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글

게시물 상세보기

크리스마스 이야기 ③

전영준 2008. 12. 16. 오후 11:46
3452

성탄절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
의로운 남자-다윗의 자손 ‘요셉’
크리스마스(Christmas)-
올해도 어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해 성탄주일이었던 23일 저녁에는 나의 소속 교회 성탄축하모임에 참석해 아내와 함께 산타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초등회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고,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엔 역시 아내와 함께 괴정동 교회의 성탄절모임에 초대를 받아 두 편의 동화구연과 산타행사를 가졌다.
별로 가진 것 없이 인생 육십 고개를 넘어선 우리 부부가 아직도 작은 달란트이나마 이웃을 위해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여간 복된 일이 아니다.
사실 성탄절인 12월 25일이 주님의 실제 탄신일(誕辰日)이냐를 두고는 늘 논란이 있어왔다.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정한 최초의 기록이라는 안디옥 주교의 ‘데오필로스’기록(AD175-183)도 학자들 간에는 위작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성경을 보더라도 예수님의 탄생 연도나 날짜의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신약성경 누가복음의 기록을 통해 그 때가 12월이 아닐 것이라는 것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들을 지키더니” (눅2:8)
목자, 즉 목동들이 한밤중에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던 사실로 봐서,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때가 한 겨울인 12월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목동들이 밤중에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면 그 시기는 어쩌면 밤기운이 차지 않은 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성탄절이 겨울이냐 봄이냐 하는 것을 두고 다투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성탄절이 어느 때인가 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끼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크리스마스의 정신을 기리는 것이 더 뜻 깊은 일이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구주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탄생은 지극히 비천한 환경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2:7)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갓 태어난 아기 예수가 몸을 누인 곳은 마소의 먹이를 담아 주는 큰 그릇인 구유였다. 이는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이 마소들의 처소인 외양간이었다는 말이다.
아기 예수가 이처럼 외양간에서 탄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가 몸을 풀만한 마땅한 장소를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리아와 요셉은 그들이 머물 제대로 된 변변한 숙소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마리아와 요셉은 그들이 살고 있던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유대의 베들레헴까지 먼 길을 여행해 왔다.
해산이 임박한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무려 80마일(128.75km)이나 떨어진 먼 길을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당시의 로마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가 온 이스라엘에 전면적인 인구조사를 할 요량으로 백성들에게 호적신고를 명했기 때문이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눅2:4~5)
이렇듯 ‘가이사 아구스도’가 백성들에게 호적신고를 명한 까닭은 철저한 인구조사를 통해 피지배 민족과 국가에 대한 지배를 더욱 체계화 하고 세금을 더 많이 걷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가이사 아구스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칙령대로 호적신고를 하기 위해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가야 했고, 다윗의 자손인 요셉 또한 이를 위해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로마황제의 호적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것’이라고 한 구약성경의 말씀(미 5:2)이 성취되었으니, 이 또한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때 베들레헴은 갑자기 몰려드는 여행자들로 몹시 붐볐다. 한글 성경에 나오는 여관이나 사관(舍館)을 영어 성경에서는 ‘inn’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여인숙, 선술집, 또는 (작은)호텔을 일컫는 오늘날의 ‘inn’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예수님 출생 당시에 베들레헴에는 여관이란 것이 있지 않았다. 베들레헴은 극히 작은 동네일뿐만 아니라 여행객들이 붐비는 길목도 아니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대개 이층으로 되어 있어 위층에는 두 칸으로 나뉜 거실들이, 아래층에는 짐승들이 머무는 축사가 있었다.
그 옛날 우리의 사대부들이 그렇게 했듯이 당시 팔레스타인의 부유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집에 사랑방을 만들어 놓고 손님 맞는 것을 큰 미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방 한 칸에서 온 가족이 함께 지내는 가난한 사람들은 집 옆에다가 바로 짐승을 기르는 축사를 붙여서 지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있을 곳이 없으셨다는 것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사랑방을 내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사렛이란 시골에서 온 가난하고 힘없는 젊은 부부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만약 요셉과 마리아가 중요인사였거나 부자였다면 방 하나쯤 못 구했을 리 없을 것이다. 아니면 베델레헴지역의 유력인사 누군가를 알고 있었더라도 방 구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먼 여행에 지친 만삭의 아내에게 편히 쉴만한 숙소를 마련해 주지 못한 요셉은 가까스로 어느 가난한 사람으로부터 가축들의 축사를 빌리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나는 네 아들의 아버지로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는 이 남자에게 각별히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억누를 수 없다.
요셉,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양부(養父)로 선택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상의 어떤 남자보다도 합당하고 훌륭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다. 그런데 정식으로 혼례도 올리지 않았을 뿐더러 그녀와 잠자리도 한 일이 없는데 마리아가 수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유대의 법은 신부로 정해진 사람이 약혼 기간 동안 부정한 일을 저지르면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요셉이 자기와 정혼한 여자가 임신했으며, 더욱이 그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여느 남자였다면 마리아를 공개재판에 회부해 유대법이 정한 대로 처벌을 받게 함으로써 약혼자의 배신에 대해 분풀이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1:19)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매우 의롭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원칙주의자였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극단론자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요셉은 마리아를 무척 사랑하였다. 자신이 겪을 슬픔과 고통이 적지 아니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사랑하는 마리아가 수모와 수치를 당하는 일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크게 떠벌리지 않고 다만 마리아와 파혼하는 것으로 조용히 마무리하려고 했다. 이렇게 은밀히 마리아와의 약혼을 취소하려고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 그는 꿈에 주의 사자로부터 현몽을 받게 된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0~21)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더 이상 번민하지 않고 곧바로 주님의 사자가 분부한 대로 마리아를 데려온다. 하지만 그는 마리아가 해산할 때까지는 아내와 동침하는 것을 삼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아들의 양부라는 사명을 겸손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만큼 요셉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양부가 되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 예수에게 일을 가르치도록 선택받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의 예수에게 율법서를 가르쳤던 사람도 바로 요셉이었다.
세상과 격리된 목공소 안에서 어린 예수에게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 주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우쳐 준 사람도 다른 사람 아닌 요셉이었다.
이같이 선량하고 의로운 남자가 아내의 해산을 보게 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안락한 집에서가 아니라 먼 여행길의 한 외양간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짐승들의 처소에서 해산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이 젊은 남편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을 것이다.
아내는 이미 해산이 임박한 만삭의 몸으로 80마일이나 되는 먼 길을 여행해 온 터였다. 가끔은 낙타를 빌려 타기도 했지만, 많은 거리를 걸어서 온 지친 몸으로 이제 해산을 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젊은 남편 요셉은 아마도 아내 마리아의 조용한 용기에 말없이 눈물을 흘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요셉은 쓰라린 가슴으로 동물들의 배설물과 쓰레기를 치웠으리라. 그러고는 가장 깨끗하고 마른 짚단을 마련해 아내의 해산을 준비했을 것이다.
‘이것이 만왕의 왕이 태어나시기에 어울리는 장소란 말인가?’
‘하나님 아들의 어머니가 이처럼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곳에서 몸을 풀어도 괜찮은 것인가?’
하지만 아무 힘없고 가난한 요셉의 능력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불평하거나 한탄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그들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에 순종했을 따름이다.
내 아들이 태어나던 날, 나는 목젖이 얼얼하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나는 여기서 나의 네 아들들이 태어났을 때를 회상해 본다.
서른세 살에 결혼을 한 나는 이듬해에 첫아들을 보았다. 그 때는 그 이전까지의 직업이었던 군무원을 그만두고 울산에서 조그만 장난감가게를 차렸을 때였다.
막 시작한 장사에 수입은 시원찮고 앞날이 불투명하던 그런 상황에 아내와 나는 부모가 되어야 했었다.
1979년 3월 25일, 그날은 마침 주일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아내에게 진통이 와 교회에도 못가고 우리는 서둘러 울산의 한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분만실로 들어가던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무 경험이 없는 예비 아빠인 나는 갑자기 목젖이 얼얼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내는 긴 시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4.6㎏의 거대아를 낳았다. 그 아이가 제짝을 찾아 지난해 6월에 결혼을 한 나의 맏아들이다.
내 맏아들이 태어난 그곳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이 아니고 낯선 객지인 울산이었다. 그런데다 나는 몹시 가난한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외양간도 아니었고 태어날 아기를 구유에 누일만큼 악조건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왠지 외롭고 불안하고 쓸쓸했다. 그곳은 믿을만한 의사와 간호사가 있는 현대시설을 갖춘 병원이었다. 더군다나 내 곁에는 내 어머님이 계셨다. 그랬음에도 나는 줄곧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요셉은 어땠을까? 그런 최악의 조건 속에서 아내의 해산을 지켜보아야 했던 요셉의 마음은 얼마나 심란했을까?
나는 그 뒤로도 아들 셋을 더 얻었지만, 번번이 어렵고 힘든 시기에 아이들의 출산을 맞아야만 했다.
둘째는 장난감가게를 실패하고 실직을 해 있을 때여서 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교회 형제님의 도움을 입었고, 셋째는 병원에 갈 돈을 마련하지 못해 집에서 조산사인 교회 자매님이 아이를 받았다. 그리고 막내는 아는 분의 친척 병원에서 분만비를 감면 받아 태어났다.
그 때마다 나는 슬프고 외롭고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그러고는 내 무능함을 한없이 원망하며 내 처지를 한탄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최악의 악조건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한탄하지 않았으니, 그 의연함이 부럽기 그지없다.
나는 또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인 마리아를 흠모한다.
처녀의 몸으로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전 인류의 운명을 바꿀 말을 듣게 된 마리아-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눅1:28)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눅1:31~32)
이 놀라운 메시지를 들은 마리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특별히 영성이 뛰어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하도록 잘 준비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천사의 명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로어지이다…” (눅1:38)
이 젊은 어머니가 출산하는 동안 요셉 말고는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경험 있는 산파나 하다못해 친정어머니나 이모, 이웃 아주머니라도 있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옆에서 손을 잡아주고 이마를 식혀주며 출산한 후 보송보송하고 깔끔한 이불 위에 산모와 아기를 뉘어줄 그 누구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런 경험이 없는 요셉의 도움만으로, 그것도 외양간의 짚더미 위에서 혼자 첫 출산을 한 이 가여운 여인의 참상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아마도 요셉은 여행길에 챙겨온 작은 천으로 아기를 싸서 건초로 만든 베개 위에 아기를 뉘었을 것이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이처럼 초라하게 열렸다. 화려한 트리도 없었고, 징글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거룩한 아기와 그 부모가 거기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내려온 수많은 천군이 찬송하며 일러준 메시지는 이 젊은 부부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비천하기 이를 데 없는 환경 속에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없이 큰 영광 가운데서 지상에 오셨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자기를 낮추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18:3)
천국에서는 누가 큰지를 두고 서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어쩌면 예수님이 당신의 탄생과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들려주신 말씀일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어린이들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크리스마스의 전통은 그래서 더욱 뜻 깊은 일이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와 같은 깨끗함과 티 없는 신앙, 참된 겸손을 구원의 덕목으로 일러주신 주님의 이 말씀을 가슴에 새롭게 새겨보는 것도 성탄절을 맞는 또 다른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다.

크리스마스의 유래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가 합쳐져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키게 된 것은 고대 로마에서 지키던 동짓날을 채택한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당시 로마의 이교도들은 동지절(12월 24일-다음해 1월 6일)을 하나의 대축제적인 명절로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로마주교는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이교의 축제일인 동지를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했다.
크리스마스를 교리적으로 채택한 것은 4세기 후반부터라고 하는데, 고대 로마교회에서 기원한 ‘크리스마스’를 지키기 시작한 연대에 대해서는 AD335년 설과 AD354년 설이 맞서있다.
‘성탄일’은 그 후 동방 교회로 퍼져나가 ‘콘스탄티노폴리스’(379년), ‘카파도기아’(382년)등에서 지키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교회력의 기원이 되었으며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서력기원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X-mas?
한편 성탄절의 다른 명칭을 흔히 X-mas라고 표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의 X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희랍어 Χρισ의 머리글자이다. 영어철자로 바꾸면 Christos다. 즉 X는 영어 알파벳이 아니고, 영어의 Ch에 해당하는 희랍어인 것이다. 따라서 X-mas라고 써진 것을 읽을 때는 ‘엑스마스’라고 읽을 것이 아니라 ‘크리스마스’라고 읽어야 한다.
이렇게 쓰는 것은 말 그대로 줄임말이다. 그러므로 ‘엑스마스’라고 발음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식함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주의할 일이다.
X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100년대 정도로 추정된다. 이후 지금까지 X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뜻하는 글자로 통용되고 있지만,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이를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영어 X는 10달러 지폐, 미지수, 글을 모르는 사람들의 서명 대용, 연애편지 끝이나 겉봉투에 표시하는 키스 부호, 포르노 영화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렇듯 영어의 알파벳 X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뜻이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요즘에는 성탄 세일을 알리는 백화점 플래카드 등 상업적인 용도 외에는 X-mas라는 표현이 점차 자취를 감춰가는 추세다.
미국의 대표적인 퀄리티 페이퍼인 뉴욕타임스는 기사작성 교범(스타일북)에서 ‘불가피한 경우라 생각될 지라도 X-mas는 [절대] 쓰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댓글 0개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