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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공원 벤치 중절모 남자

김봉길 2016. 02. 07. 오전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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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같지 않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빠르게 걷는 저녁 어스름 휴일 문래공원. 누가 앞뒤 가고 오는지, 나만 가고 있는지, 그저 너나없이 만들어진 길을 걷는 사람들. 이미 정해진 길쭉한 7분짜리 공원 산책길 따라 줄줄이 돌고 도는 사람들. 걷다가 스친 나무의자. 나도 앉았을 의자, 거기 중절모 남자가 다시 눈에 띄었다. 아직 비스듬 길게 앉아 있는 중절모를 쓴 남자. 세바퀴 째 돌지만, 그 자세 그대로다. 


 누가 분명히 꽂아준 것이 분명하다. 색 바랜 중절모 옆, 연두 잎이 달린 꽃. 분홍 꽃봉오리가 사그러질 듯, 제 고개를 뉘이고 있다. 처음부터 냄새가 없이 만들어진, 차라리 사람 내음이 밴 꽃. 나 때문이었을까? 하필 이때, 내 걷는 소리를 따라 몸을 내 걷는 방향으로 돌려 앉는 남자. 꿈속에서도 우스꽝 내 엉덩이를 보았을까, 웃는지 아픈지 입가 낡은 주름이 떨린다. 굵고 검게 드러나는 입술이 뭐라고 꿈틀거리는 듯. 


'오후 내내 웅크리고 있었던 것, 왜? 후, 너네는 모를 것이다. 주름이 거무스레하다거나 내 눈동자 움직거리지 않는다거나, 뭐 그래서 지금 여기 앉은 이유를 모를 거다. 하루를 살고 죽는데, 그러면 또 하루가 생기는데, 내가 쓴 밤색 중절모가 내 나이만큼 숨이 헐떡거리는 걸 알리 있을까. 나를 보는 사람들아, 그래 너도 지나치는 사람이구나. 그러나, 분명,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인 것을. 너희도 나처럼 웅크릴 것이언만.' 


그 남자의 얼굴엔 오랜 시절 웃다 울다 생긴 주름만 보였다. 눈코입귀 주름들도 낡은 중절모 귀퉁이 너널 헤진 상표처럼 제자리를 헤매고. 나이를 세는 일이 귀찮다는 듯, 씰룩거리는 입술로 새어 나오는 소리들, 시간 가는 소리보다 작은 그 소리들은 땅 어디도 앉지 못하고. 그랬다. 그 소리는, 사시사철 겨울인 그의 가슴에서, 매몰차게 내 목덜미를 시리게 하는 말이 되어 문래공원 길가를 날아다니다, 그렇게 얼다가, 또 숨다가 내 발에 툭툭 채이는 것이었다. 


'말을 하건 기침을 하건, 주머니에서 휴지 같은 것을 꺼내 입언저리를 감싸야겠어. 나도 내 안에서 나갈 때가 됐거든. 사람은 언제나 나갈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거야. 휴지 같은 것에 싸서 꺼내 보면, 허, 참 내 맘은 아니더라고. 그래도 하루에 세 번 침을, 스스로 삼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어? 세 번 다 세고 나면, 한꺼번에 힘이 빠진다니까. 그래서 삼키지 않으려 참아. 참으며, 사람이 만든 이 꽃을 모자에 꽂고 있어. 겨울 문래공원 산책 내내 이 꽃을 모자에 달고, 입을 가린 채 고개 기웃 기울이고, 세상을 보는 거지. 어디 한 곳은 뚫어지게. 뚫어진 곳으로 들어가 보게!' 


중절모 남자를 뒤로하고, 그가 매단 꽃 모양을 떠올린다. 그래 모자는 짙은 밤색이었고, 그 꽃은 왼쪽에 꽂혀있었다. 그런데, 허 그런데, 웬걸! 그 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쓸데없이 떠오르는 중절모 남자는 모자 속에 가득 자기 말을 가두어 놓은 듯하다. 멀어질수록 내 귓바퀴를 뱅글뱅글 맴도는 중절모 속 말들, 뒤통수 머리카락에 매달려 날 간지럽히는 말들을.


'뭐, 안 된 얘기네만 이 꽃은 내가 달았지, 히히! 나를 보는 사람은 내 모자만 보라고 말이야. 가슴속에 단 꽃은 말로 설명하기란 얼마나 힘들다구.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정확한 색과 모양새가 뭔지 모르더라구. 내 입가에 맺힌 마른 잡풀 같은 주름살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어. 이 모자 꽃이나 잡풀이나 그들이나 나나 모두 한 번은 같아질 거라는 말 말이야. 물론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다른 사람이 없는 시간에도 모자를 쓰고 있지. 내 꽃이 달려있는 중절모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보는 거지. 사람보다 이 중절모를 조금씩 더 사랑하고 싶은 걸 어쩌겠나.' 

 


--->  계 속  - http://kimbongkil.blog.me/220620772362




댓글 2개

이소영 2016. 02. 07. 오후 04:26

김봉길님 문래공원 반갑네요 저 근처 살거든요 ^^*

김봉길 2016. 02. 09. 오전 11:17

혹여 스쳐지났을지도 모르는 것이 문래공원의 법칙인 듯합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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