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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목 36편 (새봄은 오건만)
김병국 2016. 10. 13. 오후 05:18
3766
김병국 2016. 10. 13. 오후 05:18
3766
( 새봄은 오건만 )
정인은 다시 전처럼 힘이 생기는지 산에 올라가 토끼를 잡자며 아침 일찍 준석을 깨웠다.
가끔 고라니며 토끼 다람쥐들이 먹이를 찾아 오두막에 내려와 두리번거리며 가곤 했다.
정인은 집 주위에다 고구마 몇 개 씩 던져 놓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준석이 약초캐러 갈때는 방문을 열어놓고 토끼며 고라니, 오소리 등 야생동물이 앞마당에서 노는 걸 즐겨보고 있었다.
먹이를 찾아 오다말고 토끼한 마리가 눈 속에 묻혀 움직이지 못하고 눈망울만 굴리며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러다 굶어 죽겠어요. 잡아다 우리가 키워요.\"
정인이가 준석에게 다그치자 준석은 정인이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갔다.
준석은 정인이가 그렇게라도 해서 운동을 더 하길 바라고 있었다.
잡힐 것 같은 토끼는 저만치 도망치고 힘이 빠진 토끼는 또 그들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다.
사실 준석은 잡는 시늉에 지나지 않았다.
정인은 이리저리 토끼를 잡으려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녔다.
덕분에 정인인 충분한 운동을 했고 그녀 자신이 병자라는 생각도 자연히 멀어지고 있었다.
'에이, 또 놓쳤네. 내일 다시 잡아야지!' 정인은 약이 올랐는지 입술을 내 밀고 중얼거렸다.
준석은 그녀가 그런 것만으로도 충분한 운동량이라 생각하고 따로 운동을 시키지는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을 옆에서 부추겨 줄 뿐이었다.
산 속엔 하루가 멀다 하고 눈이 내렸다. 오두막 지붕에서 땅바닥까지 팔뚝만한 고드름이 내려가 달라붙어 있고, 그것이 수십 개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새장에 창틀처럼, 그들은 그 곳으로 얼굴을 내밀며 장난을 치곤 했다.
고드름이 떨어지면 그것을 들고 칼싸움을 하느라 쫒고 쫒기를 반복했다.
마른나무 가지가 얼기설기 엉겨 붙어 그 곳에 눈이 쌓이면 환상적인 눈꽃 숲이 되었다.
그런 눈꽃 숲에서 그녀는 놀기를 좋아했다.
눈 나무 가지의 숲을 오가며 마치 토끼처럼 그들도 뛰어 다녔다.
그러다 지쳐 눈밭에 쓰러져 하늘을 보면, 온 천지가 하얗게 설경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아 절로 탄성이 나왔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장난스런 햇살이 지날 땐, 너무나 강렬한 눈(雪) 빛에 눈(眼)을 감아야만 했다.
마음이 들킬까, 그저 조용히 올라앉은 나무 위에 꽃으로 피었다가 온도가 전해지면 사르르 몸을 사르는 순결한 느낌.
달팽이의 촉각을 닮아 너무도 예민해서 자신을 드러내다 금새 숨어버리는 허상 같은 꽃. 그녀는 분명 눈꽃을 닮아 있었다.
준석은 시를 하나 지었다.
파 랑 새
어디선가 날아든 파랑새 한마리가
선녀같은 눈망울로 나를 허물고
아직도 남아있는 설레임에
꿈잃은 눈동자는 별같이 반짝이네
새야 새야 ! 파랑새야 !
빯갛게 농익은 석류알 터지듯
새콤 달콤 행복터트리며 살고지고
미지의 그대향에 취한듯 시 한편 읊조리며
아!--- 그대 눈꽃이여‘
그 후 준석은 해질녘엔 늘 언덕에 올라 이 가사에 곡을 부쳐 하모니카도 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는 귀여운 딸들을 생각할땐 눈물이 줄줄 흐르곤 했다.
그런 중에도 계절은 바뀌고 어느새 눈이 녹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가면서 그녀는 예전 같은 생기가 돌아 왔다.
준석은 뒷동산에 올라 그들의 오두막과 갈대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발 밑에서 파랗게 돋아난 새싹에 시선이 머물렀다.
오두막 옆 길가에도 파란 싹들이 돋아 올랐다.
추위와 눈 속에서도 한해 겨울을 견디어 온 잡초도 이렇듯 다시 살아 나는 데 정인이도 그렇게 이겨 나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차츰 나아간다는 사실은 그에게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이별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 하니 파랗게 돋은 싹들이 희망만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준석은 그 자리에 앉아 파란 싹 하나를 검지 손으로 꾹 눌렀으나 잠시 후 다시 일어섰다.
파릇파릇 돋은 싹들이 미웠는지 그는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마구 눌러댔다.
그 싹들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나둘 꿋꿋하게 일어서고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그것이 다시 시작되는 인생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인간은 항시 좋은 일만은 없는 것일까? 왜 이토록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시련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그 날 이후 그는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 쉬는 버릇이 생겼다.
그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는 하모니카를 들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가곤 했다.
언덕 아래 펼쳐진 깡마른 갈대가 삐죽삐죽 남아있는 밭에서 연주와 연지가 뛰어다니는 것만 같았다.
'아빠, 아빠 이리와 같이 놀아요. 아빠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어젯밤엔 아빠가 오시는 꿈을 꿨어요.' 준석의 귀엔 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주야, 연지야, 아빠가 하모니카 불어 줄게.'
준석은 집 생각을 하며 딸들에게 보내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얘들아! 조금만 기다려 다오. 이제 환자의 병도 거의 나아간단다. 그런데 이 아빠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모른단다.”
뒤에서 가만히 하모니카 소리를 듣고 있던 정인은 곡조가 너무 슬프다고 말하지만 그녀역시 준석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가슴엔 지울 수 없는 멍을 안고 준석은 그렇게 마음을 조이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으나 이따금씩 나타나는 가슴의 통증을 스스로 이겨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되풀이되는 준석의 어두운 표정에 정인의 표정도 전처럼 밝지 만은 않았다.
빈 마음 한구석에 못다 채운 마음을 어디서 채워야 하는 건지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오두막 지붕 너와에 쌓인 눈은 어느새 물이 되어 낙수처럼 떨어지고, 눈꽃으로 덮였던 나무 가지는 앙상하게 그 모습을 들어났다.
응달진 계곡엔 아직도 눈이 조금 남아 있었으나, 마을과 통하는 오솔길은 질척하게 젖어있어 흙이 신발에 묻어 나왔다.
준석은 이제 그녀를 데리고 병원엘 가야 했다.
정인의 병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준석의 마음 은 무겁기만 했다.
그녀와 헤어지는 시간이 좁혀진다는 생각은 준석의 마음을 조이고 있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만 한다고 생각만 하면 살점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날씨가 점점 풀려질수록 준석의 볼에 살은 점점 더 야위어만 가고 가슴에 멍은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며 그녀가 먹여 주는 밥 한 숟갈에 준석은 몹쓸 병에 걸린 사람처럼 가슴이 메어지며 손이 떨려 왔다.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맨밥 한술 물고 멍청히 있어야만 했다.
준석의 모습을 본 그녀는 깜짝 놀라며 \"밥이 목에 걸렸어요?\" 하며 등을 두들겨 주며 숭늉 그릇을 들었다.
음식이 걸리진 않았지만 정말 가슴에 걸린 듯 말문이 막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시원하게 말을 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석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정인은 숭늉 그릇을 얼른 그의 입에 갖다 대며 어린애처럼 먹여 주었다.
당황한 듯 등을 두들기는 그녀, 물과 밥과 눈물을 함께 먹은 준석은 그녀 앞에서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준석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넘기려 했지만 자꾸 얼굴이 일그러지며 나오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짧은 시간 고생도 했지만 준석에게 있어 그 날들은 참으로 행복했던 나날이었다.
그 날 이후 준석은 더 이상 정인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준석은 그녀와 여기서 이렇게 살까 도 했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가족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꼭 돌려보내겠다는 약속했던 자신을 믿고 있는 신념을 저버린다는 것이 죽기보다도 싫었다.
순간엔 그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정인을 가족으로 보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4 월이 되자 계곡에 쌓인 눈도 거의 다 녹아 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자란 싹들은 들판을 제법 파릇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두막 주변엔 싱그러운 풀내음이 가득하고 그녀와 냉이며 달래 쑥을 캐서 떡도 해먹고 된장국도 맛있게 끓여 먹었다.
식목일 아침에 엉성이 할아버지가 감나무 묘목을 들고 오셨다.
내한성에 강한 개량된 감나무라서 가져 왔다며 들고 오셨다.
엉성이 할아버진 그들이 이곳을 떠난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의미를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이것 좀 갖다 잡수세요.\"
정인이가 고구마를 한 자루 들고 나와 할아버지에게 드렸다.
\"뭘 이렇게 많이 주나.\"
\"고구마에요 아직 여기 많아요.\"
엉성이 할아버지는 허리를 구부린 채 고구마 자루를 둘러메고 마을로 내려 가셨다.
준석은 방에서 잘 보이는 앞마당에다 구덩이를 팠다.
\"정인아 이리와, 나무 좀 잡아 줘.\"
\"네\"
정인은 나무를 잡고 준석은 삽으로 흙을 덮었다.
\"지금 심으면 내년에 감이 열릴까요?\"
“아니야, 감나무는 3.4 년 정도 자란 후에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는 거야 그런데 이곳은 날씨가 추워서 감이 열릴지 모르겠어?”
\"아! 그래요. 어릴 때 우리 집 앞마당에 감나무가 있었어요. 감꽃이 피면 떨어진 감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어 동생이랑 같이 목에 걸고 다녔어요. 감꽃이 말라서 갈색으로 쪼글쪼글 해질 때까지 우린 그게 마치 무슨 보물인양 애지중지 했어요.\"
정인은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했다.
\"이 나무에 감꽃이 피면 예쁜 감꽃 목걸이를 만들어 당신께 걸어 드릴게요.\"
\"그... 그래\"
정인은 감나무 묘목에서 금세라도 꽃이 피는 것처럼 흥분되어 있었다.
\"씩씩하게 잘 커서 얼른 꽃을 피워라.\"
정인은 감나무에 물을 주며 마치 아이에게 하듯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준석은 정인을 불렀다.
그녀와 심은 감나무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해 줄까?\"
\"네, 해줘요.\"
두 사람은 양지바른 곳에 있는 준석이 만든 통나무 의자로 손잡고 걸어갔다.
\"무슨 얘기예요?\"
그들은 통나무의자에 기대듯 나란히 앉아 상큼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에 얼굴을 맡기고 어느덧 옛날로 돌아가 있었다.
\"어릴 때 그러니까, 국민(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 뒷집에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는데, 가을이 되면 그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려 먹음직스러웠지. 그런데 그 집주인은 얼마나 지독한지 아이들이 떨어진 감을 줍기만 해도 막 야단을 치곤했어.\"
\"그 사람은 너무 했다. 뚱뚱했어요?\"
\"아니, 키가 크고 얼굴엔 죽은 깨가 다닥다닥 붙어서 멀리서 보면 얼굴이 까맣게 보였지.\"
\"어른이 죽은 깨가 그렇게 많아요?\"
\"응, 그래서 그 아저씨 별명이 깜둥이야, 나는 동네 아이들 대여섯 명을 밤에 불러모아 마치 전쟁놀이 라도 할 것처럼 윗저고리를 벗어 하나 가득 돌을 주워 오게 하고는 그것을 한 곳에 모았지.\"
\"그래서 던졌죠?\"
정인은 준석의 말을 예상이라도 하듯 앞질러 말했다.
정인이가 그렇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건 완전히 건강을 찾았다는 징조로 생각하고 준석은 무척 기뻐했다.
\"응, 감나무를 향해 돌을 던졌지. 아이들은 얼마나 많이 던졌는지 나중엔 지쳐서 멀찌감치 도망가서 앉고는 내 지시를 기다렸지, '여기서 고자질하는 놈은 나 한데 죽어,' 나는 그 때 동네 꼬마 대장이었거든. 감들은 땅바닥에 노랗게 떨어져 있었어, 먹음직스러워 그것을 먹고는 변이 안 나와 혼나기도 했지만, 다음날 주인은 그것을 보고는 펄펄 뛰며 야단이 났어. 온 동네를 다니며 그런 짓 한 아이들을 찾다가 윽박지르는 아저씨가 무서웠는지. 한 아이가 그만 내가 시켜서 했다고 말해 버렸어.\"
\"그래서 혼났겠군요.\"
\"응, 나는 그 아저씨에게 붙들려 갔어. 방안에 가둬 두고는 순경에게 잡아가게 하겠다고 혼을 낼 때 나는 당당하게 그 아저씨에게 말을 했지. 나를 잡아가도 내일 또 감이 떨어질 거라고 했지.\"
\"아니, 이놈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렸군.\"
\"죽은 깨 아저씨는 화를 냈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 내 뒤엔 부하들이 많았으니까 든든했거든, 잠시 후 그 아저씨는 무순 생각을 했는지 이상하게도 나더러 카바이트로 익힌 감 하나를 손에 집어주고는 그냥 집에 가라는 거야.\"
정인은 준석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그래서요?\"
\"재미있어?\"
\"네\"
\"이따 저녁에 해줄게 너무 오래 밖에 있으면 좋지 않아.\"
\"괜찮아요. 빨리 듣고 싶어요.\"
준석은 옷을 벗어 정인에게 들러주고는 얘기를 계속했다.
정인은 준석의 팔장을 끼고 머리를 기댄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죽은 깨 아저씨더러 손이라도 한대 때려 주세요. 하며 손을 내밀었어. 그런데 그 아저씨는 나를 보면서 눈물이 글썽거리는 거야.
그러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고는 우시잖아. 나는 영문도 모른 체 그 아저씨와 같이 울었지.\"
\"왜, 울었어요?\"
\"그렇게 무서웠던 아저씨가 갑자기 우시니까 나도 괜히 눈물이 나더라구. 잘못도 하고 겁도 나고 해서 울었지 뭐,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아저씨에게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 감나무에서 같이 놀던 때를 생각 했었나 봐. 6.25 전쟁이 났을 때 각처에서 젊은 사람을 군인으로 데려갔던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아저씨는 그 감나무에 올라가서 숨었고, 어린 동생은 미처 숨지 못해 군인으로 잡혀 갔데나 봐.\"
\"네 에, 그 후는 어떻게 됐어요?\"
\"그 후로는 내가 아이들에게 그 감나무에 누구든 손을 대면 내가 혼낸다고 했지. 그 이듬해 감나무엔 빨간 감이 탐스럽게 주렁주렁 열렸어, 그 아저씨는 물론 내게 감을 많이 주셨고, 난 그 죽은 깨 아저씨를 좋아하게 됐어.
나이 들어 상대의 상황을 모른채 오해하고 미워하는 거라는 걸 알았지 언제 시간을 내서 그 아저씨 한번 찾아 가야겠어, 지금은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셨을 텐데, 죽은 깨 아저씨는 내게 아주 커다란 교훈을 주신 분이야.\"
\"어떤 교훈인데요?\"
\"매나 체벌보다는 사랑의 힘이 더 크다는 걸 가르쳐 주셨지.\"
\"네 그래요. 저도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어요. 그 죽은 깨 아저씨 만나실 때 저도 같이 데리고 가요. 어떤 분인가 뵙고 싶어요.\"
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은 다음날 아침 다른 날 보다 일찍 일어나더니 어제 심어 놓은 감나무 앞에서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아침 인사를 하고 있었다.
준석은 그런 그녀의 상기된 듯한 얼굴에서 예전처럼 건강해진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흐믓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 후 준석은 병원에 가서 확인해 보자며 그녀와 짐을 챙겼다.
그들이 챙긴 짐은 그가 일기처럼 써왔던 두꺼운 노트 한 권, 그녀의 간식거리 손가락 과자 몇 개 침통과 쑥뜸기 하나, 바위에서 채취한 작은 풀 몇 뿌리와 마른 약초, 하모니카가 고작이었다.
남아 있던 곡물들은 강 노인과 엉성이 할아버지에게 드렸다.
\"나 정말 다 나았겠죠?\"
\"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괜찮은 것 같아 식사도 잘 하잖아.\"
그녀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은 것 같았다.
짐을 싸다 말고 갑자기 그녀는 준석의 손을 잡아끌더니 마을이 보이는 작은 동산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소리를 질러 댔다.
'야-아, 야-아' 눈물을 흘리며 마구 외치는 그녀를 쳐다보다 준석도 소리를 질렀다.
'여-어-----어'
준석의 소리는 울음소리에 가까왔다.
그녀를 위해 다시 외쳐 보았다.
'여-어......여......'
가슴 속 에서 치미는 눈물은 그의 목을 점점 더 조여 아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꽉 막힌 응어리는 도저히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정인의 소리와 눈물......
준석의 목메인 소리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다만 이별을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의 차이일 뿐이라고...
다음날 그들은 마을로 내려가 강 노인에게만 인사를 하고는 서울로 올라 왔다.
다시 돌아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 준석은 다른 분들에겐 인사를 하지 않았다.
\"잘 가게, 얼른 다녀와서 내게도 좋은 소식을 알려 주게.\"
그들은 해질녘에 서울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도시의 화려한 네온불빛들이 하나 둘 번쩍이고 있었다.
그 동안 서울은 많이도 변한 듯 별천지 같았다.
높은 빌딩 윗 층에서 쏟아지는 네온들은 마치 천국의 불빛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지나는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화려한 상점들의 진열품과 간판들......
오랜만에 보는 도시는 그들의 눈을 휘둥거리게 만들었다.
시골 사람이 다 되어있는 그들의 허름한 옷차림에 어리둥절한 행동은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활기차게 다니는 사람들 틈에 그녀도 그들처럼 활보 할 수 있다는 것이 착잡했던 준석을 위로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준석은 정인을 데리고 선배 고광필 박사에게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는 몇 가지 검사를 받았다.
이틀 후 결과를 보러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병원 문을 들어섰다.
준석은 떨고 있는 정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선배는 침울한 표정으로 사진을 형광판에 꽂으며 한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준석은 선배의 표정과 형광판을 번갈아 보며 그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인도 그러한 의사의 행동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꼼짝도 못하고 굳어있었다.
\"자 이리로 가까이 앉아요.\"
선배는 양손을 꺼덕이며 특이한 제스츄어로 그 둘을 불러 앉혔다.
\"그런데 말이야 참 이상한 게 있단 말이야.\"
\"네? 무슨 일이..... 선배님!\"
“여길 보게 그게 덩어리가.....”
선배는 긴 여운을 두며 말 꼬리를 흐렸다.
“마치 쪼그라진 건포도처럼 말라있단 말야.”
\"정말요! 선생님.\"
정인은 벌떡 일어나 준석에게 매달렸다.
준석은 정인의 손을 잡고 선배에게 재차 확인을 했다.
\"현재 상태로는 이상이 없어 보이는데, 통증이 멎은 지 얼마나 됐나?\"
\"아마 석달쯤 될 거예요.\"
준석은 정인을 보며 말했다.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고개를 자우로 흔들며 미심적은웃음을 지으며 준석의 손을 부여잡고 축하를 해야 할지 하여간 이해가 안가네.
기적이 일어 난 것이다.
'오! 하나님, 정인이를 살리셨군요.'
준석은 종교를 갖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외쳤다.
인간이 극단적인 상황에 돌입하면 자신도 모르게 절대권자를 찾게 되는 모양이었다.
\"한가 할 때 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이야기를 좀 나누세, 자넨 정말 대단해.\"
\"네 선배님.\"
\"무엇인가 해야 할거야.\"
위암에 대상이 정인이기 때문에 준석은 추호도 그럴 마음은 없었다.
\"그건 나중 일이고 하여간 환자분도 축하합니다.\"
정인은 가숨에 벅차오르는 감동 부여안고 어쩔 바를 몰라 했다.
그의 손을 잡고 막 달리고 싶었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고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선배와 간호사가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좋아라 했다.
선배도 간호사도 그들의 모습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준석은 정인이 몰래 그녀 어머니에게 연락하여 검사 결과를 말씀 드렸다.
그녀 어머님은 빨리 오라며 잔치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그는 몇일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아구! 고마워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요.\"
‘엄마’ 나 좀 바꿔줘요.‘ 영인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언니가 정말 다 났어요?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전 선생님이 고치실줄 알았어요. 정말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얘, 이리 줘라.’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우리 애좀 바꿔주세요.”
“지금 옆에 없습니다. 나중에 전화를 드리라 하겠습니다. 아직 좀더 검사를 해봐야합니다. 재발 할 수도 있으니 가족들이 신경을 많이 써 주셔야 할 겁니다.\"
\"예, 예, 당연히 신경을 써야지요. 죽을 애를 살렸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그녀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목이메이는 것 같았다.
준석은 마음속으로 이미 그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정인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그들이 처음 사랑을 나누었던 곳으로 갔다.
그녀는 이 곳이 얼마나 오고 싶었는지 모른다며 기분이 들떠 있었다.
준석은 마음도 정리를 해야만 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몇 일간 휴양을 하자고 했다.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정인의 모습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그녀와 처음 사랑했을 때의 황홀했던 그 흥분이 되살아났지만 가슴은 아려오기 시작했다.
‘보내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그녀...... 아! 저 사랑스런 여인......’
준석은 가슴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에 몸부림을 치며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누고 깊은 잠에 들었다.
그가 별장 뒤 높은 산에 오르다 발견한 폐광이 된 금광, 우거진 나무들이 그 입구를 막고 있어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준석은 정인을 그 곳으로 데리고 갔다.
굴 안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한쪽 벽을 따라 더 들어가니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목소리가 울리는 광장에 멋모르고 따라온 그녀, \"여기 뭐가 있어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손전등을 여기저기 비춰 보다, 벽에 씌어 진 글을 보고는 우뚝 섰다.
준석이 자기를 잊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치며 고통스러워했는지를 알게된 정인이는 준석에게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죽어도 당신과는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만일 헤어 질 거라면 저를 죽여주세요.\"
준석은 그녀와 헤어지느니 차라리 여기에서 같이 죽고 싶었다.
\"정인아! 나랑 같이 여기서 죽을까?\"
뭔가 짐작한 듯한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집에서 당신한테 뭐라 했어요?, 애들 아빠가 뭐라고 했지요?\"
그녀의 표독스런 눈초리는 여태껏 보아왔던 정인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표정도 잠시뿐 그녀는 모든 걸 체념한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렇게 하자면 저는 그 뜻에 따르겠어요. 어떤 일이든 전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거예요.“
그녀는 진정하려고 애를 썼지만 심하게 울먹이고 있었다.
그녀는 준석에게 지금의 남편과의 관계를 말하기 시작했다.
남편과의 강제적인 부부생활과 그 동안 있었던 자잘한 가정사지만 그녀의 한 맺힌 사건들을 얘기할 때 참았던 그녀의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봇물처럼 터지고 말았다.
그녀는 이제 준석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의 이별로 죽음 같은 암을 선고받지 않았던가!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를 놓치지 않으리라.'
정인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애원하듯 준석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앞으로 남은 인생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요. 난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
준석은 눈을 감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요. 우리 멀리 도망가서 살아요. 네?\"
그러나 준석은 그녀의 가족과의 약속을 도저히 저버릴 수가 없었다.
또 그의 사랑스런 두 딸들을 방치할 수 없었다.
준석은 점점 더 심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몰라하며 안절부절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준석은 정신을 잃은 듯한 행동으로 자신도 모르게 준비했던 하얀 약을 한주먹 꺼냈다.
“안돼요”
그녀의 외마디소리도 잠시 손을 뿌리치며 준석은 약을 입 속에 털어 넣고는 굴속에 흐르는 물로 약을 삼켜버렸다.
순간, 물속에 보이는 누런 황금 덩어리......
오랜 세월 물에 씻겨 금덩이가 들어나 있었다.
정인은 준석의 입을 벌리고 약을 토하게 하려고 무진 노력을 했으나 시간만 지체할 뿐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선 커다란 황금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준석은 정신이 흐릿한 가운데에서도 손으로 황금을 가리키며 '여기,여기' 하며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안돼, 안돼!\"
그녀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통곡을 했다.
굳어져 가는 그의 시신 앞에서 정인이도 결심을 한 듯 조금 남은 약을 먹었다.
그와 똑같이 그녀도 황금 덩어릴 보았다.
그러나 그가 없는 이 마당에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없는 세상에서 그녀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못 다한 사랑, 못 다한 인생......
허무한 종말을 여기 이 곳에서 그들은 그렇게 엉켜 있었다.
손전등은 땅 위에 나뒹굴어 한 곳을 비추었다.
조금 전 그녀가 보았던 준석이 쓴 글이 선명하게 보였다.
'정인아! 사랑해! 난 당신을 보낼 수밖에 없어 부디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사랑하는 사람끼리 살수 없는 이 세상을......
인간들이 만들어 낸 굴레를, 난 벗어날 수가 없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당신과 살고 싶었는데......
정인아 ! 행복해야 해!'
그녀는 저승에서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준석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아직은 따뜻한 그의 체온이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 오며 눈까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 웅덩이에 빠졌을 때처럼 준석의 몸 위에 엎드려 바위에 쓰여진 글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사랑하는 준석의 위에서 잠들려고 하니 그녀는 고통스런 중에서도 행복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밖엔 아직 추웠지만 굴속은 따뜻했다.
온갖 벌레들이 모여 그들을 뜯어먹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이 꿈틀대더니 몸을 부시시 일으키며 눈을 떴다.
그녀는 아직 죽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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