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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로운, 신화의 얼굴찾기 』

유민자 2008. 05. 25. 오전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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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이 글은 한 권의 책을 한 자리에 머물며  단숨에 읽어내려 갔던, 감성의 글줄기입니다.
전문 (全文) 에 걸친 탁월한 문체로 그 어떤 신비로운 휴머니즘으로 이끌었던 느낌을 생각해요. 
프라하 거리마다 글향기가 있는 오솔길이 깔려있는 ,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졸필의 제가 '소설, 산문 그리고 시의 거리를 닮아 낸 감성'과 상징적인 수사가 오롯이 살아 숨쉬는
언어의 그림자를 찾아 '신비로운 문학과 신화의 얼굴찾기'를 시작해요.

우리는 드라마로 유명한, \"프라하의 연인\" ,
감동적인 풍광으로 또한 감성의 사랑으로 프라하를 기억하지만,

\"프라하\" 도시이름만 같을 뿐 내용은 무관해요.
다만,  책과 드라마가 흡사한 것은 '흐느끼는 듯한 인간 감성의 덩어리'의 승화작업이 있습니다.
사색의 향기님...
우리가 되어 '문학과 신화에 대한 공부'를 함께 하시며
졸필의 글을 읽어 주실래요......?!

글/ 유민자드림


펌/ tvreport.co.kr
 

《 신비로운, 문학과 신화의 얼굴찾기 》


                                                                  


                                                                    -  『  프라하 울고 다니는 여자를 중심으로 』 -



    
                                                                                                            유 민 자

펌/GoodNews paper 영상/ 작가 실비제르맹의 모습과 책 표지 -  

신(神)들과의 친교 
  신화는 인간이 알고 싶어 하는 정신세계의 뿌리를 만나게 한다. 신화는 인간 상상력의 총화로서 과거속의 이야기이지만, 현재 속에 되살아나 숨을 크게 내쉰다. 『프라하거리에서 우는 여자』의 작품 속에서 신화의 그림자들이 우리들의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듯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 한다.   직역된 『프라하 거리에서 우는 여자』는 실비 제르맹(Sylvie Germain)1)지음, 김화영2)옮김. (주)문학동네 2006년 4월에 출간했다. 「분노의 나날들」로 1989년 페미나상을 수상했던 프랑스 작가의 소설이다. 작품의 원제『La Pleurante des rues de Prague』에서 ‘La Pleurante’라는 말은 그냥 우는 여자가 아니라, 흔히 무덤 앞에 조각하여 세우는 상복 차림의 눈물 흘리는 여인상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에는 이별, 버림받음 그리고 단순 소박함 인간들의 비참과 신의 침묵을 말하는 수많은 페이지들이 가슴을 뒤흔든다고 역자는 말하고 있다. 저자는 몽환적인 신비주의자 이다. 작품속의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는 묘사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책 속으로 들어간 그 여자'의 행적을 뒤쫓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낸다.
『프라하거리에서 우는 여자』에서 주인공은 거인 여자로서 복수의 존재이다. 그녀의 상(像, image)은 숨결, 눈물, 속삭임으로 합류하며 읽는 독자의 마음 깊이 스며들어 커다란 혼돈을 일으킨다. 그녀의 이미지의 특징은 상징적이다. 거인여자인 그녀는 우리의 육신의 구성요소인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이세상의 모든 눈물과 기억덩어리로 책속에서 존재한다. 그녀는 고뇌하는 인간의 참 모습으로 어떤 추억과 명상을 하며 거리에 나타나서 떠돈다. 
  엘리아데가 추구한  \"Hierophany(성현 : 聖顯)\"은 정서적인 면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을 가미해야 경험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聖\"과 \"俗\"이라는 것을 통해 그의 의견을 주장한다. \"성스러움\"은 俗이 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지 \"聖\"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성스러움은 속의 세계에서 성스러움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그는 속에서부터 성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속가운에서 성스러운 것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 그는 아주 독특한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Hierophany(성현 : 聖顯)\"이다. 이것은 \"역의 합일\"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신화란 인간이 성현(聖顯)의 현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캇시러3)는 신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이성 혹은 합리성 중심의 세계관에 대해서 우회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성(reason)과 합리성이라는 말이 오늘날 어떤 식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신화 속에도 논리성, 합리성, 객관성이 들어있다는 캇시러의 관점(rationality)이다.  신화는 지적인 과정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깊은 정서에서 싹튼다고 캇시러는 주장한다. 그러나 신화는 그저 정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서의 표현이다. 감정의 표현은 감정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상(像, image)으로 전환된 정서이다. 바로 이 사실이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인간의 새로운 표현 양식인 상징적 표현을 발견한다. 이 표현 양식은 인간의 모든 문화적 활동, 즉 신화와 시, 예술, 종교, 과학의 공통분모이다. 이 활동들은 서로 크게 다르지만 하나의 동일한 임무, 즉 ‘객관화’의 임무를 수행한다고 캇시러는 말한다. 
  자연과 사람들, 초자연적인 힘들이 신들과 친교를 약속한다. 종교는 인간적인 사고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 볼 것을 가르친다. 개인의 심리적인 의 다른 구성요소의 조화적인 관계를 이룰 수 있는 「엘리아데가 추구한 Hierophany(성현 : 聖顯)」  과「캇시러의 문화철학 신화관」을 중심으로 「작가의 문화철학관속의 신화 찾기」, 「작품속의 문화철학관속의 신화 찾기」 로 나누어 이글을 시작한다.   

 작가의 문화철학관 속의 신화 찾기 
  실비제르맹은 프랑스 중부 샤토루에서 태어났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전근을 다니는 관리의 딸이었다. 그녀의 생애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어린 시절 사년간을 살았던 로제르 지방에서 본 늑대인간의 거대한 석상에서 어떤 근원적인 공포를 느꼈다는 점이다.  그 신화적인 동물은 그녀의 상상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그 늑대인간은 그녀가 저명한 철학자 엠마뉘엘 레베나스의 지도자하에 받은 철학박사 학위보다 그녀의 문학적 감수성 형성에 더 중요한 것이었다.4) 그녀는 철학공부를 통하여 진정한 문제는 악(惡)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렇게 그녀의 문학세계는 시작되었고, 프라하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작가인 그녀는 파리에 살았고 체코의 프라하에서 여러 해를 지냈다.

  실비제르맹의 작품이 주는 감동은 장소의 분위기와 실체를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면모들에 있는 것이다. 저자(著者)를 단편이 아닌 소설로 데뷔시키며 정신적인 후견인 그르나에는 말했다. “ 빛나는 태양, 요란하게 울어대는 매매 소리, 로즈마리 향기는 아닙니다. 그녀의 세계는 그녀가 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세계, 국경지대, 변방 역사의 밀물과 썰물이 휩쓸리는 불확정의 영토, 전쟁이 터지면 최전방이 되는 경계선 같은 곳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리 늪, 무르방의 숲이지요. 그녀가 프라하를 환기시킬 띠 보면 그곳은 그녀가 쉬지 않고 피워대는 담배연기를 통해서 보이는 꿈의 도시 같다.”5) 
 오늘날 저자가 몸담아 살고 있는 세계는 프랑스의 서남부 라로셀의 북부 늪으로 뒤덮인 지역에 살고 있다. 물과 땅과 하늘이 맞닿아 그 경계가 지워진 그 곳은 이 세상이 처음 태어나는, 혹은 이 세상이 끝나는 원소들의 대혼동의 풍경을 이룬다. 
   그 여자를 추월해 그녀의 얼굴을 좀 쳐다보겠다고 발걸음을 빨리한 내가 그녀를 거의 스치고 지 
    나치려는 순간 갑자기 어떤 직관 같은 것이 솟아오르면서 그런 호기심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여자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얼굴이 있는 게 아니라는 , 심지어 그녀는 유일부일한 인격체나 개
    인 이 아니라는, 심지어 그녀는 복수의 존재라는 직관이 그것이었다. 그녀의 몸은 다른 몸들로
    부터 나 오는 무수한 숨결, 눈물 속삭임들이 합류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녀의
    내면에서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이었을까?              
                                                                                 
 - 프라하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35쪽 부분- 

  작가의 환경이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의 거대한 여자인 그녀를 만든 것이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책에서 그것은 전체, 도시 그 변두리 그 너머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땅덩어리 전체, 산자와 죽은 자인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외의 생명들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신화적인 세계에서는 동물들, 식물들, 인간들이 구별 되지 않고 자연이 하나의 큰 사회 즉 생명사회를 이루게 된다.


  캇실러는 신화에서 현대인의 사고와 매개인의 사고는 대립적이지 않으며, 또한 매개인의 사고는 문명인의 사고의 일부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형태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문명을 이룩해 온 내재적 사고라는 것이다. 불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왔던 신화 , 그 신화가 가지고 있는 합리성이 캇실러의 이론에서 볼 수 있다. 
 작품 속에 나타난 문화철학관 속의 신화 찾기 

  신화는 어떤 시각을 열어준다고 말한다. 원시인들의 삶을 통해서 오늘날의 삶을 보고자 한다. 사람에 대해 무엇을 탐구하고 이해하게 하는 시각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즉 신화에는 사람과 성스런 무엇과의 관계를 발견하고 밝히는 능력이 들어있다. 그는 이것을 신화의 상징기능이라고 부른다. 신화는 자연과 인간 생활의 모든 현상에 대하여 의미를 둔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인 작품속의 이미지 상들과 신화 발생의 유형인 자연현상설과의 관계이다.  공기, 물, 불과 같은 원소는 원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고 주요한 신들은 모두 이러한 자연의 요소를 의인화(擬人化) 한 것이라는 자연현상설과 작품속의 유사하다는 점이다.  인간이 무의식 원형 원시인의 삶에서 의식으로 가기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엘리아데는 말 한다.  “인간이 자기의 삶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신비적 경험을 염두 해 두면 사람들이 자기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인정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비합리적이라고 그것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마저도 인간의 삶의 영역에 놓고 인간을 이해하려고 할 때 인간에 대한 참된 이해가 가능하다” 고 엘리아데는 표현한다. 그리고 인간을 종교적 인간(Homo-Religious)으로 규정 한다 

  이 소설은 전통소설이 요구하는 등장인물과 갈등과 사건의 연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결같은 이론은 무엇인가?’ 생각한다. 이 책에는 체코의 프라하 거리를 울면서 지나가는 한 여자만이 나올 뿐이다. 비물질의 여자는 환경이 아닌 불행의 덫에 걸린 남자들,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스며 나오는 눈물과 고통의 신비스런 압축, 바로 거기서 유래되는 비전이었다. 본인은 그녀의 뒤를 쫓으며 우리는 어두운 역사의 자취가 찍힌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프라하의 거리거리들, 그 모퉁이들을 만난다. 안개 속의 프라하라는 이국의 도시는 독자들의 내면의 풍경이 되고, 개인적 집단적 역사와 기억의 어둠 역시 깊게 파인다. 책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하며 우리의 귀에 대고 속삭이곤 한다.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가 들어왔다, 문득. 그러나 그녀가 책의 주위를 배회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된다. 그녀는 책을 살짝 건드리곤 했다. 하지만 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었다. 그녀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들을 들춰보았고, 심지어 어떤 날은 낱말들을 기다리고
  
있는 백지상태의    페이지들을 소리 나지 않게 스르륵 넘겨보기까지 했다. 그녀의 발자국마다
  
잉크 맛이 솟아났다.                                                
                                                                              -
『프라하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첫 장 부분-


   그 물질의 여자는 그러나 결코 어떤 환영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불행의 덫에 걸린 남자들, 여
   자들 그리고 아이들에게서 스며 나오는 눈물과 고통의 신비스런 압축 바로 거기서 유래되는 어
   떤 비전이었다./ 비온 뒤, 폭포수 주위에 날리는 물보라속의 무지개, 빗방울들 속에 광선이 굴
   절되어 생겨나는 비물질적이며 일시적인 아름다움 말이다. / 눈과 서리의 결정체 꽃을 피운다. 
   손으로 만지기만 하면 곧 지워져버리는 지상에 추락한 그 연약한 별들 말이다.


                                                                              -『프라하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P. 37쪽 부분-   
  
   그 여자는 시간의 살갗이다. 지나가고 미끄러지고 사라지는 시간, 그늘 속에서 대낮의 광명 속
 
   에서 끊임없이 지워지며 캄캄한 어둠 속으로 깊이 빠졌다가 대낮의 빛 속에 불쑥 솟아오르는
  
시간. 그 여자는 살갗을 훑고 지나가며 그 살갗을 부르르 떨게 하는 신비스런 전율이다. 피로, 
   흥분, 다정함 혹은 고통의 전율일 뿐 결코 분노의 전율은 아니다
                                                                             -『프라하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P. 64쪽 부분- 


  그녀는 쓰여지지 않은 책 속에서 새처럼 날아오르고, 강과 물과 강둑의 기억, 프라하에 내리는 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이 세상의 물 위에 어리는 별 그림자가 찰랑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모든 말과 사물에 깃들인 언어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 여자는 시간의 살갗을 신비스럽게 오고간다. ‘그 여자는 눈물의 남모를 밀사가 되어 그 여자는 바람만 밟고 있다’고 했다. ‘이미지 언어는 납처럼 굳어져 의미가 닳아지고 생각은 길을 잃고 두 눈의 부재의 안개에 덮이고 가슴은 공허에 사로잡힌다 ’고도 했다.


   인간을 무엇을 찾아 헤매는가? 어느 가을날 저녁 프라하의 구시가 골목으로 한 여자가 걸어가며 심하게 다리를 저는 한 여자의 그림자만이 보일 뿐이다. 그녀의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보다 훨씬 짧다. 여자가 다리를 절뚝거리는 것은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현재와 과거, 생명과 침묵의 세계를 번갈아 딛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 사이를 오간다. 사라진 자들과 살아 있는 자들의 것이 한데 섞인 눈물의 남모르는 밀사가 되어. 그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 침묵 위에 한 발을 디딘 다음 다른 한 발은 언어의 세계로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그래서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우리의 마음도 심하게 다리를 절고 있는 듯 느껴온다. 

  한 여자가, 거대한 여자가 프라하의 안개 속에서, “낮의 빛을 부식시켜버린 것 같은” 안개 속에서 저만큼 걸어가고 있다. 헌 누더기를 펄럭이는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는 여자는 가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어 저만큼 걸어가고 있지만 마치 투명인간과도 같다. 그녀에게는 어떤 물질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도 하며, 푸드득 날개치며 날아오른 백조가 그녀의 몸을 공기처럼 관통하여 지나가기도 한다. 그녀는 떠돌아다니는 개들처럼, 방랑자들처럼, 바람에 불려 다니는 나뭇잎처럼 지나간다. 그녀가 지나가면 바람이 인다. 그녀의 발자국 속에는 숨소리가 나고 잉크 바람이 일어난다. 그녀는 난데없이 나타났다가 또 자취 없이 사라진다. 그녀는 존재하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거인여자는 살과 피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눈물과 집단적 기억의 압축으로 만들어졌다.”고 옮긴이는 풀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나타날 때마다 작품 속 화자의, 그리고 독자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어떤 추억, 명상, 작품의 분위기, 혹은 고통의 편린들이 솟아오른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가는 우리 독자의 마음도 심하게 절고 있다.


     신의 연민이 인간들의 눈물 속에서 굴절하여 태어난 비물질적인 거인여자는 책을 떠났고 책은 
     그 연민을 완전하게 말하지 못 하게 된다. /그것은 책이 아니라 부름들과 메아리의 되풀이다. 
     글쓰기의 절룩거림, 더듬거림, 잉크의 눈물흘림이다. 기다림이다. // 모든 것이 아직 말해야 하 
     고 아직 해야 할 일로 남았다. 무슨 책이든 책을 완성하는 것은 이미 다른 사람들. 산 사람들과 
     즉은 사람들이니까. // 모든 것이 아직 그녀의 두 눈의 눈물을 통해서 읽어야 할 일로 남았다. 
     그 연민의 프리즘을 통해서.                     
                                                                        -『프라하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P.147쪽 부분-


    우리의 죽음이 찾아오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온 생애를 통해서 도망치고
    거부했던 천사의 최종적인 권유를 받아들일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박탈 사랑 그리 
    고 겸허함을 받아들이고 “나 여기 있습니다!” 라고 말 할 때일 것이다. /  “나 여기 있습니다” 
    저 너머 초월의 말이 아니다. 문턱의 말, 출두(出頭)의 말. / 다리를 절고 몸이 울고 있는 거인
    여자가 사라지면서까지 한 말은 바로 그 말이었다. 
    그 여자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하여 파편들로 조각난 책이 여기서 중단된다. 그 여자는 지나간다. 
    그녀는 벌써 다른 곳이 가있다. 어디에? /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기다림, 사라의 상상, 자 
    기 버림을 초월한 욕망에 찬 생각 같은 신비스러운 지리 함에서 다른 곳과 이곳은 동일한 장소를
    이룬다./ 그 여자는 책에서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녀를 위한 페이지는 없다. 잉크는 지워져 투명 
    해진다. 이 세상의 모든 길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여기 있다./그 여자가 여기 있다.


                                                                -『프라하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P.148쪽  결미 부분-   


 우리가 온 생애를 통해서 도망치고 거부했던 죽음을 천사의 최종적인 권유를 받아들일 절호의 기회라고 말을 한다.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나 여기 있습니다” 말할 때라고 한다. 다리를 절고 몸이 울고 있는 거인여자는 사라지면서까지 한 말이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거인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시의 세계에 던져놓고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가시적인 것들에 대한 반복은 아름다움을 하늘과 빛과 바람의 공간을 동시에 빼앗긴 채 죽어간 자들의 비명이자 목소리로 생각된다. 도시의 속에서 버림받음, 고통, 악, 역사, 연민 같은 말들이 그냥 추상적인 단어가 아닌 안개 낀 거리에서 절뚝거리며 울고 가는 거인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텍스트는 고독, 부재가 환하게 밝혀지는 장소, 공허가 날카롭게 우는 소리를 내고 침묵이 노래하는 장소”임을 마침내 깨닫게 되는 것이다.  기다림, 사랑의 상상, 자기 버림은 초월한 욕망에 찬 생각 같은 신비스런 지리함에서 다른 곳과 이곳은 동일한 장소로 이룬어낸다. 이 책에서 사라진 것들에 대해 자신을 겹쳐놓는 발상은 문학적 천재의 출발점인 듯 느껴진다.


 『원형과 집단 무의식』의 저자인 융(Carl Jung)은 다수의 원형적인 유물 즉 물, 색채, 재생을 연구했다.  인간의 타고난 구성요소인 6)그림자(Shadow), 아니마(Anima), 페르조나(Persona)는 인류의 신화와 문학작품을 통해서 이들 원형의 상징적인 투사에 조우한다.「심리학적 고찰」에서 융은 그림자는 아직도 인간이 뒤편에 달고 있는 파충류의 꼬리라고 했다. 《분리 심리학에 관한 두 논문들》에서는 투사됐을 때 그림자의 일반적인 변형은 ,인식되지 않은 어두운 반쪽의 위험한 국면이라 할 수 있는 악마라는 것이다. 

 
캇시러에 의하면, 원시인의 정신은 자신이 만들어낸 창작물들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캇시러는 이 ‘의미’를 밝히는 일, 즉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가면들 뒤에 있는 참된 면모를 찾아내는 것은 바로 현대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우리들의 과학적 분석의 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과학적 분석의 작업은 객관적 방법과 주관적 방법으로 진행되어 왔다. 객관적 방법에서는 신화적 사고의 대상들을 분류했고, 주관적 방법에서는 신화적 사고의 동기들을 분류하였다. 그리고 많은 대상들과 동기들을 단순화하여 궁극적인 하나의 대상, 혹은 하나의 동기를 찾아내면 완전한 신화이론이 된다고 여기게 되었다. 
  현대 민족학과 심리학은 신화적 세계의 객관적 중심을 찾아 말하자면, 태양, 달, 바람, 하늘의 빛깔 등을 신화적 세계의 중심으로 본다. 그 여자의 신비스러운 지리함은 자기만의 세계 색채인 것이다. 주인공인 그녀는 방황의 중심에 걸린 낱말 신을 통해  경이로운 노래로 표현하며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을 본다. 그리고 또 생각의 그림자들이 꼬리를 물고 다니는 프라하의 언어의 거리에 바람을 불러들인다. 본인은 바람을 불러들이는 힘 (power)도 바람을 내몰 수 있는 것들인 세상의 모든 것이 내재된 자아의 감성과 이성의 끝자락임을 자각한다.    


언어의 감동 
  현실을 이야기하는 꽃인 문학의 날개 짓과 신비로운 상상(想像) 속에서 신화의 날개 짓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어려움이었다. 실비 제르맹의 소설 전문(全文) 자체가 신비로운 단어 응축덩어리였다.『 프라하거리를 울고 다니는 여자 』의 압축언어 하나하나가  환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서, 작가의 자양분을 받아먹듯이 커다란 문학적인 형상화 앞을 서성였다. 「내게 미친 신화의 원형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문학적인 형상화」를 다시 모색(摸索)한다.
  언어는 우리의 감관 지각을 객관화한다. 신화는 경험적인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신화에도 객관적인 측면과 일정한 객관적인 기능이 있다고 캇시러는 주장한다. 언어의 상징성은 감관 지각을 객관화하고, 신화는 그 상징적 기능을 통하여 ‘감정’을 객관화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말들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언어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고, 낱말 속에 담긴 거대한 공간을 새들이 날고, 바람에 쫓긴 건초바람처럼 색깔들이 굴러다닌다”고 했다. 작가의 말처럼 지금 이 시간에도 울고 다니는 한 여자가 낱말나무아래 자신의 바람을 몰고 와, 낱말들이 앉아 숨을 쉬고 진동을 하여, 잉크 밑바닥을 윙윙 소리 내어 훝고 있는 듯 느껴진다. 책속에서 윙윙거리고 울고 있는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여자의 의식세계에서 신비로운 영혼의 이미지, 인간의 생명의식 열정의 근원을 느끼며 형상화된 일상어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보았다.


   본인은 전문(全文)에서 강렬하게 전해오는 어떤 특별한 분위기에 둘러싸인 즐거움 슬픔 흥분 환희 우수의 분위기에서 오감(五感)으로 말하고 있는 '작가의 생생한 의식세계'를 읽었다. 신화는 종교와 철학의 본체이며 제일 초기 형태의 문학 즉 '구전 문학의 본체'가 될 것이다.. 합리성, 이성, 명확성, 객관성 그리고 정밀성이 기초된 학문과 비교해서 신화는 희미하고 마적 혹은 신적이고 경외(敬畏)이다. 그리고 미신이 지배하던 시대의 잔해로도 간주된다.  비과학적인 신화를 이성에 맞추어서 보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강력한 정신적인 힘, 신화이다. 초기의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구전신화가 문학과 미술에 표현되어, 유럽대중예술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융의 원형가운데 가장 복잡한 것으로, 우리의 자아와 외부세계를 맺어주는 7)아니마(Anima)의 다른 면을8) 페르조나(Persona)라고 했고,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부조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고 했다.


  인간이 심리적인 성숙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의 이성으로 해명 할 수 없는 부조리한 것의 문제점을 알아보았다. 우리의 경험적인 과학적 사고에서는 감각경험의 한결같은 모습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과학적 사고의 특징인 분석적 과정에 의하여 우리는 실체적인 것과 우연한 것, 필연적인 것과 우발적인 것, 불변하는 것과 변천하는 것을 구별한다. 이 구별에 의하여 우리는 고정되고 한정된 성질을 갖춘 물리적 대상의 세계에 대한 개념을 가지게 된다. 이에 반해, 신화적 세계는 우리의 이론적 세계보다 훨씬 더 유동적이고 변동성 있는 단계에 있다고 캇실러는 파악한다.9)


   캇시러는 과학적 사고와 신화적 사고의 차이를 밝혀내기 위해서 신화가 주로 지각하는 것은 객관적 성격들이 아니라, 상모적(physiognomic)인 성격들이라고 구분 짓는다. 
  신화적 세계의 특징인 ‘상모적 성격’10)의 중요성을 파악했다. 소설을 읽으며, 이미지 전체가 특별한 분위기에 휩싸여 ‘사고의 방랑’을 일으키게 한다. 강렬한 한 편의 서서 시처럼 다가서며, 비 물질을 형상화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 속으로 들어간 그 여자의 행적을 뒤쫓는다. 이미지 언어는 납처럼 굳어져 의미가 닳아지고 생각은 길을 잃는다. 그녀는 쓰이지 않은 책 속에서 새처럼 날아오른다. 

  강과 물과 강둑의 기억, 프라하에 내리는 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이 세상의 물 위에 어리는 별 그림자가 찰랑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세상의 모든 것들, 모든 말과 사물에 깃들인 언어의 숨소리를 듣는다.  이 책은 그녀의 뒤를 쫓으며 우리는 어두운 역사의 자취가 찍힌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프라하의 거리거리들, 그 모퉁이들을 만나게 된다. 
  소설은 산문시에 가깝고 안개가 쓴 테스트로 읽히고 있다. 안개 속의 프라하라는 이국의 도시는 독자들의 내면의 풍경이 되고, 개인적 집단적 역사와 기억의 어둠 역시 깊게 파인다. 프라하의 거리마다 뿌려진 여자의 눈물자국이 소설을 탄생시킨 잉크였다. 작가는 역사는 “진흙 속에 뒹구는 개털같이 구역질나는 영혼들의 악취가 진동 한다”고 잘라 말했다. 
  본인은 이 책을 놓으며 생각한다. 그녀의 뒤를 쫓으며 우리는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프라하의 어두운 역사를 만났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의인화(擬人化)되어 살아 숨 쉬는 자연(自然)을 느꼈다.  공기와 물 그리고  불과 같은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의 신(神)들이 책속에서 의인화(擬人化) 되어, 현실세계에서 드러나는 성현( 聖顯) 현상을 경험하는 듯 했다. 
  낯선 단어 속에서 울고 웃는 인간 존재덩어리인 단어들 사이에서, 죽음의 신 ,Tanatos인 저승사자가 보이는 듯했고 ,들의 신 Pan의 피리 연주가 들리는 듯 했고, 꿈의 신 오네이로이중에 하나인 Morpheus가 나타나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변화시키는 사람\"으로 상징되기도 하였다.


  본인은 책속에서 윙윙거리고 울고 있는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여자의 의식세계에서 신비로운 영혼의 이미지, 인간의 생명의식 열정의 근원을 느끼며 형상화된 일상어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보았다. 『프라하 거리에서 우는 여자』소설속의 언어는 우리의 멋진 삶을 직접 꾸밀 수 있는, 언어의 감동이 느껴지는 신선한 매개체이다.  제르맹의 펜에 묻은 잉크는 인위적인 화학재료로  만든 비 물질(非 物質)이 아니라, 자연 속에 살고 있는 공기속의 침묵과 땅의 습기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새롭게 사고(思考)한다. 


☎ 참고문헌-실비제르맹.『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문학동네(166 Page ) / 인터넷 영풍문고 / hhpark@chosun.com. 박해현의 글 / 레포트월드. 캇실러의 문화철학 신화관 참조
* <용어해설> *
1.아니마는 저절로 살아있는 내면존재이며, 이것이 없으면 개인의 가장 두드려진 감정인 나태 속에  인간을 찌들어 버리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남성의 마음속에 있는 여성성은 「아니마」이고 여성의 마음속의 원형은 「아니무스」라고 부른다.
2. 페르조나(Persona)는 우리가 바깥 세상에 내보이는 배후의 가면을 의미, 이것은 사회적 인격, 진실한 자기 자신과는 다른 인격을 의미한다.
3. 상모적인 성격- 신화에서 보이거나 느껴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떤 특별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     는데, 이 분위기는 즐거움 혹은 슬픔, 괴로움, 흥분, 환희 혹은 우수의 분위기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사물들”에 관해서 말할 때 그 사물들을 생명 없는 물건으로, 혹은 냉담한 물건으로 말할 수  가 없다


댓글 6개

포아풀 2008. 05. 25. 오후 06:58

다는 알 수 없지만, 다 느낄 수는 없지만 유민자 선생님의 글 천천히 읽고 깊이 느껴보겠습니다. 전에는 본문이 날아가버렸는데 다시 읽게 되니 새롭네요.

김문숙 2008. 05. 25. 오후 11:57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수고 하셨읍니다. 이만한 글을 쓰기까지 --- 그 긴 여정동안 수고 엄청 하셨군요. 다시 읽으러 돌아오겟읍니다. 열두신데 아직 내일 발표할 네 개의 발표문이 작성 되지 못해--아니 시작도-- 잘 쉬었다 갑니다.

유민자 2008. 05. 26. 오전 06:20

아..그리운 포아폴님, 저또한 그 어떤 무언가를 \"다 알 수 없어요. 다 느낄 수도 없어요. \" ...졸필을 쓰고 있는 제가 늘 반가이 맞이하는 포아폴님과 김문숙님의 마음결이 은혜로운 아침인결요. 한 발을 내밀며 '문학과 신화에 대한 소통하는 우리 사이'가 되고파 올렸습니다. 김문숙님 포아폴님, 종종걸음치는 우리 모두에게 힘의 저장고인 맑간 가슴에 머릿속을 향해 화이팅을 외칩니다. ^&^

이임영 2008. 05. 26. 오전 09:42

글을 쓴다는 것은 말들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언어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고, 낱말 속에 담긴 거대한 공간을 새들이 날고, 바람에 쫓긴 건초바람처럼 색깔들이 굴러다닌다..이 대목이 참 아름답습니다...글의 묘미란 말로 미쳐 표현해내지 못한 내면의 세계에 침착해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인 것 같습니다...글의 내용이 깊이가 있고 좋은 것 같은데 다시와서 읽어보겠습니다 유민자님 감사합니다^^

유민자 2008. 05. 26. 오후 11:49

송구해요. 제가 너무 지리한 긴 글을 썼나요...^&^ 글은 자기상실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듯한걸요. 이임영선생님, 아름다운 글동행,제가 감사드려요. 문학은 삶의 자세에 있어서 주관적인 나에서 객관성을 지닌 단정한 나로 돌아올 수 있는 그 어떤 힘을 줍니다. 졸필의 제가 이렇게 \"글의 내용이 깊이가 있고...\" .... '선생님께서 주신 덕담'에 슬며시 웃어요. 웃을 수 있는 함께하는 문학인... 혹, 문화의 소통인가요...?!

이임영 2008. 05. 27. 오전 02:02

유민자님 안녕하세요^^ 아직 여기 오래 머물지 못해서 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어떤 일이든 설전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좋은 것 같습니다...그 과정에서 서로 깨우치고 상승효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어요...오늘의 만남에 감사드리며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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