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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耳順)인 나에게

박상덕 2009. 11. 15. 오후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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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耳順)인 나에게

  어제는 두어 불록쯤 떨어진 원적산길 사거리로
  며칠 전부터 벼르던 바깥나들이에 나섰다.
  땅 냄새와는 천리 길인 아파트 고층에 사는 것이 언제나
  못마땅한 그 친구는 천국이 조금 더 가깝다고 우기듯이
  엉뚱한 구석도 보이고, 호방한 기질도 배어있는 친구다.
  모두가 발아래로 보이니 신선으로 부르라고 호들갑인 그 친구
  요즘사람 같지 않은 초고(超高)한 기개를 지니고 있다.
  이제는 나이도 들었으니, 순순해질 만도 하련마는
  집으로 돌아오면 살던 대로 살아야지 하면서도
  매양 그날의 나머지는 순서조차 없어지는 것이나
  날 세운 세치 혀가 파고드는 당당함에 감당키가 어려운
  무언가가 단단히 조이고 있음은 내 삶이 비틀렸음을 일깨운다.
  그렇다고 이순(耳順)인 나이지만 초달(楚撻)이란한들
  마다할리 없는 인생의 선생으로 싫지 않은 존재이니
  이보다 큰 행운도 실상은 없을 것이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날씨마저 갑자기 내려가
  추위에 움츠려드는 몸이 마음 같지 않다.
  눈치 빠른 내자가 놓칠 리 있나. 어김없이 레이더에 걸렸다.
  이제는 매사에 조심해야 된다며, 제철만난 성화로
  들어 보이는 내복은 언제나처럼 전리품 일호가 되었다.
  엎드리면 코 닿을 데라고 늘어놓지만 가당찮게 춥단다.
  언제나처럼 못 이기는체하고 감촉이 비단결인 내의를 껴입고
  입혀주는 두툼한 겨울외투까지 걸치니 장수풍뎅이가 따로 없다.
  고맙다는 내색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못 고치는 고질병인지
  오히려 아직도 새파란 청춘인데 나이를 들먹인다고,
  이순(耳順)이 나이인 허세로 한 마디하고 나서는데,
  저 성질, 죽을 때면 가져가려나. 조금은 섭섭함이 밴,
  뒤통수에다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여운이 길다.
  그 아파트로 들어서는 길 양편으로 하나 둘 셋…
  마대자루가 길섶의 나무마다 하나씩 도열하듯 서있다.
  윤기 없는 나무에 기대놓은 반쯤 열린 자루 속을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정지된 시간의 무더기가 하나 가득 담겨 있다.
  갈매 빛 플라타너스의 바랜 잎에 뒤섞인 노란색이 유난한
  은행잎은 밤새껏 그렇게나 많은 이별을 만들고도
  아직도 노란색갈로 치장하고 가을을 퍼 나르던 그대로
  고운색깔 흠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이 처연한 느낌마저 준다.
  그 옆으로 나란히 줄서듯 마주하고 서있는 어버이나무는
  엊그제까지도 수령에 걸 맞는 당당함으로
  꽤나 됨직한 초록의 이파리를 무성하게 매단채로 고고(孤高)한
  거인의 자태로 주위를 감싸주며 수호나무인양 자리하고 있었다.
  한때는 그랬던 이순(耳順)이 나이인 이처럼
  빛접게 서서 청록의 활기찬 생명력을 구가하기도 하였다.



  섭리란 하늘이 짊어지어준 짐이니 비켜갈 수 없는 것은
  그 은행나무도 마찬가지다. 어둠으로 가는 길목에 서서
  가을 색을 갈아입힌 자기 살점을 하나 둘 떼어내다
  끝내는 계절을 재촉하는 성화에 못이긴 차고 날선 바람이
  한바탕 휘감아 돌고는 하늘로 치솟으며 애면글면 잡고 있던
  몇 남은 이파리를 잡아끌었다. 이제는 마지막 잎마저 빼앗긴
  볼품없는 앙상한 가지만을 생명 없는 표본인양,
  신산(辛酸)에 절은 촌노(村老)의 지친 삶에 겨운 모습인양,
  늦가을 비에 흠뻑 젖은 늙은 나무의 메마른 가장이처럼,
  영락(零落)한 쓸쓸함으로 남아 텅 빈 오후의 햇살을 밟는다.
  이리저리 질퍽이는 흙탕길에 휘둘리던 낙엽이 간 길은
  핏기 잃은 시간만을 간직한 채 미련과 함께 가는 길이다.
  뜨악한 눈길로 달려가던 이순(耳順)이 나이인 이의 안타까움은
  흙탕물이 메꿎은 짓거리로 헤살질 하는 가운데 멍하니 섰다.
  정(情)이 있으니 연(緣)이 생겼다.
  그 정은 아직도 그대로요. 그 연도 아직은 변함이 없는데,
  어찌하여 모두가 끊어지는가?
  정이 다하면 연도 끊어진다는데, 그 정은 무엇이 떼어놓을까?
  만나면 헤어지는 슬픔이 있는 것이 운명이고,
  제살을 도려내는 은행나무의 그런 아픔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유한(有限)한 삶 가운데에 계절의 변화나 순환처럼
  끝자락을 만드는 멍에를 짊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가는 세월의 끝에 서서, 스스로에게 애증(愛憎)의 노래를
  가슴으로 불러야 하는 것도 제 몫으로 견뎌야하는 아픔이다.
  하지만
  은행나무 밑을 지날 때마다 가슴 한 쪽이 애달파지는 것이나,
  한여름 밤의 화려한 무대에서 펼쳐졌던 생(生)의 찬가에 남은
  그리움에 느꺼워지거나 이슬지는 것이나,
  생을 이별한 끝맺은 슬픔만이
  몇 무더기의 쓰레기로 남는 것이 남다르게 여겨지는 것이나,
  이순(耳順)이 나이인 이만이 끄덕이는 심신상인(心心相印)으로
  천년이 똑같은 순서에도 정(情)붙은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사람의 정이란 그런 것이다. 연과 정이란
  영화(榮華)와 쇠락(衰落)에도 어김없이 얽혀있어
  연민(憐愍)을 부르게 마련이 아니겠나.
  섭리는 모두에게 빈틈없이 그 같은데,
  내 삶의 빛깔은 어떤 색으로 변하고 있을까?
  기약은 일모(一毛)의 기미조차 없는 물음표이지만,
  끝은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처럼 곱디곱게 지고 싶다.
  자칭 신선인 그 친구 즐겨 쓰는 채근담(菜根譚) 이야기에
  '몸 뒤의 몸을 생각하여, 차라리 일시적인 적막을 겪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함을 당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내 삶의 진정(眞正)은
  얼마나 가까이 따라가며 고원(高遠)한 삶을 살고 있을까?
  끊어버린 생(生)의 진실에 대한 연민이 주는 것과
  뺨을 스치는 찬바람이 공허만을 뒤에 남기는 것이
  모두가 삶의 가운데서 상념이 만드는 갈애(渴愛)임에도
  정신적 소심(小心)에 시달리거나
  완전한 욕구에 대한 불만이 삶을 덮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업보(業報)가 만드는 자업자득일까?
  만추(晩秋)는 내일을 꿈꾸는 미망(彌望)이 절실함을
  이순(耳順)이 나이인 나에게 통절(痛切)하게 가르치고 있다.


댓글 1개

백성동 2009. 11. 17. 오전 11:44

장수풍뎅이 처럼 완전무장 하시고 그 안에 인생의 덕으로 쌓여진 또 다른 무장이 금강처럼 빛을 나투시내요 어르신 화이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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