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우주기원론과 창조신화)
- 6. 나고 죽는 것은 이치 -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듯, 인간들의 마음이 물들고 변했듯이, 하늘은 영겁의 세월에도 그대론데, 종교는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기를 끝없이 반복했다. 태초에 천지가 열리고부터 중간에 도태 없이 주어진 운명을 다한 것들은 나고 컸다가 지쳐서 망하는 것이 만유의 법이 되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도 그렇고 우주 전체를 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가 사는 지구의 인류사만 보자. '메(me)⑴'로 수렴하던 수메르는 3천년을 조금 넘게 맥을 이었다. 하늘과 땅이 모두 잠든 무가치한 혼돈의 시기에 오직 관행만이 세상의 잣대로 횡행하던 즉자적(卽自的)세계에서 인간의 가치를 대자적(對自的)존재로 탈바꿈시킨 위대한 문명이었다. 그 역사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일어났지만 후대를 이끄는 이정표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던 등대지기였다. '마아트(Maât)⑵'란 하늘의 법을 앞에다 내세운 고대이집트도 수메르만큼의 긴 세월과 거대한 문명을 열어 인류를 선도하였다. 오시리스(Osiris)의 최초의 부활사상이나 유일신 아텐(Aten)사상과⑶ 그들 문명의 결정체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고대문명의 아이콘이다. 그러나 찬연히 빛나는 문명의 꽃을 피우고 발전시키는 데는 가혹한 도전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극복해야 했다. 얕은 여울이 만든 커다란 소택지와 냉기를 발하는 황무지가 그들 앞에 놓여있는 미래의 터전이었다. 암울한 현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수시로 범람하는 강이었다. 한 번의 홍수로도 강줄기를 바뀔 만큼이나 강력한 물의 힘은 아귀의 굶주림인양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먹어치웠으며, 반복되는 재난은 그들의 영혼마저도 송두리째 앗아가는 저주였다. 미처 날뛰는 바다에 농락당하는 배를 타고 있는 듯한, 슬픈 탄식의 폭풍우 속에서 너무도 가혹하게 그들을 때려 꺾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불행의 연속은 초인적인 인내를 원했으며, 자연과의 사투는 수세기에 걸쳐 그렇게 끝없이 이어졌다. 끝내는 개펄처럼 끈적끈적 늘어진 늪지의 일부를 개간하였고 소택지의 물을 빼고 다듬어 개척지를 늘렸다. 놀라운 그들의 의지와 용기는 황폐화된 땅을 농경에 이용하도록 바꿔 놓았다. 문명은 그렇게 하나씩 뿌리를 내리며 싹을 틔운 것이다.⑷ 여기까지는 수없이 봐왔던 고대문명의 발생과정이었으며 오늘날 이룩한 사상을 비롯한 모든 것의 원천이자 동력이다. 그 후에 서로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려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문명세계를 뒤집어엎는 혼란에 휘말려 조금의 정체기를 가졌던 인간은 '신의 사랑(Agape)'이란 또 다른 굵직한 아이템을 갖추고, 예전보다 더 큰 세상에서 큰 마디의 두 세월을 이제 막 지나쳤다. 이번에는 그 옛날과 조금은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약효란 세월이 흐를수록 어쩔 수 없이 떨어지기 마련이 아닌가. 그러니 흐름을 아는 자들은 기댈 구석이 사라진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왜 그런지 오래전부터 느낌이 그랬다. 이전 시대부터였다. 19세기부터 일기 시작한 인본주의 사고와 자연탐구에 대한 염원은 작은 불꽃으로 시작하여 들불처럼 온 누리에 퍼져나갔다. 거칠 게 없었던 거대한 폭풍이 그들 세계의 모든 가치를 말살하듯 휩쓸고 지난 뒤에도 뿌리가 깊었던 거대조직체계는 외형상으로 기존 구조들이 그대로 남았지만, 새로운 질서는 전도된 가치를 되돌리기에 충분한 힘으로 새로운 정신 및 영적 구조들의 방향을 확실하게 바꿔놓았다. 그동안 그렇게 막무가내로 내댔던 이유가 뭐였을까? 답을 찾지 못해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 나고 컸을 때에 온 세상을 뒤엎어 버렸으니 이제는 지칠 때도 됐다. 그러니 그들 말마따나 심히 우려되는 하나의 가정이지만, 하나하나 바꾸다가 본질마저 훼손될까 걱정되어 그랬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이니 하늘의 섭리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역사는 앞일에 대하여 과거를 경험으로 예측하게 해준다. '메'로 강한 유대를 맺은 메소포타미아의 신의 세계도 풍상을 이기지 못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⑸ '위대한 신이시여! 위대한 심판을 하는 그날에,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제가 당신에게 왔으니, 죄가 없다면, 악이 없다면, 제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증인이 없다면, 제가 해를 입힌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저를 구하고 보호해 주소서! 저를 위대한 신 앞에 고발하지 마소서! 저는 깨끗한 입과 깨끗한 손을 가진 자니이다./《사자의 서(Book of the Dead)》' 영원할 것 같던 '마아트'도 세월의 풍화를 이기지 못하고 '메'를 따랐다. 정말로 인간이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 당사자들이야 펄펄 뛰겠지만, 수메르나 이집트의 신관들도 그랬다. 겁부터 덜컥 나는 엄청난 사고(思考)의 용기이지만, 혹여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해봤던 이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과연 하늘을 이고 살아가야하는 인간에게 하늘이 없다면 어떨까? 어떻게 이 사회를 이끌고 대처해 나갈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긴 하다. '하늘이 없는 세계가 더욱 인간적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척도에 따라서 이성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정의롭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통찰로 우리는 완숙해져 있으며, 더 냉철해지고 또 강건해져있다.⑹' 그러니 부질없는 기우일 뿐이다. 그 점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한은 하늘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짓거리는 오늘 당장엔 없을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본(人本)의 세상과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고, 군림하게 되면 어떠한 폐해를 입히는지는 잊지 않고 있다. 인간의 역사를 들춰봤을 때에 종교도 정치처럼 언제나 같이 있었다. 사랑도 권력으로 오염되면 인간의 존엄에 타격임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옛일처럼⑺ 강제적인 게 아니게, 이제는 스스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신을 앞세워 인간을 감시하던 타락한 중세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 안에 담겨있는 바른 뜻을 깨닫는 것이 제일이 아닌가.⑻ 맞지도 않는 문자 몇 개로 우길 것이 아니다.⑼ 바른 것은 그나마 질기게 이어갈 수 있지만, 곁가지가 되면 털어질 뿐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 이치인가. 역사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 ⑴ '메(me)' : 제의권①의 총칭으로 고대메소포타미아문명 전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흐름으로 사회전체를 지탱했던 사상이다. '메'는 동사로 '있다(to be)'라는 뜻이며, 동명사로 '존재나 실제(being)'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수메르 어 'me'는 라틴어로 esse로 번역되며, 명사로 essentia, 즉 essence(本質)라고 표현할 수 있다. 수메르문화에서 '존재'란 의미는 시민으로서의 자격, 즉 시민이 되는 척도를 가리킨다. 이는 수메르사회에서 인간사이의 질서를 지키는 소양을 지니는 것이 얼마만큼이나 중요한 덕목이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메'는 창조순간부터 우주를 지배하는 공리(公理)로서 우주를 굴러가게 한 율법과 규칙, 규정을 모두 합쳐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바탕이 깔려 있는 정서가 그들을 실용적이게 만들었으며, 애초에는 엔키(Enki)가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가 세상의 '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혜의 신이며 구원과 치유의 신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엔키가 도시를 발전시키고 건전한 사회를 이끌 수 있는 법도와 기술을 갖게 된 것도 '메'란 존재능력이 있기 때문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수메르에서 '메'는 사회의 기본을 이루는 제도와 사람, 의식, 그 밖의 문화적 요소가 복잡하게 담겨진 존재로서 최고선이었다. 후에 메소포타미아의 통치자와 권력의 주체인 그들과 연합한 사제계급이 이를 이용하여 정치적, 사회적 권력을 창출하고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삼았음은 불문가지다. 《지우수드라의 홍수이야기》나 《수메르 왕 계보》에서 '왕권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의 하나라고 보면 맞는다. - ① 수메르의 제의권(祭儀權)은 대략 백여 개가 넘는다. 그 가운데에는 '주권(主權,nam-en)과 대여사제권(大女司祭權,nam-lagal)이 제의권 중에서 가장 높은 권한이다. 주(主,en)는 주인이란 뜻으로 신전을 포함한 도시 전체의 주인을 말한다. 주권 개념은 더욱 발전하여 신들의 왕 엔릴(Enlil)의 주권이 세상의 주권을 뜻하기도 했다. 그 외에는 신성(神性), 왕관, 왕좌, 왕홀(王笏), 왕의 지팡이, 왕 의복, 목자권(牧者權), 그리고 다음으로 왕권(王權), 여사제권, 구마사제권(驅魔司祭權) 등이 있다. * ⑵ 마아트(Maât) : 마아트는 고대이집트 사회의 안전유지에 기초가 되었던 철학, 종교 개념, 조화의 원리, 행동규범 등을 망라한다. 마아트는 정의와 올바른 삶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우주의 질서이다. 마아트 여신은 라(Ra,Re)의 딸로서 창조신 프타(Ptah)와 또 다른 형태의 창조신화에서 나일 강을 관장하는 풍요의 신인 크눔(Khnum)을 도와서 사물을 '올바르게' 창조한 신이다. 마아트가 '올바르다, 진실 되다, 순수하다, 실제적이다, 변경할 수 없다, 변함없이 확고부동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바꿀 수 없는 하늘의 법률, 이를 관여하는 신'을 의미한다. 「사자의 서」의 '심판의 장'에는 두 명의 마아트 여신이 등장한다. 한 여신은 실정법을, 또 다른 여신은 도덕적 규칙을 상징하고, 각각은 전통왕조인 멤피스(Memphis)의 하 이집트와 테베(Thebes)의 상 이집트를 분할하여 관리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상하 이집트의 정치적인 통일은 18왕조의 아흐모세(Ahmosis, BC 1580∼BC 1558)에 의해 최초의 완벽한 통일 이집트가 되었다. * ⑶ 아텐(Aten,태양의 원반이라는 뜻)신 : 본래는 나일 강 중류의 테베(Thebes)지역에서 숭배하던 지방의 작은 신이었다. 신왕국시대 18왕조의 10대 파라오였던 아멘호테프 4세(Amenhotep Ⅳ, BC 1352∼BC 1336)에 의해 오직 하나의 신으로 지정되어 추앙하게 하였다. 방대하던 이집트의 종교 체계가 아주 짧은 시간에 파라오 한 사람이 주도한 유일신 숭배로 대폭 축소된 것이다. 이는 후일에 '아마르나 혁명(Amarna revolution)'이라고 부르며, 종교개혁을 뛰어넘는 종교혁명이었다. 왕은 이름마저 아케나텐(Akhenaten,아텐에 봉사하는 자라는 뜻)으로 개명하고, 왕비이며 여제사장인 네페르티티(Nefertiti,아텐에게 이로운 자라는 뜻)와 둘만이 오직 아텐신과 의사소통하게 하였다. - 중세의 교황을 비롯한 여타 종교 지도자들이 오랜 세월동안 경험한 것처럼, 신과 의사소통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됨은 권력을 확고히 하는데 결정적이 된다. - 그러나 아텐신 숭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케나텐의 죽음과 동시에 끝났다. 언제나 이해를 맞추면서 공생하는 종교와 권력은 각개로 떨어져서 존립할 수가 없었다. 아텐에 의해 손발이 묶였던 여타 신 숭배자인 기득권층에게 아텐이란 단일신은 방해꾼에 불과하였다. 18왕조 마지막 파라오였던 14대 호렘헤브(Horemheb, BC 1323∼BC 1295)는 중부지역에 위치했던 아텐의 성지인 아마르나(Amarna)의 모든 시설을 훼파(毁破,헐어서 깨뜨림)하였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이집트에 갇혔던 유대종족사이에서는 이 단일신 숭배관습을 원용한 유일신 체계가 어느 정도 힘을 얻게 되었으며, 일부에서는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다고 연구결과를 발표한 학자도 있다. 피라미드처럼 생긴 지구라트(ziggurat)가 바벨탑 이야기에 영향을 주었듯이(창 11:4)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절대가치인 부활에 대한 희망이 탄생하기 훨씬 오래전에 이미 고대이집트의 종교관은 사후의 삶과 부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 오시리스신의 부활 - 이런 여러 가지가 결코 창세기와 우연히 들어맞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들 연대기를 일목요연하게 나열하면 더 명확하게 확인이 된다. '모세는 유태인들에게 아톤(Aten)의 영적인 종교를 부여했고 신성의 표현이자 그들을 다른 종족과 분리시킬 목적으로 할례를 소개했다. 유태인들이 후일 자랑하는 여호와 신은 모세가 그들을 선택된 민족으로 만들어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데리고 나왔던 부분들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선택 행위와 새 종교의 선물을 통해서 그는 유태인을 창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1939,《모세와 일신교(Moses and Monotheism)》'고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AD 1856∼1939)는 주장했다. * ⑷ 수메르문명의 발생 : 수메르문명을 이루게 된 실질적인 요인과 성장발전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인류학자 루이스 모건(Lewis H. Morgan, AD 1818∼1881)은 《고대사회(Ancient Society)》를 통하여 인류사회진화사를 크게 3단계로 나누고, '문명'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성음자모(聲音字母)의 사용 및 문자기록의 제작으로 시작된다.'고 말하며 문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이것만이 다는 아니다. 이후부터 '문명'의 정의에 확충과 정규화를 꾀하는 일이 잦아졌다. '문명의 정의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는 역사발전의 과정 중에 중요성분의 출현을 표지로써 발전단계를 식별했는데, 이런 중요요소에는 문자, 청동기, 그리고 도시(城市)가 포함되며 심지어는 계급사회와 국가의 정부형식도 포함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열거한 이들 성분 혹은 그 개별적인 발전역사는 결코 문명탄생의 동력에 관한 완벽한 설명이 될 수가 없다. 문명이란 한 사회가 이런 성분을 갖추고 있을 때의 물질이나 혹은 정신상의 어떤 질량적 표현이고, 그 관건은 재물(財富)의 축적과 집중 그리고 과시에 달려있다./장광직(張光直, AD 1931∼2001), 1990, 《中國文明的起源》'고 한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 따라서 '문명'을 분석하여 표지(標志)로서 문자와 주조와 사용한 청동기 및 도시(城市) - 수메르에서는 도성국가(都城國家)로 존재했다. - 의 형성과 발전을 꼽았으며, 이에 해당한다면 문명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문명의 동력이란 한 사회가 축적, 집중 그리고 과시한 그 재산의 방식과 특징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의 각종 성분 - 예를 들어 문자, 청동기, 도시 따위 - 이 재산의 축적, 집중 그리고 과시에서 맡은 역할 및 일어난 작용을 말할 수 있다. 이는 수메르문명을 해부해 보면, 발생과 성장에 있어 정확하게 그에 들어맞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에서 이해가 된다. 수메르인은 막대한 국부(國富)를 이룸으로서 문명의 싹을 틔울 수 있는 여력을 얻었다. 초기 몇 세대에 걸쳐 수메르의 통치자들은 두강 사이를 연결하거나 도시와 도시사이를 운하를 건설하여 연결하기도 하고, - 한 예로 라가시(Lagash)왕조는 기르수ㆍ라가시ㆍ시라라ㆍ구아바 등 주요 4지역의 도시를 묶어서 구성하였다. 기르수에 주왕궁(主王宮)이 있고, 수십㎞ 떨어진 구아바를 제외하고 세 지역은 운하로 연결하였다. - 수로를 거미줄처럼 만들어 강물이 미치지 못하는 도시외곽의 먼 들판에까지 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관개시설을 완성하였으며, 이는 농경지의 대량 확보를 가져다주는 농업기술의 회기적인 진보였다. 애초부터 비옥했던 토지는 당시로서는 첨단이라 할 수 있는 농경기술에 힘입어 곡물생산은 단위당 소출량을 타 지역보다 몇 배나 늘렸으며, 거미줄처럼 놓인 농수로와 충분한 농수의 공급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경작지를 크게 증가시켜줌으로서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더구나 강이나 수로에 때도 없이 쌓이는 침적토를 공동 작업이란 이해를 떠난 협력을 통하여 수시로 제거하였듯이 공통의 관심사에 대하여 합심함으로써 더 큰 효율을 얻을 수 있었다. 경제활동의 주축인 곡물의 다량생산과 잉여농산물의 교역으로 얻은 소득은 국부의 창출에 더할 나위가 없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발전한 절대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점점 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경제활동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발전하여 규모의 확장과 함께 국력도 동시에 커지면서 교역의 범위도 점점 더 넓어졌다. 서쪽으로는 아나톨리아반도의 끝에서 지중해 지역까지 뻗었으며, 아래쪽으로는 고대이집트 왕국과의 대량교역을 이뤘으며, 서쪽으로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이랄 수도 있는 저 멀리 인도대륙의 모헨조다로(Mohenjo-daro)와 하라파(Harappa)까지 수메르상인들은 대규모의 상거래를 트였다. 당연히 문자를 이용하여 물량의 수급에 대한 정보와 문서를 서로 공유할 수 있었다. * ⑸ 아프라시아(Afrasia)①지역에 건조화기 시작되기 전에, 시리아 북부의 하란(Haran)에서 드넓은 광야를 횡단하여 우라르트(Urartu)지역 일대에 이르기까지, 아나톨리아(Anatolia)고원의 남부평원에서 농경생활을 하다 남쪽으로 내려오던 일부가 인간의 정주(定住)에 안성마침의 조건이 되었던 티그리스의 중류유역에서 선사시대부터 거주하며 독특한 형태의 토기문화를 꽃피웠던 니네베(Nineveh)②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의 한 축으로 세상을 이끌었던 초기의 여러 지역 가운데에서도 주목할 만한 도성국가(都城國家)의 하나였으며, 남쪽 칼데아(Chaldea)의 문명과는 또 다른 '문명의 요람(the cradle of Civilization)'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던 도시였다. 니네베는 문명의 성장기에 돌입한 이후로 자연의 끈질긴 도전에 대항하여 각고의 응전으로 맞서며 광명의 길로 한발씩 나아갔다. 하지만 영화와 영광은 불멸성과 영원성의 보장되지 않는 잠깐의 환상과 같았다. 융성했던 대부분의 고대도시가 언제나 그러했듯이 문명의 개화와 성장도 잠깐의 환희에 그쳤을 뿐으로 흥망과 성쇠로 점철된 역사의 기록이 말하듯이 숫한 곡절로 엮여졌을 뿐, 결국은 시종의 흐름을 이어가는 운명이 섭리인 것처럼, 시대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여느 도시나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못 다한 아쉬움만을 남기는 똑같은 비운을 당해야했다. 문명의 만개는 유아기를 견뎌냈다고 해도 성장기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이겨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니네베에게는 더욱 강해진 내외적인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하는 더 어려운 응전이 필요하였으나 남아 있는 힘으로는 이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니네베에게 주어진 운명이 시간이 다 되었는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이 통하는 '군자지택, 오세이참(君子之澤, 五世而斬=위대한 조상이 덕이 있어도, 오대가 지나면 멸문한다)'의 철칙이 역사와 함께 오래도록 살아 숨 쉬는 것은 역사의 필요한 순간마다 매정하게 채찍질하고, 끊어놓을 때에는 어김없이 찾아와 맥을 자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BC 25세기경의 '독수리 석비③'의 명문처럼 문명초기에는 서로를 도와가며 똑같이 부의 혜택을 나눠가졌었다. 그러던 것이 부가 쌓이면서 부패의 도가 심해지고, 권력도 마찬가지로 커질수록 안하무인이 되어갔다. BC 24세기경에는 라가시왕조(Lagash王朝)의 우루카기나왕이 등극하며 칙령으로 개혁을 반포하기에까지 하였다.④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조 내에서 뿐만이 아니고, 역내의 모든 왕조가 쌓이는 부만큼이나 점점 군국화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나중에는 축적된 부보다 훨씬 많은 지출이 발생하고 되고, 수입은 경작의 소홀로 농지가 황폐화됨으로서 급격히 줄어드는 악순환이 수세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 구티안족을 비롯한 인접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비확충은 불가피했다. 그렇더라도 역내의 역학관계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어쩔 수 없는 결과를 만들게 됨으로서 서로간의 불신을 조장하게 되었으며, 싫든 좋든 알력이 발생하게 되고, 끝내는 〈동란시대(動亂時代)⑤〉를 불러왔다. - 그들이 고귀한 신의 이름으로 신성하게 맺었던 온갖 신의∙정직은 '메'의 상실로 이어졌으며 결국은 스스로가 나락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라진 니네베에 대한 기억은 다른 도시와는 양상이 전혀 달랐다. 전설속의 예언자 나훔(Nahum)이 도시의 멸망을 예언했던 〈히브리 성서〉「나훔서(Book of Nahum) 1:1」에 의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오랜 궁금증으로 수십 세대를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왔다. - ① 아놀드 J. 토인비, 1976, 《역사의 연구》/「卷1 문명의 발생, 제 2부/C. 문명발생의 원인/Ⅱ. 생각할 수 있는 적극적 요인/(a). 인종과 환경/2. 환경」, '페르시아만 서안에서 대서양 동안까지, 그리고 이란∙아나톨리아∙시리아∙아프리카 북서부 고지의 남쪽 기슭에서 야만과 아빗시니아 고지의 북쪽 기슭과 열대 아프리카 삼림의 북쪽 연변까지이다.' - ② 니네베(Nineveh) : 성경에서는 '니느웨(Niynĕveh)'로 불린다. 전기신석기시대인 BC 7000년경부터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우바이드기 문화와 교류할 만큼이나 번성했다. 남부 칼데아(Chaldea)에서 수메르문명이 발흥(發興)한 이후인 BC 3000년대에의 유물에서 티그리스 강가의 여러 곳과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 있는 도시들과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음에 비추어 이런 유사성은 이전의 어느 시기부터 서로간의 상업적 이해관계가 성하였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수긍이 간다. 니네베는 아시리아(Assyria,Asshur)제국 최후의 동방(東方)수도로서 최고, 최대의 성읍이었다. BC 612년의 바벨론과 메디아(Media; 아리안종족)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 이후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 후로 〈민간전승〉으로만 근근이 이어오던 니네베의 영화는 메소포타미아문명을 탐구하던 영국인 클라우디우스 리치(Claudius James Rich, AD 1787∼1820)가 전설속의 유적지 일대를 탐사하면서 문이 열렸다. 그는 한적한 폐허로만 보이던 황량한 벌판이 놀랍게도 잃어버린 니네베였음을 확신하고 일대의 유적지분포를 지도로 만들었다. 그때가 1820년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대부분이 탐사수준에서 머물다가 같은 영국출신의 오스틴 레이야드(Austen Henry Layard, AD 1817∼1894)에 의해 1839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인 폴 보타(Paul Emile Botta, AD 1802∼1870)도 발굴대를 편성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조금 늦게 참여한 보타가 오히려 1842년에 니네베로부터 북쪽으로 16㎞쯤 떨어진 코르사바드(Khorsabad)에서 아시리아의 사르곤 Ⅱ세(Sargon Ⅱ, BC 721∼BC 705)의 궁전을 발견하는 개가를 올린다. 정면입구의 성벽이 수십 미터나 되는 장엄한 궁전은 입구에 높이가 4.2m나 되는 거대한 석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얼굴은 사람의 모습이고 몸은 황소이고 등에는 독수리의 날개까지 달려있는 황소상(人頭牛)이었다. 보타의 성과에 자극을 받은 레이야드는 발굴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드디어 1845에서 1851년에 사이에 걸쳐 남쪽 29㎞지점에 있는 님루드(Nimrud, Calah, kalakh, 니므릇)에서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Ⅲ, BC 858∼824)의 센나 케리브(Senna-cherib)궁을 비롯한 수많은 유물을 발견한다. - 보타가 발견했던 황소상도 여럿 발견하였으며, 많은 유물과 함께 쐐기모양의 글자들로 씌어진 2만 5천개도 넘는 깨진 토판(土版)조각들을 발굴하는데 성공한다. - 또 같은 곳에서 아시리아의 마지막 세 군주의 궁전의 일부도 발굴하였으며, 고대 니네베의 유족과 동일함을 알았다. 니네베의 폐허는 고스르(Khosr) 강에 의하여 분할된 두 방축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레이야드에 의해 발견된 북쪽의 구윤직(Kuyunjik)에는 산헤립(Sennacherib, BC 705∼681)과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BC 669∼BC 627)㈀의 궁전이 있었고, 남쪽에 있는 네비유누스(Nebi-Yunus, 선지자 요나라는 뜻이며, 그가 여기에 묻혔다는 전설에 기인한 명칭)에는 산헤립과 에살핫돈(Esar-haddon, BC 681∼668)의 궁전이 있었다. 이들 궁전은 웅장하고, 그 안에는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였던 큰 창고가 발굴되어 수천 개의 토판과 원주형의 도장, 흉상, 조상(彫像) 등 고대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성벽에 둘러싸여 있던 성읍은 길이 5㎞, 넓이 1.6-2.4㎞, 면적 730ha로 여리고(Jericho)성의 약 250배의 넓이로서, 고대 니네베의 성곽선(城廓線)의 자리를 정밀하게 더듬을 수가 있게 됐다. ㈀ 연대에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근년연표 - Charles Freeman, 1996, 《History of Sumer》 - 를 기준하였다. 《인명지명사전,1994,엠마오》의 '니느웨' 항에는 BC 669∼BC 633년으로 기재되어있다. - ③ 독수리 석비(stele of the Vultures) : 현재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비문에는 라가시왕조시대 에안나툼(Eannatum, BC 2454∼BC 2425 재위)왕의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수메르의 키시, 우르크, 우르, 라르사, 움마 등의 도시국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수메르의 패자였다. 내용 중에는 이웃 도시인 움마의 통치자와 체결한 조약문이 기록되어있으며, 접경지역에 있는 경작지를 움마인이 임차하면서 추수가 끝난 후에 임차료를 곡물로 지불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경계비를 훼손하지 않는다거나 그 이외의 지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면서 최고의 신인 엔릴(Eenlil)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조항이다. 이는 만일 조약을 어길 경우에는 엔릴의 거대한 투망(投網)이 움마인들에게 덮어 씌어질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움마인들이 빌려 쓰는 경작지는 라가시의 수호신인 닌기르수가 관장하는 신의 땅임으로 이를 어길 경우에는 신의 이름으로 징치할 수 있는 명분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석비 정면의 부조에도 오른손에 천둥방망이를 들고 있는 닌기르수신이 천둥새를 쥐고 있는 왼손에 전쟁포로들이 갇혀있는 투망을 함께 쥐고 있다. - ④ 우루카기나(Urukagina, BC 2351∼BC2342 재위)왕의 칙령을 기록한 토판에는 권력자나 사제들의 횡포가 심하여 시민들의 원성이 높았으며, 약자가 일상에서 신분이나 재산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의 당위성은 당연히 사회정의였다. 칙령은 기득권자들의 권력을 줄이고 빚 때문에 종이 된 사람들은 자유를 되찾아주는 등으로 시민의 기본권 확립에 주안을 두었다. - ⑤ 아놀드 J. 토인비, 1976, 전게서/「卷1 문명의 발생, 제 1부/C. 문명의 비교연구/Ⅰ. 문명사회의 調査/(b) 수메릭(Sumeric) 사회」, '수메르∙아카드 제국이 세계국가이던 당시에 선행하는 사상(드럽)을 검토할 때 우리는 다수의 지방 국가 사이의 파괴적인 일련의 전쟁이라는 형태에서 〈동란시대〉가 있었다는 징후를 발견한다./…/이는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이 상호 투쟁을 거듭하여 모두 피폐(疲弊)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은 이란 고원 기슭의 구릉지대에서 침입한 만족(蠻族) 구타이(Gutaeans)에 의해 이 사회 발상의 본 고장이 짓밟히고 말았다.' * ⑹ 니체 著/안성찬ㆍ홍사연 譯, 2005, 《즐거운 학문ㆍ메시나에서의 전원시ㆍ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 ⑺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중세기 말에 횡행하였던 교회들의 잘못된 실상을 비난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소망과 바람에 대한 대답이었다. 물이 고이면 썩는 것은 신을 받드는 신성한 곳이라고 일컬어도 인간사회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개혁이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설령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해도, 기득권층에게는 개벽과 같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저항은 당연했을 것이다. 더구나 일개인의 독선도 타파하기가 어렵거늘, 신성이 뒷받침된 계급화 된 독선은 더욱 깨뜨리기가 불가능할 만큼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일을 인간이 어찌할 수 있겠나. 오랜 악습에 대항하는 투쟁과 그에 따른 혼란 속에도 개척자는 나오기 마련이고, 그중에 한사람이 마르틴 루터(Luther, Martin, AD 1483∼1546)였다. 루터는 자신이 정열적이지만, 학구적이며 경건하고 순종적인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다. 시대가 그를 불러냈지만, 그는 '개혁자'로 불리기를 원치 않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은 오로지 신에 의해 이끌려 한 일이기 때문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평신도들 가운데 오히려 선지자들 보다 더 경건한 신자와 바른 믿음과 은사를 가진 자가 많다./1520,「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The 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는 루터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믿음은 말씀에 진실로 순종하느냐이다. 그런데도 곁눈질에 바뿐 사람들이 많다. * ⑻ 문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말씀에 들어 있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세속화에 빠진 교단을 부정하고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를 주창했던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AD 1890∼1981)의 주장은 그래서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얼얼하도록 박수치고 목청껏 떠들어야 무슨 소용이냐. 말씀의 진리를 담은 깨달음이 없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던 노아 가족 8사람 이외처럼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당시 사람들도 성전건축을 위하여 벽돌 값도 내고 노력봉사도 당연히 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누가 인도한다고 그 사람이 날 구원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 백날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 박영호(朴永浩) 著, 2006, 《다석 유영모 어록》 5. 예수 그리스도, 『내가 23살 때까지만 해도 기독교를 전도하는 데는 「요한복음 3:16」절과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보혈로써'라는 사도신경 구절이 빠져서는 안 되는 줄로 알고 줄곧 외웠는데 지금은 달라지고 있다. 수십 년 간 이 구절을 인용하여 오다가 지금은 몹시 달라지고 있다. 달라진 뒤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나로서는 내 해석이 옳다는 신념이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요 3:16)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데 어찌하여 이 세상에 살기가 이렇게도 괴롭단 말인가? 그러나 나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인다. 하느님의 사랑을 줄곧 보고 있다. 세상의 온갖 것들이 나에게 하느님의 편지가 되어 소식을 전해주고 내가 생각을 함으로 하느님이 주신 생명인 얼나를 밝힐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예수만이 혼자 하느님의 아들(독생자)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아버지의 성령을 받아 얼나로 거듭나면 얼나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다. 내가 깨달은 얼나로는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얼나를 받들고 줄곧 위로 올라가면 내가 하느님께로 가는지 하느님께서 내게로 오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가까워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얼나가 하느님 나라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사람마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를 깨달으면 이 세상도 그대로 하느님 나라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보면 하느님 아버지의 참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자기 마음속에 온 하느님의 생명(씨)인 얼나가 하느님 아버지 외아들인 것을 믿어야한다. 그러면 누구나 몸나로는 죽어도 얼나로는 멸망치 않는다. 거듭난 얼나가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얼나가 참나인 것을 깨닫는 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이라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다시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성령을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한 하느님과 이어준다.(1957)』 * ⑼ 아래의 두 사람은 모두 세례를 받았으며, 평신도이지만 믿음의 크기가 성직을 수행하는 이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 평신도에 의미를 두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지만, 그들이 누구 못지않은 믿음의 깊이를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싶다. - 믿음의 생활에서도 자유분방함을 주장한다는 것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두 사람 중 독일 태생인 야곱 뵈메(Jakob Böhme)는 루터교의 평신도이자 신비주의자였다. 그의 생애는 한 마디로 평안한 삶과는 지독히도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을 온갖 중상과 핍박을 받았으며 인생의 말년에조차 쓸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릴 만큼이나 불운의 연속이었다. 뵈메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인간 영혼의 중심이 영원으로부터 나왔으며, 하느님으로부터 기원한 인간 영혼 안에는 영원히 감추어진 본질 혹은 실체가 있다.'고 하는 주장일 것이다. 그는 교조주의(敎條主義,Dogmatism)와 세속화에 빠져 있던 시대상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바람이기도한 '영의 자유, 내적인 삶,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계시를 내세우며 개인의 자유로운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문자는 우리를 죽인다는 원칙에 근거하여 믿는 자들은 《성경》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성경 기자들을 영감 시켰고 지금도 신자들을 영감 시키는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글을 썼다. 그는 어느 날 이렇게 고백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즉 성경말씀 전체가 내 안에 계신 것이다. 내가 왜 이 책을 더 필요로 해야 하는가?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을 배워야지 왜 내 밖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하여 논의해야 하나?' '사람은 하느님이라는 자연 전체의 일부분이다. 전체 자연인 하느님을 알아야 전체의 부분으로 한 군데에 있는 사람의 자리를 정(定)할 수 있다. 전체인 하느님과 부분인 사람의 관계를 밝혀주는 것이 종교이다./(1957),「종교란(Religion is」'고 말하며 세속화에 빠진 교단을 부정했던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AD 1890∼1981)의 「어록」①에 이런 구절이 있다. '흔히 사람들은 정신을 어디에 매어 놓으면 일이 잘될 것같이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정신을 붙들어 매어놓고 싶어 하지만 정신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은 자유로운데 그 본질이 있다. 그 대상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라 해도 거기에 매여 사는 것은 그 대상은 우상이 되고 내 정신은 내려가게 된다. 내 정신은 하느님 한 분을 우러를 수 있도록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매여서는 안 된다. 매어놓지 말아야 할 것을 매놓고 모으는 것이 아닌데도 모으려고 하는 것이 우상이다. 어디에다 묶어 놓을 수 있는 게 정신이 아니다./(1956),「안 매인 마음(Untied mind)」' 또 하나 편벽(偏僻)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들의 방음다리 외에는 벽견(僻見)으로 싸잡아보는 짓거리를 질타하는 말도 있다. '동야자이야(同也者異也)는 같은 것이란 다른 것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이단이라고 헤프게 불러서는 안 된다. 자기하고 다른 것이 이단이라면 자기 자체 속에도 다른 것이 좀 많겠는가? 그렇다면 죄다가 이단일 것이다. 나 아니고서는 모두가 이단인 것이다. 한 가지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다. 동야자이야는 또 사뭇 다른 것은 같다는 뜻도 된다. 머리하고 발하고는 절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다르게 움직이면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머리와 발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같다는 말 속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일치할 것이다. 같은 것이라도 따지면 다르고, 다른 것이라도 따지면 같은 것이 된다./(1956),「동야자이야(Same is differrent)」' - ① 박영호(朴永浩) 著, 2006, 《다석 유영모 어록》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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