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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열 나흘의 단상

채 원 2005. 02. 23. 오전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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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날짜는 년 초에 동그라미 쳐 놓은 글자에만 민감하다.
아침 식탁을 치우는데 친구에게서
점심에 오곡밥을 먹으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떡국 먹은 지가 엊그제인데 오늘이 열 나흘이구나 벌써.
뒷베란다에 가을에 말려둔 호박이랑 가지를 더운 물에 담가놓고
지난 봄에 고향언덕에서 뜯어서 말려놓은 묵 나물과 시래기는 보드랍게 삶아 씻어
다시 따스한 물에 담가두고 접심을 먹고 왔다.
부드러운 나물도 있어야겠기에 시장에 들러 시금치와 콩나물을 사고 땅콩과 호두도 몇 알 샀다
무나물과 시금치를 데치고
지난 설에 작은어머님이 주신 농사지은 참깨로 짠 고소한
참기름과 들기름으로 갖가지 나물을 볶아내었다
오곡을 깨끗이 씻고 밤이랑 대추도 넣어서 밥을 지었다.
소금을 넣어 간간하면서도 달착지근한 찰진 오곡밥이 기름이 반지르르하다.
앞집엔 새댁이니 안 했을 것 같아서 일곱 가지 나물을 예쁘게 색색이 담아서
밥 한 그릇이랑 갖다 주니 오늘 이거 먹는 날이냐고 물으며 좋아한다.
신세대주부들은 귀찮아서 좋아하면서도 만들어 먹지 않는다.
아니, 그 의미나 추억이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지도 모른다.
정월 열 나흘 밤이면 삼삼오오 모여서 달이 뜨기를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마을에서 어린아이들이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불놀이를 허락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어귀에 있던 우리 집 작은 논배미는 쥐불놀이 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양철통도 귀했던 시절,
그래도 어디선가 쭈그러진 깡통 하나씩 들고나와 못으로 구멍들을 뚫었다.
어둠 속에서 그 작은 구멍들 사이로 붉은 빛으로 불들이 새어나오면 우리는
달을 보고 소원을 빌기보다는 그 불빛에 더 환호를 했다.
잘못 휘둘러서 설빔으로 얻어 입은
귀한 나이론 잠바에 불똥이 튀는 불상사를 당하고
그 다음날에 구멍 난 옷을 입고 나타나는 남자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불씨들이 사그라지고 정월 대보름 달이 동산위로 나타나면 우리들은
커다란 바가지나 소쿠리를 들고 삼삼오오 마을에 집집마다 돌면서 밥을 얻으러 갔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면 누구네 집이든 문을 열고
어른들은 오곡밥이나 수수떡 같은 것을 주시곤 했다.
마을에 고무래기 들이 화롯가에 모여 앉아 얼굴 맞대고 먹던 그 맛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진 같은 기억들은 해마다 오늘이 되면 선명하게 떠오른다.
대보름날 아침이면 할머니께서는
잠이 덜 깬 내게 밤이나 호두 같은 부럼을 깨물게 하셨다.
어른들께서는 귀밝기술이라하여 식전에 이명주를 드셨다.
눈이 녹은 양지쪽에는 멍석을 펴고 마을 어른들이 모여 윷놀이를 하는 소리가
마을 전체에 쩌렁쩌렁 들렸고 마을 아낙들은 부엌에서 기름냄새를 풍기며 더 즐거워했다.
대보름날 재미있었던 기억 중에 더위팔기라는 것이 있었는데
00야~ 하고 불러서 뒤돌아보면 ‘내 더위 사가라’ 하고 더위를 파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해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미신인데 왜 그리 그게 재미있었는지
친구가 불러서 뒤돌아봤다가 그 말을 들으면 진짜 더위를 먹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약이 오르던지
쫓아가서 때려주고 골려 주고 종일 놀이거리였다.
우리 집 두 남자들은 오곡밥을 안 좋아한다.
그러나 난 20년 동안 줄곧 정월 대보름날을 위해
봄이면 나물을 뜯고 가을볕에 나물을 말리며 혼자 즐겁다.
나역시 그 맛보다는 그 옛날의 추억을 잊지 못해서 그러는 지도 모른다.
이즈음은 백화점에 가면 오곡밥과 갖가지 나물들이 색색이 예쁘게 포장되어
수고로움을 덜어주고 아주 간편하게 즐길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마음만 먹으면 단 몇 분의 쇼핑으로 정월 대보름 음식을 장만 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었다
언젠가 나도 귀찮아지면 그런 대열에 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작은 수고가 남편에게 잠시 어린 날의 추억을 되살려주고
아들아이에게 나의 할머니가 그랬듯이
잊혀져 가는 우리민족의 풍습을 조금이나마 기억시켜주는 시간이 된다면
내년 봄 다시 난 겨울 준비할 것이다.
아파트에 살면서 쥐불놀이는 단지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자라는 아이들의 세대가 되면
정월대보름날의 풍습은  역사 속의 한 행사일 뿐 귀찮고 무의미한 오늘이 될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먹는 이 저녁은
옛날 그밤에 얼굴 맞대고 같이 밥을 먹던 그 맛은 진정 아닐지라도
아름다운 추억이 나의 기억 속에 있는 한 그것으로 행복한 시간이다.
내일은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나의 할머니가 그리 하셨듯 소박한 소원하나 빌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정월 열 나흘 밤에.

댓글 3개

에머랄드 2005. 02. 23. 오전 12:00

어머나! 저도 어제 친구 한테서 오곡밥 먹으러 오라는 전화를 받고 오늘 점심때 가서 맛있는 찰밥을 먹고 왔답니다. 보름날 저녁에 몰래 남의 부엌에 들어가 부뚜막이나 밥솥을 열어 보면 틀림없이 오곡밥이 들어있곤 했었는데...... 어릴적 추억들이 새록새록 나는군요.

운영자 2005. 02. 24. 오전 12:00

추억은 언제나 시간을 뒤돌아보는 기회를 주네요...^^*

성현우 2005. 03. 06. 오전 12:00

부모님 떠나 서울서 혼자 사는데. 어머니 생각나게 해주시네요. 어머니, 그리고 오곡밥 그리고 나물. 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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