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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박성실 2011. 01. 10. 오후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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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디서든 구제역 뉴스가 즐비하다. 텔레비전을 틀면 구덩이 쪽으로 몰린 소와 돼지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벌써 살처분된 개체수가 백만 마리를 훌쩍 넘었으며, 과거 독일과 대만에서 있었다는 재앙에 가까웠던 구제역 사례를 들면서 그 참혹함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잘, 농민들의 생활고라던가 이농현상에 대한 회의 섞인 한탄으로 옮겨 간다. 그러면 우리는 농민들의 현실이나 사지로 몰리던 소나 돼지보다는 우리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다 착잡한 마음으로 대화를 끝낸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온 구제역 관련 보도를 들으며 나는 문득, 지난주 MBC에서 방영된 ‘아프리카의 눈물’에서 보았던 흑인 아기가 생각났다. 최근 그 아이가 살고 있는 사하라사막 인근지역에는 혹독한 가뭄이 지속되고 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그 조그마한 아이는 살갗 위로 뼈의 모습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모자를 비추며 내레이션은 이곳에서는 6명 중 1명의 아이가 기아로 죽는다는 통계를 내 놓는다. 파리가 맹렬하게 달려드는데 힘없이 떨어진 아이의 자그마한 손은 움직이지를 않는다. 나는 내 아이의 하얗고 포동포동 살이 오른 손을 떠올리다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의 마른 눈물에 함께 울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왜 구제역 뉴스를 들으면서 아프리카에서 기아로 죽어가는 한 소년의 눈동자를 떠올렸을까? 그 눈동자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어가고 있는 유약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인가? 혹은 그저 연속되는 슬픔의 감정을 내 멋대로 연결시킨 것인가?

  클로즈우업 되었던 아이의 눈동자가 생각난다. 그 눈동자는 긴 속눈썹의 소의 것과 닮았다. 유난히 검던 슬픈 눈, 가만, 그 눈동자에 무엇인가 맺혀 있었다. 아, 그것은 나, 그 앞에 선 나이다. 내가 보았던 그 아이의 눈동자 안에, 소의 눈동자 안에 내가 있었다.

  그 안, 나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그러다 오래도록 보는 것이 힘들다고 회피하고 싶어 한다. 눈물을 훔친다. 값싼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나는 그래도 그들을 애도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자위한다. 그러다가 누군가 구제역과 빈민구제에 대하여 화두를 던지면 누구보다 근심어린 표정과 말투로 통렬한 감정을 토로한다. 그리고 온갖 문제점들을 들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고 나서 돌아서면 내 마음에 허망함이 밀고 들어와 텃세를 부리고 나는 무기력해진다. 그 사이 그들은 내 눈 앞에서 그런 나를 보면서 저 너머로 간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삶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애써 회피하려고 했던 물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댓글 14개

정상근 2011. 01. 11. 오전 12:26

무엇 하고 있는가??...쩝..글 쓰셨자나요..ㅋ 문제가 좀 심각하긴 한데..참..답답하기만 한 일이지 뭐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이나마 표현할 밖에..ㅠㅠ

박성실 2011. 01. 11. 오전 09:58

그러게요.... 지금으로서는 글을 쓰는 것을 할 수밖에 없네요. 그래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그 짐을 다 짊어지지는 말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더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포아풀 2011. 01. 11. 오전 11:25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고작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네요. 그러나 그런 의식이나마 가지고 있다는 것도 어쩌면 다행일지도... 성실님, 생각이 젊고 공정하고 살아있는 정신을 느끼게 하는 분입니다. 가끔은 안이함에 젖은 나를 일깨워 주는 글입니다.

김재원 2011. 01. 11. 오후 02:05

가축 또는 동물이라는 생명체를 가까이 하다보면 단순히 동물이 아닌 가족이라는 개념을 갖게 된다지요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할 뿐 인간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런 가족과 다름없는 가축을 살처분 해서 땅속에 파묻는다는 것 ..... 고통이겠지요 어쩌다 운좋게 사색의 향기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았던 \" 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 라는 책을 보니 가슴아픈 현실들이 너무나 많더군요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그들.... 그들에게 아픔이란 왜 늙을 줄을 모르는지.. 그런데 ... 그때 과연 나도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박종영 2011. 01. 12. 오전 12:53

나라안이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국가재난 사태입니다 하루 빨리 치유를 위하여 모두가 동참해야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성실 2011. 01. 12. 오전 09:46

개척자들이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분쟁지역에 들어가서 평화캠프를 하기도 하고 무너진 사회를 재건하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 단체가 시작될 때 저는 참 무모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젊은이였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일에 매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용기가 부러웠습니다.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그 근원이 무엇인지,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어요. 그런데도 저는 비겁함 뒤로 숨으며 도통 헌신이라는 것을 할 수 없더군요. 비폭력에 대한 책을 쓴 신학자 중에 월터 윙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폭력적이다. 우리가 어느 날 비폭력, 평화에 대하여 깨달았다고 해도 갑자기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지속적으로 자극되어 쌓이고 훈련되어 어느 순간, 그런 사람으로 변화해 가는 자신을 볼 것이고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계속 대체 방안을 생각해 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뭐 그런^^ 포아풀님, 눈이 많이 내리네요. 군대에 간 아드님이 생각 많이 나시겠어요. 여전히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 항상 포아풀님의 댓글이 반갑기만 합니다만, 너무 바쁘실 때는 건너 뛰셔도 됩니다. 나중에 오셔도 여전히 반가울 거예요. 건강 항상 조심하시고요, 바쁜 날은 바쁜 대로 좋은 날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성실 2011. 01. 12. 오전 09:55

김재원님, 감사합니다. 김 훈 작가의 소설 '현의 노래'는 가야의 순장 예식을 시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문장이 간결하고 객관적임에도 그 비통함에 대하여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그것이 말씀하신 생매장, 살 처분이네요. 지구상의 생명체라면 언젠가는 죽는 것인데, 그 마지막이 어떠하냐, 윤리적이냐, 그것을 따지는 것이 부질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저의 가슴은 계속 말을 거네요. 옳지 않다. 눈동자에 맺힌 나의 모습이 다음에는 달라질 수 있도록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들려 주셔서,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운 날씨에도 건강하세요.

박성실 2011. 01. 12. 오전 09:57

네 시인님, 모두가 동참해야 합니다. 날이 무척 춥습니다. 북극이 따듯해지면서 저기압이 밀려 나와 전세계가 기상이변이라는데, 북극의 기운을 데리고 온 인간의 잘못을 따지자면 이런 추위쯤은 견뎌야 하는 것이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건강 조심하셔요.

최인구 2011. 01. 12. 오전 10:56

문제라는 의식을 지니기 위해서는 오랜 관찰과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걸 통틀어 ‘생각’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한데 생각의 수준은 그 사람의 인격에 따라 달라지리라 여깁니다. 그런 면에서 성실님은 요즘 생각의 호수에 자주 잠기시는 것 같고 깊이를 찾고자 갈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요 아래 양심수나 사상범 같은 생각의 고수들은 독방에서 깊은 사색에 잠기며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는 어떤 분의 얘기에 큰 공감을 받으며 여러 고민을 함께 했었지요.. 생매장 당하기 전 도망쳤던 궁녀 아라가 생각납니다.(현의 노래에서...) 신분의 귀천만으로 무능력하게 죽은 왕 옆에 생매장되어야만 했던 비애가 쓰디쓰게 다시 떠오르는군요. 원래 권력 맨 꼭대기에 있던 사람들은 땅에 뭔가를 파묻는 걸 좋아했나봅니다. 도자기, 귀금속, 칼, 거짓말, 말, 노비 등등 참 미련하고 포악한 영장류인 것 같습니다. 유능한 생체학자들이 빠른 시일 내에 간염백신을 개발하여 산 채로 흙을 덮어 쓰는 일이 없기를 성실님과 함께 문제의식을 가져보면서 이만 물러갑니다. 성실님~! 오늘 하루 행복하세요...bye

윤고방 2011. 01. 12. 오후 05:34

박성실님, 요즘 자주 뵈어도 더욱 반갑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온 지구를 뒤덮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몹시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선 '망각'이란 명약이 필요하고, 곧바른 진전을 위해서는 '긍정'이란 보약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문제를 문제로 볼 수 있는 따뜻하고 '성실'한 눈매가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만 세상이 좀더 인간다워질 것 같군요.

미오새 2011. 01. 13. 오전 10:21

*성실님.. 오래 전, 텔레비젼의 어느 시사프로그램에서 방영되었던, 고등학교에 재학중에 임신하여, 유산을 목적으로 독한 약을 복용한 결과 두 팔이 없고, 두 다리도 기형이며 입천장이 없는 \"피에르 로빈증후군\"을 가지고 미혼모의 몸에서 태어난 한 아이를 보면서, 그리고 성실님의 글에서도 언급한, 참혹한 현장에 방치된 생명들을 보면서, 훗 날 하늘에 가면 신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게 하나 있었어요. 인간이 가장 절제하기 어려운 욕망 속에 씨가 전해지는 비밀을 숨겨 두신 연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세상에 나와서 처참한 환경에 내몰리는 연유가 무엇인지... 수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의 눈물을 시청하였겠지만, 성실님처럼 마음의 소회를 적나라하게 밝힌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런지...? 생명의 경외심이 결여된, 욕구속에 씨가 전해지는 비밀을 숨겨 두신 연유는, 언제인가 신이 설명하여 주시겠지만, 우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참혹한 상황을 외면하고, 방기(放棄)하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우리 돈, 몇 천원이면 아프리카, 기아에 신음하는 아이들의 한 달 먹거리를 해결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지폐 몇 장을 후원하는 일밖에 없겠지만,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요. 성실님 스스로,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문하셨지요? 지금 성실님은 그들의 참혹한 현실을 알리고 있잖아요. 새댁들의 보편적인 관심사는 육아와 살림, 재산불리기에 집중되어 있을것 같은데, 이웃집 새댁 성실님은,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근원적인 삶의 가치를 추구할려는 욕구가 강한 것 같아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장면에서도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은 감동을 받는 것처럼...

박성실 2011. 01. 13. 오전 10:25

혹시, 아침에는 hello~ 저녁에는 bye를 해야하는 직장에 다니시나요? 인구님만의 인사법이 참 재밌습니다. 헤헤 친근해요. 유쾌한 것 같기도 하고... 궁녀 아라가 쓰디쓰게 떠오른다는 말과 뭐든 땅에 파묻는 걸 좋아하는 포악한 영장류라는 말이 참.... 그게 나 이군요. 토마스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세계의 인구는 계속 늘어날 것이고 식량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모든 연구나 빈민을 구제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답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는 천재적인 학자였으나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라는 책에서 말하더군요. 저는 인간이 내재하고 있는 그 포악함에 대해서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구나 생각하다가, 그렇다면 인간을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 주저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머리는 말합니다. 믿을 수 있다. 한 사람의 힘은 위대하며 모든 일의 시작이다. 그러나 제 가슴은 이런 사회적인 현상을 보면서 자꾸만 주저합니다. 맬서스 처럼 말이죠. 그래도 그와 같은 결론은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는 아들이 있는 엄마거든요. 뭔가 거창하게 보이는 모든 것의 이유는 아주 사소한 나의 현실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구제역과 AI 사건, 그리고 북극에서 밀려난 저기압에 시름하는 여러 반도를 보면서 내가 어디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 계속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의 문제라는 글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이 있다는 것을 저는 요즘 여기서 배우고 있습니다.

박성실 2011. 01. 13. 오전 10:38

네 저도 무척 반갑습니다. 그리고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윤고방님, 오늘도 제 글의 핵심과 헛점을 잘 짚어주셨네요. 제가 아프리카에 잠시 가 있을 때 만난 소년이 있었죠. 저는 소년원에서 자원봉사를 했었는데 아이들에게 이야기했죠. 소년원에서 나가면 집으로 가라. 부모님이 때리거나 못 살게 굴면, 가까운 보호시설이나 교회를 가라. 그리고 몇 달 후 길에서 친구들과 구걸하는 그 소년을 또 다시 만났죠. 제가 그 때 느낀 것은 이것이 저 아이의 현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것, 어쩌면 나의 시선은 나의 감정과 선입견과 지극히 사소한 개인적 이유에 가려져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 그들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고 할까요? 내 상상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 그곳에 다른 삶이 있다는 것, 자책할 필요도 없지만 나의 동정이 값싼 것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말이죠.

박성실 2011. 01. 13. 오전 11:04

네, 저도 듣고 싶습니다. 사실 지금도 계속 물어 보고 있으니, 그 때가 되면 그 속내, 시원히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것이 흔히 말하는 업보라는 것이구나 라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에게 자연적인 변별력을 주셨죠. 그것을 본능의 영역이라고 해도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랫동안 철학자들이 논해 왔던 성악설, 성선설이 옳으냐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측은지심과 같은 것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혹은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라던가 하는 것 말입니다. 곧 우리에게는 흔히 말하는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내재되어 있는 것 아닐까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그런 분별의 소리를 탐심으로 눌러 버렸고, 그 결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책임을 서로에게 떠 넘기고 싶은 것일까요? 어쩌면 신에게까지 말이죠. 미오새님, 제 글을 꾸준히 읽고 수다에 동참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다소 무거운 주제로 자꾸 글을 쓰게 되는 요즘이지만, 이렇게 기꺼이 독자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어서 더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감사드리고, 한가지 더 말씀 드리고 싶네요. 저는 미오새님의 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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