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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관람 감상문
연극 파우스트 관람 감상문
섣불리 본 연극에 관한 변명
지하철 2호선. 사대문 안을 지나고 있는 밤 9시, 뉴스가 끝난 지 1시간은 더 지났을 거다. 잘난 사람이 왜 못난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느냐는 말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것은 며칠 전 문예진흥원 예술극장의 연극 파우스트에서 섣불리 들었던 말과 혼돈되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맞는 말이야.'
더 이상 할 말 없다며, 다른 말을 고개 들고 할 수 없게 됐다며, 자신의 존재를 모두에게 지워달라는 마지막 행동을, 그 소식을 다시 생각하는 밤. 보이는 불빛 모두 처량해 보이는 밤, 지하철 2호선, 앞에서 세 번째 칸에는 술 내음 같은 사람 치친 냄새가 더욱 진하게 흘렀다. 인간의 존재를 대표하는 파우스트와 그를 별 볼일 없는 인간 중 하나로 몰아넣으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이하 메피스토). 보이는 사람마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를 닮아 보이는 듯, 아니 지금도 며칠째 이 곳 시간 저 곳 장소를 최선의 답인 양 기웃거려 돌아다니는 너와 나인 듯했다.
3년 전, 독일에서는 21시간짜리 연극 '파우스트'가 장장 5일에 걸쳐 공연된 적이 있다고 하는 연극은 우리나라에서도 수차례 그 무대를 지금처럼 펼쳐오고 있었다. 이 연극을 처음 본지 사흘 정도 지나면서 감상문의 방향 설정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했다. 평소 알고 지내는 사람들,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 혹은 직업으로 인한 일로 알게 된 사람 등과 이 파우스트 내용을 가운데 두고 한치 두치 따진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과 특히 버스나 전철에서 가볍게 지켜보거나 헤어질 수 있는 곳에서 더욱 파우스트 내용을 연결해보려는 나름대로의 구도를 세운 것은 내 딴에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 자위해 보았다. 즉, 가급적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침묵 혹은 묵계 아니면 극도의 대립을 통해 스스로 내 안의 돌파구를 찾는 일에 다름 아니리라는 생각이 앞선 것.
이 원고 탈고를 위한 몰두가 일주일 정도 지나고 있다. 언제나 현실과 이상이라는 서로 바라보는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야 파우스트건 메피스토건 다를 바 없으리라는 생각에 그동안 살아왔던 나 자신 모습 확인 행위에 내 일기장 쥐 갉아 먹는 소리 같은 불편함에 눈가 주름살마다 제각기 꿈틀거린다. 이번 2004년 3월 3일부터 12일간의 이번 연극을 위해 많은 땀을 흘렸던 정일성 극단미학 대표, 축하의 글을 쓴 이상일 연극평론가, 김명수(파우스트 역)와 장두이(메피스토 역)와 이승연(그레첸역)과 장성하(마르테 역) 등 여러 연극인, 그리고 감상문을 쓰기까지 기회를 만들 준 박미향 등 이 연극 만들기에 참여한 제작진 모두가 그 사이를 좁히기 위한 애씀이었으리라. 당연지사, 언제나 실체를 확인하려는 파우스트의 고뇌는 우리네 공통 사항. 파우스트가 선택한 메피스토와의 계약은 자신을 바깥에서 다시 확인하려는 새로운 도전이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매우 서글프게도, 우리네 스스로 하는 계약 아닌 결심이란 '한쪽 상처를 메우기 위해 한쪽 살을 떼어 붙이는 것과 같은' 스스로 도취되어 자행하는 변명이라 여겨졌다. 바깥 누군가와 약속을 해야 하고, 번복할 수 없는 그 약속을 위반했을 때, 자신의 한계상황 이외의 것을 담보로 하는 계약은 가히 절대계약이라 불러 손색이 없다. 나는 원고 탈고에 문득 '나도 무엇인가 내기를 해야 할 일이다'라는 생각을 한 후, 실소에 실소를 거듭했다. 지금 쓰는 이 느낌이 그 어떤 가치를 가질 것인가? 문제는 결국 나 자신에 있음을 어찌 숨길 수 있단 말인가?
연극 줄거리 더듬으며 만지며
겨울비도 아닌 봄비도 아닌 차디찬 빗방울이 제법 굵게 내린 어느덧 3월 중순이다. 밤 11시를 넘어 파우스트와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놓고 뒤적였다. 인터넷을 통한 자료 수집은 결국 사람을 게으르게 하는 것 같았다. 오랜 노력을 들이지 않고 쉽게 소개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그저 간략히 옮겨 요약만 이 글을 통해 이해하거나 숨었던 기억을 되살려 놓기만 하면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이 감상문과 함께 우리네 삶의 모습에 대한 한두 개 다짐을 해 보면 되니까.
천재의 시대들이라는 기간에 살았던 괴테. 나폴레옹, 베토벤과 직접 만나기도 했고, 모차르트, 제인 오스틴과 동시대를 살았던 괴테. 파우스트는 그런 괴테가 고전주의 초입 시기인 1808년의 1부와 1932년의 제2부의 희곡이다. 16~17세기경부터 독일에 전해져 오던 마술사의 이야기로서 민중본과 인형극 등으로 널리 친숙해져 있는 파우스트 전설을 소재로 60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완성한 그의 최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전설의 내용은 모두 비극으로 끝난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과는 달리 괴테의 파우스트는 1부 2부 모두에서 구원을 받는다. 특히 2부는 죽기 몇 달 전, 82세까지 쓴 원고를 밀봉한 채 '사후 개봉'이란 유언을 남긴다.
영원한 인간상을 찾으려 했던 괴테, 그러나 작품 속에 그 나름의 해답을 숨겨 놓으려 했던 것은 아마도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완성이 될 수 없었음을 고백한 것이려니와, 작품 속 파우스트의 결론 또한 완전함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 것이라 보여진다. 어느 누구도 인간은 신의 창조한 세상에서 서로 위하는 마음으로 함께 어울려야 한다는 당연함을 실천하는 것만이 최선의 아름다움이지 않겠느냐하는 답, 바로 괴테의 답이기도 한 것이라 하겠다.
이번 연출된 파우스트는 셋의 대천사 말과 합창으로 시작해 천상에서 신과 악마가 인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신이 메피스토에게 '그대는 파우스트를 알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즉, 파우스트는 희곡의 단순한 등장 인물이 아닌, 인간 존재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인 것이다. 따라서 이 극의 주제는 한 인간의 생활 내지 생애가 아니고, 인간 존재라는 것이 무엇이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악마 메피스토가 인간을 악의 구렁텅이로 유혹하여 파멸시켜 보겠으니 내기를 하자고 신에게 조른다. 신은 자신 있게 메피스토의 뜻에 맡긴다. '인간이 노력하는 동안은 혼돈하는 위험성은 있지만, 인간이 어두운 충동을 받더라도 올바른 길을 잃지 않는 선한 본능이 있다'는 신의 확신은 아마도 파우스트든 메피스토든 결국 자신의 창조에 의한 결과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신과 악마, 선과 악, 창조와 파괴, 사랑과 질투 등의 이율배반을 대표하는 힘들의 싸움이 전개된다. 누가 어느 것을 어기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관객의 호흡을 '높였다 늘렸다 줄였다'들을 이어가고 있다.
기억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두 시간 반 동안의 제1부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연출한 이번 파우스트의 줄거리를 되짚어 본다.
신학, 수학, 천문학, 논리학, 철학, 물리학 등 모든 학문 어느 것 하나에 정통하지 않은 노력과 실력을 겸비한 파우스트. 그는 더 나아가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인간 존재의 이유.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접해 온 낡은 문제인 동시에 가장 심오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으나, 단순한 결과, 생기 없는 지식이 정열과 치열한 인식의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 욕구의 소리를 들어보자.
나는 신을 닮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을 절실히 느낀다.
나는 쓰레기 속에서 꾸물거리는 벌레를 닮았다.
이 쓰레기 속레서 살이 찌며 살아 나가는 동안
나그네의 발길에 짓밟혀서 으깨지고 파묻힌다.
높은 벽을 따라 수백 칸으로 나누어져,
내 주위를 좁히고 있는 것도 쓰레기가 아닌가?
이 좁은 세계에서 나를 압박하고 있는
온갖 잡동사니 낡은 도구들도 쓰레기가 아닌가.
내게 모자라는 것을 여기서 찾아내야 한단 말인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인간들은 고생을 하고 있으며,
어쩌다 하나쯤 행복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수천 권의 책들 속에서 읽어야만 되는가.
마술의 힘으로 인간과 우주의 비밀을 파악하려 하지만, 그것도 실패. 더 나아가 대지를 지배하는 지령(地靈)을 불러내어 도움을 받으려고 했으나, 지령은 그를 상대조차 해주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욕구에 지친 파우스트는 궁극적인 본질에 도달하기 위한 최종적인 시도를 한다. 자살, 죽음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론 중의 하나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최소한 한 번 이상 자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었고, 또 우리 몇몇은 그것을 문득 실천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아름다웠던 또한 꿈이 많았던 시간과 장소가 그 극한상황을 벗어나게 하는 처방인지도 모른다. 독약을 입에 대는 순간, 부활절의 종소리가 울리면서 천진난만하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희망에 부풀었던 어린 시절의 모습 회상으로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향해 움직이는 파우스트.
우리는 언제나 타협을 하면서 산다. 스스로 정상적인 삶이라는 위안. 그래서 타협이란 결코 비겁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결국 나만의 타협, 스스로 위로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도 한다. 갈등이란 단어의 출현이 매우 오래된 것처럼. 갈등의 결과 선택한 것은 순간적인 파우스트의 다음 선택처럼 더 화려한 생활에로의 탈출일까?
아, 내 가슴에는 두 개의 영이 살고 있다!
그들은 서로 떨어지려고 하지.
그중에 하나는 굳센 애욕에 불타며,
악착스러운 관능으로 현세에 매달리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억지로 이 속세를 떠나,
숭고한 선인들의 세계로 오르려고 하고 있지.
오오! 대기 속을 떠다니는 영이 있다면,
부디 황금 빛 놀 속에서 내려와서
나를 새롭고 다채로운 생활도 인도해 다오.
<계 속> http://blog.naver.com/kimbongkil/140001915615
댓글 1개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살면서 끝없이 드네요. 감상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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