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우주기원론과 창조신화)
- 5_a. 이승 다시보기 - 가없는 정으로 세상을 보듬으며, 실한 인생을 누릴 줄 아는 우리는 만유(萬有) 가운데에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겁(永劫) 중에 '한 마디의 몫으로서의 시간을' 귀하게 얻은 만큼이나 소중한 금쪽같은 이승을 짐벙지게 산다. 이승은 적당히 살다가 소위 다음세계라는 곳으로 가버리면 그만인 간이역일까? 아니다. 수만 가닥의 햇살이 하늘 길 따라 찬연히 빛나는 아름다운 터전을 시샘하여 억지로 누그러뜨리려는 같잖은 수작이다. 나그네가 잠시 쉬면서 숨 돌리고가는 휴게소라니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 이승은 줏대 없는 인간들이 소일하듯 가벼이 시간을 보내는 엉뚱한 곳이 아니다. 누구나가 당당한 주인공으로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권리를 마음껏 행사해야하는 내 삶의 공연장이며, 존재성의 준엄한 의미를 알차게 다져야 하는 숭고한 삶의 터이다. 우리로 하여금 존재케 한 의무를 다하게 하면서도 자유의지로 자신의 이력을 한껏 쌓을 수 있도록 준비까지 해준 유일한 마당이다. 그러니 이승을 헛것이라고 떠드는 소리를 어쩌다가 듣기라도 하면 그거야말로 아래동네 누렁이가 달보고 짖는 소리처럼 헛소리로 여기고 한쪽 귀퉁이로 냅다 차버려라. 인생은 이름만으로도 숨이 벅찰 만큼이나 감격케 하는 깊이가 있다. 하지만 더 위대한 것은 진실로 충실하게 사는 그 자체이다. 삶에는 흡족하거나 환희에 들뜰 때가 드물다. 불편할 정도로 조금씩 부족하기도 하고 내 맘과 같지 않아 불평이 생기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 가운데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재하는 것을 사랑하며 산다. 생활의 진실이 충실이며, 그 충실이 생(生)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가치를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이승을 살며 간절히 바라는 것은 타고난 삶을 기뻐하며 인간다운 나날을 누리는 데 있다. 자신이 가는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해 높은 뜻을 실천하고 뜻대로 얻는 것이야말로 원하는 삶이며, 빛나는 삶이며, 진실로 귀한 열매를 맺는 삶이 아닐까.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삶의 가치이고 인생을 숭엄하게 한다.
(인생을 나그네라 말하면서 다음세계를 들먹이면 우리의 사고가 뭔가에 비끄러매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하늘나라 지옥세계 내세나 전세처럼 이승을 벗어난 이름의 실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에, 생각만으로도 처연한 느낌을 가질까? 더욱이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는 막막함에는 들썽해진 마음조차 가눌 수가 없다. 지금까지 수십 수백만 년이란 인류출현 기간과 그동안 주검이 된 수십 수백억의 사람들 중에 전세나 내세를 증언한 자가 있었을까? 아니면 혹여 봤다는 자는 있었을까? 하지만 이를 확인하는 것은 어림도 없고, 의문을 갖는 것 자체도 쓸데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모든 게 인간의 사유로 만들어낸 상상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후세계를 비롯하여 이승을 넘나드는 어떤 세계에 대해서도 인간의 사고는 한계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손안에 쥔 재물은 물론이고 머릿속에 든 지혜조차 이승너머로 지니고 갈 수 없음은 군말 없이 수긍하면서도 자신의 영속성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종교적인 잣대 이외엔 설명할 길이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건 해결책이 아니라 유치한 도피처일 뿐이다. 그러니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무엇은 다음세계로 가지고 갈 수 있고 무엇은 안 된다면, 만유에게 똑같이 작용하는 섭리라 할 수 있는가? 공리(公理)엔 악도 선도 좋음도 나쁨도 없다. 거짓도 참도 추함도 아름다움도 진정도 헛것도 믿음도 불신도 영혼도 육신도 구분하지 않으며 가역과 비가역의 성질마저 한계를 두지 않는다. 처음이 마지막일 수도 있고 마지막이 처음이 될 수도 있다. 여기가 저기이고 저기가 여기이며, 그게 그저 그거인, 처음부터 똑같았던 세상이다. 현재의 3차원 공간(4차원 시공간)의 무경계 유한우주에서의 우리도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니 이승을 벗어난 세계는 모두 다 인간이 편의를 위해 시각(時刻)의 개념을 만들 듯이 창안한 것에 불과하다. 내세와의 연속성이란 애초부터 없는 불가능한 기제이다. 죽은 후에 흙이 되는 되돌림의 궁극은 가장 작은 요소로서의 환원을 의미한다. 이는 새로운 형태의 전혀 다른 출발을 하기 위한 준비이며, 따라서 언제나 동일한 선상에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로 본다면, 죽음의 근본적 개념은 존재로서는 소멸이긴 해도 다음의 형상을 위한 '질료(hyle, materia)로의 전이(轉移)'이고, 이는 다음의 형상(morphe, eidos)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하나의 순환질서라고 할 수 있다. 만유는 비 생명으로 사는 게 대부분이고, 물질이 처음 생겨난 그때나 지금이나 요소라는 의미에서는 차이가 없으며, 자체로는 당연히 비가역이 필요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목을 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로 모르기 때문이다. 내세에 대하여 사유하고 두려움을 가졌던 것은 인류가 사후세계를 인식하며 장례를 의식화(儀式化)하기 시작했던 10만 년 전의 원시사회 - 대체적으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지구상에 출현했던 시기로 보며 그 이전에는 활동하던 지역에서 풍장의 형태를 취하기도 했으나 이후로는 매장풍습이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⑴ 다만 일정한 장소에서 의례를 갖추어 매장하는 풍습은 이후로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이다. 자연물을 이용하여 예술적인 표현이나 종교적인 의식을 행한 것은 소위 크로마뇽(Cro-Magnon)인으로 불리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가 출현하기 시작하던 4만 년 전이다. - 부터 가진 가장 기본적인 경외감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 후로 전세와 하늘과 지옥에 대한 개념도 갖게 되었다. BC 30세기경의 수메르인의 장례풍습은 매장이었다. 죽은 사람에게서 떨어진 혼이 저승([수메르]Kur)으로 가게 하려면 육신을 땅에 묻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또 육신을 태우면 혼이 연기처럼 하늘높이 사라짐으로서 혼을 통제할 수 없다고도 인식했다. 이는 혹여나 이승의 삶을 잘못하여 원한이 남게 되면 혼이 저승의 출구로 몰려와 이승의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하여 이를 달래기 위해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었다. 그 만큼 이승과 저승과 인간과의 인과관계까지 사유할 수 있는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문명의 척도로는 헤아릴 수 없는 죽음처럼 불가항력의 사건이나 자연현상에 대한 외경심은 여러 경로로 발전되어 왔으며, 특히 주술신앙은 종교형식의 기본적인 모태가 되었으며, 원시종교가 현대종교처럼 정교하게 체계화 된 것은 그리 긴 기간이 아니다. - 한 예로, 유대민족은 지엄한 율법이 구속하고 있었음에도 바빌론 유수(babylonian exile)시대인 BC 6세기까지도 상당한 규모의 사람들이 집집마다 신의 형상을 인형처럼 만들어 받드는 다신론(多神論, polytheism) 신봉자였다. 이런 신앙생활은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었다. 모세가 율법을 만들면서 유일신을 첫 번째 계명으로 하여 강조하였음에 주목하게 된다. -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은 먼 원시시대의 조상들이 믿었던 종교나 현대인이 믿는 종교나 맥은 같다. 그러니 믿고 안 믿고는 각자의 이성에 따를 뿐이다. 신앙을 가지면서 이승의 내 삶에 살이 찐다면 그건 좋다고 할 수 있다.)
이승은 누구나 알고 있듯, 저마다 시종(始終)이 새겨진 운명의 시간표를 짊어지고 생겨났다고 믿는다.⑵ 그런데 이것을 두고 여러 생각들을 한다. 개중에는 세상에 나온 게 오히려 고통스러운 과보(果報)로 여기기까지 한다. 사는 게 힘든 것도 그 때문이라며 매사에 투덜거리는 것도 모자라, 제풀에 움츠러드는 생활로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며 사는 멍청한 인간도 있다.
(우리는 상식이라는 익숙한 틀 속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번연(繁衍)한 삶을 이루려고 무던히 애를 쓰며 살고 있다. 어느 때는 날카롭게 경계의 날을 세우고 사물을 냉정하게 대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정 붙은 온화한 본연의 모습으로 산다. 그러나 삶이 주지적(主知的)이던 주정적(主情的)이던 그 하나하나의 치열한 순간마다 유의적(有意的)인 자세를 견지함을 잊지 않으며, 모두가 수긍하는 보편적 삶을 영위하려고 성실을 다한다. 그것은 사유의 행태와 그에 따라 얻어진 이해에 따른 행동반경까지도 그에 맞춘 범주 안에 있게 됨을 이르며, 대다수가 공감하고 긍정하는 관습화된 도덕적 관념을 상식의 기준으로 하여 살고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귀한 시간을 하눌타리 먹듯 아깝게 허송세월하는가. 어째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위로 자신의 인생을 속빈 강정처럼 실속 없게 만드는가. 전생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가. 그럴수록 오히려 이승에 더욱 정진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바른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올바름을 마다하고 정말로 그렇게 산다면 참으로 한심한 인사가 아닌가.)
또 다른 인생도 있다. 날 때의 기쁨은 죽을 때의 근심에 묻히고, 앞일을 모르는 불안에 절벽 끝에 매달린 듯 벌벌 떨며 살맛조차 잃어버리고, 인생을 회의하고 기껏 백년을 살면서 뭐에 그러냐고 허무를 되새기며, 생각하느니 오직 내세가 보증해 준다며 그것만을 그리워하면서 목매며 사는 허깨비 같은 인간도 있다. /곱게 보이려는 그 얼굴 애씀이 역력한데, 잡념의 그림자가 짙게 드려 아우성인 안달만이 더욱 도드라진다. 기도하나에 온갖 것 매달아 논 목말라하는 군상들, 매달린 사다리 허리춤엔 피 묻은 손들이 허공을 찢는다./
(뭔가에 빠져 산다는 사람의 풍문을 더러 듣긴 했지만, 실제로도 그런 식의 삶을 사는지 확인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렇더라도 한평생이 빈껍데기라니 우습지도 않다. 솔직히 이런 인사를 보면 왜 사냐고 묻고 싶다. 종교를 갖는 것은, 좋게 접하면 삶에 여유로움을 주고 바른 생각을 갖게 해준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는 부분적인 가치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인생을 충실하게 하는 것과 얼핏 같다고 생각이 되겠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만유(萬有)는 필귀종(必歸終)이어야하는 멍에를 평생의 짐으로 짊어지고 살아가야하는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명(命)은 시종(始終)을 제일의 뜻으로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사물로 하여금 실체하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의미를 갖게 함으로서, '하늘이 세상에 내었으니 당연히 그만큼의 시간을 살라고 주어진 것이다.(天旣生人, 人各有命)/徐升,《淵海子平評註》「幽微賦」' 따라서 '하늘에는 하늘로서 도리가 있고(有天道焉), 땅은 땅으로서 할일이 있듯이(有地道焉), 사람은 사람됨으로 사는 조건에(有人道焉 )/《周易》「繫辭下」' 맞추어서 살줄 알아야 현명한 삶을 꾸려갈 수 있다. 이는 사람이 짐승처럼 사는 것이 잘못이듯이 하늘만 쳐다보고 그것에만 매달려 사는 것도 안 되는 노릇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생을 살면서 내 삶에 보탬이 되도록 할 수는 있지만, 하늘의 뜻을 쫒아 그대로는 결코 따라갈 수가 없다. 그렇게 되기도 쉽지가 않지만, 많은 독신주의 성직자들에게서 보듯이, 물론 이런 방법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승에서의 자신은 버려야 하며, 그래야 그나마 끝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종교생활로는 만족한 결과를 얻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신앙생활로까지 연결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대부분이 구원받을 삶을 사는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
옛날 어느 시대에 스님이 중생을 계도하려 읊조린 '태어남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태어남은 한 조각구름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나옹화상(懶翁和尙), 「부운(浮雲)」'이라는 시구(詩句)에 남겨진 시상(詩想)이랄 수 있는 한 자락에서도 느끼게 되지만, 인경의 낭랑한 떨림을 뒤에 두고 들리는 시음(詩吟)하는 소리엔 또 다른 색다른 방법으로 사는 삶이 담겨 있음을 알게 한다. 이는 사람의 몸은 구름과 같은 허깨비임에도 본질은 보지 못하고 겉모습에만 매달리는 것이니 집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구도자로서 갖는 삶의 방법과 추구하는 뜻이 조금은 다르겠지만, 그러나 방법이 속세의 일반인과 똑같지 않을 뿐이지, 사람이 사는 게 그렇게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평범한 속세의 인간들이 보기에는 그게 그거다. 인생이란 영겁의 기회 속에서 한 마디의 시간으로 주어진, 비록 날 때부터 시작된 끝날 때까지의 기간이 육신에 의해, 늙음은 세포가 노쇠하여 사멸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機制)에 의함으로, 좌우되는 불확실한 시간을 갖고 있지만 소중한 내 몫으로 받은 거의 1회적인 귀한 삶이고, 이승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겪어야하는 자연법칙에 의한 것임에도, 같은 삶을 살아야 하면서도 얼마나 별다르고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승의 공기를 마시며 이승의 밥을 먹으면서도 이를 비웃듯이 얼마나 하찮고 덧없느냐고 말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 뱉기 식으로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비하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냐고 물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사는 세상이 영원하다면 지금 처해있는 위치가 즐겁다고 해도 오히려 가볍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승은 그렇지 않기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시한부 존재성을 가지고 있기에 실체를 더욱 중히 다루는 것이다.
(늙음은 세포의 증식력이 소실되고 인체 기능의 쇠퇴로 인한 장애이니 당연히 생명현상이다. 이를 생명역학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늙음뿐만 아니라 탄생과 성장을 포함한 모든 과정이 '됨(becoming)'의 상태에서 '있음(being)'의 상태로 변환하는 산일구조(散逸構造,dissipative structure)이다. 개체의 생명보존이나 종(種)으로서의 진화는 이러한 산일구조로 형성된다. 만물은 수많은 요소가 복잡하게 상호작용해서 야기되는 생명력을 지닌 카오스(Chaos)이며, 그 상태에서 자기조직화 한다. 그렇다면 동일한 관점에서 주검(death)은 어떻게 봐야할까? 당연히 산일구조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평형상태(equilibrium state)에 있음을 말한다. '산일구조란 개방계(開放界,Open system)에서 에너지나 물질이 들어오거나 나가며 그 출입이 평형이 아닌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물질과 에너지를 환경과 지속적으로 교환하면서 항상 비평형상태(non-equilibrium state)를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도록 자신의 엔트로피(entropy,무질서도)를 감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물질과 에너지가 완전히 바닥이 들어나 산일구조가 형성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생명활동은 당연히 정지된다. 즉, 죽음은 생명계에서의 평형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비평형성은 바로 생명의 유지이니 이는 생명현상 그 자체가 된다. 거창한 수식어로 꾸밀 필요조차 없다. '삶이란 생명체의 명(命)이다.' 명(命)에 대한 옛사람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전한(前漢)의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 BC 179∼BC 104)는 '중(中)이란 천지의 끝마침과 동시에 시작함이고, 화(和)란 천지를 태어나게 하고 성취시키는 것이다. 덕(德)은 화(和)보다 큰 것이 없고, 도(道)는 중(中)보다 바른 것이 없다. 중(中)이란 하늘과 땅을 아름답게 통달하는 이치이며 성인이 보호하여 지키는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억세지도 약하지도 않으며, 너그러이 정사를 베푼다.' 이는 중화(中和)라 할 것이니, 이런 까닭으로 중화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그 덕이 크게 왕성하고, 능히 중화로써 그 자신을 기르는 자는 그 주어진 수명을 다하는데 이를 것이다.(中者, 天地之所終始也, 而和者, 天地之所生成也. 夫德莫大於和, 而道莫正於中, 中者, 天地之美達理也, 聖人之所保守也, 詩云: '不剛不柔, 敷政優優.' 此非中和之謂與, 是故能以中和天下者, 其德大盛, 能以中和養其身者, 其壽極命.)/董仲舒 著, 南基顯 解譯, 2005, 《春秋繁露》「循天之道 第77章」'라고 하였다. - '不剛不柔, 敷政優優.' 은 《시경(詩經)》「상송(商頌)/장발(長發=오래 전부터라네)」에서 인용. 상(商)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을 칭송한 노래 - 수극명(壽極命)이라 했다. 주어진 수명을 쌀 한 톨 만큼도 남기지 않고 다 채운다고 했다. 정신을 한 곳에 매어놓지 않고 유연하게 살라고 했다. 그러니 주어진 수명도 우리가 이승에서 하기 나름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준 소중한 기회가 명(命)임을 깨닫는다면, 이승의 삶을 보람되게 가꿔야 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하는 길이다. 유기체는 매 순간마다 치열한 경쟁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화과정을 통해서 명(命)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승을 허상으로 여기고 육신을 버려야할 대상으로 허접하게 보는 등, 허투루 말하는 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망각하는 짓이다. 생명현상은 준엄한 섭리이다. 하늘의 지엄한 명령이다. 누구라서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는가.)
그리고 보이는 게 모두 헛것이라고 했으니 굳이 없애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허상이 무슨 힘이 있나? 그대로 나두면 봄날의 아지랑이 아른거리다 사라지듯 저절로 없어져야 허상이 아닌가. 뭘 그리 걱정하며 야단법석까지 떨어야하나. 그런데도 그게 자신을 해코지하려 든다면 그건 허상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만약에 번뇌가 우리의 마음속까지 파고들어 못되게 하는 칼이라면, 물질세계에서는 당연히 흉악한 무기인 물질이어야 맞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물질이 아닌 게 아니다. 태초엔 아무 것도 없었다. 혼돈에서 세상이 열린 이후에 시(時, time, beginning)‧공(空, space, heaven)‧물(物, matter, earth)이 생겨났으니 당연히 우주의 세 가지 사물 안에 포함되어야만 논리적으로 맞는다.⑶ 이는 마음이나 정신이나 영혼은 물론이고 선악도 모두 다 마찬가지로 포함된다. - 서두에서 말하길, 공리(公理)에는 '하늘이 친소(親疎)의 구별을 두지 않는다(天道無親)'고 했듯이 구분이 없다고 했다. - 따라서 물질세계인 이승에서는 사물의 특성대로 당연히 반영되는 것이다. '번뇌'가 우리를 헤치는 칼처럼 나쁜 성질을 가진 것은 나쁘게 반응되고, '맑은 영혼'처럼 말 한 마디라도 좋은 것은 좋은 쪽으로 작용을 한다. 그러니 큰 죄를 지어도 용서되는 신비주의 세계처럼 이승에서는 역작용이 나지 않는다. 말만 허상이라고 하면 뭐 하냐 실제로 존재하는 건데. 육이 없는 영이 없고, 마음과 의식이 사는 곳도 육이다. 문명이라 일컫는 현실세계는 그것들이 한데 어울려 이룩한 것이다. 그러니 진실한 의미의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인 삶의 추구야말로 이승에서는 진실 된 자세임은 당연하며, 그것을 부정하는 삶이 오히려 세상살이를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무책임한 생각이다. 따라서 필귀종(必歸終)인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해도 이승의 숨을 쉬는 한에서는, 우주의 기원으로 삼는 저 멀리 137억년이란 능변여상(能變如常=바뀜으로 온전함을 갖는다)의 세월과 작게는 그동안 인류가 이륙해놓은 역사는 물론이고, 하루 세끼 식사와 잠을 자야하는 생물학적인 현상과 옥죈다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경(經)을 공부하고 종국에는 깨닫는다는 의미까지도 통 털어, 그 삶 전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율배반이지 않은가. 그런 자세가 종교적인 행위로는 정당성을 가질는지 모르지만, 실체만이 존재하는 이승을 억지로 없는 것처럼 여기며 해석할 수는 없다. 진리는 아주 단순하게 있다. 애써 무시하거나 혹은 느끼지 못할 뿐이다. 공자도 '도(道)는 사람으로부터 멀지 않다. 사람이 도라고 하면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도라고 말할 수 없다.(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중용 13장)'고 했음에, 어느 정도 신뢰가 간다. 진리를 엉뚱하게도 멀리에서 찾는다. 그것도 확인 돼지도 할 수도 없는 저 멀리 불가사의에서. 이승은 이승일 뿐이다.
(아무리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인 삶을 외친다고 해도, 이승에 살면서 인본(人本)의 물결에서 비껴 살기는 불가능하다. 진화의 힘에 의해 완숙해진 생물학적 기제(機制)인 인식 구성체계의 한계와 그에 따른 행위는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히려 혼돈 속에서 헤매게 된다. 이게 심해서 안의 정신까지 물들면 입우감담(入于坎窞)의 경우이니 아예 빠졌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실질적인 예를 들어보자. 신본을 추구하는 이들을 보면, 감사는 오직 자신이 믿는 신에게만 할뿐이지 모든 이의 하늘인 천도무친(天道無親)의 하늘에는 하지 않는다. 이것도 그 일면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신을 받들게 되면 오히려 보편적인 공리로서의 선(善)이 배제되니, - 한쪽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전체가 옳지 않으면 지선(至善)이 될 수가 없다. -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전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반목하게 된다. 당연히 내남에 틈이 생기고 끝내는 벽이 생겨 중동의 사태처럼 목숨을 뺏는 짓까지도 서슴없이 행하게 된다. - 간혹 짐승들이나 할 짓인 생명을 잔혹하게 도륙하는 장면을 접하게 되는 데, 그건 신을 빙자하여 제 야망을 펴려는 사악함이지 신의 뜻에 따랐다고 할 수는 없다. - 모두의 하늘은 제쳐둔 채 내 것만 옳다는 편견을 가진 믿음이 마음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포용이란 이름의 가없는 사랑조차도 그들 안에서 동류(同類)일 때에만이 가능한 인정이 되며, 그렇지 않으면 타도의 대상인 적으로 간주되어 진군의 나팔소리에 휘둘리게 된다.⑷ 그것에 무슨 사랑이 있고 자비가 있겠는가. 사랑은 내 안에 사랑보다 내 밖에 사랑을 실천할 때에 더욱 유익하지 않을까? 자기자식 미워하는 부모도 있는가? 내 밖에 사랑의 구현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랑은 반쪽짜리거나 가식일 뿐이다. 말로는 신본주의를 부지런히 외치지만 실제로는 이승의 공기를 마시고 이승의 음식을 먹으며 이승의 실체 속에 묻혀, 동류(同類)로 살기 때문에 이승의 인본주의 정신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옛 사람도 '물고기는 물속에 있으면 살지만 사람은 물속에 있으면 죽는다.(魚處水而生. 人處水而死.)/《장자》「지락」'고 했다. 그러니 말로만 그렇다는 거다. 신본을 제일로 내세우며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중세유럽의 그들이었지만, 결국은 재물에 눈이 멀어 면죄부까지 팔다 끝내는 거대한 폭풍에 휩쓸려 새로운 질서에 의해 전도된 가치가 되돌려지고, 정신 및 영적 구조마저 방향을 바꾸도록 재촉을 받아야 했다. 그들만큼 신본주의를 내세웠던 세력이 있었던가? 결국은 다 거짓으로 끝났다. 물속에서 살려다 죽은 것이다. 이만한 역사의 실증이 어디에 있는가.)
어차피 주어진 목숨이니까 마지못해 사는 것이라면 그 시간이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 없는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굳이 존재 이유를 물을 필요조차도 없다. 이는 너무나 비공리적(非公理的)인 삶이요, 실체로 있다는 실재를 부정하고 어쩔 수 없이 명(命)을 받았으니 받았다는 그대로, 조금도 보태지 않고 있는 대로 사는 것으로 모든 행위는 피동적인 삶이어야 한다. 당연히 자신의 삶에 대해 의무감도 없고, 행복이나 불행마저도 그의 몫이 아니게 여기는 무감각한 삶이니 심하게 말한다면 무생물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이 세상을 죄의 굴레로 인식하는 한은, 자손에게 죄를 물려주거나 짓는 길을 여는 것이니 번식행위조차 죄의식으로 여겨야하니 모두가 독신주의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이는 유기체가 가진 종족보존의 의무와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하늘이 준 권리와 원시적인 육체적 본능임에도 이를 모두 무시하고 중지하여야 하는데,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인가.⑸ 그러니 한쪽에서는 오히려 결혼을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게끔 하고⑹ 다른 쪽에서는 이 모두가 이승에 살면서도 지금의 삶을 헛것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는 내세의 상상에 세뇌 당한 것을 깨달음이라고 보는 황당한 논리에 빠져야 한다고 주장한다.⑺ 이는 너무나 위선적이지 않은가. 시인 묵객이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생백년을 부평초라고 말하며 인생을 즐겨 논하지만, 신비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은 거기에다 덧없는 짧은 인생이라고 덧붙이며 달콤한 미래의 세계로 유혹한다. 그러니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오히려 인생이란 찰나에 불과한 한 각(角)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툴툴거리며 무궁한 흐름 가운데에 주어진 내 몫의 소중한 생명이 흐르는 둘도 없는 시간임에도 애써 무시하고, 탐욕과 거짓을 위장한 정의를 내세운 교화에 가볍게 물들거나 어느 경우에는 이룰 수없는 경지에 도달해야 깨달음이 가능함에도 쉽게 말려들어 자신의 귀중한 것마저 잊어버린다. 성현(聖賢)이라 추앙받는 공자, 부처, 예수, 마호메트와 같은 선각자들은 가장 이상적인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결코 하늘이지 못한 것은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날 때와 죽을 때'라는 섭리에 갇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평범한 사람들에게 하늘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지구에 살았던 수십 수백억의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했는가? 깨달음이 없으면 믿는 게 모두 신기루인데, 《공자》와 《맹자》를 볶아 된다고 성인군자가 될 수는 없다. 거듭나기는 쉬운가. 경(經)을 첫 자부터 마지막 자까지 모조리 외웠다고 거듭나게 되는가? 아침부터 저녁도 모자라 밤을 지새우며 정진한다고 도통의 경지에 오를까? 그러니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깨진 항아리에 물붓기일 뿐이다. 믿음의 시작을 기독교에서는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했다.(롬 10:17) 그러므로 많이 들음은 가짐을 굳게 하고, 많이 들음은 뜻을 밝게 하고, 많이 들음은 근심을 없애 준다. 이는 세상의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듣고 새겨야 내 것이 되는 것은 같은 이치다.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는 것은 순수화되려는 자기정화의 본성이 작용함과 동시에 외부의 간섭에 대한 일정한 내적인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며, 이는 자기실현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믿음에는 극단의 절제가 동반되어야만 진실성을 갖게 된다. 또 하나는 소위 중생(重生,Anothen; 요 3:4-6)이 인간존재의 타락(창 2:16-17)을 본으로 하는 것이고, 신과의 관계를 이어가며 살기 위해서 그에게 요구되는 영혼의 변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봤을 때에 믿음 또한 그래야한다는 점이다. 믿음이란 신과 인간 상호간에 신뢰를 바탕으로 맺는 약속의 실천이지만 칼뱅(Calvin)의 바람처럼 '하느님이 대가없이 주시는 선물(고전 12:8-9)이다.'고 하는 신의 배려이기도하다. 그러므로 믿음의 역사는 불특정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다가가야 함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사람이 마땅한 은총을 손쉽게 입어 원하는 바를 이룰 수가 있어야 말씀에 진정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유행가처럼 누구나 쉽게 접하도록 대중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는 엉뚱하게도 모두가 자기도취에 빠지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믿음과 종교적 행위를 혼동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느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벧전 4:11)'고 했으니, 말씀을 곱씹어 진의를 다시 새겨보라. 가짜 불과 가짜 흥분을 만들고 박수치고 흔들며, 벽돌 몇 개 올려놓고, 나는 이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으니 구원의 도장을 당연히 받았겠지 하는 혼란의 허방다리에 깊이 박혀있을 뿐이다. 설령 '좁은 문(Narrow Gate)'을 지났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계속해서 '좁은 길(Narrow Way)'로 가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중생의 상태를 유지하며 사는 것은 생활 전체가 신선처럼 한 단계 위의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모두가 그런가?
(칼뱅은 이에 대해 어느 한 부분의 변화가 아니라, '본성(本性) 전체의 갱신(The renewal of the whole nature)'이라고 했다. 본성은 하늘이 내려준 그대로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본성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베껴내라는 의미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몇 명이나 되겠나? 다른 곳은 고사하고 참 뜻을 다 잊어버린 오늘날엔 성직자만 따져도 몇 명이나 되는지 쉽게 알 것이다. 좋던 싫던 어울려 살아야하고, 적과의 동침이란 황당한 일도 다반사이고, 권모술수가 판을 치고, 탈법과 불법이 횡행하고,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잠시 뒤돌아보기라도 하면 뒤쳐지는 세상에서, 그런 상태로 현실의 삶에 안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모두가 무가치한 상태에 있다는 점을 안타깝게도 모른다. 평생을 안거(安居)와 만행(萬行) 등을 통하여 정진하는 수행자도 이루기 어렵다는 깨달음을 일개 중생이 일상을 탐진치(貪瞋癡=탐심을 내고 화를 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내는 것) 삼독심(三毒心)에 절은 삶을 살면서 어찌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심오한 뜻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하여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심청정시불(心淸淨是佛)이라 하여 마음이 청정하면 바로 부처라고 했다지만, 그것이 하루아침에 되겠는가? 다겁생(多劫生) 동안 쌓인 업장을 녹이는 일만도 뼈를 깎는 인내의 정진 없이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The Bhagavad Gita)》에는 '천사람 중에 한사람이 겨우 완전에(成滿位=완성의 지경) 이르기 위해 노력한다.⑻'고 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신 말씀을 깊이 되새겨보라. 미국 태생의 전도목사인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AD 1918∼ ) 침례교회목사는 어느 날 설교를 마치고는 '내 설교를 들은 수많은 사람 중에 단지 5%만이라도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면 하는 것이 희망이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니다. 물론 5%라는 의미도 그의 간절한 희망일 뿐이다. 가당찮은 줄을 알면서 뱁새처럼 쫓아가봤자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수행이나 명상을 하는 등으로 자신을 추스르는 것은 복을 받으려는 것도 아니고, 무아(無我)나 무상(無相)을 깨달으려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제대로 알려면 그 또한 수행에 버금가는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러니 평생을 수행하는 승(僧)도 도달하기 어려운 묘경(妙境)일진데 하물며 속(俗)에서야 불감당이다. 그러니 목적은 다른 것에 두어야한다. 기도나 명상은 마음의 평안을 얻어 이승의 삶을 충실히 하는 데에 최소한이나마 도움을 얻고자 함이 속인에게는 더 큰 바람이다. 우리가 이승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데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충실한 삶이야말로 이승에 존재케 한 이유에 상응하는 진실한 답례가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며 동시에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가치를 스스로 높이는 자족과 보람이 되기도 한다. 둘째는 어느 누구도 다음 세계를 알 수가 없음으로, 만약에 주검이후에 다음 세계가 있다고 한다면 최소한도의 입회자격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목적도 나를 돌아보기 위한 방편의 하나이고, 지금의 나를 스스로 위로하는 행위이며,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다음세계를 향한 오늘의 다짐인 것이다. 물론 이도 나약한 인간이니 어쩔 수 없는 생각일 뿐이지, 확인된 게 어디 있나? 그러니 소위 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삶의 목적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신이 주재하는 속에서 내가 피조물이어야 하는 예수의 세계나 세상의 주인은 나이니 내가 곧 신일 수도 있다는 부처의 세계라도 마찬가지로 이승에서 사는 한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믿음을 가졌으면 믿음대로 따라 살아야겠지만, 참회경(懺悔經)을 게송하거나 고백성사(告白聖事) 후에 용서를 받는다고 해서 삶의 이력까지 고쳐지는 것이 아님을 바로 깨친다면, 하루하루의 삶도 진실해야 함을 알 것이다. 이는 작은 깨우침에 지나지 않겠지만 큰 실천으로 가는 첩경이다. '하루살이 버섯은 한 달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莊子》「逍遙遊」'고 했지만, 한 달을 사는 버섯은 고사하고 하루살이라도 그의 하루는 그 벌레가 아는 한에서는 일생이니 그것에 충실해야 자신에게 주어진 도리를 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 살고 있었는데 5백 년 동안은 봄이요, 5백 년 동안은 가을로 삼고 살았다.(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고도 했다. 이것을 긴 수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명령이란 신수(神樹)가 천년을 한 해로 나이테를 만들지만, 하루가 일겁(一劫=4억3천2백만 년)인 하늘이 보기에는 그것도 1분이 조금 넘는 것에 불과하니 하루살이의 하루나 비슷한 크기의 명(命)일 뿐으로 인간의 시간 셈으로 했을 때나 더 살았다는 정도이다. 주어진 생명의 시간이 짧다고 허무에 젖는가? 수명이 100억년이 넘는 태양이나 하루살이나 똑같은 일생일 뿐이다. 요절한 사람이나 장수한 사람이나 한평생을 산 것은 같다. 하루를 살다가 죽어도 존재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기(期=100세)를 넘겨 살았으면 그것에도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모르면서 단지 수명이 어떠니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식으로만 바라보니 세상살이에 자신이 없는 인간들이 귀하디귀한 삶을 쓰레기 같다고 말하고, 무책임한 인간들이 인생을 짧다거나 허무를 말하며, 저울추가 내세로 기운다고 주접을 떤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진실성이다. 그러니 이를 평생을 통하여 털어내야 하는 한낱 환상쯤으로 여기고 마음 졸이며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하여야 할 어리석음이 아닐까. 누구는 고해(苦海)라고 해도, 그 옛날 수메르 사람들처럼 '달콤한 삶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Nig-nam nu-kai zi ku-ku-da)/《수르파크의 가르침(The Instructions of Suruppak), 245행》'는 축복으로 감사하며 '날 때와 죽을 때 사이'를 평안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금쪽같은 시간을 옳게 쓰는 것이며, 존재로서의 가치를 충실이 하는 것이라는 충고를 다시금 새겨들어야 한다. '죽어 황홀하고 아름다운 곳에 들어간 어느 믿는 자가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어 지루하다 못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천국이 지옥처럼 여겨졌다./「지옥」'는 오쇼 라즈니쉬(Rajneesh Chandra Mohan Jain)의 우스개는 웃자는 게 아니다. 영원성이나 불멸성도 좋지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 ⑴ 에르베르 토마(Herbert Thomas) 著/김양미 譯, 2007,《인류의 기원》「6장 네안데르탈에서 라스크까지」, '1933년에 이스라엘 나자렛(Nazareth, Nazerat)남쪽의 카프제(Kafzeh, Qafzeh)동굴에서 다섯 구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그 가운데는 약 10만 년 전 것으로 보이는 젊은 여인과 발치에 여섯 살 된 아이가 발치에 함께 묻혀있었다. 1965년에는 그 근처에서 프랑스의 선사학자 베르나르 방데르메르슈가 같은 시기의 어른 여섯 구와 아이 일곱 구의 유골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그로부터 6만년 후에 등장한 크로마뇽인과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다. 카프제 무덤은 가장 오래된 무덤이다.' * ⑵ 「전도서 3:1-8」, 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 ⑶ 《회남자(淮南子)》「券14 전언훈(詮言訓)」篇, '洞同天地 渾沌爲樸 未造而成物, 謂之太一. 同出於一 所爲各異 有鳥有魚有獸 謂之分物. 方以類別 物以羣分 性命不同. 皆形於有 隔而不通, 分而爲萬物 莫能反宗. 故動而謂之生 死而謂之窮. 皆爲物矣.(천지간이 만연하여 혼돈한 본래의 만듦이 없는 자연그대로 있는 만물의 상태를 일러 이를 태일(太一)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하나에서 생겨나는 데, 그 만들어진 모습은 각각 달라서 새도 되고, 물고기도 되고, 짐승도 만들어 지고 이를 일러 여러 분류의 물건이라 한다. 온 사방은 종류별로 모이고, 물건은 무리대로 분류되니 성품과 목숨이 각기 다르다. 모든 것은 형태가 있어 격이 생기며, 서로 통하지 않으며, 분류대로 만물을 이루어 그 대종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느니.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죽은 것을 일러 궁(窮)이라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을 사물(事物)이라 한다.)' * ⑷ 월레 소잉카(Wole Soyinka), 1986년 12월, 〈노벨문학상 수상연설〉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식민지시대(유럽 그리스도교 국가와 아랍 이슬람 국가의 식민지 모두를 말한다. 論者註) 이전의 아프리카 사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프리카 사회가 종교(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를 지칭한다. 論者註)문제 때문에 다른 사회와 전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경우라도 흑인 종족은 다른 종족을 우리가 너희보다 낫다는 식의 전도 열정에 사로잡혀 복종시키거나 개종시키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경제적 또는 정치적 동기라면 모른다. 그러나 종교 때문에 그러지는 않았다.' * ⑸ 뿌리가 깊은 기원을 갖고 있는 인간의 생득적(生得的) 본능은 가없는 세월만큼이나 튼실하게 내재하고 있는 근원적인 힘으로, 진화가 요구하는 조건에 끊임없이 필연적이어야 하는 변이(變異,variation)와 환경조건에 최적화된 특질(特質,characteristic)로 조화를 맞추면서 진행되었다. 생명체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생산하는 자기생산의 지속적인 역동성과 함께 항상성(恒常性)을 지닌 정보로 이를 보장하고 있기에 극히 작은 미미한 변동만으로도 비평형상태(non-equilibrium state)를 보존함으로서 본래대로 유지할 수 있다.① 생명체의 이런 존재방식을 생물학에서의 산일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계에서의 평형상태(equilibrium state)란 생명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비평형성을 유지하는 일은 바로 생명현상 그 자체가 된다. 결국 생명현상을 정의하는 자신의 존속(survive)과 후대를 잇는 번식작용(reproduce)이 전형적인 비평형구조의 역학이며, 이는 생물학적 산일구조의 특징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생명체는 설령 그 존재이유가 밖에 있다 할지라도 동력이유만큼은 그 자신에게 있어야하는 이유이다. 〈히브리 성서〉의 신이 생명체를 창조했다고 해도, 생명이 '저절로 그러하지는 못할지언정, 스스로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생존본능과 종족보존은 유기체가 지니고 있는 능력이다. - ① 에리히 얀치(Erich Jantsch) 著/홍동선 譯, 1995, 《자기 조직하는 우주(The Self-Organizing Universe)》/「9. 사회 문화적 진화/생물학적 커뮤니케이션의 역동적인 전개」, '환경과의 물질 및 에너지교환은 에너지/물질시스템의 자기조직을 위한 기초적인 전제조건의 하나다. 에너지적 관점과 물질적 관점은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새로움과 확인의 상호 작용을 표현한다. 그러나 새로움과 확인은 실용적인 정보의 측면들이다. 에너지/물질계들은 적절한 정보에 의해 상호 조정되고 방향이 설정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정보의 자기조직은 새로운 정보를 낳는다. 환경정보를 경험하고 활용하는 것은 이미 에너지와 물질 교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 ⑹ 《성경》에서는 어떨까? 에덴동산에서의 순결에① 대해 많은 논란이 있지만 신이 번식을 명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말하고 있다.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은 이에 대해 낙원에서는 슬기의 불꽃(inteligible flame)이 억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이것(결혼)을 위대한 신비라고까지 말했다.(엡 5:32) 그는 《실낙원/4편》에서 '위선자는 순결에 대해서 장소 문제며, 순진에 대하여 아무리 엄격한 소리를 할지라도, 또 만물에게 개방하신 것을 깨끗지 못하다고 중상을 하여도, 창조주는 번식을 명하였으니 신과 사람에게 적이 되는 파괴자가 아니 다음에야 누가 금욕을 명하리오.② 만세, 결혼의 사랑이여, 신기한 법이여, 인류 자손의 참된 근본이여, 다른 모든 공통한 것 중에서 낙원의 특유한 자산(資産)이여!'라고 찬양하였다. 하지만 밀턴의 주장은 말씀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 낙원에서 순결의 상태에서는 출생이 축복이 되겠지만, 실낙원 이후는 원죄에 더해 이승의 죄까지 얹혀야 하는 저주가 붙은 출생임에도 이를 비켜가려했을 뿐이지 의미도 없다. 우리는 낙원이 아니라 이승에서 출생되었다. 죄인을 끝없이 양산해야하는 화수분 같은 이 상황을 신의 명령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신의 섭리는 인간이 무엇이 되어 지기를 원하고 있는가? 우리가 피사육자의 신세라면 그게 진정 구원인가? '범이나 외뿔소가 우리에서 뛰쳐나오고, 귀갑(龜甲)이나 옥(玉)이 궤 안에서 깨졌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이냐?(虎兕出於柙, 龜玉毁於櫝中, 是誰之過與.)' 범이냐? 옥이냐? 이게 인간의 잘못이냐? 에덴동산은 우리이고 궤이다. - ① 존 밀턴은 이에 대해 '만일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이러한 자연생식의 인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AD 약 346-407)외 여러 신학자(Gergory Nisene, Procopius)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청교도의 기정(旣定)입장과 같았다. - ② 「디모데전서 4:1-3」,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쫓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리라 혼인을 금하고,' * ⑺ 불가(佛家)에서는 삼라만상이 다 공(空)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빌 공자 공(空)은 없을 무(無)처럼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있되 없는 것처럼 깨닫는 것을 이른다. 이 밀도 참으로 듣기에 어색하다. - 음양오행으로 보면 공(空)은 구멍(穴) 속에 천지를 빚어내는 장인(工)이 있음이니, 겉은 고요해 보이나 내부의 본체는 생동하는 태극(太極)이다. 무(無)는 본태가 없어 겉으로만 작용하니 무극(無極)이다. - 한 예를 든다면,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개아(個我)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소위 '허망한 물질을 얻으려는 자인 중생(衆生,sattva)'과 '허망한 물질임을 깨달은 자인 보살(菩薩,bodhisattva)'로 나뉘게 된다.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으려하는 마음에는 번뇌(煩惱)가 따르고,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에는 청정(淸淨)을 얻을 수 있다는 이론이다. 물질세계인 이승의 삶은 욕심으로 도배된 생로병사의 고통일 뿐이다.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계 안에서 '물질은 허망하다'는 명제가 성립되지 않음은 제쳐두고라도, 허망한 물질의 의미란 속된 말로 재물을 위로 본 것인 데, 인간의 속성을 그렇게 구별해서 말하기도 간단치 않다. 무소유(無所有)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기본적인 의식주의 양이 있어야 한다면 기준을 두기는 애매하다. 어느 선을 지나야 허망한 물질일까? 생물학적 충족까지일까? 사회적 품격까지일까? 그리고 인간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한계란 윤리도덕에 어긋나는 것 외에 무엇인가? 지향하는 목표가 높다고 해서 경계를 넘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삶의 동력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주장인 힌두교 경전의 하나인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이조차도 신에 의한 허상으로 본다. 다시 말해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최면에 걸리게끔 유도한 것으로 볼만큼이나 극단적이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되면 허무주의에 빠져야한다. 인간 모두는 깨닫지 못하여 윤회전생의 세계를 헤매는 신세일 뿐으로 육도(六道)에 갇힌 존재는 유한의 섭리에 얽매여 돌고 돌아야만 한다. - 이는 노아의 때에 세상의 양심으로 사는 자보다 신의 의로 사는 자가 선택을 받았듯이 절대화 시킨 자기본위의 가치일 뿐이다. 그 연장이 원죄를 짓고 났다고 하거나 도둑의 씨를 안고 태어났다고 하거나 물질세계는 껍데기인 허상만이 비추는 그림자로 보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승에는 무엇 때문에 왔는가? 오로지 죄의 업(業報,Karma)을 닦으려는 삶일 뿐으로, 자연법칙만이 존재하는 현상계에 대해 당위의 가타부타는 제쳐두고라도, 나임에도 내가 아니라는 이상하게 변한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이승에 살면서도 현상계의 존재인 나를 그림자로 여기려 하다니, 이는 듣기에도 이상하지 않은가. 오로지 신을 위해 이승에 존재해야하는 인간이란 하늘의 공리를 오도했던 중세유럽의 잘못된 신앙관을 답습하려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것도 모세가 세운 신앙관이 뿌리이다. 그러니 모세가 주장하는 하늘일 뿐이다. * ⑻ 함석헌 註釋, 2007, 《바가바드 기타(The Bhagavad Gita)》「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50」, '쿤티의 아들아, 완성의 지경에 이른 사람은 어떻게 브라만에 이르는가를 간단히 들어보아라. 그것이 지식의 최고의 경지이니라.' 논자 주 : 내적 내버림(초행작,naishkarmya)도 넘고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 '일상을 탐진치(貪瞋癡=탐심을 내고 화를 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내는 것) 삼독심(三毒心)에 절어 사는 인간이 그를 벗어나 아욕(我慾)이 없고 마음이 잔잔하면 브라만과 하나(brahma-bhuta) 됨을 얻을 수 있다/「제18장 내버림에 의한 해탈 53」'고 분명하게 길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면 '완성의 지경(成滿位)'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할까? '일천 사람 중에 한사람이 겨우 완전(成滿位)에 이르기 위해 노력할 줄 알며, 그 노력해서 완전에 이른 일천사람 중에서도 나를 참으로 아는 자는 겨우 하나뿐이다./「제7장(즈나나 비즈나나 요가/#거룩한 주 말씀하시기」) 3절'고 하였다. 따지자면 일백만 분의 일의 확률인 셈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희망인 5%보다도 훨씬 적다. 욕심에서 벗어나긴 불가능한 인간이니 물론 이마저도 하는 말에 불과하다. 노아는 의(義)로 선택을 받았다. 양심껏도 아니고 무욕(無慾)이기에 그런 것도 아니다. 만약에 의가 아니었다면, 홍수 후에 손자에게 한 저주행위로 보아서는 노아도 그 기준에는 들지 못했을 것이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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