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도
황태영
방화동 종점에서 22번 버스 승차, 또는 22-1번 버스, 혹은 41번 버스, 화곡시장에서 하차, 동방빌딩, 뉴가든 당구장, 남부 주유소, 청보당 금 은 보석 시계, 쓰레기 버리지 맙시다, 구두 수선, 부산 횟집 도다리 아나고 산낙지, 두발로 신발 총판, 비와이씨 양말 쌍방울 트라이 일체, 속초 건어물, 해바라기 분식, 실내낚시터.
배동수 씨 일행은 화곡시장 한복판 회색 3층 건물의 이마 부분에 붙어 있는 '실내 낚시터' 라는 아크릴 간판을 올려다 보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쓰윽 닦으며 그는 뒤따라오던 동료에게 말했다. \"살다보니 이렇게 별난 약도를 다들고 집을 찾게 되는군. 어디 가까운 생맥주집에서 잠시 열 좀 식히고 갈까?\" 배동수 씨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약도 좀 줘봐.\" 배동수 씨로부터 약도를 건네받은 우상진 씨가 약도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해바라기 분식, 실내 낚시터, 원조 마포 돼지갈비, 암소 한 마리, 둘리 전자오락실, 칼스 호프, 아, 여기 있군. 칼스 호프에서 한 잔씩 하자구. 어, 정말 저기 있네. 둘리 옆에.\" 생맥주집에 들어서자 젖은 목소리의 라틴풍의 유행가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사랑은 잠시 내게 다가왔다...... 그대를 내 맘 속에 유혹하고 싶어......' 배동수 씨 일행은 시장터가 훤히 내다보이는 커다란, 짙은 색유리창 옆자리에 앉아 생맥주를 한 잔씩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갑작스레 들이닥친 무더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지껄이기도 하고, 그들의 팀장인 한상재 차장에 대해 인간미가 너무 없어, 진드기 같은 작자야, 그러니까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도 못간 거 아니겠어? 근데 말야, 소문에 의하면 그 친구 생물학적 기능에 큰 이상이 있기 때문이라던데...... 생물학이라면 동물학 말인가 식물학 말인가, 등등 쓰잘데 없는 소리들을 떠들어대기도 했다. 그러다가 화제를 약도로 돌린 사람은 김동현 씨였다. 그는 노가리 한 마리를 쥐고 열심히 이빨로, 그의 표현을 굳이 빌리자면, '신체해부'를 해대더니, 탁자 위에 허연 내장을 드러내고 아무렇게나 자빠져 있는 성냥갑을 무심코 보다가 불쑥 말했다. 거기에는 칼스 호프의 전화번호와 약도가 조잡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이 성냥갑 좀 보세요. 도로를 나타내는 단순한 직선들, 건물을 나타내는 두어 개의 검은 네모꼴, 약도란 이런 것 아닙니까?\" 담배 연기를 후욱하고 뿜어내더니, 호주머니에서 약도를 꺼집어내어 탁자를 탁, 소리가 나게 치면서 배동수 씨가 끼어들었다. \"그러게 말야. 이건 약도가 숫제 작문이야. 이걸 수필이라고 해야하나, 소설이라고 해야 되나. 그렇다고 시도 아니고.\" 막 테이블 옆으로 빈 잔을 들고 스쳐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배동수 씨는 빈 잔을 치켜들며, '여기 오백 한 잔 더'하고 주문하더니 중단됐던 말을 다시 잇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거창한 자서전도 아니잖아? 근데 말야, 이 대하소설의 활자체를 보니 PC로 친 것 같은데. 적어도 두어 시간은 소요됐겠는 걸?\" 이쑤시개로 잇발 사이에 낀 노가리 찌꺼기를 후비며 김동현 씨가 강하게 부정하듯이 한 손을 좌우로 몇 차례 흔들어댔다. \"두어 시간이 뭡니까? 이삼일은 '한글97'로 쳤을 겁니다. 물론 디버깅하느라, 화물 매니페스트 관련 프로그램들을 테스트하느라 바쁜 와중에 틈틈이 준비한 것이라......\" 주문했던 오백 한 잔을 종업원이 배동수 씨 앞에 쿵,하며 내려놓는 바람에 갑자기 대화가 중단되었다. 생맥주 잔에서 맥주 거품이 컵의 바깥 면을 타고 조금 흘러내렸다. \"이거 피 같이 소중한 알콜이 흘러내리네.\" 후루룩, 흘러내리는 피를 흡혈귀처럼 급히 마시더니 배동수 씨는 옆자리에 앉아서 사이다를 마시고 있는 과묵한 정현화 씨에게 말을 걸었다. \"과장님은 왜 술을 갑자기 안 하시고 맹물을 드십니까? 수상쩍어요. 술고래가 술을 끊으셨을리는 없고,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병원에 다니신다고 하던데 혹시 비뇨기 계통에 이상이 생긴 거 아닙니까?\" \"허허, 배 대리, 상상력이 지나치군. 묵비권을 행사하겠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이 하나씩은 있는 법 아닌가? 우 대리, 우 대리는 조건경 씨 옆자리라서 조건경 씨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고 있겠군. 왜 이렇게 엉뚱한 약도를 우리에게 줬을까?\" 정현화 씨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우상진 씨가 그가 던진 낚시밥을 무심결에 덥썩 물었다. \"글쎄요. 워낙 그 친구 말수가 적은 작자라서...... 게다가 그 사람 입사한지 겨우 다섯 달도 지나지 않았잖습니까? 술잔도 다 비었는데 이제 그만 일어나죠.\" 그러자, 배동수 씨가 얼른 시계를 보더니 '어, 벌써 시간이 꽤 됐네. 자 빨리 나갑시다. 늦겠어'하며 재촉했다. 그는 탁자 위의 약도를 들고 서둘러 술집을 나섰다. 모두들 허겁지겁 뒤따라 나왔다.
화곡 복지매장, 영에이지 화곡점, 민속마당, 헌트, 뱅뱅, 르까프, 종합화장품 상설할인매장, 사원모집 급구 미싱공 OO명, 달나라 이발청, 가을맞이 대사은잔치 삼성 전품목, 수 다방......
88 한 갑을 사느라 대열에서 상당히 뒤처진 정현화 씨가 '어이, 같이 가자구'하며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정 과장을 기다리는 사이에 우상진 씨는 생맥주집에서 자신에게 물었던 그의 질문을 떠올렸다. 사실 우상진 씨로서는 그리 엉뚱한 약도가 아니었다. 물론 약도는 오늘 처음 보았으나, 비슷한 낙서들을 조건경 씨 책상 위에 어수선하게 어질러져 있는 각종 프로그램 리스팅, 프린트물, 코딩 용지, 플로우 차트 용지 속에서 몇차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가자구\" 정현화 씨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우상진 씨의 등을 떠밀었다. 배동수 씨는 약도에 눈을 옮기더니 중얼거리며 다시 선두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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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피해가 엄청나군. 저것 봐. 마을 전체가 물 속에 잠겼잖아.\" 정현화 씨가 진열장 안의 텔레비젼에서 반영되고 있는 뉴스를 보며 말했다. 그 바람에 우상진 씨와 김동현 씨도 그냥 스쳐 지나가려다가 눈길을 주었다. 수해 뉴스가 막 끝나고 다른 뉴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뉴스입니다. 30일밤 10시 30분경 서울 강남구 청담동 공룡빌라 1동 105호 허국진 씨 집 안방 장롱에서 허 씨의 부인 최수지 씨가 살해된 채 네 토막으로 잘려 비닐에 담겨 있는 것을 맏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맏딸에 따르면 지난 27일 오후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던 아버지 허씨가 29일 낮 전화를 걸어 '안방에서 냄새가 나지 않느냐'고 물어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대답했으며...... \"어이구, 끔찍해라.\"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김동현 씨는 저만큼 혼자 앞서가 있는 배동수 씨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배동수 씨는 일행들이 뒤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듯 사거리에서 약도 상의 '실내 포장마차'가 어느 쪽에 있는지 열심히 혼자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정확한 위치를 찾아냈을 즈음, 뒤에 처져 있던 일행들도 다시 합류했다. 푸른 신호등이 켜지고 그들은 횡단보도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들 옆으로 흑인이 자전거를 타고 휙 지나갔다. 흑인이 입은 티셔츠의 등쪽에 박힌 '입 맞춰주세요'라는 영문 글씨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셨다. 도로가의 쌀상회 안에 가득 쌓여 있는 쌀가마니 위에는 하루라도 굶으면 죽어버린다는 참새 떼들이 새카맣게 붙어 쌀을 쪼아대다가 주인이 황급히 쫓아내자 우르르 전봇대 위로 달아났다. 배동수 씨는 약도를 또 한 장 넘기더니 골목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리산 진성보살, 점, 임철빈, 정귀영, 김경수, 롯데빌라, 개나리 연립, 화진주택, 주차금지, 소변금지 작은 가위 큰 가위, 걸리면 잘라버린다, '위험한 정사' '로보캅2' 동시상영, 불법벽보 부착금지, 컴퓨터 세탁, 김계현, 개조심......
\"문패도 각양각색이군. 평상시에 무심코 지나칠 때는 몰랐는데......\" \"아니, 문패도 적혀 있습니까?\" \"그럼, 이것 보라구. 주택가로 진입하면서 온통 문패들로 거진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잖아.\" \"어이, 이제 거의 다 온 거 아냐? 슈퍼 가서 뭘 좀 사가지고 가야지. 정현화 씨가 그렇게 묻더니 88 한 가치를 꺼집어내어 담뱃불을 붙였다. 배동수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듯 적당하게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보안등이 하나 둘 켜졌다. 집들이 형광등을 켜대기 시작하면서 골목길도 알맞게 밝아졌다. 그들은 조건경 씨 집들이를 위해 약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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