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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지 1

이민수 2010. 09. 28. 오전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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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는 것 보다 더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이번에는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서인지 여행 전엔 의당 따르는 기대나 설렘도 없었고, 덜 나은 상처에 대한 걱정만 은근히 앞설 뿐, 짐 싸는 일 조차도 미적거리다가 출발 전날 저녁 무렵에야 밀린 설거지하듯 마지못해 해치우고 말았다.


이러한 연유로 출발 당일도 먼 거리를 감안한다면 좀 서둘렀어야 마땅했으련만, 평소 아이들 학교 가는 시간에야 겨우 일어나는 바람에 다소 늦어버렸다.

가뜩이나 지체되어버린 출발을 앞두고 남편은 기다리는 사람들의 초조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화장실에 틀어박혀서 도무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급기야 아이들의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장거리 운전을 감안해서 꾹 참고 있던 나도 한 잔소리 거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러나 겨우 나오긴 했지만 따가운 눈총을 받느라 허둥거리는 바람에 게이트를 닫고 막 출발하려는 순간 지갑을 놓고 왔다며 다시 들어가야 하는 사태를 벌임으로써 간신히 버티고 있던 우리들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 버렸다.



그러나 시내를 벗어나자 이런저런 출발 전의 불협화음은 바람 속에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우리는 그렇게 일상을 벗어나 삶을 재충전하러 미풍과 더불어 가뿐한 마음을 활짝 열고 서쪽을 향해 떠났다. 나흘의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난디로 통하는 단 하나의 고속도로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가끔씩 우스갯소리가 나오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고, 경치 좋은 곳에 잠깐씩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기도 했으며, 김정민의 테이프를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며 그렇게 수바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스쳐지나가면서 가끔씩 차창 밖으로 만났던 여러 가지 살아있는 것들은 가끔씩 찾아오는 우리들의 무료한 공백을 순식간에 휘저어 놓았다.

이동의 수단으로 말을 기운차게 타는 피지언과 병아리 떼의 봄나들이를 연상시키는 백인가족의 말 타는 모습은 묘한 대조를 이루었으며, 집 앞 개울가에서 천진난만하게 물장구치던 어린 아이들은 내 어릴 적 향수를 불러 일으켰고 ,풀밭을 뛰놀던 귀여운 돼지새끼 두 마리를 보고 내가 “멋진 바비큐꺼리인걸.” 했을 때 쏟아지던 아이들의 비난, 더운 날씨에 철망 속에 빽빽하게 가둬진 닭들과 오리들은 아이들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집 앞이나 길거리에 놓여있는 크고 작은 가판대 위로 채소나 과일이 놓여 있는 풍경은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채소나 과일이 풍성한 가판대는 드물고 바나나 몇 송이, 만다린 한 접시, 푸성귀 두 묶음. 이런 식으로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허름한 것이 대부분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인디언 청년이 한적한 길가에서 나무궤짝 위에 롱빈 두 묶음을 놓고 팔리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 차가 다가가자 한 묶음의 롱빈을 들어 올렸는데, 순간 나는 차를 세워놓고 그것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외출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팔아서 읍내에 나갈 차비라도 마련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만 그럴 뿐,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는 이미 그의 모습은 내 시야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싱가토카를 지나자 여기저기 어린 양처럼 순하디 순한 낮은 능선들이 어깨동무를 하듯 정다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내 마음을 나긋나긋하게 매만져 주었을 때 난 갑자기 평화의 바다에 침몰된 듯 했다.

온종일 보고 있어도 질릴 것 같지 않은 그 모습을 랜즈에 담고 싶어 서둘러 셔터를 눌러보지만 카메라에 갇히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 그들은 번번이 나보다 더 황급히 달아나 버렸다.



4시간을 달려서 데나라우에 도착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숙소인 골프 테라스를 찾을 수 있었고, 번잡스러움 없이 바로 체크인을 끝내고 성격 급한 한국인들답게 헬퍼의 도움 없이 짐을 메고 들고 이층에 위치한 우리 방으로 돌진했다. 부엌이 딸린 숙소는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해서 먼 거리를 달려온 우리들에게 생기를 제공해 주었다.

남편과 내가 가져온 식품들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점심식사 준비를 마치는 동안 아이들은 침실이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 넓은 베란다가 붙어있는 전망 좋은 방을 차지하고 옷가지 등을 꺼내 정리를 하느라 식사준비로 바쁜 우리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진이가 “이모, 우리 하룻밤만 더 자고 가요”하며 조르기 시작했던 것이.

처음엔, 그럴 수 있지 싶어 가볍게 흘려버렸는데, 시도 때도 없이 조르다가 나중에는 아예 애원을 한다. ‘굶어도 좋으니 그냥 있게만 해 달라’며 막무가내로 조르는 그 아이를, 일박 이일을 예정으로 모든 물품이며 여비를 준비해온 터라 일정을 변경하기가 힘든 상황이라는 말로는 설득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뭔가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일이 없던 아이라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고, 이틀 분의 식량으로는 충분치 않지만 그런대로 넉넉히 준비해왔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으나 쉽게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



다소 늦은 점심밥을 게 눈 감추듯 하고 섬에 포진해 있는 리조트들을 두루 섭렵했다.

2년 전에 우리들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던 The Westin Resort를 시두로 해서, 한국 국기가 펄럭이던 Sofitel Fiji Resort & Spa, 그리고 화려한 변신에 성공한 Sheraton 등을 감탄의 눈빛으로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화려하던 날씨가 잔뜩 심통난 사람처럼 돌변하기 시작하더니 빗방울까지 날리기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 일행은 날씨야 변덕을 부리던 말든 수영장으로 직진했다.

비오는 날, 집에서 아이들이 수영하는 모습이 참 재미있어 보였던 나는 속으로 내심 잘됐다 싶었지만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어 바로 나왔는데 물 밖은 의외로 선득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좀 더 있자는 아이들의 성화가 빗발쳐 다시 풀 안으로 들어가 수영 못하는 설움을 참아가며 재미없이 혼자서 물속을 퐁퐁 뛰어다녀야만 했다.



사납게 심술을 부리던 날씨는 모처럼 나들이한 우리들의 마음을 헤아차렸는지 쉽게 기색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풀장에서 돌아와 따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거실 소파에 제각기 편한 자세로 널브러져 재미있는 영화 한편을 보고, 저녁을 먹은 다음, 낮에 들르지 못했던 리조트 Radisson에 가보기로 했다.

2년 전에 Sheraton에 묵었을 때는 한창 기초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어느새 완공이 되어서 Westin을 제치고 데나라우의 왕관을 차지할 만큼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의 내년 여행목적지가 바로 정해져 버렸고 남편은 어느새 리셉션에 있는 젊은 여자 안내원에게 그 호텔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었다.

멋진 성으로 둘러싸인 유럽의 어느 마을 같은 Radisson 호텔의 야경을 음미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칠흑 같은 어둠에 모든 것이 파묻혀 잠시 길을 헤매기도 했다.

어둠은 점점 짙어지고 밤도 깊어만 가고 눈꺼풀위로 파도 같은 피로가 몰려왔지만 나는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 채 늦도록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떠있는 밤배처럼 뒤척거려야 했다.



댓글 8개

포아풀 2010. 09. 29. 오전 11:08

마치 제가 이국에서 행복한 여행을 하는 듯 여유롭게 읽었습니다. 바쁘게만 살아가는 요즘의 일상에서 잠시 쉬고 싶다는 느낌을 글에서 받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박성실 2010. 10. 01. 오후 02:48

어느 영화의 한 장면내지는 소설의 한 장면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재밌어요. 저도 다녀온 여행의 족적을 남기는 것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좋은 가을 되세요.

전수랑 2010. 10. 11. 오후 01:46

와우~~파라다이스!! 제법 쌀쌀해진 요즘, 무척 그 곳이 그리워집니다.

신상성 2010. 10. 13. 오후 10:17

1. 이민수 씨의 반가운 수필작품을 여기서 만나니 더 반갑습니다. 이번 수필은 이제껏 보다 훨씬 '현장감'이 있어서 좋습니다. 그런데, 난디에서의 일 가운데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주제나, 또는 철학적인 고뇌 같은 것이 삽입된다면 더욱 깊은 인상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2. 오늘 임건태 선생님에게 이메일도 보내드렸습니다. 이번 한국유학생들 현지 확인문제로 19일(화)에 피지로 들어간답니다. 업무완료 후, 귀국할 때, 난디의 호텔도 하나 추천해 주세요. 3. 사색의 향기-카페(맨 위 오른쪽)-> 따근따끈카페(오른쪽 중간)-> '신춘문예 예비평가실 아카데미'를 개설했습니다. 먼저 들어가서 '출석부'(고유번호)에도 올리세요. 앞으로 우리가 열심히 이 아카데미를 성실하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3. 특히, 이곳 '수필 창작실' 등에 이 선생님의 '남태평양의 피지통신'이란 제목으로 그 동안에 쓴 수필들을 충분히 다시 손질한 후, 매일 한편씩 올려보세요. 새로운 소재가 될 것입니다. 신두목 왈.

이민수 2010. 10. 14. 오전 07:53

교수님 이 공간에서 만나뵙게 되다니요. 너무 반가워 말문이 막힐 지경입니다. 늘 젊은이 못지않은 열정과 풋풋한 감각으로 사시는 교수님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웁니다. 다음 주 화요일에 오신다니 정말 기다려집니다.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라구요, 큰 조언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이민수 2010. 10. 14. 오전 07:58

아직 덜 여문 글, 염치없이 올렸는데, 좋은 댓글 남겨주셔서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민수 2010. 10. 14. 오전 08:03

사색의 향기 여기저기 성실님의 흔적과 많이 만났습니다. 댓글도 멋지네요. 여기는 우기가 끝나고 남태평양의 태양이 작열하는 건기로 넘어가는 도중입니다. 한국의 가을하늘은 아직도 물방울이 뚝 떨어질것 처럼 파란지요. 그립습니다.

이민수 2010. 10. 14. 오전 08:15

'피지는 파라다이스' 난디 해변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글귀죠. 데나라우에 처음 온 사람들은 어디로 눈을 돌려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곤하지요. 이미 다녀가신 것 같기도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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