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글

게시물 상세보기

이별의 인천항

박상덕 2008. 09. 04. 오전 12:55
3792


  유월의 기행(奇行)  #2 이별의 인천항

이별의 인천항

(작사 세고천, 작곡 전오승, 노래 박경원)


  바다의 경계에 다가가 땅 끝에 섰다. 눈앞에서는 한 무리의 갈매기가 앞 다투듯이 용솟음치는 나블사이를 곡예 하듯 날고 있다. 한껏 따라 올랐던 포말(泡沫)은 바닥에 쏟아진 은빛 진주알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무수한 은방울을 만들었다. 파도는 여러 갈래로 쪼개진 작은 물결위에 한 무더기씩 그것을 이었다. 어릴 적에 종이부채를 만들려고 밀가루포대 종이를 오려 여러 겹으로 접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겹겹이 결을 만들며 미끄럼을 타듯이 빠르게 다가와 해변을 덮었다.
  보름사리 때나 찾아오던 달콤함에 목마른 갯벌은 어쩌다 올라온 파도에 가쁜 숨을 몰아쉬듯 거품을 내뿜으며 오랜만에 맛보는 아쉬움을 달래보지만 야속한 파도는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몇 걸음 더 앞으로 나가니 간혹 생기다 만 잔 물결이 슬며시 밀려와 발등을 타고 넘는다.
  유월초의 바다는 아직도 차가웠지만 받는 느낌은 따스하다. 10년 전에 처음으로 유월의 기행을 시작하면서 40년 만에 밟았던 그때의 주체할 수 없었던 감격을 똑같게 느낄 수는 없었지만, 고향의 바닷가는 언제 밟아도 남다른 포근함을 준다.
  잔물결은 간간이 물방울을 튕기며 발끝을 건드려본다. 내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제는 그마저도 심드렁해졌는지 옆의 조약돌로 관심을 옮겼다. 얼마의 세월만큼 공을 들였는지 반들반들해진 동그란 조약돌은 끈임 없이 밀려드는 잔물결에 반짝이는 등을 들이대며 더한 장난질로 여념이 없다. 작약도(芍藥島)의 파란하늘과 어울린 쪽빛바다는 한없는 평화를 간직한 듯이 온화한 그 옛날의 모습을 닮아간다.
  지금의 인천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상전(桑田)이 벽해(碧海)요, 천지의 개벽(開闢)이라 할 것이다. 그 옛날 혼돈(混沌)을 갈라 천지를 나누고 사극(四極)과 오방(五方)을 만든 반고(盤古)라 한들 이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한 인천이니 옛날의 흔적을 찾기란 잔솔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렵다.
  지난 세월은 기억 속에 영상으로만 남아있다. 어린 시절 틈만 나면 뛰놀던 바닷가는 높다란 방파제로 막히거나 매립지로 변했으며, 이제는 디딜만한 갯벌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나마 바닷가의 풍경이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곳은 지금은 쓸모없어 버려진 그 옛날 염전(鹽田)에 물을 대던 해수로의 메운 흔적과 작은 배를 수리하던 조그마한 조선소가 들어있던 움푹 패인자리와 - 크기도 옛날에 비한다면 반에 반도 안 남았다 - 오늘도 한쪽 방파제에 걸터앉아 망둥이 낚시질로 하루해를 보내는 동네꾼들의 망중한(忙中閑)이다.
  그들 머리위로 하루 내 여정의 끝에 도착한 태양은 남은 힘을 다하는지 다홍색으로 변한 큰 얼굴을 내밀고 빛의 잔치를 알린다. 파란색 하늘은 진홍(眞紅)으로 덧입고, 암갈색(暗褐色)을 곁들인 너부죽한 구름 띠는 백운산(白雲山, 永宗島)위로 여러 줄의 곱디고운 비단결을 만들었다. 부둣가 쪽으로 낮게 깔린 저녁안개는 팔미도(八尾島) 앞바다를 넘실대는 까치놀의 은빛물결에 장단을 맞추듯이 나릿나릿 춤을 추며 흥을 돋운다.
  수평선 너머로 안간 힘을 쓰던 마지막 조명마저 스러지듯 꺼지자, 얇게 퍼지는 만종(晩鐘)의 은은한 소리는 해변을 따라 막(幕)을 내리고, 땅거미는 조급증을 더한 듯이 노을을 하나 둘 회색으로 덧씌우며 급한 걸음을 옮긴다. 어슴푸레해진 부둣가의 활기는 저 멀리서 형형(炯炯)하던 까치놀과 함께 어둠속에 잠겼다. 새로운 아침에 대한 기대감을 간직하며 하루는 대단원은 막을 내리고, 밤의 여흥(餘興)은 부두가 선술집의 술잔 부딪치는 소리로 다시금 시작되었다.
  밤바람도 갈바람으로 바뀌었는지 바닷가 특유의 짜고 비린 냄새로 시장기가 도는 오감(五感)을 자극한다. 어디서부터 흘러오는 노래일까? 그 바람에 실려 어렴풋이 들리는 노랫가락은 신산(辛酸)에 젖은 고까운 한탄(恨歎)으로 창가를 심하게 두드린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구슬픈 가락은 스산한 기운처럼 낮게 깔려 사붓이 귀를 대고 들어야만 들을 수 있다.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창가를 타고 오는 '이별의 인천항'은 오늘 같이 유월의 회귀(回歸) 끝에 후회와 그리움이 뼛속깊이 사무쳐 몰골이 가년스러울 때처럼 속 끓일 때 들어야 제 맛이 난다. 이 노래의 특별함은 괴로움에 이울어진 마음을 헤아리는 능력이 있다. 노래를 듣다보면 기분마저 새뜻하게 추슬러주기 때문이다.
  이별의 인천항은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유행가의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아무 때나 부르는 그런 노래가 아니다. 이 노래는 등 따습고 배부를 때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그저 세끼 밥이 입에 들어가니 어찌어찌하며 대충으로 사는 이에게는 쓸모없는 노래이다.
  치열한 삶속에서 좌절의 쓴잔을 맞봤거나, 진솔한 삶 가운데에 인내의 고통을 삭일 때에 필요한 노래이다. 분한 마음을 달래거나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거나 꽉 막힌 가슴을 뚫을 때 쓰는 민초들의 만병통치약과 같은 노래이다. 그럴 때에 한 곡조 힘차게 뽑으면, 화로 속 시뻘건 숯덩이사이에 녹일 듯이 재워뒀던 인두처럼 주름진 우리의 마음을 후련하게 다려준다.
  그래서 그런지, 1954년도에 이 노래가 발표된 이후에는 많은 민초들의 심금(心琴)을 그렇게나 울렸다. 노래깨나 한다고 어깨를 들먹이며 나돌던 이나, 음치수준을 갓 벗어난 새침때기나, 노래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릴 정도였으니 당시의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노래의 가사를 보면 작약도(芍藥島)등대가 나오는데 이 등대는 해방 후에 대한민국이 최초로 세운 등대이다. 인천에는 그 외에도 우리나라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여진 곳이 많다. 전편에서 소개했듯이 자유공원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조선말 격동기에 열강의 외세에 밀린 아픈 역사를 증언하는 곳이기도 하다.
  인천항에서 얼마쯤 나가면 팔미도(八尾島)라는 섬이 있다. 그 섬은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므로 열강들이 그대로 놓아 둘리가 없었다. 그곳에 일본제국의 압력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등대1)가 세워졌다. 알렉산드리아의 타오르는 불꽃이었던 파로스(Pharos)등대가 천년의 지중해 뱃길을 비추었듯, 개항초기 어려웠던 대한제국의 앞날을 밝혀주고 인도하는 참 빛이 되기를 바랐지만,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 1) 1883년 7월 25일에 조선 전권대신인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영목(閔泳穆)과 일본 전권대신인 판리공사(辦理公使) 다케조에(竹添進一郎)는 전문 42조의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체결하였으며, 그를 근거로 하여 1903년 6월에 높이7미터에 지름이 2미터 내외 남짓한 등대를 건설하였다. 이 등대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등대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지난 100여 년간 주어진 본연의 임무를 성실히 끝내고 일선에서 퇴역하였다. 인천광역시는 지방문화재 제 40호를 지정하여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하고 있다. 기존 등대의 퇴역에 맞춰 그 옆에 높이 26미터에 위성항법정보시스템까지 갖춘 제 2의 최첨단등대를 새로 건축하였다. 비록 100년 전에 비해 등대의 활용도가 낮아졌다고 하지만, 팔미도 등대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역사의 현장으로 더욱 가치가 있다.

  등대는 항구로 들어오는 배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바다의 이정표다. 하지만 팔미도등대는 광복 후의 열악한 나라재정으로 인하여 일시 폐쇄되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상륙작전의 길잡이로 나서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큰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때에는 팔미도등대가 세간에서 많이 회자(膾炙)되기도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우두커니 바닷가 바위 위에 서서 밤마다 그 큰 눈을 번쩍번쩍 굴리면서 밤길 가는 배들이 편안히 가도록 지켜주는 등대는 한번 찾아가보고 싶은 곳이 아닙니까. 여기는 서울서 얼마 되지 않는 인천 앞바다에 있는 팔미도라는 섬에 있는 등대입니다.' 당시 라디오방송 리포터가 조금은 흥분하며 소개한 말이다.
  우습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정(人情)에 얽매여야 되는 것은 변함없는 공통점이다. 하여튼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지만 다시금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항구와 등대는 이해할 수 없는 묘한 곳이다. 항구와 등대를 말하면 낭만적인 의미보다는 아픔이 숨어있는 부정적인 뜻을 더욱 떠올리게 만든다. 항구는 떠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돌아오는 곳이기도 하고, 등대는 배웅도 하지만 마중도 한다. 그런데 어찌해서 만남보다는 이별을 강조하고 떠올릴까? 그것은 만남은 몸으로 하고 이별은 가슴으로 하기 때문일까? 만남의 기쁨보다는 헤어지는 슬픔이 몇 배나 크게 마음을 울리기 때문일까?
  멀리 팔미도의 수평선위로 가물가물하여 보일 듯 말듯하던 여객선 한척이 어느 사이에 인천내항 가까이 다가왔다. 그 배는 등대 옆의 어둠을 비켜서 지나오며 어김없이 뱃고동을 요란스럽게 울린다.
  쌍고동에서 울리는 이중창은 순수와 순진함으로 새하얗게 도색된 소리가 되어 만남을 재촉하는 반가움에 웃음 짓는 소리처럼 들린다.
  거기까진 괜찮다. 그러나 은퇴한 바리톤가수의 변색 된 낮은 소리처럼 들리는 끝에 남은 어색한 뒷소리가 헤어지는 슬픔과 교묘하게 이어진 검게 변질된 부정의 소리인줄은 아무도 모른다. 그 속에는 진정한 사랑이나 진솔한 믿음이란 아예 없다. 마지막 하나 남은 희망마저도 바다 속으로 송두리째 빠쳐버린 실없는 소리다. 그러니 세상살이의 허무함만 남아있는 허깨비 같은 소리가 아니겠는가?
  가사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틀리는 말이 아니다. 첫 절에서 '쌍고동이 울어 대는 이별의 인천 항구'로 시작하여 끝나는 부분이 '정들자 이별의 고동소리 목메어 운다.'로 뒤를 맺었다. 이별을 알면서도 들어가는 항구요, 떠나는 고동소리도 정(情)붙은 이별이다. 그러니 항구의 인생살이는 기다림이 없는 곳이요, 믿을 곳이 못되는 곳이다. 항구란 이별이 타고난 숙명이 되는 곳이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오두방정을 떨듯이 요란하게 울리는 쌍 나팔 뱃고동소리에 기쁨과 슬픔이 교묘하게 맞춰져 있듯이 삶도 마찬가지로 기쁨과 슬픔이 경위(經緯)로 짜 맞춘 옷감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기쁘다고 좋아하며 웃지 말고, 슬프고 괴롭다고 울고만 있지 마라. 지금은 기쁜 듯이 보이지만, 그 뒤에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으며, 슬프게만 보이는 날도 지나면 기쁜 날이 오는 것이다.
  항구란 우리네 인생이다. 항구는 기쁜 만남도 있고, 정들자 이별인 쓸쓸한 항구도 된다. 웃고 울리는 요술 같은 인생을 만드는 것이 항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픈 추억도 지나면 삭이듯이 슬픈 일도 지나고 나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만 남는다.

♬ 이별의 인천항 ♬
1.♬
쌍고동이 울어 대는 이별의 인천 항구
갈매기도 슬피 우는 이별의 인천 항구
항구마다 울고 가는 하루살이 사랑인가
정들자 이별의 고동소리 목메어 운다.
2.♬
등대마다 임을 두고 내일은 어느 항구
쓴웃음 친 남아에도 순정은 있다.
항구마다 웃고 가는 하루살이 사랑인가
작약도에 등대불만 가물거린다.
3.♬
외항선원 수첩에는 이별도 많은데
오늘밤도 그라스에 맺은 인연을
항구마다 끊고 가는 하루살이 사랑인가
물새들도 눈물 짖는 이별의 인천항구

  이 노래는 인연에 얽힌 사랑에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깊은 뜻도 포함되어있으나, 속말로 하는 하룻밤의 풋사랑과 같은 숭엄(崇嚴)한 삶의 의미를 희롱조로 해석하였거나, 어찌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인생살이를 덧없게 표현함으로서 그 자체를 가볍게 보려는 의도가 깔려있지 않나하는 의구심을 가져보기도 한다.
  하지만 슬픔이나 이별이 어찌 가볍게 웃고 넘길 일이겠는가.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슬픈 이별로 염색된 항구나 등대와 함께 슬피 울며 나는 물새(갈매기)를 함께 등장시킨 것으로 보이며, 이는 애잔한 내용을 깊게 표현하였음을 느끼게 하였다.
  \"그 처량함이 얼마나 오죽하면 날짐승까지도 울며가겠는가.\"
  신파극을 좋아했던 어떤 눈물 많은 할머니가 이 노래를 부르다 두고 온 고향이 생각난다며 이산(離散)의 아픔을 울먹인 피눈물이다. 구름이 되어 한번만이라도 고향 땅을 보았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노래하듯 간절히 소원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불가해졌으니, 민초들이 감내하기에는 너무 큰 멍에를 지운 것이 아닌가.
  노래 전체는 당연히 서민들의 진솔한 삶을 그대로 담았으며 그 애환(哀歡)을 고스란히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럴 것이다. 그 당시의 백성들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해방과 전쟁의 피폐 속에 무슨 힘이 있었겠나. 무소불위(無所不爲)로 닥치는 독단주의의 시대조류에 막무가내로 휩쓸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강자독식(强者獨食)이라는 불가항력의 시대상황에 반반한 저항조차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자아(自我)상실의 인간군상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연민(憐愍)의 정으로 노래했다고 말한다면 너무나 비탄조(悲嘆調)인가?
  특히 오십 년대는 말하기조차 두려운 변혁기의 정점이었고, 가장 어둡고 험난했던 굴곡 많은 시절이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목숨이 오가는 고비사위를 어디 한두 번 겪었는가? 민초들이야 오로지 맨몸으로 참혹했던 전쟁에 휩쓸렸으니 가뭇없는 생(生)의 절박했던 공포를 말해서 무엇 하랴. 그 시절의 삶이란 반은 송장이었던 산송장처럼 살았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모진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고, 시련을 견디면서 살다보니 모두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 시절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삶은 오직 안녕이었다. 당시를 회상(回想)해보면 남아있었던 유일한 가치는 미래가 없는 좌절뿐이었다. 기쁨이었다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그렇고 그런 추억이라도 모아봐야 한줌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통의 그늘은 끝도 없는 벌판과 같았으며, 절망의 허방다리는 깊이를 모르는 늪지와 같았던 시대였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사치(奢侈)였던 암울(暗鬱)한 삶의 질곡(桎梏)이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허물어진 볼품없는 삶이었지만, 그곳에도 무언가 위로가 필요했다. 삶의 격랑에 부딪치는 중에, 가는 고달픔이나 오는 서러움의 순간에 닥치는, 쓰리고 궂은 좌절에 절어버린 민초들에게는 간절한 바람일 수밖에 없었다. 삭정이신세와 다름없는 그들에게는 안쓰러운 마음을 달래고 보듬어 주는 안식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했다.
  그 시절의 삶이란 그렇게 시련과 고통의 연속되는 순간과 이루지 못한 좌절의 아픔을 이겨내고 삭이게 하여주는 구원자로서의 희망을 심어주는 특별한 메시지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전쟁직후에 유행된 이 노래는 노래 그 이상으로 우리의 애환을 달래주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백(李白)은 어떻게 천년후의 우리를 보았을까?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夫天地者萬物之逆旅)/세월은 백대의 나그네라(光陰者百代之過客)/덧없는 인생 꿈 같으니(而浮生若夢)/기쁨 되는 일 얼마리오(爲歡幾何)?/좋은 자리 마련하여 꽃을 대하고(開瓊筵以坐花)/앉아 깃털 조각 술잔을 돌리며 달 아래 취한다(飛羽觴而醉月)' 시(詩) 한수를 읊어 우리의 아픔을 달래준다.
  궂기어 막힌 우리는 무엇으로 삭일 것인가? 울 때는 손수건이 필요하고, 울화가 치밀 때는 두더지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이백처럼 한 잔의 술과 한 곡조의 노래가 필요했다. 그것도 사기꾼이나 다름없이 매몰차게 돌아가는 세상을 상대로, 입에 올렸다가 화풀이하듯 속 시원히 내뱉듯 하는 노래로 말이다. 야속한 항구에 정붙인 이별을 한풀이하듯이 가벼운 리듬의 이면에 담긴 역설(逆說)의 후련함을 외쳐야했다.
  우스운 얘기이지만 마음이 슬픔으로만 가득 찼을 때에는 슬픔으로 풀어야한다. 실컷 울어야 속에 들어 있는 응어리가 눈 녹듯이 풀어진다. 그러한 이유에선인지 당시의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노래판 메뉴 맨 꼭대기에서 대단한 위세를 떨치며 변함없는 인기를 구가(謳歌)했었다. 당연히 그 시절의 속칭 딴따라패의 일등공신으로 그들의 밥그릇 노릇을 톡톡히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오늘에는 술 한 잔에 날리는 설움이나 눈물지을 만큼 슬픔을 느낄 때는 안성마침으로 꾸준하게 애창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은 노래라도 부르는 것으로 끝나면 가치 있는 노래로서의 생명력은 길지 않다. 더구나 유행가는 더하다. 노래는 똑같지만 그 생명력은 노래를 부르는 각자가 자신의 끊을 수 없는 깊은 애증(愛憎)을 그 속에 담아야 질긴 인연으로 남는 것이다. 그 동안 흐른 세월이 옛날의 영광을 지우고 묻었지만,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기억에서 잊혀 지거나 시들지 않았으며 언제나 불렀다하면 제 1번으로 지명하는 애창곡이 된 것은 그와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좋아하면서 얽힌 특별한 사연은 유월이 돌아오면 그 옛날의 파노라마가 병풍에 새겨진 그림을 보듯이 또렷하게 되새겨진다. 잊을 수 없는 이 노래에 얽힌 이야기는 유월이 오면 헤어날 수 없는 굴레를 씌우며 꼼짝달싹 못하게 옥조인다. 무척이나 좋아하는 노래이지만 그에 비례해서 깊은 사연도 그 만큼의 크기로 간직하고 있다.
  익지도 않은 어린 가슴에 평생을 짊어질 멍에를 지우고, 이제는 절망 끝에 체념한 끊어지고 녹이 슨 쓸모없는 사슬로 변하여 이을 수 없는 우정의 다리로 남은 쓰라림으로 유월의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저밀도록 아프게 만드는 사연이 들어있다. 그리움을 말해서 무엇 하랴. 이 노래를 흥얼거리다 크게 꾸중을 들었던 어린 시절의 서러움은 바뀌어 즐거움이 된지도 오래건만 들을 때마다 하염없이 들추는 그 옛날의 그리움은 가없다.

* 이 노래를 처음 부른 박 경원 선생은 작고했지만 그 노래는 영원히 남아 민초들의 애환을 어루만져줄 것입니다. 고인은 인천에서 태어나 1952년 가수로 데뷔한 이래 '만리포 사랑, 이별의 인천항, 남성 넘버원' 등의 주옥같은 노래를 발표해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선생의 업적을 기르기 위해 충남 태안군 만리포 해수욕장과 인천 월미도에 그의 노래비가 건립돼 있습니다.

「그저 스쳐가는 꿈이었던가」

(Monika Martin)

댓글 1개

포아풀 2008. 09. 04. 오후 12:39

창가를 타고 오는 '이별의 인천항'은 오늘 같이 유월의 회귀(回歸) 끝에 후회와 그리움이 뼛속깊이 사무쳐 몰골이 가년스러울 때처럼 속 끓일 때 들어야 제 맛이 난다.... 아, 그렇군요. 그저 해박함에...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