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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꽃 담장을 지나며
나팔꽃 담장을 지나며
야반 도주 연습하듯 내려가는 이층 계단이 꼭 마흔 한 개란 사실을 기억해 낸 것은 아침마다 지나치던 담장을 톡톡 본 후였다. 잘 다녀오라는 아내와 아이들의 기다란 소리를 엇몸으로 자르던 골목 틈새. 담장에 매달린 나팔꽃이 제 얼굴을 곳곳이 세우고 내 곁눈을 찌르는 순간이었다.
흥, 담장이나 끼고 얼굴이라 뽐내는 주제에!
뭐, 뭐라구? 무슨 소리야? 이건 내 땅 내 집이라구. 너희가 보이는 곳마다 말뚝 박고 집 짓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라구. 뿌리 하나 반반하게 내리기 위해 자 보라구. 이 손이며 발, 머리 허리는 또 어떻구. 닿는 곳이면 끌어안고, 코 앞 어느 것이든 눈을 부라려 내 씨앗 것이라며 흘리는 이 땀과 피를 보라구. 밤마다 새 날 기다리는 일에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세우는 고개. 머리카락 움켜쥔 채 숨죽이는 내 몸뚱어릴 보라구. 울지도 웃지도 못해 떠도는 이슬이 찢겨진 얼굴 적시는 것쯤 뭐 대수겠어. 멈출 순간 찾지 못해 땀과 피 대신 움먹거리는 이슬이 훌쩍훌쩍 흘러 다니는 몸뚱어리를 어찌 숨 길쭉하게 내쉬고 내 것이라며 아침마다 한 번 제대로 볼 수 있었겠느냐구. 바라건대, 내 얼굴보다 찌그러진 그대 얼굴이나 잘 보라구.
나팔꽃마다 떨어질 번호를 새겨두었다. 꿈벼랑에서 비틀 먼땅 보던 버릇인양 삼키는 침이 꿈틀거렸다. 햇살 질끈 밟았다. 둘 혹은 셋으로 부서지는 그림자.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이빨 끙 물었다. 그래도 손잡아 앞서는 그림자. 나팔꽃도 처음엔 혼자였었다라는 흔적이 갈라진 담장 상처마다 딱딱한 먼지로 쌓이던 아침이었다.
댓글 1개
꿈벼랑에서 비틀 먼땅 보던 버릇인양 삼키는 침이 꿈틀거렸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존재는 꿈꾸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릴 수 밖에 없네요 좋은 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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