ‘쉿’하는 시늉을 했다. 김양이 나가자 정춘팔은 억지로 봉투를 신호근의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신호근은 아까와는 달리 헛기침을 하면서 못이기는 체 거절하지 않고 말했다.
“선배님의 성의로 알고 받는 겁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십시오.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브리핑 자료 복사해 드릴 테니.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마시고 아무도 안 보이는 데 가셔서 숙지하셔야 합니다.”
“암, 암, 여부가 있나.”
신호근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정춘팔이 중얼거렸다.
“나쁜 새끼. 결국 받으면서. 김양 있으니까 괜히 폼 재고 지랄이야, 지랄은.”
정춘팔에게 잘근잘근 씹히고 빨릴 대로 빨린 애꿎은 담배꽁초가 죽는 줄도 모를고 커피 잔 밑바닥에 깔려 있는 커피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확대간부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회의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신호근의 브리핑이 끝나자 정춘팔의 예상대로 공장장의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어이, 뺑끼! 현재 UPH 가 얼마야?”
“의장! 가동률이 왜 계속 제자리야?”
사실 현장의 부서장들은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 불철주야로 현장을 뛰어다니기 때문에 그런 숫자들에 대해서는 생관 부서의 도움 없이는 알아내기 힘들다.
신호근이 타부서장들의 신임을 받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신호근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면서도 공장장이 부르면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뛰는 시늉을 하면서 어떠한 자료라도 공장장의 입맛에 맞게 가공하여 제공하곤 했다. 사실 조광록도 신호근 덕분에 공장장의 신임이 더욱더 두터워지고 있었다.
공장장이 정춘팔의 이름을 불렀다.
정춘팔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는 사전에 공부해 둔 게 효험이 있다고 생각하며 쾌재를 불렀다.
“예, 공장장님”
예전에 없던 여유를 짐짓 부리며 대답한 그는 공장장의 얼굴을 정면으로 당당하게 보고 있었다.
“자넨 나가봐. 총무과에서 생산관리를 알기나 해?”
“예?”
정춘팔은 회의실 출입문까지가 그렇게 길다는 것을 그 날 처음 느꼈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 회의실 안에서는 한 바탕 폭소가 터지고 있었다.
모두가 퇴근한 빈 사무실.
정춘팔은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오후 늦게부터 내린 비가 아직도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공장을 빠져나온 정춘팔은 머리가 뻐근하여 사우나를 할 요량으로 중앙스포츠센터로 차를 몰았다. 그는 VIP 회원권은 신호근에게 인계했지만 카운터 직원들은 모두 안면이 있는 터라 키를 받아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입구에 들어서자 카운터에서 반갑게 맞이하였다.
“91번.”
정춘팔은 스스럼없이 사물함 번호를 대고 신발을 벗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운터의 여직원이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과장님 91번 손님 오늘 들어가셨는데요.”
“그래, 그럼 일반 키 아무 거나 주지.”
“오늘 하루만 봐 드리는데, 다음부터 중복 사용은 불가능합니다.”
“알았어.”
정춘팔은 탕에 있는 비누를 사용하여 대충 샤워를 하고 찬물에 들어가서 몸을 식혔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는 둥 마는 둥 샤워를 끝낸 그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휴게실 앞 쪽을 통과하여 나갈려는 찰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신호근과 조광록의 목소리였다.
“부장님, 총무과 정과장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리 버티시는 겁니까?”
“그러게 말일세. 오늘 공장장님도 ‘너 그만 둘 때 됐잖아?’ 하는 말이었는데 말일세. 좌우지간 아까는 우스워서 죽는 줄 알았네. 안됐기도 했지만 생산성이 전혀 없으니, 나 원 참, 글로벌 시대에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술 마시는 거 외에는 말이야.”
정춘팔은 속이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그는 굳은 얼굴로 소리 나는 곳을 향하여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었다.
다시 조광록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김양과의 관계는 잘 마무리 됐어? 그런 애는 뒤 끝을 감당 못해. 하루 속히 마무리 하게나, 자네 앞날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어.”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일부러 총각행세를 한 것도 아닌데, 저도 미치겠습니다. 조속히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과장이 요즘 김양에게 추근대는 눈치 던데요.”
\"안 빠지는 데가 없구만, 지 주제를 알아야지.\"
정춘팔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천천히 출구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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