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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탐방 128차] 창경궁
[역사문화탐방 128차] 창경궁
● 창경궁은 성종14년(1483년) 세 명의 대비들을 위해 지은 궁궐로써 창덕궁과 인접해 하나의 궁궐처럼 사용했으며 이 둘을 합쳐 동궐이라 하였습니다.
● 창덕궁과 연결되어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부족한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 창경궁은 일제 강점기에는 식물원과 동물원이 들어서 유원지로 변했고 창경원이라 불렸지만, 1983년 복원사업을 시작해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회복했습니다.
● 창경궁은 유명한 역사속 이야기인 숙종 때의 인현왕후와 장희빈,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픈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 사도세자는 영특하여 영조를 기쁘게 하였다는 기록이 왕세자 책봉당시 내렸던 죽비에도 있다 합니다.
● 영조는 종종 아들 사도세자를 불러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곤 했는데 조금이라도 부족한 면이 보이면 무섭게 다그쳤다 합니다.
●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커갈수록 비행을 일삼았고 정신병과 강박증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영조의 분노는 나경언의 고변을 통해 극도에 달해 고변 21일 후 세자를 문정전으로 부릅니다.
● 세자에게 자결하라는 전교를 내리자 세자는 읍소하는데 끝내 아들이 들어간 뒤주에 스스로 못질을 합니다.
● 그 어떤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가슴을 치지 않으리오. 훗날 영조는 아들의 묘비에 절절한 슬픔을 토로합니다.
● 두려움 속에 죽어간 사도세자의 처절한 외침과 후회로 가슴치는 아버지의 한이 서린 문정전도 갑니다.
● 화재도 유난히 많았고 성종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일,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의 처형, 일제 강점기의 슬픔 등 많은 일이 있었던 창경궁을 갑니다.
+9월19일(수요일) 오후 1시 40분
+창경궁 매표소 앞(창덕궁 아니고 창경궁)
+회비 : 5,000원 (현장 수납)
+인원 : 20명
● 창경궁은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양위하면서 거처할 공간으로 수강궁을 지었습니다.
● 성종이 수강궁 옛 터에 대비들을 모시기 위한 별궁을 지어 완성하였습니다.
《성종의 태실비》
●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경춘전. 이곳 경춘전에서 정조와 현종이 틴생하였습니다
●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잠시 거처한 적도 있는 양화당입니다
● 통명전은 창경궁 내전중에 으뜸 전각입니다. 이곳에서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습니다.
● 이 일로 인해 장희빈은 사약을 받게 되고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의 선인문을 통해 나갔습니다.
● 영조는 어린 나이로 간택된 정순왕후를 이곳 통명전에서 맞이합니다.
《왼쪽이 통명전, 오른쪽이 양화당》
● 후궁의 처소인 영춘헌과 집복헌. 집복헌은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한 곳입니다.
● 영춘헌은 정조가 독서실과 집무실로 이용했으며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 '복을 모으는 집'이라는 뜻의 집복헌에서 정조와 수빈 박씨의 순조가 태어났습니다.
● 일제 때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사용될 때 영춘헌과 함께 동물 관리소로 이용되는 치욕도 겪었습니다.
● 영춘헌과 집복헌은 원래 2개의 집으로 후궁들의 처소였습니다.
● 영춘헌에서 탄생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뜻에서 정조는 영춘헌 앞에 별도의 건물을 지어 생활 할 정도였습니다.
●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도 논하고 학문 토론도 했던 숭문관으로 현판은 영조친필입니다.
● 함인정은 임금이 문무과거에 급제한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입니다.
● 조선왕조실록에 숭문당에서 과거시험을 본 김기대에게 영조가 급제를 내리며 \"내 마땅히 빨리 가서 자전(임금의 어머니)께 고하리라.\"
● 이는 김기대가 숙종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의 조카였기 때문이라고 실록에 적혀있다 합니다.
● 문정전은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편전으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휘녕전이 문정전의 옛이름입니다.
● 영조는 영특했던 어린 세자를 아꼈으나 첫아들을 잃고 늦게 얻은 자식이라 교육열이 대단했다 합니다.
● 세자의 교육을 직접 챙기는 아버지, 영조가 두려운 가운데 복잡한 당쟁구도가 작용해 한 번 어긋난 영조와 사도세자는 돌이킬 수 없는 단계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둔 곳은 왕의 집무실인 이곳 문정전의 앞 마당입니다.
● 회화나무 앞 팻말에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죽은 곳이 이 근처이고 비극적인 사건이 많이 발생한 선인문과 역사를 같이 한 나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 사도세자의 참극을 지켜본 이 회화나무는 속이 썩고 뒤틀려 속이 비어 버렸다며 사람들은 이 나무를 보면 사도세자의 고통을 알 것 같다고 한답니다.
● 동궁의 정문인 선인문. 그날의 일들은 훗날 정조의 청으로 세초(글을 물로 씻어 기록을 없앰)했다고 합니다.
● 지금은 창경궁 관리소 정문이 된 월근문. 원래는 이곳에 문이 없었지만 정조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 참배를 하기 위해 만들었다 합니다.
● 경모궁은 지금의 서울대병원 안에 경모궁 터로 남아 있습니다.
● 환경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이곳에서 승하하였습니다.
● 환경전은 중종이 대장금의 치료를 받던 곳으로 중종의 마지막을 지켰던 사람은 조선 유일의 여의사 대장금이었다 합니다.
● 환경전은 창경궁 내전 건물 중 하나이며 이 건물은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된 예가 많았습니다
● 빈전은 왕 또는 왕족의 시신이 들어있는 재궁(관)을 모신 건물을 말합니다.
● 경춘전은 왕비의 산실청으로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입니다.
● 경춘전은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와 숙종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생모 현경왐후, 즉 혜경궁 홍씨 등이 승하한 곳입니다.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하여 창경궁을 지었고 창덕궁과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주로 궁궐안의 여성들을 위한 복지차원에서 활용되었습니다.
● 왕과 왕비, 후궁, 공주, 궁인들도 이곳을 처소로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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