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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들아 미안하다 1

윤고방 2010. 07. 10. 오후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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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들아 미안하다 1

억만 년 세월 한가운데
너른 치마 두르고 퍼질러 앉은
그녀의 가슴에 안기고부터
흙덩이에 눈이 멀어 버렸다
청치마 홍치마 상추잎에
풋고추 하나 싸고
들깻잎 치커리 쑥갓
고추장에 듬뿍 찍어
식솔들아 모여 앉아라
야박한 세상 어떤 놈의 잔치가
이 말고 더 풍성하겠느냐며
목구멍이 한참이나 행복한데
손끝에서 풍기는
풀냄새 피냄새
잡초들아 미안하구나
벌레들아 난들 어쩌랴
한 잎 푸른 남새를 위하여
한 알갱이 곡식을 위하여
몸살나게 잡초를 뽑을 것
진땀나게 벌레를 잡을 것
얘들아 귀여운 잡초들아
아무래도 나는
잡초와 벌레와 함께 살면서
텔리비젼에 자주 나온다는
그 일등 농부는 못될 것 같구나
 

댓글 5개

포아풀 2010. 07. 11. 오후 12:54

선생님, 오셨어요. 더위에 잘 계시는지요. 소식이 궁금하면 오셔서 안부내려놓듯 좋은 글 주십니다. 반가운 글, 눈에 익은 글입니다.^^

윤고방 2010. 07. 12. 오전 12:06

포아풀님, 오랜만입니다. 한동안 농삿일 때문에 꽤나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올해에는 남의 힘 빌리지 않고 집사람과 둘이서 매달리다 보니 잡초들과의 싸움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서너 번씩 땀이 뒤범벅된 옷을 햇볕에 말려서 다시 입곤 했지요. 땀이란 것이 온갖 번뇌, 욕구, 혼돈을 씻어내는 청량제 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깊이 깊이 깨우친 나날이었습니다. 향기방에 들여 놓을 여름시로 마땅한 게 없고, 글빚에 몰리는 기분도 풀 겸 묵은 골방에서 하나 골라 실었습니다. 무더위 장마 속 건강 잘 챙기십시오.

김경은 2010. 07. 12. 오후 12:16

김수영님의 '풀'이란 시가 떠오르네요.

박성실 2010. 07. 12. 오후 03:46

풍경이 그려지는 것 같아 재밌습니다. 여름내 밭과 마당우에 둘러앉은 이들의 모습과 목소리, 햇볕이 떠오르네요. 그리고 그 사이 벌레들과 잡초들에게 하시는 말씀도 즐겁게 들립니다. 아는 사람이 귀농했는데 몇 년 뒤에 보니 손이 달라졌더군요. 그 손에서는 흙냄새도 나고 잡초냄새도 나고 사람냄새도 땀 냄새도 나더이다. 이번에는 시에서 그것들을 느끼네요.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 재밌습니다.

윤고방 2010. 07. 13. 오전 12:08

김경은님, 박성실님의 방문에 감사 드립니다. 그들대로 생명의 찬가를 한시도 멈추지 않는 싱싱한 잡초들을 뽑으면서 늘 마음이 아픕니다. 채마밭을 포기해야 하나, 농부를 때려 치워야 하나. 그러니 얘들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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