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글

게시물 상세보기

동생의 유골과 함께 고국을 방문하다/ㅡ(잊히지 않는 나의 여행)ㅡ

박영숙영 2020. 12. 06. 오전 09:16
585

동생의 유골과 함께 고국을 방문하다 ㅡ (1)ㅡ

 ㅡ(잊히지 않는 나의 여행)ㅡ

 

                                                 박영숙영

 

 

매년 방문을 하지 않아도 자주 한국을 방문해서 현대시문학 행사에 참석했고, LA에서 하는

미주한국문협 행사에도 거의 매년 참석해 왔다. 올해도 1박2일의 여름문학켐프를 끝내고

8월14일 California Yuba City에 살고 있는 동생을 보려 갔는데, 동생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병실 안에서는 죽음이 진행되고 있는데, 창밖은8월 한여름의 무성한 잎들은 생명을

자랑하고 있었고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창 안과 밖은 삶과 죽음이 갈리는 길이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참으로 쓸쓸하고 인생이 허무했다.암 판정을 받은 지 6개월

만인 2011년 8월20일 55세의 젊은 나이로 사랑하는 동생 의구는 세상을 떠났다. 좋은

건강 보험을 가지고 있으면서 위암 말기, 간암 말기의 판정을 받을 때까지, 아프다 말다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참고 견디며 병원 가는 것을 미루며 살아왔던 것이 병을 키웠다.

 

그만큼 삶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동생의 힘들었던 삶.

 

진통제와 생명선을 연결하는 줄이 동생의 마른 팔에 매달려 있었다. 중간 중간 고통에서

깨어날 때마다 동생은 벽에 걸린 시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잠들었다

깨어났는지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마취제를 맞고 깨어나고 잠들기를 반복했다.

 

방문 2일째 아침, 동생의 복부에 찬 물을 빼고 나니 정신이 맑아져 살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병원에서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ㅡ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더 이상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생명선을 재거 하고 퇴원하면, 고통 없이 편안히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해 주겠으니

결정을 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내가 누나지만, 사랑하는 동생의

생명선을 제거할 수 있는 권한은 내게 없었다. 지난날 시아버님의 생명선을 제거하고 난 후,

시누는 늘 죄책감에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다.

그날 오후 한인 ”이“성씨를 가진 의사가 병실을 찾아와서 동생에게 하는 말이 ㅡ“당신은 살아날 가망이 없고, 죽을 테니 퇴원하라”ㅡ고 냉정하게 말했다. 아무리 죽음을 앞둔 환자라 할지라도

환자의 인격을 무시한, 인간성이 결여된 한인의사 “이”였다. 같은 한인으로서, 미국 이곳 Yuba City에서, 더구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자신의 부모님이나 가족에게도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의사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갈라 심장을 꺼내고 있는 한 마리 냉혈동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문 3 일째 되는 날 다시 동생의 몸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통증은 극심했다. 마취의

간격이 짧아지자 자가 마취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동생 스스로 마취주사를 놓을 정신이

없었다. 대신 마취를 해 주어도 된다고 해서 올케가 동생의 손가락을 마취버턴 위에 올려놓고

올케가 그 버턴을 눌렀다. 올케가 자리에 없을 때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을 보고서도, 나는 차마

그 버턴을 누를 수가 없어서 간호사를 불렀다. 마취는 고통을 없애 주는 것과 동시에 사랑하는

동생을 더 빨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방문4일째 동생이 떠난 후 사후

처리를 하려면 유언장에 서명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올케가 동생의 서명을 받으려 했지만,

동생은 펜을 잡을 힘이 없었고 정신이 없어 결국 서명을 받지 못했다. 동생이 살아생전 통화를

할 때, 동생이 내게 한 말이 있었다. 자신이 세상 떠나게 되면 지금까지 봉급에서 자동 적립된

연금은 자동으로 올케에게 수령이 가게끔, 직장에 함께 가서 서류작성을 해 놓았다고 했다.

충격 때문이었을까? 왜 올케가 동생의 서명을 받으려 했는지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글이 길어서 다 입력이 되지를 않아/글을 올리려 시도를 했지만 글을 올릴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글을 끝까지 읽어보고 싶으신 분

댓글 1개

박영숙영 2020. 12. 06. 오후 12:53

2011년 동생이 하늘라라로 갔습니다 \"잊히지 안는 여행\"이란 수필을 쓰야할 사정이 이어서 오래전에 메모를 해 두었던것을 정리했습니다 2011년 8월 LA 문학모임에 참석후 켈리모니아 유바시티에 살고 있던 동생을 찾아 갔습니다. 병원에 7일동안 입원해 있던 동생의 마지막 삶을 지켜보고.... 동생의 장례를 치른 후 동생의 유골을 작은 대리석병에 담아서 핸드백속에 넣고 비행기를 타고서 저가 살고있는 텍사스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동생의 유골을 저의집 응접실 벽란로위에 앚혀 두었습니다. 2012년 제 78차 세계한글국제펜대회에 참석하게 되면서 다시 동생의 유골을 핸드백속에 넣고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경주에서 국제펜 행사가 끝나는 날 제주도에 어느분의 시비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에갔고 제주에서 우도에 섬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그리고 토요일 아침 일찍 포항에 도착하고 보니 수중에 남은 돈 2만원 그렇게 잊혀지지 않은 여행을 했습니다. 저의 문학서재로 방문하여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