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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故鄕)

박상덕 2008. 08. 30. 오전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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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월의 기행(奇行)  #1 고향(故鄕)

고향(故鄕)

  나의 유월은 엄숙함이다. 비에 젖은 나뭇잎에 청록(靑綠)의 상쾌함이 묻어나는 유월이 서는 날에는 언제나처럼 엄숙함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에 더해 정묘(淨妙)한 청록의 빛을 흩뿌리는 유월의 햇살 가운데에는 그리움도 가득하게 담겨있다. 아이의 손바닥만한 진초록 잎사귀의 가녀린 잎맥사이에 살며시 숨겨진 사연에도, 짧은 여름밤을 탓하며 서둘러 돌아가는 초저녁별의 조급한 마음속에도, 돌고 도는 세상을 돌도 돌았던 하늬바람의 숨 막히는 이야기 속에도 어린 시절의 그리움은 세세하게 새겨져, 유월이 그리는 그림에는 느꺼움이 크다.
  나에게는 감성이 가득한 유월이 그리움의 달이기도 하여 살바람이라도 불어와 그리움에 애달픈 가슴 한구석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며칠간은 마음이 감사나워진다. 열 번째에 해당하는 유월의 기행(奇行)은 그런 이유로 올해도 계속되었다. 내가 태어나서 꿈을 만들고 키웠던 곳. 생각만 하면 언제나 미소를 짓게 하고, 가슴을 뿌듯하게 하는 아름다운 기억을 모아서 쌓아둔 곳.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득 담은 보물창고와 같은 그곳으로의 회귀(回歸)는 청록(靑綠)의 유월이 서는 날 다시금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사라진 그 때의 정취(情趣)가 그립고, 마음이 여려져서 어쩔 수 없이 행하는 감상적인 행위만이 아니다. 유월에는 지불하지 못한 부채가 많다.
  어릴 적에 살았던 옛 동네의 뒤쪽으로는 손을 뻗치면 닿을만한 가까운 곳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구풍(西歐風)으로 아기자기하게 만든 공원이 들어서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정포산(山)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리기도 하였던 자그마한 봉우리가 두개인 야트막한 야산이다.
  산세는 약했지만 습기가 많은 바닷바람의 영향 때문인지 여러 종류의 많은 수의 나무가 자랐다. 주로 전나무와 아카시나무 그리고 상수리나무 등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키가 높다란 큰 나무는 대장부의 기세인양 활개를 쭉쭉 뻗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었으며, 어린 키로는 그 끝을 볼 수도 없었다.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쉽지 않은 제법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보배와 같은 산이었다.
  오정포산(山)이라는 이름에는 아픈 역사가 숨어있다. 일제 강점기에 보다 높은 안쪽봉우리에 대포(大砲)를 설치해 놓고 정오만 되면 시간을 알린다는 명목으로 앞바다를 향해 소리만 요란한 공포(空砲)를 쏘았으며, 그 후로 사람들이 '오정(午正)에 포를 쏘는 산'이란 뜻으로 자연스럽게 오정포산(山)으로 불렀다. 그렇다고 일제(日帝)가 우리를 위하여 선의(善意)의 배려를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태부족인 군수품을 낭비하듯 포를 쏘아 시간을 알려준 이면에는 교묘한 농간(弄奸)이 숨어있다.
  뇌옥(牢獄)에 갇힌 것과 다름없는 피압박민족(被壓迫民族)이 당하는 겸재(箝制)의 통고(痛苦)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일제(日帝)로서는 공포(空砲)를 통해 강력(强力)을 매일매일 보여줌으로서 대한민족(大韓民族)의 독립의지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려는 고도의 심리전을 쓴 것일 뿐이다. 기미독립선언과 같은 봉기(蜂起)를 사전부터 억누르려는 기만적인 술책이 깔려있었음은 간과하면 안 된다. 이는 날카로운 비수(匕首)를 목젖에 들이 대듯 우리를 옥죄는 악랄한 수단의 하나였을 뿐이다.
  백범(白帆)선생이 일제(日帝)에 억압되어 잔혹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신의 고통과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저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는가.'라고 통탄하며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흑심(黑心)을 읽고, '스스로를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통절한다.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노(亡國奴)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싶어,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넘친다.'고 가슴 아파했다. 무엇을 지우고, 어떤 것을 간직할 것인가는 깨어있는 민족만이 분별할 수 있다.
  산하(山河)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날아갔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꿈속에서 몽유도원(夢遊桃源)을 보았다고 하였던가? '이 세상 어느 곳이 꿈꾼 도원인가? 은자(隱者)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 보아오니 참으로 좋을시고, 여러 천년 이대로 전해지면 오죽 좋을까(世間何處夢桃源 野服山冠尙宛然, 著畵看來定好事 自多千載擬相傳)' 아깝도다. 참으로 아깝도다. 안견(安堅)의 신필(神筆)은 어디로 사라지고 이제는 그 끝자락조차 보이지 않는가? 전쟁의 포연(砲煙)이 걷히자 어린 시절의 이상향(理想鄕)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커먼 잿더미만 남겨졌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자 수많은 포탄이 그 위로 우박처럼 쏟아졌다. 그 곳에서 바라보면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관측의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그 산은 인천항과 가깝게 접해있어 산위에서 바라보면 드나드는 배가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은 멀리 팔미도 등대에서 가냘프게 비추는 한 가닥 불빛도 볼 수가 있다.
  퍼붓듯 쏟아지는 포탄은 허기진 아귀(餓鬼)와 같았다. 작렬하는 열기와 폭풍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앗아갔다. 큰 나무들은 대부분이 화마(火魔)에 시커멓게 타죽거나 굵직한 허리가 부러진 상태로 여기저기 나둥글었다. 산허리 곳곳에는 강력한 폭발이 있었는지 깊게 패어진 흙구덩이가 뻘건 속살을 들어낸 초라한 몰골로 그대로 남겨져 그날의 아픔을 애기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꼬질꼬질 비틀어지고,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진저리치는 지옥불 속에서 버려진 잔 나무들만이 볼품없이 널려 있어 전쟁의 깊은 상흔(傷痕)만을 더해주고 있다.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사람들에 의해 또 한 번 큰 홍역(紅疫)을 치렀다. 산 중턱에는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띠는 진달래나 개나리를 심었다. 바다가 보이는 쪽 산은 봉우리 전체를 아예 깎아내어 넓은 터를 만들고 그 곳에다 맥아더 장군 동상을 세우고 명칭도 자유공원으로 바꿨다.
 격변기에 모진 시련을 겪은 산이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언제나 즐거움의 대상이 되었던 놀이터와 같았던 산이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여느 얘들처럼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실바람에 살랑대는 아카시나뭇잎사이로 힐끗힐끗 열리는 쪽빛하늘을 보면서 곱게 잠들기도 했다. 잠자리보다 높은데서 산다는 천사가 보이지 않는 것은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천사의 꿈을 꾸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온 산이 좁다는 듯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뛰어 놀았다. 그때까지도 전쟁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던 시절이라 남자 애들은 모이기만하면 제일 먼저 병정놀이를 하였다. 양쪽 산위에다 제법 그럴듯한 진지(陣地)를 만들고 양편으로 나뉘어 실감나는 전쟁놀이를 하였다. 놀이에 이겼을 때에는 꽃을 따다가 훈장인양 가슴에 달고는 흔히 하던 주먹나팔을 불면서 의기양양해하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다 시들해지면 탐정놀이로 온 산을 뒤지고 다녔다.
  산딸기를 따먹다 신맛에 얼굴을 찡그리기도 하였고, 이름 모를 야생화를 들여다보며 신기해하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톰 소어의 모험을 따라 한다고 산속 조그만 굴속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숨어있기도 하였다. 밤이 되자 무서워지기 시작하였다. 서있는 나무가 짐승으로 보이기도 하고 귀신으로 착각되기도 하였다. 산새의 울음소리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정신없이 뛰어내려오다 무수히 채이고 넘어져 많이 다친 적도 있었다. 그 산은 모험심도 길러주었고 지혜도 가르쳐준 고마운 선생님 같은 산이었다.
  어릴 적에 뛰어놀던 산은 특별한데가 있다. 산의 포옹력은 바다같이 넓고 끝이 없다. 무한한 포근함으로 평안과 사랑과 믿음과 여유로움과 부드러움과 편안함을 줄 뿐만 아니라 이상(理想)이나 소망(所望)을 이룰 수 있는 전능한 힘을 준다는 굳은 믿음도 함께 심어준다. 그 산은 어린 시절의 나를 품어주었고, 가르쳤으며, 길러준 어머니의 품과 같은 남다른 산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곳은 추억 속에 머물고 있는 옛날의 그런 산이 아니다. 하늘아래 둔 것은 변치 않는 것이 없음을 말하려는 듯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어슴푸레한 초저녁부터 불을 밝힌 하얀 달은 알숨달숨한 달무리로 울타리를 세우고는 저 멀리 동쪽 끝에 들쭉날쭉한 허리만 남았듯이 명맥만 남은 수도곡산(山) 언덕배기에 제 몸 한 귀퉁이를 꿰어놓고는 오늘을 위한 듯 까뒤집은 아픈 현실을 나에게 말하고 있다.
  그 산 일대는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뻥 뚫린 신작로와 개발이란 이름으로 조성된 같은 모양의 주택가로 변모되어 원형을 잃어버렸다. 어느 핸가? 지리산 깊은 산골짜기에서 보았던 노인부부가 정성껏 돌보던 토종꿀 벌통위에 씌어놓은 깔때기 모양과 똑같은 형태의 삼각형 집들과 뒤쪽으로는 전쟁 때 피나온 난민들의 판잣집과 화교(華僑)들의 주거지가 산의 중턱까지 무분별하게 차지하여 해괴한 모양으로 산 전체가 변했다.
  그런 식으로 한쪽은 개발로 무너지고 다른 반쪽은 아예 출입도 할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로만 남았다. 어제까진 영예(榮譽)가 있었지만 그 산은 애들에게 물어보면 '산동네 꼭대기에 살아요!' 더럽게 바뀐 우리세대 비극의 현장이 되었다. 개발이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것은 필연적인 삶의 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의 편의나 이해득실에 의해 필요 이상으로 개발하는 것이 문제이다.
  언제나 초가삼간에서 호롱불 밝히며 지낼 수는 없다. 빨래를 세제도 없이 얼음을 깨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옛날에는 모두가 불행하게 살았고, 지금은 모두가 행복한 사람들만 있는가? 변화는 있어야 하고 언제나 변화하며 산다. 그 옛날에도 그때에는 변화해가는 하나의 지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가 파괴를 택(擇)하면 그 때부터 추악해지고 천박해지는 것이다.

그 옛날 큰집이 있었던
작은 시골동네 동구 밖으로 나가면
곱게 핀 클로버가
푸른 양탄자를 만들며 사방으로 피어 있었다.
하얗게 물든 꽃은
하늘과 맞닿은 드넓은 들판으로 안개꽃이 되어 흩날리기도 하였다.
동네를 가로질러 흐르는 실개천 너머에도
연초록에 하얀색이 점점이 밖인 작은 글로버 동산이 있었다.
새로 뚫린 신작로를 따라서 신나게 달리던 가시나들은
길 따라 피어있는 클로버를 머리장식처럼 꽂으며
다소곳하게 멋 자랑을 하기도 하였다.
클로버는 새로운 길을 따라서도 줄을 세웠다.
그 옛날 큰집이 있었던 작은 시골동네의 앙증맞은 천사들과
예전부터 클로버는 다정한 친구였다.
세월이 흐르자
사람들은 땅을 뒤집기 시작하였다.
외지인들은 온갖 말로 동네 사람들을 꼬드겼다.
땅을 뒤집는 것이 자연을 살리는 길이라고 동네 사람들을 부추겼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시골동네 마지막 황소였던 우렁이의 정겨운 울음대신
험상궂은 불도저의 굉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또 얼마 후에는…
돋운 단지의 잡스런 흙더미 속에
실개천 너머 작은 글로버 동산의 신비로움도 파묻히고 말았다.
개발이란 이름은 그렇게 쓰였고
무성했던 클로버는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 버렸다.
그 시골동네에는
클로버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린 애들의 오랜 친구는 그렇게 모습을 감추었다.
.
.
.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했지만
그것을 찾는 길이 땅을 뒤집는 것이 아님을 몰랐다.
행복을 얻기 위해 땅을 뒤집는 일은 당연한 일로 알았다.
그동안
하나의 행운을 얻으려고 수도 없이 땅을 뒤집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푸른색을 잃어버린 회색빛 콘크리트로 지어진 구조물 속이다.
우리의 도시는
시멘트가 만든 삭막한 사막으로 바뀌어 버렸다.
자연을 살리자는 개발로 우리가 얻은 것은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을
우리의 마음과 함께 모두 잃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풀밭에 누우며 느꼈던 어머니의 품 같은 포근함마저도
가질 수 없다는 상실의 아픔만이 있을 뿐이다.
눈앞의 편리만을 위해 행복의 원천을 허공에 날렸다는
때늦은 후회와 자괴감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푸른색을 잃어버린 우리는 온유함마저 같이 묻었다.
남을 배려하기 보다는 자신만을 앞세우면서도 거리낌이 없었고
남들에 앞서 행운을 독차지하려는 욕심만이 가득했다.
여유로움을 얻으려다 강퍅한 마음으로 변했고
사랑과 믿음 대신 질시와 불신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었다.
물루(物累)에 사로 잡혀
무수한 행복을 짓밟는 어리석음도 모르는 바보처럼 살았다.
이것은 서글픈 현실이지만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고 우리 자신이 만든 세상이다.

  지금의 고향은 냄새와 정(情)붙은 사연의 흔적마저 남김없이 지워졌다. 이제는 눈앞에 보이는 굴러다니는 돌멩이까지도 옛날의 추억이 깃들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내가 태어난 그 집도 과거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만화로(萬花路)란 이름의 백치(白痴) 대로(大路) 한 가운데에 묻혀 훤하게 뻗어있는 도로의 일부가 되었다.
  옛 대한사진관 앞 급커브 길을 사거리로 만들면서 그쪽으로 새 도로를 놓아 원래의 모든 것이 정지 된 과거의 시간 속에 함몰되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고이 간직했던 과거의 사진 속 영상(映像)이 간데온데없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한번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그때에는 인지(認知)하고 있었던 과거의 긍정적인 사실까지도 그렇지 못하고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바뀌었었다.
  태어난 곳이 사라졌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며칠 동안은 비통함과 상실감에 휩싸여 안절부절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술 한 잔을 걸치고 내친김에 예정에도 없이 그곳을 찾아갔었다. 이제는 원주민 소리까지 듣는 토박이 김가를 불러냈다. 비감(悲感)한 마음으로 내뱉는 하소연에, 푸념에, 거기에다 한잔마다 쏟아내는 한(恨)풀이에 김가는 나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자네는 태어난 곳이 도로 한복판이라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겠나? 어느 누가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음을 생각하여 밝은 쪽을 보자고 말했다는데, 그 사람 고향이 태평양 한 가운데인지 묻고 싶다. 자네는 나의 괘씸하고 분(憤)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나? 어머니의 품과 같은 이곳이 이제는 손끝 하나라도 닿을 수 없는 천애(天涯)라니! 이 원통함을 알겠는가?\" 그 날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인사불성의 환각상태까지 되었었다.
  초저녁부터 날 따라오던 달은 돌아올 때에도 날 따라온다. 갈 때야 그나마 나았지만 올 때는 진실과 거짓조차 구분 못하는 어리석음에 젖었음에도 나를 인도해 준다. 하지만 나를 보는 안색은 같지가 않다. 중천에 떠있는 달이야 같은 달인데, 어찌하여 갈 때 보았던 달빛과 올 때 보는 달빛이 이리도 다른가? 그 달인가? 아닌가? 갈 때는 불 밝히듯 훤하게 비춰주던 달빛이 올 때는 어스레한 달빛으로 변하였으니, 까라져 보이는 내 모습이 측은한 모양이다.
  축 처진 어깨를 끌고 돌아오는 나의 앞에는 아파트 정문 앞의 아름드리 큰 나무 한 그루가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긴장의 끈을 풀어도 된다. 그 거인은 어리석게도 나와 같은 바보짓을 하고 있는 동지다. 단숨에 하늘까지 맞닿고 싶은 욕심에 갈매 빛으로 감싼 몸을 있는 힘을 다해 하늘로 치솟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미련한 줄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그 나무는 나보다 낫다. 세상은 안 되거나 잘못되는 일이 더 많음을 잘 아는 하늬바람이 가끔씩 가지 끝을 스치고 지나며 여물다 만 아픈 상처를 달래주고 있지만 알량한 나에게는 그만한 행운마저도 없다.
  고향을 찾아가 생명의 원천(源泉)을 찾으려 해도 지금은 사라져 버린 끊어진 과거이건만 언제나 유월이면 되살아나서 연어의 숙명적인 회귀처럼 끝없는 기행을 시작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아쉬움에 남는 것은 넓고도 깊게 패인 주름과 신산(辛酸)에 젖은 얼굴뿐이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다. 마음속에 아직도 팔팔뛰고 있는 과거의 살아있는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지 않은가.

  'Es War Doch Alles Nur Ein Traum.'
  그저 스쳐가는 꿈이었던가.

  Monika Martin의 노래 소리가 내 마음을 또 다시 흔들어 놓는다.
  그 모든 것이 단지 바람처럼 스쳐가는 꿈결 속이었던가?

댓글 1개

한상용 2008. 08. 30. 오전 10:27

아련한 추억을 불러오는 아름다운 글 , 잘 감상합니다.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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