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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1. 한 울림소리)

박상덕 2012. 06. 16. 오후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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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우주기원론과 창조신화)


- 1. 한 울림소리 -
신이 우주를 창조한 게 아니다.
(God did Not create the universe.)/Stephen W. Hawking

…한순간 숨이 막혔다.
어떤 메시지가 이토록 격했을까.
칠흑 같은 밤에 들렸던 그 소리⑴가 이랬을까?
그때도 바람처럼 날리던 한 울림에 지금처럼 둥갰을까?
하지만 어떤 소리도 이보다 더한 두려움으로 짓누르진 않았다.
도리질까지 쳐보지만 화들짝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엔
한 마디의 광풍에 패인 자국이 너무나 깊다.
감사나운 태풍에 가로수 몇 개가 뽑혔다고 초점을 잃겠는가.
이성을 동강내 방탕의 늪에 빠트려 추하게 만들고
정의조차 허물로 가득 덮어 보잘것없는 허깨비가 되게 하고
선악에 대해 갖는 지독한 회의는 온갖 두려움에 싸이게 할 것이다.
모든 게 겉보기 지평면에 걸려 빛조차 빨려 들어간 암흑처럼
혼돈에 휩싸인 그물 속에 갇힌 채 아우성만 남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그 소리처럼 경이로움이라면,
자기 갱신적 체계역학의 게슈탈트로 만들어 생명의 자기조직에
재울 수 있는 기회를 잡는 대단한 행운이 되겠지만
내 안의 뉴런을 모두 동원시켜 자극해도 눈치 챌 수가 없다.
내친김에 이력이 났다는 머릿속을 들쑤셔 기억의 창고에서 찾아낸
과거의 온갖 사상(事象)들과 제짝을 맞추려 해도 그마저 없다.
어쩔까? 오늘까지의 가치는 내일로 물거품이 되어야하나?
태초의 불가사의⑵에서 세계가 열린 후에
또 다시 천둥소리가 천지를 뒤엎으며 흔들고 있다.
대체 뭔 일이 벌어졌을까?
이는 년 전에 한 과학자의 주장으로 야기되어
세간에서 격렬히 회자되던 화두였다.
창조이야기는 신화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일 뿐이고
창조론적우주관은 이전시대에서 이미 종말을 고했던 세계관이다.
이는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대부분은 그런 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세상 밖으로 굳이 끄집어내 발칵 뒤집으면서까지
과학적인 설명을 더하려는 의도는 뭐였을까?
같잖은 결기론 어림도 없는 사안이니 객기나 허세는 아닐 테고
엄청난 논쟁을 불러올 것은 빤한데, 뭣 땜에 설레발을 쳤을까?
그 옛날 데카르트는 진즉에 포기하고 돌아서지 않았는가.⑶
결국은 우려하던 방향으로 사태가 발전되었다.
편 가르길 좋아하는 세태가 사단이 났으니 나둘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고 우리만이 유난스레 난리굿을 친 게 아니다.
온 세계가 이말 한마디를 체 위에 올려놓고 호들갑을 떨었다.
지나간 옛 시대의 사고가 아직도 팽배한 집단에선
펠라기우스에 가했던 이단의 죄목이 다시금 떠올려졌는지⑷
이게 웬 망발이냐고, 난도질하듯 처음부터 손가락질이 난무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더러더러 나왔다.
관념의 노예가 된 이부터 파란 이성을 가진 이는 물론이고
무관심했던 이까지도 기웃거리며 여러 의견이 찬반으로 나뉘었다.
한 동안은 육지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에 설왕설래했지만,
여지없는 망각의 시간이 흐르자 수군대던 소리도 가라앉았다.
그래도 육지건 바다건 가리지 않고 길길이 날뛰며 비난하던 거나
봇물 터지듯 여기저기 한꺼번에 나서서 언성을 높였던 게,
그 후에도 여진처럼 이어지는 것이 예사롭진 않지만,
괜스레 하는 걱정이기를 기대할 뿐이다.
새로운 사조(思潮) 앞엔
사회질서 전체를 뒤엎는 혁명적인 질적 변화가 따른다.
이는 '관념화된 질서(신념)⑸'에 대해
그것이 지난 시대부터 이어진 구태라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시대상으로
굴곡진 역사성이 더해져 단단한 바위처럼 철옹성을 지어놓았지만
경험이 일러주듯 뛰어넘어야 전진이 가능해짐을 말한다.
따라서 고착화된 개념의 한 자락에라도 개입하면
생각보다 큰 벽에 부딪쳐 싸워야하는 어려움이 뒤따르지만
그렇더라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려면 어차피 피해갈 길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진실을 하늘에 맹세코 말한다 해도
거대한 집단을 상대하여 대놓고 얘기하긴 겁나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한쪽으론 터무니없는 바보짓을 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일이란 때에 이르러야 본연의 기운이 나타나듯이
'면면과질(緜緜瓜瓞:길게 뻗은 오이덩굴)⑹'이어야 쓸모가 있고,
'부절(符節)이 서로 맞아야 부드럽게 돌아가지 않겠는가⑺'고 했던
옛 사람의 충고가 오월의 백합꽃처럼 밝은 빛으로 일깨워 준다.
과연 합리적인 발상일까?
이는 충분한 이론적 근거가 토대라고 했다.
주장엔 타당성이 있을까? 과학적 추론으로 얻은 결과다.
벽견(僻見)은 없었을까?
갈릴레오로 대표되는 정통과학의 탐구정신은
창조과학과 같은 유사과학을 배제하며 이어져 온 오랜 전통으로
조작된 논리를 용납지 않는 정화기능은 학자적 양심이 갖는 힘이다.
이는 지난 시대 수백 년의 수난을 거치면서 터득한 지혜다.
거기에다 수천 년의 인류역사가 주는 교훈까지 거들어 준다.
처음엔 별난 의심까지 다해야했다. 그만큼 무척 당혹스러웠다.
그렇다고 아주 틀린 말이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시대가 고착화된 이념의 지배에 허덕이고 있다.
오늘도 겪고 있는 관념의 굴레가 모질게도 옥조이고 있지 않은가.
자연의 작동방식에 무지했던 고대의 어느 시기에
고센(Goshen)의 비옥한 토지를 차지하며 풍족하게 살다가
그들을 옹호하던 힉소스왕조⑻가 몰락하여, 요셉에 의해 주어졌던
한 때의 배려마저도 애굽 본토인의 원성으로 되돌려진 업보로 짓누르자
상위계층에서 피지배계층으로 전도된 한 민족이 억압을 벗어나려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지었다는 옛날 옛적의 천지창조 이야기⑼를
그 민족이 역사의 부침을 이겨내고 명맥을 꾸준히 이어오며
민족의 얼이 정채(精彩)를 더해 지선(至善)이 된
분명히 남의 집 이야기일 뿐인데도,
그것도 왼 만큼 깬 민족이면 빠짐없이 가지고 있다는 창조설화인데,
아직까지도 금과옥조인양 요지부동으로 껴안고 있다.
제 4의 물결이 밀려오는 21세기의 패러다임에 맞는 삶이냐?
어찌해서 도대체 변한 게 없는가? 참으로 엉뚱하지 않느냐.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었듯이 이치가 참으로 밝혀졌으면,
이제는 진실을 향해 바뀌어야 마땅하지 않느냐.
그런데도 꺼리는 게 있는지, 꿈쩍도 않은 채 그대로다.
일부에서는 옛날에 선조가 당했던 중세의 억압이 그렇게나 그리운지
한술 더 떠, '진화론적 사고'를 걸고넘어지며 오히려 세월을 탓한다.


* ⑴ 「누가복음서」에 노숙하고 있는 목동들의 눈앞에 별안간 수많은 천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신의 탄생의 고지(告知)를 받은 자'로서 고른다. 이 장면은 히나야나(hinayana, 小乘佛敎) 불교철학의 팔리어 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경전의 하나에 나오는 예언자(仙人) 아시타의 환상과 노래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있다.① 이 하늘의 천사들의 노래(눅 2:8-14)와 시므온(Simeon)의 노래(눅 2:25-35)는 두 곳의 경 사이에 몇 가지 구절의 유사함이 전체로서 극히 근밀(謹密)한 것으로 맺어져 우연으로 치우치기에는 너무나 확연히 들어나 있다.②
- ① 《숫타니파타(Suttanipata) 卷3, 2:679-700》
- ② 아놀드 J. 토인비, 1976, 《역사의 연구》 卷7 「문명의 붕괴와 세계국가」,五部. 문명의 붕괴(續)/C-Ⅱ(a)補論Ⅱ. 수난(受難)의 그리스도, 허구와 진실(Dichtung und Wahrheit) 註2, 『복음서와 불타 전설사이의 이 일치점에 대해서는 Aufhauser, J.B. : Buddha and Jesus in ihren paralleltexten(bonn 1926, Weber)에 의함.』인용
  '…/이 설명은 간단하지만 꼭 수궁되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도 사회와 시리악(Syriac) 사회는 어느 편이나 미개생활로부터 발생한 초기문명은 아니며 또한 일치의 근밀함이 세부의 점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만일 이들 전설이 아무리 늦게 보아도 BC 4백 년대 이래 두 개의 다른 〈민간기억〉의 흐름을 내려왔다고 하면 일치가 이 만큼 근밀한 채로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와 가우타마의 이야기의 공통요소는 아마도 시리악사회나 인도사회의 특유한 〈민간전승〉군(群)에 기원을 갖는 것으로 이들의 요소가 포함되고 있는 기독교와 불교 성전의 가장 연대가 새로운 것일수록 그렇게 앞의 것이 아니고 최고의 것보다 상당히 후의 시기에 시리악세계로부터 인도세계엔가 혹은 그 반대로 인도세계로부터 시리악세계에 전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같이 생각된다./…/'
* ⑵ 인류최초의 고대문명인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sumer)는 '옛날에(u-ri-a)', 히브리사람들은 '태초에(Bereshith,berēšît)',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는 '원각(圓覺)', 현대우주론에서는 '특이점(特異點,singularity)'이라 부른다. 고대 중국에서는 태일(太一)이라 했다. 대일(大一)∙태을(太乙)∙태일(泰一)이라고도 하며, 태극(太極)이나 도(道)와 같은 개념이다. 《예기(禮記)》,《장자(莊子)》,《여씨춘추(呂氏春秋)》,《회남자(淮南子)》등에 따르면 만유를 포함하는 대도(大道)이며, 천지창조의 혼돈된 기(氣)∙도(道)를 뜻한다. 《사기(史記)》의 「봉선서(封禪書)」와 「천관서(天官書)」에는 천신(天神)이 거주하는 자미궁(紫微宮)이라 했다. 《예기(禮記)》와 《공자가어(孔子家語)》「예운(禮運)」과 《여씨춘추》「대악(大樂)」에서는 태일을 예악(禮樂)의 근본으로서 천지(天地)∙음양(陰陽)∙사시(四時)∙귀신(鬼神)을 분화시키는 본원으로 풀이했다. 특히 《여씨춘추》는 태일에서 양의(兩儀)와 음양이 생겨난다고 하여 이것을 태극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장자》「천하편(天下篇)」에서는 노자의 주요사상을 태일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태일은 도이다. 도는 일(一)에서 나오므로 도 자체가 태일인 것이다. 또 《회남자(淮南子)》「숙진훈(俶眞訓)」에서는 '有始者(태초, 존재의 시원)'인 상태로, 풍수지리의 원전(元典)인 《청오경(靑烏經)》은 '반고적 혼돈 상태(盤古渾淪)'로 보았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혼돈(混沌,Chaos)으로 정의했다. '혼돈'은 '형체가 없는(without form, 形が なく)' 상태이다.
* ⑶ 인간의 순수하고 올곧은 이성을 곰팡내 나는 쓰레기로 만들고, 우주의 가장 깊은 못(池)에 떨어뜨리는 것은 이성에 대한 탄압일 것이다. 중세유럽의 신본주의 시대는 수탉이 아침을 깨우는 나팔소리로, 그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한껏 올려, 낮의 신을 깨운다고 해도, 나락(那落)의 심연에 깊이 빠져 헤어날 수 없는, 그대로 몽리(夢裏)를 헤매게 만들었다. 자기 것만 챙기려고 남을 비난하는 것에 익숙해진 집착의 결과로 창조적인 선각자에 대한 단죄는 수없이 집행되었다. 이는 실제로 핍박을 당한 사람 외에도, 르네 데카르트(Ren Descartes, AD 1596∼1650) 같은 처지의 지식인도 많았다, 그는 AD 1633년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에서 우주론과 물리학을 다룬 《세계(Le Monde)》를 출판하려 했으나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포기했다. 그는 '사람이 신(神)을 너무 생각하다 보면 분별력을 잃는다.'며, 하늘의 진리를 자신들의 편의에 맞게 왜곡시킨 세상이 우리 모두를 아집에 싸이게 하고, 편을 갈라 독선으로 흐르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 시대는 오로지 기계인간 같은 무뇌인(無腦人)이 유일한 미덕이었던 복종과 충성만을 받쳐야 했던 획일화된 단조로운 세상이었다. 신의 세계를 금단의 영역으로 선을 그어놓고, 절대가치화 된 의문의 세계로 만들어 놓았다. 이처럼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무지의 껍데기를 씌워 순종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은 교리에 대한 어떠한 반문이나 비판에서 초월한 굳건한 왕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⑷ 펠라기우스(Pelagius, AD 354∼418) : 로마가톨릭 계통의 정통교리와 어긋나는 주장을 펴다가 이단자가 되었지만, 평생을 근엄하게 살았던 영국의 수도사이다. AD 41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Innocentius) 1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인노켄티우스 교황을 계승한 성 조시무스(Saint Zosimus)는 재심을 통해 펠라기우스의 〈신앙에 대한 짧은 진술(Libellusfidei)〉에 근거해 그를 무죄로 선언하기도 했지만, 이듬해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문제가 제기되자, 그를 단죄하는 공의회의 9개 교령을 승인했다. 그 후 펠라기우스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그는 원죄(原罪)를 부인하며 아담과 이브의 죄는 그들에게만 작용하고 후손에게는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이론을 폈다. 예수 없이 세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 한다고 주장하며, 죽음은 죄와 관련 없는 자연적인 것으로 유아는 죄가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사회의 주체이며, 최고 권력집단이기도 했던 교회에 대한 저항으로 간주되었다. 그의 주장은 AD 431년 3차 총회에서 이단으로 최종선고를 받았다. 그의 바르고 근엄한 수도생활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펠라기우스는 신의 품안에서 그의 신적영감을 애기하려고 하였으나, 그 교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인간 본성의 선함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 ⑸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著/홍영남 譯, 2006,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논자 주 :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와 신앙을 직설적으로 비판할 뿐만 아니라 종교의 순기능조차 인정 않는 반종교적인 과학자의 한 사람이다. 그렇더라도 그의 주장이 모두 다 폐기해야할 것은 아니며 일부는 새겨들어야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는 종교의 교리를 정신바이러스로 비유하고 종교인을 전염된 잘못된 신념 환자로 몰아 세웠다. 9.11 테러를 포함하여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와 관련된 갖가지 테러행위에 대해 종교적 광기로 여겼다. 그가 정신 바이러스라 비유한 종교 신념 환자들의 몇 가지 증상으로 진단한 것 중에 일부를 발췌한다. 그의 진단이 조금은 편협하지만 음미해볼 정도는 된다.
  신념 환자들은 대개 그 신념이 증거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음에도, 그 신념에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긍정적인 미덕을 부여한다. 사실 그들은 증거가 적을수록 그 믿음이 더 고결하다고 느낀다. 증거 부족이 신념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한다는 이 역설적인 개념은 스스로 유지되는 프로그램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기 준거적이기 때문이다. 한번 믿음을 얻은 명제는 자동적으로 반대 주장들을 억압한다. 또 환자는 경쟁 신앙을 용납하지 않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심하면 그들을 죽이거나 죽여야 한다고 선동할 수도 있다. 그는 배교자들이나 이단자들에게도 비슷하게 호전적인 태도를 취할지도 모른다. 또 그는 항바이러스 소프트웨어와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과학적 추론방법 등 자기신앙과 불화를 빚을 가능성이 있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적의를 느낄지 모른다.
  물론 도킨스의 주장이 일부 과장되거나 일방적인 추측에 불과한 부분도 있겠지만, 오직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신의 기치를 앞세운 적의로 무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학살했던 십자군 원정이나 남미 토착민을 무자비하게 도륙 낸 파괴행위는 역사적인 사실이며, 끝없는 문명충돌(종교분쟁)로 그 지역 10억 가까운 사람들이 반세기가 훨씬 지나도록 공포에 떨며 살아야하는 작금의 중동정세도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집단화가 권력의 주체가 된 이래로 끊임없이 대두되었다. 이는 종교와 정치사이의 관계가 상보적일 때는 물론이지만, 적대적일 때도 권력의 추구라는 동일 목표를 위해 협력하게 됨으로서 가능해졌다. 따라서 세력 확장(권력, 재력)에만 혈안이 된 종교집단에 대한 진단은 바르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결코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⑹ 《시경》「대아,문왕지십, 면(大雅,文王之什, 緜)」
  논자 주 : 의미가 아주 깊다. 주(周)나라 건국신화를 노래한 것으로 주족(周族)의 시조인 고공단보(古公亶父)로부터 나라를 건국하게 된 옛일을 말하고 있다. 제목인 면(緜)은 길게 뻗는다는 뜻이니 영원과 불멸의 염원이 담겨 있다. 처음 구절의 시작이 '면면과질(緜緜瓜瓞)'이다. 면면(綿綿)은 끊임없는 모양이고, 과질(瓜瓞)은 오이를 말한다. 오이의 큰 것은 瓜라 하고 작은 것은 瓞이라 하는데, 오이가 맨 처음에 뿌리 가까이에서 나올 때는 작아 쓸모가 없지만, 그 덩굴이 끊어지지 않고 끝에 이르면 나중에는 커지는 것이고 그래야 제 구실을 한다. 이 글도 같은 염원을 담았다. 주노공(周魯公)이 조카인 성왕(成王, 2代)을 경계케 하는 시(詩)를 지었다.
* ⑺ 《사기》「권130 태사공자서 제70」, '與道同符, 內可以治身, 外可以應變(부절①이 서로 맞듯이 그 이론이 도에 맞아야, 안으로는 스스로 자기 몸을 다스릴 수 있고, 밖으로는 그 변화에 대해 대처할 수 있다.)'
- ① 부절(符節) : 일종의 신표(信標)로써 개인의 신분을 확인케 하는 증표. 이는 황제가 제후나 사신의 신분을 보장하던 제도처럼 하나의 물건을 둘로 쪼개 따로따로 보관하다 필요할 때 맞췄다. 민간에서 사용한 신물(信物)도 같은 의미다. 옥은 물론이고 돌이나 대나무 또는 후일에 증표가 될 만한 것으로 사용했다.
* ⑻ 힉소스(Hyksos, [이집트]heqa-khase) : 히브리종족의 조상이 포함된 북 셈어족은 BC 20세기까지도 큰 세력이 되지 못했다. 이는 그들을 한데 아우를 수 있는 공통된 문화가 없었고 유목생활이라는 제약도 장애가 되어 어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한곳으로 결집시킬만한 큰 인물과 통일감을 갖게 할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 몽골족도 마찬가지로 초원을 누비던 유목민이었지만, 한 사람의 걸출한 인물과 일체감에 대한 의식이 동기부여가 되어 그들의 힘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었다. - 그러나 히브리종족의 조상들은 아브라함(BC 2166∼BC 1991) 일족처럼 모두가 씨족단위로 움직였을 뿐으로 기반부터 뭉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닥친 고난 길이 아이러니하게도 길을 열어주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북부까지 양 강 사이의 전 지역은 BC 24세기 말이 되자 〈첫 번째 동란시대〉로 돌변했다. 외세의 침략이 빈번해지고, 번성하던 왕조들이 군국주의적인 정치행태로 변질되어 서로 간에 알력이 심하다가 결국은 키시(Kish)왕조의 유력자였으며 후에 키시왕조와 통합하여 아카드(Akkad)의 개국왕이 된 사르곤 1세(Sargon Ⅰ, 재위 BC 2334∼BC 2279)에 의해 BC 2350년경에 남부수메르는 모두 멸망당했다.
  그러나 사르곤 1세의 손자인 4대 나람신(Naram-Sin, BC 2255∼BC 2219)에 이르자, 사르곤 1세에 의해 이란의 자그로스(Zagros)산맥 너머로 쫓겨 갔던 만족(蠻族)이 세력을 다시 회복하여 수시로 접경지역에서 분쟁을 일으켜 혼란에 빠지다가, 수메릭(Sumeric)사회의 〈두 번째 동란시대〉의 발작의 정점을 가름하는 만족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문명의 발상지를 초토화 시켰다.① 그들은 북쪽의 고원지대를 넘어 아나톨리아반도의 남단까지 세력을 크게 넓혀갔다. 이는 아브라함의 가나안이주처럼 BC 20세기 후반부터 많은 수의 셈족들이 현재의 팔레스타인지역인 레테누(Retenu) - 당시의 지명 - 일대로 피난하게 만들었으며, 남쪽인 요단강 서안에 정착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주초기에는 조상들이 해왔던 그대로 넓은 지대에 뿔뿔이 흩어져 씨족중심의 생활을 이어갔지만, 이주 민족을 경계하는 토착 세력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한 지역마다 집중적으로 모여들게 되면서 조금씩 세력화되었다. 특히 BC 19세기 말에는 큰 집단을 형성하게 되자, 시리아에서부터 팔레스타인지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세력화한 도시국가연맹체란 정치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역사의 조화인지, 북방 이민족에게 쫓겨났던 피난민집단이 BC 18세기부터는 후에 힉소스(Hyksos)②라 불리는 큰 세력으로 성장하여 고대이집트 중왕국의 14왕조 - 이 왕조는 BC 18세기 중엽부터 BC 17세기 중엽까지 약 100년간을 통치하였지만, 단 한 사람의 파라오 이름도 알 수 없다. 힉소스에게 침략당하면서 왕조의 기록물이 파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를 무너뜨리고, 고대이집트 18왕조의 아흐모세(Ahmosis, BC 1580∼BC 1558)에 의해서 붕괴될 때까지 하(下)이집트를 200년간이나 통치하게 되는 대사건을 만들었다. - 이일은 후일에 고대이집트 왕국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되자, 그들에게는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 핍박과 출애굽은 이때에 싹이 자랐던 것이다. - 힉소스의 대부분은 셈족에 속했지만, 한 종족이 아니라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지역에 분포하였던 도시국가연맹체의 여러 종족으로 아무르(Amurru) 와 얌하드(Yamhad) 그리고 호리(Horites)족도 일부 포함된 연합세력이었다. 힉소스왕조 당시 이집트 총리였던 요셉의 - 그가 총리라는 고위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셈족이 다스리는 왕조이었기에 가능했다. - 배려로 같은 셈족인 히브리민족은 목축에 적합한 토지인 고센(Goshen)지역의 비옥한 땅을 받아 정착하게 되었다.(창 46:33-34) 히브리민족의 시조인 셈족계의 아피루(Apiru)가 이집트에 정착하게 된 배경이다.
  당시 힉소스의 최대 영토는 북방으로는 호리(Horites)족속의 영역인 갈게미스(Carchemish)와 알레포(Aleppo)와 하란(Haran)이 속해 있는 수발투(Subartu)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과 하볼 강(R. Habor)이 합류하는 티르가(Tirga)일대까지 달하였다. 남 이집트왕조를 정복했던 초기엔 철제무기와 전차(Chariot)를 이용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BC 18세기 중엽에 바빌로니아(Babylonia)의 패자인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1750)왕이 등장하고부터는 제동이 걸렸다. 끝내는 그의 군대에 패하여 동방교역의 중심지였던 마리(Mari)를 잃게 됨으로써 더 이상의 세력 확장은 도모하지 못하였다. 이집트 내에서도 고대이집트 신왕국(BC 1580∼BC 1090)의 시조이자 18왕조의 창건자인 아흐모세에 의해서 힉소스왕조는 붕괴의 길을 가게 되었다. 아흐모세는 이집트인의 힘을 한데모아 이집트왕조를 새롭게 복원하고, 실지인 놉(Noph)과 온(On)을 수복하고, 연이어 힉소스왕조의 교두보이자 수도였던 아바리스(Avaris)의 공성(攻城)에도 성공한 후 마지막 남은 동쪽의 델타지역의 실레(Sile)까지 탈환함으로써 이집트는 완벽한 통일왕국을 세우게 되었다.
  셈족에게 원한이 깊었던 아흐모세에게 온정이란 없었다. 여세를 몰아 팔레스타인의 힉소스 본거지인 샤루헨(Sharuhen)③까지 추격하여 그곳을 3년간이나 포위한 끝에 힉소스왕조를 완전히 괴멸시켰다. 이제는 이집트 안의 히브리민족도 포함된 아피루에게 향한 이집트인들의 철저한 복수만이 남았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인에게 핍박받았다고만 주장하지만, 이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켜 무수한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것은 외면한 채 원자폭탄의 피해자라고만 우기는 것이나 같다. 인과(因果)의 세상에서 역사의 입은 한쪽을 편들어 변호하지 않는다.
- ① 아놀드 J. 토인비, 1976, 《역사의 연구》 卷1 「문명의 발생, 제 1부/C-Ⅰ 문명사회의 調査/(b) 수메릭(Sumeric) 사회.
  '수메르∙아카드 제국이 세계국가이던 당시에 선행하는 사상(事象)을 검토할 때 우리는 다수의 지방 국가 사이의 파괴적인 일련의 전쟁이라는 형태에서 〈동란시대〉가 있었다는 징후를 발견한다./…/이는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이 상호 투쟁을 거듭하여 모두 피폐(疲弊)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은 이란 고원 기슭의 구릉지대에서 침입한 만족(蠻族) 구타이(Gutaeans)에 의해 이 사회 발상의 본 고장이 짓밟히고 말았다.'
- ② 힉소스라는 이름은 이집트의 역사가이며 성직자였던 마네토(Manetho, BC 300경)가 붙였다. - 현재 통용되는 고대이집트의 왕조분류는 마네토의 구상이다. - 유대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AD 100?)는 집요하게 힉소스와 《구약》에 나오는 히브리인들이 같은 집단이라는 점을 증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는 BC 13세기 이전의 역사가 전무한 히브리종족의 역사를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이 힉소스의 침공이 성공을 거둔 후에 이집트로 들어갔거나 힉소스인 가운데 일부가 히브리인들의 선조였을 가능성이 있을 뿐으로, 요세푸스의 시도는 많은 고고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힉소스는 이집트인들이 '외국에서 온 지배자들'이란 뜻으로 불렀으며, 아시아인들과 유럽인들까지도 혼합된 집단이었다. 누가 모래알 같던 유목민인 셈족이 고대이집트의 거대왕조를 힘으로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겠는가.
- ③ 사루헨(Sharuhen) : 가나안 정복 후 시므온(Simeon)지파에게 할당된 성읍 중의 하나. 이곳은 팔레스틴에서 애굽 남북으로 통하는 중요한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힉소스인들이 아바리스(Avaris)가 함락되자 그곳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였다. 현재는 대체로 나르 베소르(Nahr Besor)의 남쪽에 위치한 텔엘 파라(Tell el-Fara)로 본다.
* [참고자료]
 ◇ 서규석 著, 1999, 《이집트 사자의 서》
 ◇ 아놀드 J. 토인비, 1976, 《역사의 연구》
 ◇ 엠마오 편집부 編述, 1994, 《인명지명사전》
 ◇ 기유메트 앙드레 외 著/옥승혜 譯, 2000, 《고대이집트》
 ◇ 데이비스(Kenneth C. Davis) 著/이충호 譯, 2008, 《세계의 모든 신화》
 ◇ 조르조 페레로(Giorgio Ferrero) 著/김원옥 譯, 2007, 《이집트:고대문명의 역사와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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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대 인간교육원 編著, 1997, 《인간학》「1장 인간의 기원」註3, '창세기는/…/3천 년 전의 중근동 민족의 오래된 문화적∙종교적 전통을 사용해서 이야기 식으로 답을 주려는 기록이다.'
- 박영호(朴永浩) 著, 2006, 《다석 유영모 어록》, '창세기에 적혀 있는 대로 창조주의 하느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나는 하느님을 생명의 근본으로 진리의 원천으로 믿는 것이지 창조주로서 믿는 것은 아니다. 창조는 무슨 창조인가? 창조주로서 믿는다든지 그것을 부정한다든지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에게 창조에 대한 시말서를 받아본 것이 창세기다. 이건 그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되었거니 하고 생각해본 거다. 그러나 이건 그때 사람의 생각이고 요새는 이걸 누가 믿나? 이것 가지고는 통하지 않는다.(1960)'
  논자 주 : '3천 년 전의 중근동 민족의 오래된 문화적∙종교적 전통'이란 의미는 그 당시에 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창조신화도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히브리 성서〉의 「창세기」가 앞선 문명의 신화소(神話素)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음은 제쳐두고라도, 우주를 다루기에는 무리일 수밖에 없던 고대시대의 저술임을 주지해야한다. 고대인들이 터득한 자연법칙이란 '관찰된 일관성에 기초를 둔 규칙(rule)'을 아는 정도에 불과하며, 근대적인 개념처럼 발견된 법칙을 통하여 원리들을 찾아내고, 예측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당연히 우주에 대한 모형은 막연히 인식하고 있던 지구와 전혀 알 수 없는 구름 밖 세계를 상상으로 만든 것에 불과했다. 고대의 우주구조론으로 대표되는 〈천동설〉①이 AD 2세기부터 시작하여 AD 16세기까지 장장 1400년이 넘도록 태양계의 운동을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으로 존속되었듯이 무지했던 그 시절에 대해 '그건 그때 사람들의 생각이다.'고 했음에 공감이 간다. 「창세기」를 저술한 시기가 주장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모세(Moses)시대로 잡는다면 후기청동기 2시기(LBA Ⅱ, BC 1400∼BC 1200)에 해당한다. 이때의 과학지식이란 거의 무지에 가깝다고 보아야하며, 노아의 방주(Noah's Ark)②를 비롯한 여러 곳의 비전문가적인 발상이 이를 말해주고 있듯이, 창세기 기자뿐만이 아니고 그 시대를 아우르던 문명적 한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모세가 생존했던 BC 13세기에 고대이집트의 천문학 수준은 어떠했을까? 인접한 최초의 문명국인 수메르와 다름없이 간단히 점(占,divination)을 치는 대상으로, 태양과 달의 운동에 대해서는, 윤달을 만들어 사용할 만큼이나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나 나머지 천체에 대해서는 낮은 수준의 천체관측이 특정한 일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천문학분야에 싹이 트던 시기였다. 점성술(占星術,astrology)조차 BC 332년 알렉산더(Alexander) 침공이후에 전래되어 성행하였다. 그들이 천체를 관측했다고 해도 기껏해야 해와 달과 별들의 규칙적인 운행과 가끔가다 연출되는 천체의 기이한 현상들인 일식이나 월식 그리고 유성 불을 기록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천제관측은 관상수시(觀象授時=천체현상을 관측하여 백성에게 때를 가르친다)처럼 통치행위의 하나로 이용했으며, 신성시했던 파라오(pharaoh)의 권위를 한껏 추켜세우는 중요한 수단이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신관(神官, 고대의 제도가 거의 그렇듯이 천문관측을 주로 하였으며, 천제(天祭)를 주제하는 외에 국정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에 의해 취득된 정보는 파라오를 비롯한 출납서기(出納書記) - 오늘날의 비서진과 비슷한 직책으로 대체로 왕족의 일원이 맡았다. 내관이 아니다. - 외에 극히 일부의 측근에게만 접근이 허용되었던 국가기밀이었다.
  그러므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무언가가 부족한듯하여 다시 해석하건데 '천지창조'란 '지구의 하늘과 땅'뿐만이 아니라. 전 우주를 통칭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궤변적 논리에 빠지는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그렇다고 해도 또 다시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제는 알만큼 안다(?)는 우주라 해도 전체의 1/1000이냐? 1/10000이냐?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AD 1879∼1955)이 '우주에 관해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우주가 이해 가능한 범주에 속해 있는 것(The most incomprehensible thing about the universe is that it is comprehensible.)'이라고 했다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이 모세 때보다는 분명히 났겠지만 그래도 부족하고 불확실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미래의 어느 시기마다 똑같은 이유로 반복하여 끝없이 고쳐나갈 것이 아니겠는가. 〈천동설〉이 〈지동설〉에 의해 폐기되었듯이 끝도 없이 고치고 바꿀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의 저술시기엔 알 수도 알 방법도 없었던 전 우주의 생명창조의 역사까지도 동시에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거나 앞으로 또 다른 창조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다면, 이 논리야야말로 오활한 생각으로 더한 억지이다. 결국 〈히브리 성서〉의 '천지창조'는 현대우주론의 관점에선 여러 면에서 맞지 않는 말 그대로 '창조론적우주론'이며, 옛날사람들이 옛날 옛적의 위대했던 이야기를 나름대로 적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겨있는 뜻이지, 맞지도 않는 문자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진리로만 가득해야할 신성한 경(經)은 믿거나 말거나인 신화와 다르고 우격다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중세초기(BC 8세기 이전)의 교부(敎父,Church Father)들이 대체적으로 잘 한 것 같다. 그들은 외부에서 끊임없이 가해지는 이교철학의 사상과 현실세계의 공격으로부터 신앙의 풍부한 지식으로 교회를 지켰다. 기독교의 복음을 변호하는 하나의 방어자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하기위해 이성적 인격에 상응하는 순순한 입장에서 신앙의 이해를 구하여 공감을 갖도록 하였다. 그런데 환경이 훨씬 좋다는 지금은 무엇이 문제인가? 아니라고 한다고 그게 그냥 아니게 되는가? 논리적인 설득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① 〈천동설(天動說,Geocentric Theory)〉은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us)가 편찬한 《알마게스트(Almagest), AD 140년경》의 1권에 포괄적인 개론으로서 지구중심우주(geocentric universe)에 입각한 태양계의 개요가 실려 있다.
- ② 방주의 타당성을 논하는 것만으로도 한권의 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지면이 부족하니 크기에 대한 기술적인 문제만 개략적으로 조금만 살펴본다. 공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방주의 크기를 처음 대하면 고개를 절래 흔든다. 더군다나 그 시대가 초기청동기 4시기(EBA Ⅳ, BC 2500∼BC 2250)라면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재화중량 14,000톤에 배수톤수 6,000톤 크기의 목선(방주)을 건조할 수 있는 능력이란 대단한 것이다. 그 만한 크기의 목선은 첨단의 선박건조기술과 최고수준의 전문지식을 갖춘 현대에도 건조나 관리가 쉽지 않다. 여덟 사람의 남녀가 톱이나 칼 몇 자루로 만들 수 있는 배는 결코 아니다. 더구나 대홍수를 견디려면 종강도(縱强度,longitudinal strength)를 강화하기 위한 특수한 구조의 용골(龍骨,keel)과 선체의 횡강도(橫强度,Transverse Strength)도 충분히 보강하여야 한다. 당연히 온갖 잡동사니로 넘쳐나는 바다에서 외부로부터 닥치는 각종 충돌에 대비한 강한 배가 필요하다. 그러니 주어진 시간은 문제가 아니다. 당시의 문명수준으로 해결하여야한다. 그러니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방주의 크기를 말한 1규빗(Cubit)은 성인의 팔꿈치에서 중지 끝까지 길이로 18인치(0.45m) 정도이니 성경의 기록대로 이를 환산하면, 대략 길이가 135m, 넓이가 22.5m, 높이가 13.5m가량 된다. 바닥면적은 3,038㎡(920평)이고, 용적은 41,006㎥이다. 배수량이 20,000톤에 - 배수량을 계산하면, 135 * 22.5 * 6.411 * 1.027 = 20,000(톤)이 된다. 6.411은 잠기는 깊이, 1.027은 해수의 비중이다. - 재화중량은 14,000톤이고, 배의 톤수는 6,000톤으로 목선으로는 상상조차 안 되는 거대한 배다. 목선은 건조에서 운용까지 쉽지 않은 배이다. 건조하는 데도 원형을 유지하기가 불충분하여 그 만큼 크기에 제한이 따른다. 현재의 조선기술로도 방주만한 크기의 목선 건조는 쉽지가 않다. 여러 가지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길이가 90미터가 넘으면, 목선을 구성하는 재료 자체의 구조적 한계로 인하여 선체가 뒤틀려 운용하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현재도 목선은 3,000톤 수준이 실질적인 운용한계라고 본다. 이 경우에도 배에 가해지는 외부의 충격에 대비하여 강화(强化)된 강철 띠를 필요로 한다. - 당시는 청동기시대이니 청동제로 한다고 해도, 이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주요품목으로 일반인이 구하기는 불가능했다. - 더구나 목선의 방수와 침수문제는 심각하여 쉬지 않고 고성능의 펌프로 빌지워터(Bilge water)를 퍼내야만 한다. 이걸 등한시 하면 선내활동조차 어려워진다.
  노아의 방주는 성경에 몇 규빗(Cubit)이라고 배의 크기가 기록되어 있으니 대단한 것 같지만, 실상은 정 반대다. 주어진 시간 120년은 방주 건조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방주는 당시수준의 문명으로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규모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후대에 만든 대형 목선을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갈 것이다. BC 1500년경의 고대이집트 18왕조의 하트셉수트(Hatshepsut)여왕의 피라미드내부의 벽에 부조(浮彫)된 배는 길이가 60m에 너비는 21-24m쯤 되며, 배의 무게는 800톤 정도로 추정되는 바지선(barge船)이다. 그 당시 이집트의 가장 큰 목선이었다. 그 후에 만든 대형목선 중에는 BC 3세기 말엽쯤에 이탈리아반도 남서쪽에 위치한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Siracusa)출신 과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 290/280∼BC 212/211)에 의해 건조된 배가 가장 컸다. 아르키메데스는 당시의 조선기술로서는 불가능하다던 초대형 목선 건조에 나서 수년의 각고 끝에 길이가 약 60m 쯤에 무게는 1700∼2000톤가량 되며, 거대한 돛대를 3개나 설치한 대형목선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이 배는 화물을 싣고 바다를 항해하는 상선이었지만,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외부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이물(船首) 쪽에 대형투석기까지 장착한 군선의 형태를 갖췄다. 그 위용은 지중해를 지배하고도 남을 만큼 대단했다. 배의 이름은 고향인 시라쿠사를 기리기 위해 시라쿠시아(Siracusya)호로 명명했다. 특히 이 배에서 눈여겨 볼 것은 대형목선의 최대약점인 침수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인력을 이용하는 '아르키메데스의 나선형펌프(Archimedes screw)'라는 기상천외한 배수펌프까지 발명하여 배의 빌지워터를 효과적으로 배출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런 모든 것이 관련공학이 발전되어야 이루어질 수가 있다. 말만으로, 사람만으로, 시간만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공학기술의 결정체가 고대의 목선 건조였다. 시라쿠시아호도 국력을 총동원하고 수백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것도 아르키메데스라는 당대 최고의 과학자와 조선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면 창세기 기자는 선박건조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을까? 단정해서 말한다면, 목선(방주)건조에 관한 여러 가지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바지선을 건조한 이집트방식㉠의 조선과정의 대략적인 정도는 습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큰 방주를 생각조차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글을 쓰기 위해 수집한 이전시대의 수많은 각종 기록물과 저작물 그리고 구전된 이야기를 포함한 전승도 방주의 구상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기술적인 측면을 전혀 고려치 않은 채 건조가 불가능한 거대한 방주를 그려놓은 것으로 봐선 전문가다운 식견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 가장 컸던 바지선을 기준으로해서 그보다 몇 배 이상이나 크게 하고, 3층 구조로 만들었다. 이는 석재 등의 중량물을 실어야하는 높이가 없는 단층인 바지선을 참고로 하긴 했지만, 방주는 체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량이 덜 나가는 비교적 가벼운 종류의 많은 동물이나 곡물 등을 실어야 했음으로 방주의 전체용적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전 시대의 대홍수에서 살아남았다고 전해오던 우투나피시팀의 방주를 참고했었을 수도 있다.㉡ 방주는 그런 식으로 크게 키웠다. 용적은 얼마나 될까? 형태가 장방형(長方形)이라고 했으니, 감소계수를 생략하고 계산한다면 41,006㎥정도가 나온다. 여기에서 배를 구성하고 있는 자재의 용적을 제하면, 배의 중량 6,000 ÷ 0.8 = 7,500(㎥)이다. - 0.8은 비중. 방주의 크기로 보아 가장 강한 나무를 사용한 것으로 본다. 목선 건조 시에 강도가 작으면 그 만큼 차지하는 용재의 용적이 커진다. 나무의 비중은 0.3∼0.8이다. - 따라서 실제로 실을 수 있는 용적은 41,006 - 7,500 = 33,506(㎥)이 된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목선으로 방주를 만들었다. 물론 기자 머릿속의 상상이었다.
  결론적으로 《지우수드라의 홍수이야기》나 《아트라하시스의 태초이야기》나 《길가메시 서사시》의 대홍수에서 선택 받은 이들이 만든 방주, 〈민간전승〉된 나일 강의 수없이 많은 홍수이야기들, BC 1500년경에 제작되어 운항하고 있는 나일 강의 대형목선들, 그 후에 호깅 트러스(hogging truss)까지 생략할 만큼 발전한 조선술㉢, 수백 년 후의 창세기 기자가 보고 듣고 배운 것에, 그의 상상력까지 더해져서 방주 모양을 나름대로 구상하여 그렸을 것이다. 물론 가장 많이 참고로 한 배는 이집트의 바지선이었을 것이다. 대형에다 무거운 석재를 운반할 만큼 튼튼했고, 무엇보다 노아가족은 배의 건조에 비전문가들이니, 배의 구조가 단순하다는 점에 착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지선은 강을 운항해야하니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의 형태이면 되었지만, 방주는 경우에 따라서는 바다 한 가운데를 항해해야한다. 바다에 떠다니는 온갖 것에 - 이는 상상도 안 된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지질학적 지층까지 바뀌었다는 주장을 할 만큼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으니, 무엇이 급작이 다가와 부딪칠지도 모른다. - 선저부분이 심하게 충돌할 가능성이 있으며, 물에 잠긴 산봉우리에 좌초당할 수도 있음으로 용골이 밖으로 나와 외판을 보호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 과연 창세기 기자가 그런 정도까지 생각해낼 만큼 조선기술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의문이다.
  ㉠ 헤로도토스(Herodotos) 著/강은영 譯, 2008, 《페르시아 전쟁사》/제2권 나일강의 선물/내세는 영원하다, '이집트인들은 고무나무로 배를 만들어 화물을 운송한다. 배는 나무를 판자처럼 길게 잘라 벽돌을 쌓아올리듯이 선체를 만든 후 못으로 고정한다. 그 다음으로 가로 들보를 걸치고, 파피루스를 이용해 선판 안쪽의 이음새를 틀어막는다. 그러고 나서는 용골을 관통해 키를 부착하고 고무나무로 돛대를, 파피루스로 돛을 만든다. 이 배는 강한 바람이 불지 않는 한 강을 거슬러 항해할 수 없다. 하지만 하류로 내려갈 때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 그래서 이때는 갈대발을 친 뗏목을 배 앞에 매어 흘러가게 하고, 뒤에는 무거운 돌을 매달아 강바닥에 질질 끌리게 해서 배의 진로를 강의 센 물살에 밀려나가면서 배가 목적지에 빠르고 정확하게 도착할 수 있다.'
  논자 주 : 고대이집트인들은 생활무대의 중심인 나일 강의 자연환경에 맞추어 실용적인 배를 건조하여 사용하였다. - 군선이나 국가에서 운용하는 대형 선박은 별개다. - 아카시아(Acasia) 나무로 만든 널빤지 - 아카시아나무는 잘 갈라져 판재로 넓게 켤 수가 없어, 폭이 좁은 널빤지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런데도 아카시아나무를 사용한 것은 그나마 비교적 흔했으며, 다른 나무로는 선용재(船用材)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로 선체를 만든 뒤 바닥 중앙 널빤지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널빤지의 끝과 끝을 잇대어 고정시켰다. 긴 목정(木釘)을 사용하여 널빤지들을 벽돌 쌓듯이 서로 엇갈리게 하여 쌓아 올린 다음 선체가 완성되면 가로로 들보를 걸치고 각재(종량)로 연결하는 방식을 썼다. 가로 들보는 갑판을 떠받쳐주는 역할과 동시에 선체의 횡강도를 보강해 준다. 따라서 이집트의 배는 구조적으로 횡강도는 어느 정도 확보가 되었으나, 배가 점점 커지다보니 종강도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후에 호깅 트러스(hogging truss)를 발명하여 사용했다.
  ㉡ 「창세기」보다 500년 이상이나 훨씬 전에 저작된 것으로 알려진 바빌로니아 판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대홍수」에서 선택된 자인 우투나피시팀(Utunapishtim)과 그 일족이 만든 방주는 6층 구조에 정사각형으로 크기는 약 60m * 60m * 60m이다. 그들의 방주가 멈춘 곳은 아라랏 산에서 멀지 않은 니시르(Nisir,구원의 뜻)산이다. 그곳은 이란 서부지역인 자그로스(Zagros)산맥의 피르 오마르 구드룬(Pir Omar Gudrun, 2745m) 산으로 소 자브(Little Zab)강의 남쪽에 있다. 백설이 얹혀있는 봉우리가 수 백리 밖의 먼 곳에서도 보이는 모습은 아라랏 산과 비슷하며,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인식세계 안에서는 방주가 정착하기에 가장 알맞은 성스러운 산이었을 것이다.
  ㉢ 고대이집트 신왕국시대 20왕조(BC 1200∼BC 1085)의 람세스 3세(Ramesses Ⅲ, BC 1187∼1156)의 피라미드내부 벽에 부조된 대형군선에는 호깅 트러스가 생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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