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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은 인생의 별책부록 1

한민 2007. 06. 11. 오후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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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을 자다가 안내 방송에 눈이 번쩍 뜨였다.

  “여기는 남포동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 쪽입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남포동은 여전히 사람들로 넘쳐났다.

  전철에서 내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막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마누라는 오늘 비가 온다며 장볼 때 차를 가져가야 되겠다고 했다.    비가 오는 줄은 알았지만 우산이라는 게 하도 귀찮은 놈이라야 말이지. 머리숱이 많아서 웬만한 비는 맞는 편이라서 그냥 집을 나섰는데 비가 장난이 아니다.


  남포동은 아련한 옛 추억의 골격을 그대로 갖추고 구석구석 한층 세련된 색깔과 디자인, 그리고 간판들이 눈에 띄었다.

  ‘그때 그 자리’를 찾았다.

  20여 년 전 그녀와 처음 단 둘이 만난 자리였다.


  실내는 까만색과 투명유리를 조화시켜 현대적인 감각을 반영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세련된 젊은 감각의 인테리어는 불혹의 나이를 비웃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했다.


  자리에 앉은 나는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허리를 곧게 일으켜서 반듯하게 앉았다. 이제 그녀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얼마나 변했을까.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담배연기가 천정으로 사라지면서 기억 저편의 파편들이 자기네들끼리 짜 맞추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무렵, 적당히 놀면서 공부하다 대충 대학 졸업장만 받을 요량으로 H 대 교육학과는 학생들이 제일 만만하게 지원하는 학과 중에 하나였다.


  입학식 날 잠깐 다 같이 모였을까 교대로 대출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강의실 보다 당구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권동주와 오철헌은 나와 함께  우리 과의 공인 삼총사였다.

  동주와 철헌은 현재 아버지의 공장을 물려받고 사업에 열심이지만 그 당시에는 세 명이 모이면 어떻게 놀까 궁리하기 바빴고 결국 제일 여유 있는 과를 택한 게 거기였다.


  우리는 모든 시간표를 똑같이 짜고 완벽한 대출 시스템을 만들어서 결강하여도 출석률 100%를 자랑했고 전 과목에 걸쳐 리포트 모범 답안을 작성하여 과우들에게 팔기도 했다. 모든 수익의 분배는 N 분의 1 임은 물론 이었다.


  유일하게 무료로 리포트 모범답안을 주기로 삼총사가 동의한 예외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진선미였다.


  진선미는 우리 삼총사의 삶의 목표이자 존재의 이유였다.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고 지혜로웠으며 우리 삼총사처럼 우리 과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 단계 위의 레벨이었다. 하지만 진선미는 우리의 의지를 알루미늄 캔처럼 짓밟았다. 삼총사가 영리한 것은 알지만 핑계에 어떻게 인생의 중요한 대학마저 재미로 대학을 다니려했냐는 것이 그녀의 거절 사유였다.


  그녀는 모든 것이 전략적이었다.

  그녀의 걸음걸이, 말투, 동작 하나하나가 모두 다음을 염두에 둔 치밀한 계획에 의거하였다는 것을 모두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매력을 반감하진 못했다.

  내숭인줄 알면서도 그녀가 웃으면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울면 눈물이 그칠 때 까지 그녀 옆에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녀가 법대 수석짜리에게 꼬리를 치겠다고 공언하고 그 놈 팔짱 끼는데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자존심에 적지않은 상처를 받은 내가 이를 악물고 과수석이 되겠다고 독서실에 처박혀 있는 동안 우리 과의 남자들은 하나 둘 군대를 가기 시작했고 졸지에 대학원 진학을 앞 둔 나는 진선미와 졸업하는 유일한 남학생이었다. 


                                                                                                     to be continued

댓글 2개

은비녀 2007. 06. 12. 오전 12:27

별책부록도 어느정도 진도가 나가고 있는 지금 남포동의 그 쓸쓸했지만 낭만도 있었던 제 추억을 투영하면서 읽었습니다. 이십년전 극장이 바라다보이던 카페가 떠오르네요. 별책부록이 더 알차서 맘에 없는 잡지를 집어 들 때도 간혹 있지요.^^*

한민 2007. 06. 12. 오후 09:04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불혹이라는 나이는 이제 수정될 때도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별책부록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별책부록 때문에 원책을 사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이 불혹이후의 처세여하에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 유사하여 별책불혹이라는 동음이어를 언어유희 삼아 붙여본 것입니다. 그리고 남포동의 그때그자리는 분명 85년까지는 있었는데 지금 있는 지는 사실 모릅니다. 이 글을 쓰고 나니 한번 확인해 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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