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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와 응원가
유월의 기행(奇行) #4 야구와 응원가 역사에 남는 꼴찌가 되자! 꼴찌와 역사라니, 꼴찌는 실패자다. 역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헛소리가 아닌가. 영국의 사학자(史學者) 아놀드 J.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AD 1889∼1975)는 자화상을 그린 자작시(自作詩) 「역사가(歷史家)의 일생」의 첫 구절에서 이렇게 외쳤다. '나에게 덤벼드는 죽음의 여신(女神)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양보(讓步)하거나, 스스로 비겁하다는 말을 듣지 않으리라. 저 위대한 신(神)의 맹서에 다짐을 두고라도─' 요즘 사람들은 너나없이 보기에 좋고 편한 것만 찾는다. 조금 불편하다고, 조금 유행에 뒤떨어졌다고, 조금은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서울시청 태평홀 뭉그러뜨리듯이 헐어 버린다. 그렇게 모조리 지금의 시각으로 뜯어고친다면 어느 것인들 한 세대를 넘기는 것이 있겠는가. 세대마다 감각(感覺)이 다를 것이고, 사람마다 다른 게 미감(美感)이다. 보는 가치(價値) 또한 천차만별일진데, 어떤 것인들 그대로 온전하겠는가? 옛날 것은 옛날대로 있을 때에, 비로소 옛날의 향기가 난다. 어린 시절에 살았던 동네에서 자유공원 쪽으로 가다보면 구름다리 못미처에 지역 명소 중에 하나였던 인천극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 극장은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어 역사로는 50년이 넘는 유서가 깊은 극장이지만 아쉽게도 도중에 건물을 헐고 현대식으로 새로 지었다. 이제는 불행하게도 고유의 옛 모습이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 이 또한 눈앞의 이(利)만 찾으려고 행한 것은 아닌지. 만물은 서로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참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양면을 모두 깨닫는다면 그 길이 바른길이다. 어릴 때부터 야구에는 특별할 만큼의 소질이 없어서 선수까지 되지는 못했지만 관심은 많았다. 야구경기는 초등학교시절부터 무척이나 좋아하였으며, 수시로 즐겨했던 놀이었다. 또래 애들 몇 명만 모이면 야구놀이를 자주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당시 인천극장 옆으로는 넓은 시유지가 공터로 남아 있어 주변에 사는 또래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 야구경기는 그곳에서 많이 했던 것 같다. 야구경기라고 했지만 용구를 보면 말하기도 쑥스럽다. 야구글러브라고 해봐야 성인용으로 야수용 3개와 배트 1개 그리고 야구공 2개가 전부였다. 글러브는 당연히 포수와 투수 그리고 1루수만이 꼈다. 글러브도 성인용이라 끈을 바짝 조여서 사용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작은 손으로 글러브를 껴봐야 헐거워서 쉽게 빠졌다. 그렇게 주의해도 경기 중에는 여러 사람이 돌려가며 끼다보니 점점 헐거워진다. 날아오는 공을 잡다가 글러브가 빠지면 도망가는 공을 잡을까 귀한 글로브를 잡을까 망설이기도 하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물자가 흔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는 그만한 준비도 대단한 호사(豪奢)였다. 어느 때는 야구공을 구할 수 없어서 테니스공을 얻어다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는 전쟁직후라 의식주에 필요한 생활용품은 물론이고 양곡도 귀했던 시절이었다. 놀이용 야구용구를 구하기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깨비시장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필요한 용구를 조금씩 구해다 주었다. 동인천역 뒤쪽으로 산 역사나 다름없는 중앙시장이라 불리는 오래 된 재래시장이 여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 시장 중간쯤에는 다수의 포목점이 몰려있고, 그곳에서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순대국집이나 선술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 안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깨비시장이 있었다. 지금은 시대가 변하여 도깨비시장이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점포마다 손님들이 바글바글할 만큼 장사가 잘되던 곳이었다. 물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어려웠다는 그 시절에도 그곳에서 만큼은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쓰던 야구용구도 중고품이었던 것으로 보아 외국군(미군)이 쓰다버린 것을 수선했거나 팔고 간 물건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야구용구는 당시로서는 꽤나 비싼 물건이었다. 그러니 글러브도 꼭 필요한 3개밖에 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글러브가 3개이면 상대가 친 공이 외야로 날아가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래도 다 받았다. 경기를 할 때에는 글로브 대용으로 각자 모자를 쓰고 왔다. 그것으로 땅으로 굴러오던 하늘높이 뜨던 잡을 수 있는 공은 거의 다 잡았다. 하지만 노는 즐거움으로 모자라도 찢어지는 날에는 집에서 치도곤을 맞기도 했다. 근처의 건물에게는 우리가 공포의 대상이었고 원성의 표적이었다. 주택이나 상점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사무실 유리창까지도 수없이 깼다. 한번은 중학교 야구선수라는 동네 형이 배트로 야구공을 쳤는데 얼마나 멀리 날아갔는지 그 공은 끝내 찾지 못한 일도 있었다. 언젠가는 극장상영이 끝나서 공터 쪽의 출구로 많은 손님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는데 하필이면 그때 힘껏 휘두른 배트가 통째로 날아가 나오는 손님들 머리위로 떨어졌다. 크게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지만 한 동안은 그곳에서 놀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이 지금에 와서는 즐거운 추억거리의 하나가 됐지만 당시에는 무척이나 부모님 속을 썩였을 것이다. 야구는 좋아만 했지 잘하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쯤 학교에서 야구선수 지망생을 모집했다. 다행히 후보 선수로 뽑히기는 하였으나 솔직히 선수로 나서기에는 소질이나 실력이 없었다. 일정기간의 연습기간이 지나자 야구부 선생님이 그 중에서 몇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는 퇴짜를 놓았다. 창피한 얘기지만 나는 퇴출대상 1호였으니 여지없었다. 여담이지만 남은 애 중에서 한 애는 나중에 국가대표 선수로 성장하였고 모 대학교 감독까지 지낸 것을 보면 초등하교 야구부선생님이 선수는 제대로 보고 뽑았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이 모자람을 인정하면서도 속상한 것은 어린나이로서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노래박사 또래친구는 나를 데리고 공원으로 올라갔다. 아이스크림과 과자 몇 봉지를 사가지고 우리는 맥아더 장군 동상아래 계단에 앉았다. \"오늘 화 많이 났지?\" 나는 대답도 않고 멍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내 눈은 카메라 파인더에 무심하게 박히는 상(像)처럼 망막에 닿았다 사라지는 바닷가의 광경을 무의미한 허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월미도에 세워진 송신탑이랑 그 너머 멀리 떨어져 아련하게 보이는 영종도(永宗島)의 희뿌연 그림자는 기억인자도 남기지 않고 지나갔다. \"저번에 나보고 그랬잖아. 힘들 때는 앞일만 생각해야 된다고.\" \"그래! 네 말이 맞아. 친구야! 고맙다.\" 나는 또래의 말에 용기를 내어 벌떡 일어났다. 세상에는 자신의 본분을 알지 못하고 분수에 넘치는 일을 쫓다가 자신을 망치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비록 겉은 돌에 쌓여있지만 속은 찬연히 빛나는 구슬이 옥석(玉石)이 아닌가. 야구부선생님은 내가 선수로서의 자질로는 옥석이 아니었음을 살핀 것이다. 내 안에는 그것이 없었다. 그 후로는 선수로서가 아니라 야구를 좋아하는 팬으로서 야구를 사랑했다. 지금은 열정이 많이 줄었다고 스스로 인정하지만 젊었을 때는 누구 못지않았다. 열의로만 따지자면 선동렬이나 박찬호급이었을 것이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소리는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았다. 역경을 헤쳐 나가라는 뜻으로 과난성상(過難成祥)이란 말이 있다. '어려움이 지나면 좋은 일이 온다.'는 뜻으로 달리 얘기해서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반드시 어려운 일을 이겨내야 한다는 애기도 된다. 야구에서도 '위기를 극복하면 반드시 기회가 찾아오고, 주어진 기회를 적절히 살리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위기가 닥친다.'라는 속설이 있어 일맥상통한 얘기다. 그러므로 야구에는 삶과 같이 극적인 요소가 많고, 예측하기 힘들어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야구의 특징 중에 하나는 기록의 경기다. 당연히 축적된 데이터를 활용하여 경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현대야구의 추세이다. 하지만 이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의외성이 크고 이변이 많은 것이 또한 야구경기다. 인생이 사소취대(捨小取大)나 취사선택(取捨選擇)이라는 확률로 판단하듯이 야구경기도 확률로 하는 경기이다. 그러나 확률이란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음으로 언제나 이변은 생기게 마련이다. 야구경기에서 역전의 명수라는 말은 그래서 더욱 우리를 열광케 한다. 9회 말 투아웃에 10대 0이라는 스코어가 말해주듯 승리가 불가능 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것이 야구경기만이 가지고 있는 묘미다. 의외성은 모든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지만 유독 야구만이 그 모습이 더욱 두드러진다. 최고의 투수가 최악의 타자에게 홈런을 맞을 수도 있고, 반대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타자라도 최악이라 평가받는 형편없는 투수에게 무기력하게 삼진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 야구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역동성과 그 결과로 얻어지는 역전적인 모습은 인간의 삶과 닮은꼴이다. 그러니 야구가 단순히 점수내기라고 한다면 얻을 수 있는 감동은 없다. 점수를 뽑아내고 경기를 승리로 만들어내기까지 그 이면에서 선수들의 피와 땀이 섞인 노력이 수반 되어야 한다. 그것이 때론 좌절의 아픔이었고, 때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담겨있었지만 그것이 보는 사람들에게 행위 이상의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야구의 참 매력이고, 야구를 인생에 비유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야구가 좋은 점이 또 한 가지가 있다. 어떤 면에서는 야구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점이 많다. 야구의 속설에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라는 말이 있다. 야구는 정상적인 9회전 게임에서 한경기를 완전히 끝내려면 한 팀이 27번째의 아웃을 당하는 선수가 있어야 끝이 난다. 그만큼 야구는 양 팀에게 조금의 오차도 없이 공평하게 수비 아홉 번과 공격 아홉 번의 기회를 준다. 그 안에서 정당하게 승부를 내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는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만큼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게 많다. 그러므로 야구가 평등과 정직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더 인간답다. 그래서 야구가 더욱 재미있는 것이 아니겠나? 야구경기를 열배 백배 즐기려면 뭐니 뭐니 해도 응원이 최고다. 그것도 현장에서 선수들과 직접 호흡을 맞추면서 고래고래 소리쳐 부르는 응원가는 삶에 찌든 때를 화끈하게 베껴주고, 막혔던 가슴까지 후련하게 뚫어준다. 그런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으나 야구를 좋아하는 열혈(熱血) 팬은 야구장 안에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지도 모른다. 관전할 때는 경기결과에 따라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할 필요가 없다. 승부에 집착하기보다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의 경기진행과정에서 생기는 드라마틱한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따지고 보면 승부의 저울추가 반대로 갔다고 해서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승부는 선수에게 맡기고 우리는 그 경기를 즐기기만 된다. 야구경기 관전도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위한 수단이니 지든 이기든 흥(興)에 겨워 응원을 해야 정신건강에도 이롭다. 그것이 한 차원 높은 관전태도이고 응원문화일 것이다. 응원에는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다.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응원도구를 이용하기도 하며, 프로야구가 원조인 치어리더의 흥을 돋우는 응원도 빼놓을 수 없다. 응원단장의 구령에 맞춰 박수를 치거나 선창에 따라 구호를 외치는 방식은 고전적이지만 효과가 확실한 응원방식이다. 예전 초창기에 비하면 응원문화도 크게 발전하였다. 종류도 다양해지고 참여도도 대단히 높아져 집단이 일심동체가 되는 응원도 여러 가지가 등장하였다. 그중에는 부산 팬처럼 모두가 한마음으로 신문지 봉다리를 흔들며 응원하거나 화장지 꽃가루 폭탄을 이용하는 응원 등도 등장했다. 이와 같은 방식의 응원은 독특한 발상의 새로운 집단응원문화라 할 수 있다. 집단응원으로 최고의 흥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파도타기 응원일 것이다. 이쪽에서 시작하여 한 바퀴 돌아오며 펼쳐지는 파도의 장관은 보는 이를 감복케 한다. 그러나 최고의 응원을 원한다면, 그곳에는 응원가가 있어야하며, 응원가야말로 응원의 백미(白眉)다. 생각해보라. 목청껏 외치는 응원가가 빠진다면 응원에 무슨 묘미가 있고 즐거움이 있겠는가? 응원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응원가가 있음으로 해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분산된 힘을 결집할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별난 응원이 있다고 해도 결국은 보조역할에 불과할 뿐이다. 응원가도 구장마다 특색이 있다. 몇 군데는 그 위력이 훨씬 드세어 응원가만 들어도 상대는 주눅이 들 정도다. 광주에서는 '목포의 눈물'이 육지 한가운데서 바다를 이루고, 부산에서는 '부산 갈매기'가 야구장을 뒤덮어 돔으로 만든다. 현재의 인천에서는 '연안부두'가 응원가로 뜨고 있다. 그런데 위의 응원가보다 몇 배나 더 우리를 열광시켰던 잃어버린 응원가가 있었다. 아니다. 잊었다기보다는 2선으로 물러났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 옛날 경기만 했다하면 그대로 나가떨어지는 형편없는 실력을 가졌던 그러나 열망 하나만은 최고였던 야구단이 인천에 있었다. 청보핀토스가 야구경기를 하는 날에는 '이별의 인천항'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이겼을 때는 기쁘게 불렀고, 졌을 때는 슬프게 불렀다. 지거나 이기거나 노래의 높낮이는 변함없이 똑같이 크게 불렀다. 그것이 최고의 응원가였던 인천의 응원가였다. 하늘이 떠나가라 외쳤던 '이별의 인천항'이라는 응원가였다. 야구를 사랑하고 인천을 사랑했던 팬들은 비록 사는 것이 힘들었어도 야구장에만 오면 구장 전체가 떠나가라 '이별의 인천항'을 부르며 괴로움을 삭였다. 지금은 이길 때가 질 때보다 더 많은 해도 있지만, 그때는 지는 것을 세끼 밥 먹듯이 하였다. 그러니 어쩌다 경기에서 이기기라도 하는 날이면 난리판이 되었다. 인천 시내는 어깨동무의 물결이었고 꿈에만 그리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이라도 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니 어찌 '이별의 인천항'이란 노래가 슬픔을 삭이는 도구에만 불과 하였겠는가. 멈출 수 없는 기쁨으로 운동장이 떠나가라 외치는 최고의 응원가로 맹위를 떨쳤으니 이야말로 진수(眞髓)가 아닐까? 그러나 세상일에 영원성이 없음은 실로 안타깝다. 인천을 본거지로 하는 구단은 삼미수퍼스타즈에 뒤이어 청보핀토스가 뒤를 이었다. 청보는 비록 짧은 2년 반 만에 사라진 단명의 구단이었지만, 처음에는 '프로야구에 새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대단한 의욕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도중에 막을 내려야하는 비운을 당하여 인천 팬들의 가슴을 더욱 쓰리게 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아쉬움은 짧았던 청보핀토스의 운명만큼이나 짧은 기간 동안 인천야구장에 울려 퍼졌던 '이별의 인천항'이라는 노래의 운명이었다. 물론 지금도 응원가의 레퍼토리에 포함되어 가끔씩 불리어지고 있지만 청보핀토스 시절에는 지든 이기든 잘했던 못했던 제일 많이 그리고 제일 먼저 불리어졌었다. 그 노래가 청보핀토스의 퇴장에 맞춰 이제는 인천야구장에서 2선으로 물러났다.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일이 순순히 오거든 막지 말며, 일이 이미 자나갔거든 쫓지 말라고 했다. 지금은 놓아 준 한 시절의 추억이 되었지만 '이별의 인천항'이란 응원에 푹 빠졌었던 즐거움이 고맙고,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애석하지만 진정으로 사랑했던 청보핀토스에 감사하고, 그를 누구보다 좋아하며 같이 어울렸던 인천의 모든 팬들과 이 마음을 나눈다. 「I.O.U (I Owe You)」(Carry & Ron) |
댓글 1개
참 해박하시네요. 삼미 슈퍼스타즈... 기억에 있네요. 얼마 전 같은데 시간이 많이 흘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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