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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늑대 9
그해 연말 혜미 할아버지의 제삿날.
그녀의 작은 아버지가 던진 화두는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는 가난을 이겨내고 서강대학교를 수석 입학한 수재였는데 당시 외무부 고위직이었다.
“옛날에 대학 면접 보던 날 한 외국인 신부와 신촌 네거리에서 서강대학교 까지 함께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알고 보니 총장님이었어. 덕분에 가끔 총장실로 불려가서 차도 마시고 하였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서 워싱턴 주립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추천되어 잔여학사일정 및 석, 박사 과정을 밟게 되었지. 물론 생활비를 제외한 교육비는 모두 국비로 다녀왔지. 친구들이 이데올로기와 민주 쟁취를 위한 투쟁을 할 때 좋은 환경에서 공부만 한 게 미안하긴 하지만 더 큰 세계에서의 경험은 ‘노블리스오블리쥬’를 실천하게 하여 지금도 적정한 선에서 꾸준히 기부와 봉사를 하고 있어.”
그날 그녀는 말로만 듣던 아버지의 막내자랑을 당사자에게서 직접 듣는 순간 그녀의 작은 아버지는 그녀의 롤 모델(roll model)로 굳게 자리 잡아 버렸다.
혜미는 창균을 다시 만났을 때 많이 반가웠고 그의 눈빛에서 뭔지 모를 강렬한 메시지를 느꼈지만 왠지 창균의 방향이 그녀와 다를 것만 같았고 애틋한 추억을 되새김질하기엔 그녀의 꿈과 포부가 너무나도 커져버렸다.
그녀는 집중력을 키울 필요성이 절실해서 그녀의 아버지에게서 허락을 받고 서울로 향했다. 그녀는 해가 바뀌자, 서울의 작은 집에서 입학 전까지 서대문에 위치한 대성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그녀는 재수생과 똑같이 새벽별 보고 학원에 나가서 어두워져서야 귀가하는 생활을 계속하면서 처음에는 낙제점을 받아 제명 경고를 받기도 했지만 두 달 여가 지나서 치른 모의고사에서는 재수생들의 평균 점수에 근접할 정도로 예비고1로서는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는 중이었다.
옆집에 사는 미옥으로부터 그녀의 작은 집으로 전화가 온 것은 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미옥이 그녀에게 전해 준 내용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며칠 전 창균이 롤러스케이트 장에서 선배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던 중 에 창균의 반발하는 발길질에 한 선배가 뒤로 넘어지면서 뇌진탕으로 중태에 빠졌는데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혜미는 무덤덤했다.
오히려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까지 했다.
그녀는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입학식을 앞둔 주말을 기하여 귀향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예상치 않게 창균이 보낸 세장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겉봉에 예쁜 글씨로 ‘독서실에서 친구가’ 라고 씌어있어서 그녀의 부모들은 당연히 여자친구라고 생각하고 사전검열에서 제외 한 듯 했다.
그녀의 책상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편지 세장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는 창균에 대한 무심함에 스스로를 질책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그녀가 아무리 강한 의지로 자신을 채찍질하여도 이제 겨우 16세 여린 소녀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혜미에게.
잘 있지.
많이 춥네.
감기 조심하고.
지난 번 너를 봤을 때 하고픈 말을 다 못해서 아쉽더라.
일,이 학년 때도 가끔 먼발치에서 널 보긴 했지만 다가서기 쉽지 않았어.
고등학교 올라가면 공부 열심히 하자.
나도 열심히 할게.
하숙집은 학교 앞에 얻었고 수성독서실에서 공부할 예정이야.
답장은 수성독서실로 하면 돼.
안녕.
1982. 1. 6.
진눈깨비 내리는 날 수성독서실에서 창균
혜미에게
지난 번 편지는 잘 받았는지 궁금하네.
공부하느라 바쁘지.
수학이 너무 어려워. 영어는 그런대로 할 만한데.
정석 한 페이지 나가는데 한 나절이 걸리는 것 같아서 답답해.
나만 그런가?
이제 인수분해 하고 있어. 너는?
성문 기본은 그런대로 재미가 있네.
단어 외우는 게 짜증나지만 억지로 외우고 있어.
수성독서실에는 원장이 악마로 소문나서 공부하기 싫은 놈은 얼씬도 하지 않아. 그게 맘에 들어 선택했지만.
방학 끝나기 전에 한번 들러라.
지난번에는 내가 샀으니까 이번에는 네가 한번 사라. - 농담 -
열심히 해라.
안녕.
1982. 1. 15.
창균.
혜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구나.
어제는 창옥이 다녀갔어.
그전보다 훌쩍 커버린 놈의 모습에서 힘들게 살지만 반듯한 모습을 보니 반갑더라.
용기를 내서 너희 집에 전화를 했어.
간판 전화번호를 보고.
고모라고 하면서 받던데.
친구라고 하니까 “우리 혜미는 남자친구 없어” 하시며 끊더라.
더 이상 전화 할 엄두가.............
창옥이는 이번에도 네 얘기만 하다가 올라갔다.
하숙집에서 하룻밤 잠도 같이 자고.
롤러스케이트장에서 형들이 자꾸 불러.
다음 주에 한번 들릴 예정이야.
무슨 일이야 있겠냐.
걱정하지 마.
다녀와서 있었던 일 얘기 해 줄게.
그리고 육학년 때는 말야,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우리 반 여학생들 모두에게 카드를 다 써서 붙였고 답장을 다 받았는데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 건 네 거 밖에 없어.
그리고 이제부터는 너에게만 카드를 보내고 싶어.
건강하고!
방학 끝나기 전에 얼굴 한번 보여줘라.
1982. 2. 15.
창균
to be continued..........................
댓글 2개
성문 영어, 대성학원... 참 낯익은 이름이네요. 학원 위치도 잘 알고 계시고... 그래서 친근감이 가네요.
재수를 하진 않았지만^^ 7,8 정도로 끝내려 했는데 주저리 주저리 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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