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글

게시물 상세보기

다시 쓰는 러브레터 1

백승훈 2013. 01. 13. 오후 11:22
3954


-연애편지


사랑하는 이에게
오늘처럼 진눈깨비 날리는 밤엔
뮤지컬 캣츠의 삽입곡인 barbra streisand의 ‘memory’를
그대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이유 없이 마음의 경사각이 가팔라진다고 투정하는 그대에게
밤거리의 불빛처럼 은은하고도 감미로운 음색의 바브라의 재즈를 들려 드리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이내 평온해질 지도 모르니까요...


책 꾸러미를 정리하다가 방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린 오래 전의 연애편지를 읽었습니다. 편지의 내용만으로는 그 쪽에서 먼저 보낸 편지인지, 내가 먼저 보낸 편지의 답신이었는지 분간이 쉽지 않았습니다.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편지 속의 구절들을 읽는 동안 마치 산나물을 씹는 것처럼 그 시절의 쌉쌀하고도 아린 감정의 편린들이 아슴아슴 피어올랐습니다. 그냥 보내도 예쁜 편지지에 잘 말린 압화(押花)로 한껏 모양을 내고 또박또박 손 글씨로 정성껏 적어 보낸 편지를 들여다보는 동안 찻잔 속에 띄운 매화가 피어나듯 내 마른 가슴에도 한 떨기 수선화가 벙그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무렵 우리는 서로 다른 이유로 많이 힘들고 아팠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또렷이 떠오르진 않지만 불면의 밤을 지새워 씀벅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새벽하늘의 별빛처럼 아득하고 멀기만 했던 둘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우리는 서로 그리워 할뿐 가닿을 수 없어 노랗게 물든 이파리를 흩뿌리며 살아가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와 같았습니다. 살아가는 일이란 가슴에 품었던 욕심을 하나씩 비워가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걸 나이테처럼 뼈에 새기며 체념을 몸에 익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
랑하는 이여!

나는 하루 중에서 그대의 밝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잠깐의 아침과
해거름의 짤막한 시간들을 가장 아끼고 사랑합니다.
때로는 그 짧은 순간에 다 들려드리지 못한 가슴 속의 말들이 남아 있어 아쉬울 때도 있지만
아직도  내게 내일로 미뤄둘 수 있는 사랑의 기회가 남아 있음을 신께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이 하늘 아래 어디에선가 당신이 나를 향해 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난생 처음 무지개를 본 아이처럼 마구 가슴이 뛰곤 합니다.


따로 약속한 적은 없었지만 우리는 출근하는 차 안에서, 퇴근길의 골목길에서 매일 짤막한 통화를 하곤 했습니다. 그 몇 의 짤막한 통화를 위해 그녀는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고 지루한 낮을 음악을 들으며 견디는 듯 했습니다. 어느 날은 밤새 읽은 책의 한 구절을 밑줄 그어 놓았다가 읽어주기도 했고 다른 어떤 날은 자신이 온종일 들었던 음악이라며 감미로운 재즈의 선율을 수화기 속으로 흘려보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줄 아름다운 음악을 고르고 책 속에서 곱고 귀한 말들을 찾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땐 그리 생각했을 뿐 그게 얼마나 서럽고 힘든 일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마음이 가난하여 보여드릴 게 많지 않은 나는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작은 것'이란 칼릴 지브란의 말을 좋아합니다.
보이는 사랑보다 그 뒤에 가려진 훨씬 더 위대한 사랑의 크기를
그대는 이미 가늠하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비록 그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유빙 조각처럼 보잘 것 없어도
수면 아래 숨겨진 내 사랑은 매우 크고도 견고함을 믿어 줄 그대임을 아니까요.
나는 언제나 가벼이 보이는 사랑보다는 뒤에 가려진 위대한 사랑의 주인공이고 싶습니다
.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을까요?

그리움의 이파리들을 모두 내려놓은 겨울나무로 그 시절의 맵찬 북풍을 잘 견뎌내고 지금은 새 잎이 피는 봄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속절없이 세월이 가는 동안 속없는 꽃들이 무수히 피었다 지고 내 마른 가슴에도 몇 번인가 연둣빛 봄빛이 다녀갔으니 쓰리고 아린 그녀의 상처에도 이제는 새 살이 돋아났겠지요.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갑자기 내려 쌓인 눈길 위에서 마음먹은 대로 제어되지 않는 자동차처럼 한 몸이면서도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인 법, 아무리 힘겹고 아픈 기억도 자고나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봄눈처럼 언젠가는 잊게 마련입니다. 넘어진 아이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던 길을 계속 가듯 그렇게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니까요. 오래전의 연애편지를 읽다가 내가 잠이 들면 밤새 눈이 내려쌓여 눈을 뜨면 순은의 아침이 펼쳐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6개

제비꽃 2013. 01. 14. 오전 12:36

추억속에 그분도 같은 마음 아닐까요ᆢ 추억으로만 간직하기엔 두고두고 가슴 아픈ᆢ 그러나 새날은 다가 오고ᆢ 공감합니다. ♧

백승훈 2013. 01. 14. 오전 10:54

나이들수록 무뎌지기 쉬운 게 감성의 촉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글을 통해 보다 많은 분들이 지나간 시절이라 치부해버리기 쉬운 사랑의 느낌을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최인구 2013. 01. 14. 오후 12:07

백승훈 님~!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한다는 말처럼 사랑하는 님께 보내는 편지를 다시 접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한자 한자 정성 들여 쓰신 글귀 저 또한 한자 한자 정성껏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김현배 2013. 01. 14. 오후 03:23

세월이 흘러 지난날의 흔적을 보노라면 아득한 사랑의 눈물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 생각한다 그때 무엇때문에 그리도 힘들었을까 오늘도 그러할까 좋은 글 감사합니다. 백승훈님

백승훈 2013. 01. 14. 오후 07:27

제아무리 힘들고 아픈 기억도 세월의 물살에 씻기고나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김현배님

백승훈 2013. 01. 14. 오후 07:30

한자한자 정성껏 읽어주신다니 함부로 휘갈겨 쓴 적은 없었나 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저의 글이 읽는 분들에게 작은 감흥이라도 드렸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고맙습니다. 최선생님^^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